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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7월 28일 목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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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7.. seoul.

2011년 7월 25일 월요일

이준구 교수의 글--복지에 대한 요구의 분출

복지에 대한 요구의 분출
-현 정부 경제정책에 대한 불신임의 표현이다


I. 머리말

현 정부가 출범할 때만 해도 ‘분배’나 ‘복지’라는 말을 입에 올리는 것조차 부담스러울 정도였다. 입만 열면 성장이 최고의 복지라고 강변하는 사람들인지라 그런 말은 씨조차 먹히지 않을 게 너무나도 뻔했기 때문이다. 부자를 더 부자로 만들어야만 가난한 사람에게도 희망이 있다는 사람들인데 더 할 말이 뭐가 있겠는가? 1980년대 반짝 인기를 끌었던 낡은 패러다임에 얽매인 사람들에게 성장과 분배의 조화가 합리적인 경제정책의 기초라는 원론적 지혜를 강조해 보았자 아무 소용이 없었다.

그러나 정권을 잡은 지 3년여밖에 안 된 지금 집권여당의 입에서 복지라는 말이 더 많이 흘러나오는 이상한 일이 벌어지고 있다. 누가 말했는지를 밝히지 않으면 여당 인사의 발언인지 아니면 야당 인사의 발언인지 구별하기 힘든 경우가 허다하게 많다. 집권초기 스스럼없이 친기업을 부르짖던 대통령조차 이제는 친서민을 부르짖어 우리를 어리둥절하게 만든다. 그렇다면 이제는 성장제일주의를 접고 분배와 복지 문제에 본격적인 관심을 기울이겠다는 말인가? 도대체 무엇이 이들을 그렇게 달라지게 만들었을까?

정치인들은 본래 미세한 정치기상의 변화까지 감지하는 동물적 후각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다. 분배와 복지에 코웃음을 치던 정치인들이 갑자기 복지정책의 챔피언을 자처하고 나선 데는 나름대로의 정치적 계산이 깔려 있음에 틀림없다. 시류에 맞게 변화하지 않으면 정치판에서 매장되고 만다는 절박감이 그렇게 갑작스런 태도 변화의 원인이었음에 한 점 의문이 없다. 자신들이 과거에 한 말이 있었기 때문에 갑자기 말을 바꾼다는 게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쑥스럽다고 그냥 있기에는 상황이 너무나도 절박하다고 느꼈을 것이라고 짐작한다.

최근에 들어와 복지에 대한 국민의 요구가 거의 폭발적인 수준으로 커진 것이 사실이다. 현 정부 초기만 하더라도 복지라는 말을 입에서 웅얼거리고 있을 정도였는 데 비해, 이제는 모두가 당당하게 더 많은 복지를 요구하는 단계에 이르렀다. 아직도 집권세력의 일각에는 복지에 대한 요구를 부정적으로 보는 시각이 여전히 존재하고 있다. 복지에 대한 과도한 요구가 나라 경제를 망치게 될 것이라는 예언도 서슴지 않는다. 그러나 그들이 알지 못하는 한 가지 진실이 있다. 그것은 복지에 대한 요구의 분출을 가져오게 만든 장본인이 바로 그들 자신이라는 사실이다.

복지에 대한 요구가 갑자기 폭발적으로 커진 데에는 서민들의 삶이 너무나도 팍팍해진 것이 결정적 역할을 하고 있다. 경제가 전반적으로 어려워 부유한 사람이나 가난한 사람이나 모두 허리를 졸라매야 할 상황이라면 서민들의 불만이 그나마 작을지 모른다. 그러나 정부는 우리가 글로벌 금융위기에서 가장 훌륭하게 벗어난 모범사례라고 선전해 오지 않았는가? 생각 밖으로 수출이 호조를 보여 국제수지 흑자가 계속 이어지고 수출기업들은 보너스 잔치를 벌이고 있지 않은가? 서민들은 1억 연봉을 꿈꾸기조차 힘든 판에 이 정부의 고위직에 임명된 사람들은 전관예우로 한 달에 1억 이상의 수입을 올리지 않았는가? 그러니 서민은 결국 힘없고 가난한 나만 뒤처지고 있다는 절망감에 사로잡히게 된다.

게다가 이 정부의 맹목적인 성장제일주의는 물가불안을 가져와 그렇지 않아도 어려운 서민의 생계를 압박하고 있다 최근 발표된 통계자료에 의하면 근로자들의 실질소득이 실제로 떨어지고 있다. 이런 형편이니 서민들 입장에서 보면 저축은커녕 보육비와 등록금 대기도 힘에 부친다고 느낄 수밖에 없다. 더 많은 복지는 필연적으로 더 무거운 조세부담을 의미하지만, 당장의 삶이 팍팍하다고 느끼는 사람에게는 그런 합리적 계산이 불가능하다. 더군다나 부유한 당신들이 더 많은 세금을 내면 되지 않느냐고 말한다면 딱히 대답할 말을 찾기 어렵다.

솔직히 말해 나 역시 지금 터져 나오는 복지에 대한 이런저런 요구를 한꺼번에 수용하기는 힘들다고 생각한다. 여러 가지 상황을 고려해 차분하게 우선순위를 설정하고 순리에 맞게 복지국가로 가는 길에 접어들어야 마땅한 일이라고 믿는다. 그러나 촛불을 들고 거리로 뛰쳐나와 반값 등록금을 외치는 학생들의 예에서 볼 수 있듯, 국민을 차분하게 설득하는 일이 결코 쉽지 않다. 더군다나 이 정부처럼 복지에 대한 요구의 폭발이 어디에 기인하는지조차 모르는 경우에는 복지국가로 가는 합리적인 로드맵을 그린다는 게 더욱 어려운 일이다.

무엇보다 우선 원인이 무엇인지 알아야 처방도 가능하고 설득도 가능한 일이 아닌가? 나는 이 글에서 최근 폭발적으로 터져 나오는 복지에 대한 요구의 근원이 어디인지를 집중적으로 파헤치려 한다. 내가 내리게 될 결론을 미리 말한다면, 성장만을 내세우고 복지를 등한히 한 졸렬한 정책이 가져온 반작용이 바로 복지에 대한 요구의 분출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현재의 어려운 상황은 현 정부가 초래한 자업자득(自業自得)의 성격이 강하다는 결론으로 이어진다. 이와 더불어 정부가 결자해지의 정신으로 이 어지러운 상황을 수습할 실마리를 제공하지 않는다면 합리적인 해결은 불가능한 일이 되고 만다는 진단 결과도 함께 제시하려 한다.

II. 747의 신기루 그리고 점차 심화되는 양극화

단도직입적으로 말해 나는 지금 우리 경제가 안고 있는 모든 문제의 근원이 747의 신기루에 있다고 본다. 너무나도 허황되기 때문에 두 번째 숫자 4와 세 번째 숫자 7에 대해서는 아예 관심을 가질 필요조차 없다. 문제는 첫 번째 숫자 즉 연 7%의 성장이 과연 현실성 있는 목표였는지에 있다. 대통령은 집권 후 그 공약의 현실성에 대해 묻자 그것은 실제로 목표한 것이 아니라 하나의 비전으로서의 의미를 갖는다고 회피해 간 바 있다. 그 자신도 그 목표의 달성이 어렵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는 뜻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슨 수를 써서라도 성장률을 높여야 한다는 집념까지 버린 것은 아니었다.

내가 그 동안 여러 번 지적한 바 있지만, 설사 이 정부가 자신의 집권 기간 동안 성장률을 평균 7%대에 유지하는 데 성공했다 하더라도 그것은 별 의미가 없다. 온갖 부양책을 동원해 성장률을 그 수준으로 올린다 해도 부양책의 약발이 떨어지면 도로 원위치로 돌아오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정말로 중요한 것은 잠재성장률이라고 부르는 성장률, 즉 인위적 부양 없이도 달성할 수 있는 정상적 수준의 성장률을 높이는 일이다. 따라서 7% 성장률이라는 공약도 그것이 잠재성장률을 그 수준으로 높이겠다는 것이어야만 의미가 있다.

때마침 불어 닥친 글로벌 금융위기 때문에 인위적 부양을 통한 7%의 성장률 목표마저 달성할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글로벌 금융위기가 우리에게 큰 어려움을 가져다 준 것은 사실이지만 대통령이나 우리 국민의 입장에서 , 보면 행운이라고 할 수 있는 측면도 있었다.

대통령의 입장에서 보면 애당초 지킬 수 없었던 7% 성장률의 약속을 지키지 않아도 되었다는 점에서 행운이었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우리 국민의 입장에서 보면 그 약속을 지키기 위해 무리하게 동원할 가능성이 높았던 온갖 인위적 부양책의 화(禍)를 면할 수 있었다는 점에서 행운일 수 있었다.

인위적 부양책을 동원한 성장률 높이기 정책은 불가피하게 경제 체질을 약화시키는 부작용을 가져온다. 참여정부의 경제정책에 대해 여러 가지로 말이 많지만, 인위적 부양책에 의존하지 않았다는 점은 높은 점수를 줄 만하다. 이 정부의 7% 성장률 공약은 인위적 부양을 염두에 두고 만들어졌을 가능성이 크다. 이제는 누구나 잘 아는 바지만, 그 동안 정부가 성장률을 높이기 위해 쓴 정책은 고작 높은 환율, 낮은 이자율, 그리고 정부지출 증가 같은 고전적인 인위적 부양책뿐이었다. 글로벌 금융위기로 인해 경제가 아주 침체된 상황에서 이런 부양책을 썼기에 그나마 부작용이 작을 수 있었다. 만약 정권 출범 초부터 계속된 부양책이 글로벌 금융위기가 일어나지 않은 정상적 상황에서 계속 유지되었다면 그 후유증이 만만치 않았을 것이라고 짐작한다.

현 정부가 저지른 또 하나의 오판은 친기업정책과 부자감세가 투자를 현저하게 증가시킬 것이라는 순진한 예상이었다. 우리의 기업은 언제나 투자 부진의 책임을 정부에 돌리는 습성을 갖고 있다. 이전의 정부는 최소한 표면적으로 진보적인 입장을 취했기 때문에 정부에 대한 기업의 불평은 제법 그럴듯하게 들리기도 했다. 그러나 이 정부가 기업들과 밀월관계를 유지하던 초기단계에서 노골적으로 친기업정책을 써도 투자가 제자리걸음을 한 것을 보면 투자 부진을 정부의 탓으로 돌리는 것은 별 설득력이 없었다는 것이 사후적으로 증명된 셈이다.

우리 기업들이 투자에 소극적인 태도를 취하는 것은 결국 마땅한 투자처를 찾지 못한 때문이 크다. 경제성장의 초기단계에서는 아무 공장이나 지어도 큰돈을 벌 수 있지만, 성장이 어느 단계에 이르면서 큰돈을 벌 수 있는 투자기회는 점차 소진되어 가기 마련이다. 우리 경제도 바로 그런 단계에 이르렀기 때문에 예전처럼 땅 짚고 헤엄치기 식의 투자는 불가능하게 되었다. 따라서 경제 내부에 투자가 둔화되고 잠재성장률이 낮아질 수밖에 없는 사정이 생겼는데도 공연히 정부 탓만 하는 습성이 생겨난 것이다.

이제는 정부도 친기업정책과 부자감세정책만으로 투자를 부추길 수 없다는 진실을 뼈저리게 느꼈으리라고 본다. 최근 정부가 반기업적이라는 비난을 들어가면서 기업들과 각을 세우는 것을 보면 잘 알 수 있는 일이다. 그러나 이런 뒤늦은 깨달음은 정책의 일관성을 무너뜨리는 부작용을 가져오게 되었다. 이 정부가 도대체 친기업인지 반기업인지 모르겠다는 기업들의 볼멘소리는 정부의 정책에 대한 신뢰가 땅에 떨어졌다는 것을 뜻한다. 이랬다저랬다 하는 정책으로 민간부문의 신뢰를 잃는 것은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최악의 시나리오다.

친기업정책과 부자감세를 통해 얻을 수 있었던 것이 별로 없었기 때문에 정부는 더욱 맹목적으로 인위적 부양책에 매달렸다. 많은 사람들이 물가불안을 염려해 고환율정책과 저금리정책의 수정을 요구했지만 정부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오직 성장률을 높이는 데만 집착하고 있는 정부로서는 그 정책들을 버리면 다른 대안이 전혀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온갖 비판을 무릅쓰고 고환율과 저금리정책을 고수해 결국 물가폭등을 현실로 만들고 말았다. 폭등한 물가를 1960년식의 통제, 관리로 잡겠다고 팔을 걷어붙이고 나선다는 것은 아직도 성장률에 대한 집착을 버리지 못하고 있음을 뜻한다.

인위적 부양책, 친기업정책, 부자감세정책 그 어느 것도 약속된 7%의 성장률 목표 달성에 크게 기여하지 못했다. 어느 것이라 할지라도 우리 경제의 성장 잠재력을 높이는 데 기여한 바가 거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 가지 확실한 부작용을 낳은 것은 사실인데, 그렇지 않아도 날로 심각해지는 양극화의 문제에 기름을 부은 꼴을 만들었다는 것이다. 그것이 실질적인 것이든 아니면 심리적인 것이든, 이 정부 들어오면서 우리 사회의 양극화가 한층 더 심각한 양상으로 치닫고 있다는 것은 어느 누구도 감히 부정하지 못한다.

사실 양극화는 우리 사회뿐 아니라 세계의 거의 모든 나라에서 진행되고 있는 보편적 현상이다. 경제와 사회 내부의 독특한 특성과 역학관계 때문에 발생하는 문제이기 때문에 해결이 무척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그렇다고 해서 정부가 손을 놓고 양극화의 진행을 그저 바라만 보고 있어서는 안 된다. 양극화의 문제 그 자체를 해결하기는 힘들다 하더라도 최소한 이로 인해 생기는 병폐에 대한 대증요법 정도는 적극적으로 추구해 없는 자의 삶이 극도로 피폐해지는 것은 막아야 한다. 그러나 이 정부는 처음부터 그런 의지가 전혀 없었다. 성장에 대한 맹목적 집착은 양극화를 한층 더 심화시킬 정책의 채택까지 서슴지 않게 만들었다. 그렇지 않아도 맹렬하게 타오르고 있는 양극화의 불길에 휘발유를 들이부은 격이었다.

양극화에 대항한 싸움이 비록 시지프스의 바위처럼 무의미한 것이 될지언정, 없는 자들은 정부가 자기편이 되어 싸워 주기를 기대한다. 설사 그와 같은 싸움에 아무런 성과가 없다 할지라도 정부가 노력을 기울였는지 그 자체가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그러나 없는 자의 눈에 비친 우리 정부는 그런 싸움에 아무런 관심을 갖지 않는 냉담한 정부다. 부자를 더 부자로 만들어 주어야 당신들의 삶도 더 나아질 수 있다고 설교하는 정부에게서 무엇을 바랄 게 있다고 생각할까? 최근 급격하게 분출되어 나온 복지에 대한 요구의 배후에는 바로 이와 같은 극도의 좌절감이 짙게 깔려 있다.

III. 불평등의 심화 - 방관만 해도 좋을까?

공식통계 수치를 봐도 최근 몇 년 동안 우리 사회의 분배상태가 계속 악화되어 왔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공식통계가 현실을 반영하는 데 명백한 한계가 있음을 고려한다면 실제로 진행된 불평등도의 심화는 이보다 훨씬 더 높은 수준일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더군다나 사람들이 느끼는 체감 불평등도로 따져 본다면 지난 몇 년 동안 우리 사회는 엄청난 정도로 뒷걸음친 것이 사실이다. 서민들의 삶은 하나도 나아진 것이 없는데 일부 부유층은 공전의 호황을 구가하고 있는 것이 눈에 빤히 보이기 때문이다. 최근 소위 명품점들이 가격을 줄줄이 인상했는데도 고객들이 문전성시를 이루는 것만 봐도 우리 사회의 부유층들이 지금 어떤 삶을 누리고 있는지 잘 알 수 있는 것 아닌가?

게다가 정부는 주마가편(走馬加鞭)식으로 부유층에 엄청난 감세혜택까지 몰아주고 있다. 그 동안 감세정책으로 인해 줄어든 대부분의 조세수입이 부유층의 주머니로 돌아갔음을 짐작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은 일이다. 일반적으로 정부재정의 개입으로 인해 불평등의 정도가 약간 줄어드는 것이 상식처럼 되어 있다. 부유층에서 좀 더 많은 세금을 걷고 재정지출은 빈곤층에게 그 혜택이 좀 더 많이 돌아가게 만들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경우에는 간접세의 비중이 큰 데다가 일부 부유층이 마땅히 져야 할 세금부담을 회피하고 있기 때문에 조세제도가 갖는 재분배효과가 지극히 미미하다. 그렇기 때문에 조세제도의 재분배 기능을 더욱 강화해도 모자랄 판에, 이 정부는 출범초부터 그 기능을 약화시키는 데 골몰해왔다.

날로 살림이 쪼들려 가는 서민들에게 ‘성장이 최고의 복지’라는 허황된 구호는 아무 위안도 주지 못한다. 성장만 하면 모든 문제가 해결된다는 안이한 태도는 우리 사회를 위험한 상황으로 몰아가고 있다. 분배와 복지는 부차적인 관심의 대상이 되기에는 너무나도 중대한 문제다. 분배와 복지는 성장에 따라 부수적으로 얻어지는 과실이 결코 아니며, 이를 직접적 목표로 삼고 노력한다 해도 이렇다 할 성과를 거두기 힘든 어려운 과제다. 이 정부는 불평등의 심화가 개인과 사회에 어떤 악영향을 끼치게 될지에 대해 너무나도 무지한 상태에 있다. 이 점에 대해 약간의 지식만 있다 하더라도 지금처럼 무모한 성장제일주의를 감히 추구하지 못했을 것이라도 본다.

영국의 두 저명 학자(Richard Wilkinson and Kate Picket)가 최근 펴낸 The Spirit Level 이란 책을 보면 불평등한 사회가 개인과 사회에 얼마나 큰 악영향을 미치는지를 잘 알 수 있다.(Richard Wilkinson and Kate Picket, The Spirit Level , New York: Bloomsbury, 2009) 이들은 30여년에 걸친 자료수집과 분석 작업의 결과로 이 책을 썼다고 하는데, Financial Times, Observer, Economist 등 유력언론이 이 책에 많은 찬사를 보내고 있다. 이 책의 내용을 간단히 요약해 보면 불평등한 사회에 사는 사람일수록 더 불행할 뿐 아니라, 정신과 육체 모두의 건강이 더 나쁜 것을 관찰할 수 있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불평등한 사회일수록 사람과 사람 사이의 신뢰가 더 결핍되어 있고, 폭력과 범죄가 더 활개를 치는 현상도 발견할 수 있다고 한다.

이 책의 저자들이 사회의 불평등도와 관련이 있다는 것을 발견한 개인적, 사회적 병리현상은 너무나 다양해 일일이 열거하기가 힘들 정도다. 개인의 행복감과 육체적, 정신적 건강에 영향을 주는 각종 요인들은 물론, 교육 성과, 마약 사용, 미혼모 발생 등 수많은 것들이 불평등도와 밀접한 관련을 갖는다고 말한다. 불평등의 심화는 이 모든 것들이 모두 한 방향으로, 즉 개인을 더 불행하게 그리고 더 허약하게 만드는 방향으로 작용한다는 것이 그들의 지적이다. 그들의 말에 따르면, 불평등의 심화는 개인뿐 아니라 사회의 건강에도 악영향을 미친다. 사회적 자본(social capital)의 핵심요소인 상호신뢰가 자취를 감추게 될 뿐 아니라, 감옥은 죄수들로 만원을 이루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이 수많은 개인적, 사회적 병리현상이 모두 불평등의 탓이라고 단정하기는 힘들지 모른다. 저자들은 이들 사이에 강한 인과관계가 있다고, 즉 사회의 불평등이 이 병리현상의 원인이라고 주장하지만 그들의 주장에 의문을 제기할 여지는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갖가지 병리현상 중 분명하게 불평등의 탓이라고 인정할 수 있는 부분이 상당히 큰 것은 사실이다.

현 정부 출범초부터 급속하게 진행된 양극화의 심화가 우리 사회 그 자체는 물론, 그 속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 하나하나를 얼마나 더 불행하고 허약하게 만들었는지 짐작이 가고도 남는다.

불평등이 빚어내는 여러 병리현상 중 가장 먼저 체감할 수 있는 것은 상호신뢰의 실종이다. 지금 우리 주위를 돌아보면 사회 구성원 사이의 신뢰가 땅에 떨어졌음을 곧바로 느낄 수 있다. 국민은 정부를 불신하고, 중소기업은 대기업을 불신하며, 학생은 선생을 불신한다. 개인들 사이에서도 다른 사람을 믿지 않으려는 극도의 불신상태가 지속되고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정부가 잘못된 태도와 정책을 통해 직접적으로 불신을 조장한 측면도 있지만, 양극화의 심화가 전반적인 불신의 풍토를 만들어낸 탓도 크다. 복지에 대한 강력한 요구는 이 불신의 풍토에 그 뿌리를 깊게 박고 있다. 부자를 더 부유하게 만들어 우리를 잘 살게 만들어 준다는 약속을 믿을 수 없으니 차라리 복지정책에 돈을 쏟아 부으라고 요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앞에서 말한 책의 저자들은 사회를 좀 더 평등하게 만드는 정책이 가난한 사람에게 이득이 되는 것은 물론 부유한 사람에게도 , 이득을 가져다준다고 말한다. 평등한 사회에 사는 사람들은 가난하고 부유하고에 관계없이 상대적으로 더 불평등한 사회에 사는 사람보다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더욱 건강하다는 것이 그들의 주장이다. 그리고 상호신뢰가 넘치고 폭력과 범죄가 없는 사회가 됨으로써 부유한 사람 역시 덕을 볼 수 있다고 덧붙인다. 상식적으로 생각해 보아도 매우 설득력이 있는 주장이 분명하다.

그렇다면 이 정부가 추구하는 맹목적인 성장제일주의는 우리 국민 어느 누구에게도 이득을 가져다주지 못했다는 말이 된다. 당장은 부유한 사람들에게 많은 이득을 가져다 줬지만 장기적으로는 그들도 불평등한 사회에 살기 때문에 치러야 하는 비용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성장률 높이는 데만 눈이 어두워 분배와 복지를 등한시한 대가를 우리 모두가 톡톡히 치르게 될 것이다. 양극화의 심화를 더 이상 방치해서는 안 된다. 친서민, 동반성장이라는 애매모호한 구호만으로 양극화의 도도한 흐름을 멈출 수 있다는 안이한 생각을 버려야 한다. 내가 보기에 우리 사회의 양극화는 지금 매우 위험한 상황으로 치닫고 있다.

IV. 공정성의 훼손도 심각한 문제다

어떤 사회가 얼마나 공평한지의 여부를 따질 때 단지 소득과 부의 분포상태만을 보는 것은 아니다. 재산과 소득이 고루 분배되어 있는 것도 중요하지만, 공정한 게임의 규칙이 얼마나 잘 지켜지고 있는지도 이에 못지않게 중요하다. 사실 공정성이 무너진 사회에서 소득과 부가 고루 분배될 리 없기 때문에 이 둘은 동전의 양면과 같은 관계를 갖는다. 그러나 사람들이 공평성에 대한 판단을 할 때 공정한 규칙이 지켜지고 있는지 그 자체에 대해 지대한 관심을 갖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이 정부가 출범하면서 우리 사회가 과연 공정하게 움직여 가고 있는지에 대한 회의를 갖게 만드는 많은 일이 일어났다. 무엇보다 우선 지적할 수 있는 것은 소위 ‘강부자’, ‘고소영’이라는 말로 대표되는 편파인사다. 공정한 사회라 함은 학연이나 지연 같은 연줄보다는 개인의 능력이 더 중요하게 고려되는 사회를 뜻한다. 출범초부터 시작된 편파인사는 그렇지 않아도 별 연줄이 없어 피해를 본다고 느끼는 대다수의 서민들에게 “연줄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선전포고를 한 것과 다름없는 효과를 가져왔다. 그래도 우리 사회가 좀 더 공정한 쪽으로 진보해 왔다고 믿어 왔던 사람들에게 그와 같은 편파인사가 가져다준 충격은 이만저만 큰 것이 아니었다.

연줄로 발탁된 인사들이 별 허물없이 나름대로 능력을 갖춘 사람이었다면 그나마 다행이었다. 그런데 우연의 일치인지 뭔지 모르지만 이 정부가 발탁한 인사들은 하나같이 허물투성이의 사람들이니 국민으로선 한숨이 나올 수밖에 없다. 순전한 가정이지만, 국민의 정부나 참여정부 때에 적용되었던 기준으로 이 정부의 고위직 인사들을 평가한다고 해보자. 그들 중에서 과연 인사검증 과정을 무사히 통과할 수 있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 명백한 범법행위인 위장전입 정도는 적당히 눈 감아줬기 때문에 간신히 그 과정을 통과한 사람이 부지기수인 한심한 현실이다.

대한민국의 성인 남자로서 할 수 있는 일 중 가장 쉬운 것 중 하나가 군대에 갔다 오는 일일 것이다. 군 복무를 하는 것이 쉽다는 말이 아니라, 특별히 노력하지 않아도 당연히 군대에 간다는 뜻에서 ‘쉽다’는 표현을 쓴 것이다. 그런데 이 정부의 고위직 인사 중에는 왜 그 쉽게 마칠 수 있는 병역의무를 깨끗하게 수행한 사람이 그리도 적다는 말인가? 물론 부득이한 사정으로 인해 병역의무를 이행할 수 없는 사람들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전 국민의 평균치보다 월등히 높은 이 정부 고위직 인사들의 병역면제율은 도대체 무엇으로 설명할 수 있을까? 공직자라면 평균적인 국민보다 병역의무를 이행한 사람의 비율이 더 높아야 마땅한 일인데 말이다.

뿐만 아니라 이 정부의 고위직 인사들 중에는 왜 전관예우를 받은 사람이 유난히 많은지도 풀리지 않는 의문이다. 공직에 있던 사람은 굶어죽으라는 말이냐는 불만을 토로하는 사람도 있지만, 전관예우을 받는다는 것은 공직자로서 떳떳하지 못한 일이다. 한 달 1억원의 보수가 자신이 공직자 시절에 쌓았던 지식과 경륜에 대한 당연한 대가라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다면 로마에 있는 ‘진실의 입’에 손을 넣어 볼 것을 권한다. 거짓을 말한 사람이 거기에 손을 집어넣으면 큰 벌을 받는다는 설화가 전해지는 그 입 말이다. 전관예우를 받는 사람들이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는 몰라도 정당한 노동의 대가로 그런 거금을 받는다는 것은 도대체 믿을 수 없는 말이다.

공정성에 대한 신뢰에 금이 가게 만드는 또 하나의 요인은 정부, 여당 인사들의 이중잣대다. 그들은 야당시절 추상처럼 엄격한 잣대를 적용해 이전 정부의 수많은 고위직 후보자들을 낙마시켰다. 지금 생각해 보면 헛웃음이 날 정도로 엄격한 잣대를 적용한 경우도 많았다. 그렇다면 일관성을 지켜 현 정부의 고위직 후보자들에게도 똑같은 기준을 적용해야 마땅한 일이다. 그러나 그런 일관성은 정부, 여당 인사 어느 누구에게서도 찾아보기 힘들다.

만약 주변의 압력에 억눌려 부득이 일관성 없는 태도를 취할 수밖에 없다면 최소한 양심선언이라고 해야 마땅한 일이다. 자신의 편의에 따라 마음대로 잣대를 바꿔 적용하는 사람들이 공정성을 얘기할 자격이 있을까?

현 정부의 사려 깊지 못한 재벌정책도 공정성의 훼손에 한몫을 단단히 했다. 우리 경제의 현실에서 재벌에게 아무런 제약 없이 마음껏 이윤을 추구하라고 허용하는 것은 판도라의 상자를 여는 것이나 다름없는 일이다. 경제학 교과서에 나오는 ‘보이지 않는 손’만으로 무소불위의 권력을 갖고 있으면서 어느 누구에게도 책임을 지지 않는 재벌을 적절하게 통제할 수 있다고 믿는 사람은 바보다. 그들을 불필요하게 얽매어 건전한 기업활동에까지 지장을 주어서는 안 되지만, 무분별한 영토 확장과 약자에 대한 불공정한 압박은 막아야 한다.

이 정부가 재벌에게 날개를 달아준 결과가 어떤 것인지는 구태여 말하지 않아도 모두가 잘 알고 있다. 경제적 강자와 약자가 평화스럽게 공존하는 질서로 진전하기는커녕 강자의 독식구도를 더욱 강화하는 어처구니없는 결과를 빚고 말았다. 정부는 뒤늦게 재벌 옥죄기에 나섰지만 상황은 이미 엎질러진 물이 되고 말았다. 더 이상 옥죄기를 계속한다면 반기업적 태도를 취한다는 비난만 받게 될 뿐이다. 다른 부문에서도 사정이 비슷하지만, 이 정부의 오락가락하는 재벌정책은 공정성을 훼손하고 정책에 대한 신뢰를 잃게 만드는 결과를 가져왔다.

자신이 공정하지 못한 사회에 산다고 느끼는 사람은 시민으로서의 책임을 기꺼이 질 용의를 갖지 못한다. 남들은 모두 단물만 빨아먹는데 나만 왜 쓴 약까지 집어삼켜야 하느냐는 불만이 솟구치기 때문이다. 공정성의 훼손은 온 사회에 이런 부정적 분위기가 팽배하게 만드는 불행한 결과를 가져왔다. 이런 분위기하에서는 이기적인 요구까지 서슴지 않고 분출되어 나올 수 있는데, 이것이 바로 지금 우리 사회가 처해 있는 상황이다. 지금 분출되어 나오는 복지에 대한 요구가 때로는 이기적인 성격의 것일 수도 있고, 때로는 지나친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정작 비난을 받아야 할 사람은 이런 요구를 한 사람이 아니고 이런 사회분위기를 만든 사람이다.

V. 맺음말

지금 이 시점에서 복지에 대한 요구가 봇물 터지듯 쏟아져 나오는 것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다. 그와 같은 요구 분출의 배경에는 이 정부 들어오면서 급격하게 심화된 양극화의 문제, 그리고 공평성의 훼손이란 문제가 있다. 이런 근원적 문제가 해결되지 않고 남아 있는 한 복지에 대한 요구는 결코 수그러지지 않을 것이라고 예상한다. 수그러들기는커녕 한층 더 광범한 복지에 대한 요구로 확대될지도 모른다. 복지에 대한 요구 그 자체를 억누르려 하는 것은 대증요법조차도 되지 못하는 졸렬한 대응이다.

시간이 무척 걸릴 테지만, 이 문제에 대한 근본적 해결책은 합리적인 경제정책 기조로 되돌아가는 것밖에 없다. 성장만을 신성한 소로 숭배하는 잘못된 정책기조를 바꾸지 않는 한 문제의 근본적 해결은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부는 아직도 문제의 본질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채 허둥대고 있다. 감세정책이 성장을 촉진하는 데 아무 효과가 없음이 명백하게 드러났음에도 불구하고 자존심 때문에 우물거리며 시간만 끌고 있다. 정부가 부자를 더 부유하게 만들어주겠다는 의지를 꺾지 않는데 서민들이 내 몫을 스스로 찾아야 하겠다는 생각을 버릴 리 없는데도 말이다.

최근에는 부동산 경기를 부양하기 위해 다주택 보유자에 대한 양도세 중과 방침을 철회할 움직임까지 보이고 있는 실정이다. 돈을 불릴 목적으로 집을 몇 채씩이나 갖고 있는 사람들은 종합부동산세 경감 혜택에 이어 양도세 경감 혜택까지 받게 되니 이 정부가 너무나도 고마울 게 틀림없다. 그 이면에는 집이 없어 셋집을 전전하는 서민들의 슬픔이 깔려 있지만, 경기부양에만 눈이 어두운 정부의 눈에 이것이 보일 리 없다. 다주택보유자에 대한 양도세 중과는 부동산 투기 억제뿐 아니라 능력에 걸맞은 공평한 과세의 원칙에 비추어 볼 때도 꼭 필요한 조치다. 도대체 이 정부의 친부자정책은 끝이 날 줄을 모른다.

무리한 부양책으로 인한 부작용이 도처에서 드러나고 있는데도 정책기조를 근본적으로 전환하려는 움직임은 전혀 보이지 않는다. 물가불안에 대한 근본적인 해결책은 부양위주의 정책기조를 포기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뛰어오르는 물가를 1960년대식의 시대착오적인 방식으로 관리하겠다고 팔을 걷어붙이는 것이 고작이다. 그렇게 해서는 물가를 잡지도 못하면서 경제질서를 어지럽히는 부작용만 가져올 따름이다. 지금이 어느 때인데 정부가 개별기업의 장부를 들여다보면서 가격을 너무 높이 붙였느니 뭐니 시비를 걸어 물가를 안정시킬 수 있다는 말인가? 하루가 다르게 물가가 뛰어오르면서 서민들의 삶은 나날이 더 팍팍해질 수밖에 없다.

이 정부가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토목공사에 엄청난 돈을 쏟아 부은 것도 복지에 대한 요구의 분출을 가져오게 만든 또 하나의 중요한 원인이다. 4대강사업으로 대표되는 각종 토목공사는 많은 사람들에게 예산 낭비의 상징으로 여겨지고 있다. 그렇게 많은 돈을 쓸모없는 토목공사에게 쏟아 붓느니 복지예산에 전용해 쓰면 훨씬 더 좋지 않겠느냐는 생각이 저절로 날 수밖에 없다. 세금 한 푼 한 푼이 귀하고 아깝다는 생각이 들게 만든 것이 아니라, 누구든 먼저 세금을 갖다 쓰는 사람이 임자라는 생각이 들게 만들었으니 보통 심각한 문제가 아니다.

현 정부는 애오라지 성장만을 추구함으로써 성장과 분배라는 두 마리 토끼를 한꺼번에 잡을 수 있다고 호언장담해 왔다 사람들은 정부가 무슨 신기한 재주라도 갖고 있나 해서 기대를 걸었다. 그러나 3년이 지난 지금 정부가 받아든 성적표는 초라하기 짝이 없는 것이다.

글로벌 금융위기가 발생했음을 고려한다 하더라도 우리 경제의 성장속도는 결코 눈부신 것이 아니었다. 그나마 무리수를 두어가며 밀어붙였던 인위적 부양책 덕분에 낙제점을 간신히 면할 정도였다. ‘경제 살리기’ 공약은 잠재성장률을 한 단계 더 높은 수준으로 끌어올리겠다는 약속을 뜻하지만, 그 약속은 결코 지켜진 바 없다. 또한 분배측면에서 이 정부가 받아야 할 점수는 당연히 낙제점이다.

우리 국민은 하나의 돌로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는다는 것이 허황된 꿈에 지나지 않았다는 사실을 절감하게 되었다. 나날이 심화되어 가는 양극화는 대다수 서민들에게 크나큰 좌절감을 안겨 주었다. 지금 봇물처럼 터져 나오는 복지에 대한 요구는 바로 이 좌절감의 표현이라고 볼 수 있다. 즉 현 정부가 추구하는 경제정책에 대한 총체적인 실망감의 표현이자 동시에 불신임(不信任)의 표현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복지에 대한 요구의 분출을 통해 국민이 전달하려고 하는 메시지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그런데도 일부 정치가와 보수논객들은 복지에 대한 요구를 무책임한 망국적 포퓰리즘으로 매도하고 있다. 이들은 왜 그와 같은 요구가 분출되어 나오게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아무런 생각이 없고, 단지 복지의 확대를 부르짖는 입만 막으면 문제가 해결될 것으로 착각하고 있다. 그러나 불평등과 불공정으로 인한 각종 병리현상의 뿌리가 치유되지 않는 한 아무리 그 입을 막으려 해도 아무 소용이 없다. 최소한 정부가 근본 원인의 치유를 위해 진지한 노력을 기울인다는 사실을 국민에서 납득시킬 수 있어야만 이 혼란스러운 상황을 어느 정도 진정시킬 수 있다. 그런 노력은 할 기미를 보이지 않고 쓸모없는 이념논쟁이나 벌이려 하는 정부를 보면 절로 한숨이 나온다.

희망버스-문화예술인 선언

"우린 지금 저마다의 크레인 위에 서있다"
[문화예술인 제안] "세상 모든 곳에서 쓰고, 노래하고 저항하자"
3차 희망버스를 지지하는 문화예술인 모임은 24일 "‘3차 희망버스’ 문화예술인들이 지켜요"라는 제목의 선언문을 발표하고, 문화 예술인들에게 오는 30일 출발 예정인 희망버스에 함께 탈 것을 제안했다.

이들은 "오늘날 대한민국의 현실은 문화와 예술이 추구하는 이와 같은 가치들에 정면으로 위배되고" 있다며 "기쁨의 축제와 슬픔의 무대를 혼자만의 공간으로부터 세상의 모든 곳으로 넓혀"가자고 제안했다. 이들은 이를 위해 "세상의 모든 곳에서 쓰고, 말하고, 노래하고, 춤"을 추며 저항할 것을 요구했다.

이들은 또 △정리해고 철회와 시민사회 충고 경청 △평화시위 보장, 폭력진압 중지 △국정조사를 실시, 노동자에 대한 불공정 처우 개선 △여야 정치인 희망버스 동승 △왜곡 보도 중단 등을 촉구했다.

이들은 3차 희망버스 출발 이틀 전인 28일 오후 7시, 명동 3구역 재개발 투쟁 지역인 '마리' 앞에서 문화예술인들이 주도한 '전전야제'를 개최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이날 전전야제에서는 선언문 낭독, 밴드 공연, 각종 전시회 프로그램이 계획돼 있다.

1~3차 희망버스에 전국적으로 각계 각층이 함께 하고 있으며, 특히 문화예술계의 참여와 활동이 눈에 띄게 활발해지고 있는 가운데, 이번의 선언과 참여 제안이 문화예술계 인사들의 광범위한 '희망버스 동승'을 이끌어낼지 주목된다. 다음은 28일 발표 예정인 선언문 전문.

                                                  * * *
오늘 우리는 문화와 예술의 이름으로 선언합니다.

문화와 예술은 생명과 자연을 개발과 경영의 대상으로 삼는 것에 반대합니다. 인간을 이윤의 수단으로 생각하는 것에 반대합니다. 문화와 예술은 세계의 변화를 다만 성장으로만 설명하는 것, 고통의 목소리를 억압하는 것, 삶의 의지와 자유를 구속하는 것에 반대합니다.

절망스럽게도 이명박 정권의 반민주적․반인권적․반생태적 행태들은 이 땅에 사는 생명에게서 존엄을 박탈하고 그들을 오로지 생존에 매달린 노예적 존재로 전락시키고 있습니다.

우리 문화예술인들은 뼈저리게 느낍니다.

문화와 예술은 사회 구성원들이 자신이 거주하고 노동하는 공간에서 자유롭고 평등하게 일하고 표현하고 소통하며 살아가는 삶을 가치 있게 여깁니다. 그러나 오늘날 대한민국의 현실은 문화와 예술이 추구하는 이와 같은 가치들에 정면으로 위배되고 있습니다.

이 땅 곳곳에서 우리는 삶의 터전을 유린하는 권력과 자본의 횡포를 목격합니다. 한진중공업의 노동자들을 일방적으로 정리해고한 사측의 무자비한 태도는 명동의 상인들을 철거민으로 만드는 건설자본의 폭력과, 군사기지 건설로 제주도의 생태와 주민의 삶을 짓밟고 4대강의 생명과 자연을 파괴하는 국가권력의 독단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개발과 이윤을 최우선시 하는 권력과 자본은 가족과 일상의 행복을 누리고 동료들과 성실히 일하고 싶다는 것이 요구의 전부인 이들을 사지로 내몰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는 부산 영도에서, 명동에서, 제주도 강정마을에서 이 소박한 꿈을 지키려는 이들의 쉼 없는 저항이 벌어지고 있음을 알고 있습니다.

희망버스에서 보았듯이 이들의 싸움은 더 이상 이들만의 것이 아닙니다. 양심을 가진 시민, 학생, 노동자들, 문화예술인과 정치인들은 부산 영도의 35m 크레인 상공에서 홀로 싸우고 있는 김진숙씨와 동료 노조원들을 지지하기 위해 함께 그들에게로 향했습니다.

우리는 서서히 깨닫고 있습니다. 이 모든 사태들은 당사자들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당사자들만의 단결로 싸워서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소수 지원세력의 도움으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우리가 김진숙의 싸움에 동의한다는 것은 정리해고라는 하나의 사태에 대한 입장 표명을 넘어섭니다. 김진숙의 싸움에 동의한다는 것은 가진 자들의 이익에 편에 선 권력과 자본의 행태들과 약자들의 소외 전반에 대한 분노이며 저항과 연대의 몸짓입니다.
3자 개입이란 말은 이제 더 이상 유효하지 않습니다. 이 비참한 세계 속에서, 같은 하늘 아래 같은 공기를 호흡하는 한, 아무도 제3자일 수 없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이 땅에 사는 모든 이가 당사자이며, 따라서 모든 사태는 우리의 사태이며, 모든 문제는 우리가 해결해 나가야 할 문제입니다.

이제 권력과 자본의 횡포와 탐욕으로 발생한 문제는, 아무리 하나의 조그마한 사건이라 할지라도 반드시 광범한 사회적 결의와 연대에 의해서만 해결될 수 있음을 우리는 확신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스스로에게 말합니다.
우리 모두는 지금 각자 저마다의 크레인 위에 서있습니다.
우리 모두는 김진숙입니다.
우리 모두는 한진중공업과 유성기업과 쌍용자동차, 콜트콜텍과 발레오와 재능교육의 해고노동자입니다.
우리 모두는 명동의 철거민이자 강정마을의 주민입니다.

우리는 저 멀리 외로이 싸우고 있는 또 다른 우리들에게 다가가기 위해 희망버스를 탑니다. 타고 또 타고 다시 또 탑니다. 빼앗긴 일상을 되찾기 위해 안락한 일상을 잠시 접고 희망버스를 탑니다. 부산으로 영도로 달려갑니다. 우리는 저 크레인 위에서 햇빛에 그을리고 비바람에 초췌해진 우리 자신의 얼굴과 만날 것입니다. 우리는 그 얼굴을 마주볼 것입니다. 우리는 그 얼굴을 감싸 안을 것입니다.

우리는 김진숙에게 말합니다.
당신은 혼자가 아닙니다.
당신과 떨어진 이곳에서 우리의 귀는 당신의 호소와 분노와 슬픔과 기쁨의 말을 듣습니다.
그 뜨거운 말들에 귀 기울이는 매순간 우리는 당신이 되어가고, 당신은 우리가 되어갑니다.

그리고 이제 우리는 당신을 향해 출발합니다. 다시 한 번 당신과 함께 웃고 함께 눈물 흘리기 위하여 7월 30일 부산을 향해 출발합니다.

다시 기도가 시작되고, 구호가 울려 퍼지고, 희망이 펼쳐질 것입니다. 다시 변화가 이루어질 것입니다. 이 비참한 세계의 한 조각 위에서 공동의 삶이 구체적인 형상으로 나타날 것입니다.

3차 희망버스의 탑승객인 우리 문화예술인은 요구합니다.

첫째, 한진 중공업 사측에게 요구합니다. 김진숙의 안전과 건강을 보장하라. 노조와의 재협상에 임하라. 정리해고를 철회하라. 노동자들의 일자리를 돌려 달라. 시민사회의 충고에 귀 기울이라.

둘째, 경찰과 검찰에게 요구합니다. 희망버스의 평화시위를 보장하라. 폭력적 진압을 중지하라. 희망버스 참가자들에 대한 부당한 체포 노력을 중단하라.

셋째, 정부에게 요구합니다. 입으로만 공정사회 운운하지 말고 한진 중공업 조남호 사장과 경영진에 대한 국정조사를 실시하라. 노동자에 대한 사측의 불공정한 처우를 개선하게 하라.

넷째, 여야를 막론한 정치인들에게 요구합니다. 한진 중공업의 문제는 바로 민주주의의 문제, 인권의 문제임을 직시하고 희망버스에 동승하라.

다섯째, 언론에게 요구합니다. 진실을 숨기거나 왜곡하지 말라. 시민들의 목소리, 노동자들의 목소리를 있는 그대로 전달하라.
또한 우리는 호소합니다.

동료 문화예술인 여러분! 기쁨의 축제와 슬픔의 무대를 혼자만의 공간으로부터 세상의 모든 곳으로 넓혀갑시다. 세상의 모든 곳에서 쓰고, 말하고, 노래하고, 춤춥시다.

시민 여러분! 노동자의 문제는 바로 나의 문제, 가족의 문제, 친구의 문제, 우리 모두의 문제입니다. 이들의 이야기에 관심을 가집시다. 이들의 이야기에 공감한다면 이들의 싸움을 지지합시다.

문제 해결에 함께 참여합시다. 아이가 깨고 장사가 안 돼서 희망버스에 화가 날 때에는 수천, 수만, 수십만 명의 가족들을 고통으로 내모는 자본과 권력의 악행을 생각합시다.

전 세계의 양심들이여! 대한민국에 주목하십시오. 이곳에서 일어나는 일은 세계 전반의 궁핍과 비참의 한 부분입니다. 이곳에서 벌어지는 일을 다른 지역과 다른 나라들에 알리고 이 싸움을 함께 지지해 주십시오.

우리 문화예술인들은 행동할 것입니다.
정리해고가 철회될 때까지 3차, 4차, 5차 희망버스는 계속 달릴 것입니다. 우리는 희망버스의 탑승객이 될 것입니다. 우리는 권력과 자본의 탐욕스런 도발행위에 맞서는 모든 싸움의 현장을 지지하고 지원할 것입니다.

시민이자 예술가로서, 시민들과 함께, 동료들과 함께 싸움의 한 축이 될 것입니다. 우리 문화예술인들의 상상력을 무기로 글, 사진, 그림, 만화, 영상, 음악, 연극, 공연을 통해 끊임없이 발언하고 표현하며 연대하고 저항할 것입니다.

행동 제안 1.
1차, 2차 희망의 버스에 동승했다는 까닭으로, 시인 송경동에게는 체포영장이 발부 예정이고, 소설가 공선옥, 화가 이윤엽, 조각가 전미영, 문화연대 신유아, 민예총 사무총장 이수빈, 만화가 이동수, 가수 조약골 등에게 소환장이 발부되어 있는 상황입니다. 문화예술인들이 이렇게 동시에 많이 탄압을 받은 것은 20여년 사이 처음 있는 일입니다. 저들의 탄압에 즐거운 놀이와 축제로 대응하고자 합니다.

행동 제안 2.
우선은 문화예술인들의 지지 선언을 내자고 했습니다. 워낙 긴급히 마음 모은 터라, 공개적으로 선언 준비를 알리고, 마음들을 구하고자 합니다. 위 선언에 함께 하실 분들은 7월 27일 밤 12시까지, 아래 연락처와 메일로 동의 의사를 보내주시기 바랍니다. 개인으로 연락을 주셔도 좋고, 장르 부문, 단체별로 모아주셔도 좋습니다.

행동 제안 3.
더불어, 7월 30일 희망의 버스를 타실 분들 역시 동승 의사를 보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희망의 펜이 되어, 희망의 붓이 되어, 희망의 그림이 되어, 희망의 사진이 되어, 희망의 극이 되어, 희망의 춤이 되어, 희망의 노래가 되어 함께 갔으면 좋겠습니다. 3차 희망의 버스 동승 여부는 최종 29일 오전 12시까지 받겠습니다.

행동 제안 4.
내려가기 전 7월 28일 늦은 7시에는 다시 제2의 두리반이 되고 있는 명동의 마리에서 선언발표와 더불어 3차 희망의 버스에 타는 모든 이들의 즐거운 휴가를 기원하는 전전야 문화제가 열립니다. 함께 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 가제 : 3차 희망버스를 위한 전전야제
■ 시간 : 2011년 7월 28일 늦은 7시
■ 장소 : 명동 3구역 재개발 지역 마리 앞
<선언문 낭독> 소설가 유채림 / 소설가 박민정 / 시인 서효인
<공연> 쏭의 빅밴드 / 조한석 / 악어들 / 밤섬 해적단
<전시> 명동해방전선 미술팀 / 리슨투더시티 / 시사만화가협회 / 파견미술팀
- 주최 : 3차 희망버스를 지지하는 문화예술인 모임
- 주관 : 명동 3구역 마리 / 명동해방전선
- 문화예술인 선언 연락처 : 김현(시인) 010-3708-7478 메일 / rin00@naver.com
 

  
  

2011년 7월 21일 목요일

의암 선생의 시 가운데 한 편

마침 저의 책상머리에 의암(義菴) 선생께서 남긴 시가 있는데
마치 지금의 저의 마음을 노래한 듯하여
외람되지만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鐵身豈非煖 쇠로 된 몸인들 어찌 따뜻하지 않겠습니까
三作分合緣 헤어지고 만나는 인연을 세 번이나 맺으니
老龍歸沛澤 노룡은 퍠택으로 돌아가고
候鳥送秋天 후조는 가을하늘로 날아갑니다
握手未喜樂 손잡아 기뻐하고 즐거워하지 못하니
別辭豈鮮明 이별의 말이야 어찌 선명하겠습니까
前程益多艱 앞길에 어려움이야 더욱 많다 해도
後事任諸賢 뒷일을 여러 어진 분들께 맡길 따름입니다

2011년 7월 17일 일요일

웃음혁명

김제동 씨가 강의하는 것을 언젠가 한 번 본 적이 있다. 그이가 주장하는 것은 웃으면서 살자, 그러니까 웃음으로 혁명하자는 것, 웃음혁명이다.

김제동: 웃고 살자. 웃음만한 혁명 없다. 어제 봉하마을에서 토크콘서트 했는데 중학교 3학년짜리 애가 6시간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다는 얘기를 들었다. 뒤에 가서 ‘안 힘드냐?’ 그랬더니 “공짜인데 이 정도는 기다려야지요.” (청중들 웃음)

그런 아이들처럼 웃으면서 한번 살아보자. 또 어떤 아이한테는 “이름 석 자 얘기해 보세요” 그랬더니 “못해요”, “왜요?” 그랬더니 “외자입니다” 그랬다(청중들 웃음).

또 아이들한테 속담 문제를 내봤다. 사촌이 땅을 사면 뭡니까? 배가 아프다 이거지요. 그런데, 그 아이는 8살이라 그 속담을 몰랐다. 그래서 “사촌이 땅을 사면 뭐?” 했더니 “가 본다” 이랬다(청중들 웃음).

기가 막히지 않는가? 사촌이 땅을 사면 가보겠다. 가서 몇 평 샀는지 보고 배가 불편할지 말지 결정하겠다. 참여해 보겠다. 창문 밖으로 보이는 세상에 안주하지 않겠다. 세상을 창문 밖으로만 보고 있으면 아무것도 바뀌지 않는다. 가봐야 된다. 가서 두발 딛고 내가 주인이 되어서 내 눈으로 똑바로 봐야 된다.

2011년 7월 15일 금요일

BIX - der Bibliotheksindex

BIX - der BibliotheksindexWelche Angebote stellen die Bibliotheken ihren Kunden zur Verfügung? Wie werden die Serviceleistungen von den Kunden angenommen? Wie effizient arbeiten die Bibliotheken und welches Entwicklungspotenzial steckt in ihnen?

Der BIX zeigt in 17 Indikatoren die Stärken und Schwächen der bibliothekarischen Dienstleistungen auf und untersucht ihre Rahmenbedingungen. Die Teilnahme am BIX ist für Bibliotheken freiwillig.
Der BIX wurde 1999 erstmalig von der Bertelsmann Stiftung mit dem Deutschen Bibliotheksverband e.V. (dbv) durchgeführt und erscheint seither jährlich. 2005 übernahmen der dbv und das Hochschulbibliothekszentrum NRW (hbz) den BIX im Rahmen des Kompetenznetzwerks für Bibliotheken (KNB), dem Netzwerk für überregionale Bibliotheksaufgaben. Unterstützt wird der BIX von der Bertelsmann Stiftung, infas Institut für Sozialforschung, der Hochschule der Medien Stuttgart und der Zeitschrift B.I.T.-Online.

2011년 7월 14일 목요일

시민 속에 뿌리내릴 도서관으로

책읽는사회만들기국민운동 10주년을 돌아보는 자료들을 뒤적이면서 다시 읽게 되는 이용남 선생님의 글. 제목은 '시민 속에 뿌리내릴 도서관으로'. 출처는 간행물윤리 통권 281호, 2001년 12월의 글이다.


도서관은 기본 시설이다.

깔끔한 소도시 대로변, 속이 환히 들여다보이는 유리벽 건물에 어린이와 주부들이 부지런히 드나들고 있다. 유리창 너머로 보이는 책 서가와 테이블의 모습으로 보아 시민들을 위한 도서관임을 금새 알 수 있다. 부리나케 문을 나서는 어느 주부의 시장 바구니에는 몇 권의 책과 액자에 넣은 그림이 보인다. 아마도 이 도서관에서는 가정에 잠시 동안 걸어두고 감상할 수 있는 그림도 소장하여 대출하는 듯하다. 뒤이어 몇 권의 그림책과 CD를 가슴에 안고 나오는 어린이들은 조금 전에 끝난 인형극의 재미에 흠뻑 빠져 있는 듯 연상 재잘거린다. 저녁 무렵쯤 되자, 조그마한 이동도서관 차량이 도서관으로 들어온다. 도서관에 직접 오가기가 먼 변두리 마을을 순회하며 책의 대출∙반납을 마치고 돌아오는 모양이다. 이 이동도서관은 내일 아침에 다시 새로운 책을 싣고 다른 변두리 마을을 돌아다닐 것이다. 인구 일이십만 정도의 소도시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앞선 나라 도서관 앞의 모습니다.

주민들이 한 곳에 집단적으로 모여 살기 시작하면서 제일 먼저 건립한 것이 마을의 교회이고 다음으로 학교였으며, 그 후에 마을도서관 순서로 지역 사회가 형성되었다는 선진국의 사례는 우리에게 커다란 교훈을 준다. 영혼의 안식처, 자녀의 교육시설, 그리고 주민들의 자기향상을 위한 도서관은 예로부터 지역 공동체 생활을 위한 기반시설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읍∙면∙동리 단위에 설립된 공공도서관은 지역 주민의 교육∙문화발전을 도모하고 삶의 질을 향상시키기 위한 기본적인 하부구조이다.

 오늘날 정보통신기술과 컴퓨터를 중심으로 한 첨단매체는 급속히 발전하고 지식정보량은 폭발적으로 증가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사실 자체는, 모든 곳에서 모든 사람이 자신에게 필요한 지식과 정보를 원하는 시기에 얻을 수 있다는 사실을 뜻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무질서하게 범람하는 지식과 정보의 탁류 속에서 개개인에게 꼭 필요한, 생명수 같은 지식정보를 구하기는 더욱 어려워지는, ‘풍요 속의 빈곤’ 현상이 가속화되기 쉽다. 그래서 지식정보 매체의 기술적 발달과 콘텐츠의 범람에도 불구하고, 우리 앞에 놓여진 주요 명제는 어떻게 하면 필요한 지식정보에 ‘편리하고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하느냐의 문제라고 생각한다.

다양한 매체에 담겨진 많은 지식정보 중 필요한 것을 수집∙가공하여 이용자에게 제공하는 기관으로서, 역사적으로 가장 오래되고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하여 온 기관은 바로 도서관이다. 그 중에서도 시민 대중 누구에게나 그들이 필요로 하는 자료와 정보를 무상으로 제공하며, 문화적 공간을 마련해 주고자 지방정부가 설치하여 운영하는 도서관이 바로 시립도서관, 군립도서관 등으로 부르는 공공도서관이다.

도서 진흥에 주력하는 선진국들

미래 사회에서는 인쇄매체가 사라지고 디지털 정보를 중심으로 한 전자매체로 완전히 대치되어 앞으로는 종이책이 사라질 터인데, 아직도 책읽기가 필요하겠느냐는 어처구니없는 사회 일각의 분위기 또한 우리를 당혹하게 한다. 공공도서관은 단편적인 정보를 보관하고 제공하는 기능뿐 아니라,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이들 ‘정보’가 ‘지식’으로 변환되고, ‘지식’이 ‘지혜’로 승화되도록 학습시킴으로써, 시민들을 문화적으로 변하게 하며 삶의 질을 높여 주는 곳이다. 그래서 앞으로의 도서관은 인쇄매체 형태의 책과 전자형태의 정보가 서로 그 특성을 보완해 나갈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어린이, 주부, 노인 등 시민대중을 대상으로 하는 대부분의 공공도서관의 주요 활동은 주민을 대상으로 한 독서진흥 활동에 치중하고 있으며, 그러한 예는 선진국의 여러 도서관에서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요즈음 세계 각국으로 번지고 있는 북 스타트(Book Start)운동은 어렸을 때부터 책읽기의 중요성을 웅변적으로 말해주고 있다. 1992년에 처음으로 영국에서 발족된 이 운동은 읽고 쓰는 능력의 저하, 상상력의 결여, 엷어진 부모와 자식과의 관계 등의 문제를 위한 해결책의 하나로 버밍햄 공공도서관, 버밍햄 보건국, 버밍햄 대학 교육학부가 힘을 합쳐 시작하였다. 이 프로젝트에 의하면, 영국의 아이들은 태어난 지 7-9개월이 되어 건강진단을 받는 자리에서, 영국의 부모들은 두 권의 유아용 도서와 그 지역 공공도서관 이용 안내서 등이 들어 있는 꾸러미를 무상으로 받는다. 이 프로젝트가 시작된 지 6년 후, 버밍햄 대학 연구진이 북 스타트를 실시한 가족과 그렇지 않은 가족을 비교 조사한 결과, 이 프로그램에 참여했던 그룹의 아이들은 기초평가에서 다른 그룹의 아이들보다 많은 영역에서 현저히 높은 점수를 받음으로써, 읽고 쓰고 셈하는 능력에서 확실히 앞서고 있음이 증명되었다.

재작년 8월, 일본 국회에서는 정치적으로는 별로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을 수도 있는 그러나 국가의 미래를 생각해서는 매우 의미 있는 한 가지 사안에 대해 의결을 하였다. 즉, 일본국가대표도서관 부설기관인 국립국제어린이도서관이 개관되는 2000년을 ‘어린이 독서의 해’로 삼자는 결의를 만장일치로 채택한 것이다. 결의문은 “책을 만나며 아이들은 말을 배우고, 감성을 닦으며 표현력을 높이고, 창조력을 풍부히 하면서 인생을 더 깊게 살아갈 힘을 얻는다. 정부는 독서의 무한한 가치를 인정하여...(중략)...거국적으로 어린이의 독서 활동을 지원하는 시설을 집중적으로 강구해야 한다”라고 선언하고 있다. 어린이를 대상으로 한 독서진흥사업을 국정차원에서 표명한 것은, 일본 헌정사에서 획기적인 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지난 8월부터 미국의 시카고 시에서는 희한한 독서캠페인이 열풍을 일으키고 있다. 시카고 공공도서관이 7주 동안 기간을 정하여 ‘전 시민 책 한 권 함께 읽기’(One Book, One Chicago)운동을 시작하여, 시장이 직접 나서 시민 참여를 호소하고 다양한 캠페인을 전개하고 있기 때문이다. 도서관이 선정한 책은 흑백인종 갈등을 주제로 한 40여 년 전의 소설 ‘앵무새 죽이기’(To Kill a Mockingbird)로서, 우리에게는 그레고리 펙이 주연했던 ‘알라바마에서 생긴 일’이란 영화로도 잘 알려진 책이다. 이 운동 관련 인터넷 사이트를 장식하고 있는 다양한 캠페인의 아이디어가 흥미롭다. 도서관 당국이 소설 4천권을 사다 비치하였음에도 모자라 미처 책을 빌리지 못한 사람들이 서점으로 몰려들었다는 즐거운 비명이다. 그 무서운 테러 공포 속에서도, 이번 가을철 책 한 권 함께 읽기 운동에 뒤이어 내년 4월부터 시작할 봄철 운동에 함께 읽을 만한 책을 모든 시민들에게 추천해달라는 안내 광고를 보니 부러움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도서관에 대한 인식 전환시켜야

한번 클릭으로 모든 정보를 꺼내어 쓸 수 있다고 맹신하고 있는 오늘날의 디지털 시대에 왜 선진 여러 나라들에서는 도서관과 시민의 독서진흥을 위한 활동에 이처럼 관심을 쓰고 있을까? 삶의 방식과 경험을 멀티미디어의 가벼움 속에서 찾기 쉬운 오늘날, 개인과 사회의 건강성을 회복하고자 하는 출발점을 도서관과 책읽기에서 시작하려는 의도를 짐작할 수 있다.
그런데 우리나라의 도서관 모습은 어떠한가? 우선, 공공도서관이 절대적으로 부족하다. 인구 1백만명 당 8개관인데, 이는 OECD국가의 1/40-1/3수준이다. 개발도상국인 말레이시아나 터키와 비교하여도 1/2-1/3수준밖에 안 된다. 그러나 더 문제가 되는 것은 몇 안 되는 도서관이나마 대부분이 장서가 빈약하다는 것이다. 자료 구입비의 부족으로 도서관 장서의 수는 현재 국민 1인당 평균 0.47권으로서, OECD국가의 1/15-1/5수준에 머물러 있다. 도서관 알맹이인 자료와 정보가 부족하여 덩그러니 책걸상만 있고, 각종 문화프로그램을 제대로 할 수 있는 여력이 안되니, 재수생의 공부방 역할밖에 할 수 없지 않겠는가? 도서관의 수가 적어 멀리 떨어져 있고, 그나마 볼만한 책이 부족하여 공부방 구실에 머물러 있으니 도서관은 시민대중 속에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경제이론은 수요가 공급을 창출하기 마련이지만, 문화의 세계, 특히 대중을 위한 도서관은 공급이 수요를 창출하는 법이다. 주민 가까이 건물의 규모는 작더라도 알맹이가 알차고 가득한 도서관이 있을 때, 시민들은 책을 가까이 하게 된다는 사실이 이를 증명하고 있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본래 공공도서관은 시민의 지식∙정보의 샘터이며, 문화의 보금자리이다. 취학 전 어린이에서부터 노인에 이르기까지 주민의 자기성장과 교육에 필요한 자료를 제공하여, 평생교육체제의 기반시설로서의 역할을 하는 것이다. 또한 주민의 개인 생활과 직업에 필요한 정보를 제공하며, 각종 회합과 집회 활동 등 지역사회 공동체 형성을 위한 구심점의 역할을 하는 것이다. 그리고 각종 전시회∙음악회∙문예활동∙공연 등을 개최하여 주민의 문화 향수권을 극대화시키는 곳이다. 한마디로 말해 지역사회의 종합 교육∙정보∙문화센터인 공공도서관이 제 구실을 다하기 위해서는 도서관 안에 알맹이를 충분히 갖추는 정책이 필요하다. 도서관은 책걸상 등의 시설이 아니라, 자료와 프로그램의 조직체이기 때문이다.

이제 21세기에 들어선 우리 사회는 도서관에 대한 인식을 근본적으로 전환시켜야 한다. 그 실마리는 국가의 정책에서부터 비롯되어야 한다. 건국 이후, 도서관 정책다운 정책이 없었던 사실을 직시하고 건강한 사회를 위한 도서관 정책을 국가차원에서 새롭게 수립하여야 한다. 우리 나라를 비롯하여 개발도상국의 도서관 발전 저해요인을 집중적으로 조사∙연구한 어느 학자의 결론은 우리 사회 지도층 모두가 음미할 만하다. 즉, “아시아 각국의 도서관 부진은 예산부족 때문이 아니다. 예산문제는 진전을 더디게 할 수는 있으나 도서관의 기본 개념을 왜곡시키지는 않는다. 보다 더 큰 문제는 사회적∙정책적 신념의 결핍이다”라는 조언에 우리 사회와 정부당국은 심각하게 귀를 기울여야만 할 것이다.

2011년 7월 11일 월요일

힌두 스와라지와 '공'의 언어

"녹색평론" 제119호를 읽고 있다. 더글러스 러미스의 <래디컬 데모크라시와 시민사회--간디의 유산을 어떻게 계승할 것인가>라는 글. 

러미스 씨는 <힌두 스와라지> 제17장의 문답을 인용하면서 비폭력의 정의를 도출해내고 있다. "비폭력은 인간과 인간 사이의 끈이며, 그렇지 않으면 '사회'는 성립되지 않고, '인간'이라는 종은 전멸할 것이다."

"간디는 이 구별, 즉 의식적인 '주의'나 '운동'으로서의 비폭력과 일상생활 속의, 별로 의식하지 않고 당연한 것으로 여기는 비폭력 사이의 구별을 전개하지 않은 것 같다. 그러나 이것은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된다." 러미스 씨는 '어디에나 있는 비폭력의 존재', 그 영역을 '시민사회'라고 한다. "그러한 의미에서 시민사회는 비폭력의 영역이다."

"시민사회는 '공(公)'을 형성한다. '공'은 인간의 언어능력에 기초한 존재이다. 즉 '공'은 인간이 말로 교류하는 장이지만, 그러나 어떠한 말이라도 좋은 그런 것은 아니다. '공'에 부합하는 말은(사적인 것이 아니라) 공적인 것이라고 말하면 동어반복으로 들리겠지만 그러나 중요한 점이다. 예를 들어, 명령이라는 형태의 언어는 '공'에 부합되지 않는다. 그렇기는커녕 '공'을 파괴할 것이다. 집회가 열려 모두가 이러저러한 이야기를 듣고 있을 때 기동대가 와서 돌아가라고 명령한다면, 그 장에 있던 '공'은 (만일 그 사람들이 그 명령에 따른다면) 소멸돼버릴 것이다."

"'공' 그리고 시민사회는 대체로 대등한 인간끼리의 대화로써 비로소 존재한다. 그것은 반드시 정치적인 논의에 한정되지 않는다. 함께 행동한다거나 일을 한다거나 하기 위한 대화도 있고, 여러가지 문제를 어떻게 생각하는가,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라는 논의도 있고, 그냥 잡담도 있다. 그렇게 해서 언어의 망(네트워크)이 형성되고, 시민사회가 형성되는 것이다. 나아가서 언어로부터 생겨난 유대는 폭력과 모순된다. 폭력은 입이 없다고들 하지만, 입이 없을 뿐만 아니라 언어를 파괴하고, 침묵을 만들어낸다."

2011년 7월 1일 금요일

책은 죽었는가?--책은 죽지 않는다

1. 누가 책을 읽는가? (Who Reads Books?
by Ransom Riggs - April 25, 2011 - 11:54 AM)  미국의 예
2003 survey conducted by a company called The Jenkins Group.


• One-third of high school graduates never read another book for the rest of their lives.
• 42 percent of college graduates never read another book after college.
• 80 percent of U.S. families did not buy or read a book last year.
• 70 percent of U.S. adults have not been in a bookstore in the last five years.
• 57 percent of new books are not read to completion.

2. 책은 죽었는가?
Is the book dead?
꼭 '클릭' 해보시길.

3. 책은 죽지 않는다


안찬수 원고
용인 도서관 소식지 『도서관 세상(vol.11)』칼럼 8매, 2011.06.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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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에 아주 흥미로운 글 한 편을 읽었습니다. 그 글을 쓴 사람은 우리에게 <고양이 대학살>이라는 책으로 알려져 있는 역사학자 로버트 단턴입니다. ‘고등교육연감’으로 번역되는 'The Chronicle of Higher Education'에 실린 글의 제목은 ‘정보시대의 다섯 가지 신화’. 그 내용을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단턴은 정보시대의 본질에 대하여 우리가 집단적인 혼란을 겪고 있다고 진단하면서, 그 혼란의 내용을 다섯 가지 신화로 정리하고 있습니다.

다섯 가지 신화 가운데 단연 첫 번째는 “책은 죽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단턴은 단호하게 말합니다. “책은 죽지 않았다.” 이것은 매년 출간되고 있는 책의 양만 살펴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 전 세계적으로 볼 때 올해에만 약 1백만 권의 신간이 출간될 것입니다. 단적으로 말해서 새롭게 출간되는 책의 양은 늘어나면 늘어났지 줄어들지 않고 있습니다.

두 번째는 우리 세대에서야 정보시대에 진입했다는 신화입니다. 단턴은 커뮤니케이션의 방식이 빠르게 변화하고 있다는 것을 부정할 사람은 아무도 없지만, 그렇다고 우리 세대만이 미증유의 정보시대를 살고 있다고 추론하는 것은 잘못이라고 말합니다. 왜냐면 모든 시대는 그 나름의 방식으로 유용한 미디어를 개발해서 사용했던 정보시대였기 때문입니다.

세 번째는 이제 모든 정보는 온라인에서만 유용하다는 신화입니다. 이런 신화는 특히 젊은이들에게 광범위하게 퍼져 있는 듯싶습니다. 하지만 이는 아주 잘못된 신화입니다. 무언가 조금 오래 된 자료를 찾아본 이들은 디지털로 변환된 자료라는 것이 얼마나 작은 양에 불과한지 잘 알고 있습니다. 구글은 이 지구상에 129,864,880권의 책이 존재한다고 추정한 바 있습니다. 그 가운데 디지털로 변환된 것은 약 1천5백만 권, 그러니까 약 12% 정도의 자료만이 디지털로 변환된 것이죠. 모든 정보가 온라인에 있다고 생각하는 이는 현재로서는 자료의 불과 12%만 접근할 수 있을 뿐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앞서 말했듯 한 해에만 전 세계적으로 약 1백만 권 이상의 책들이 계속해서 쏟아져 나온다는 거죠. 또 다른 문제도 있습니다. 디지털 텍스트는 종이에 인쇄된 텍스트보다 더 빠르게 사라져 간다는 것입니다. 인터넷 아카이브의 창안자인 브류스터 카알이 1997년에 계산한 바에 따르면 인터넷 주소(URL)의 평균수명이 불과 44일에 불과했다고 합니다. 디지털 정보의 휘발성은 우리가 감당하지 못할 정도로 강합니다.

네 번째는 이제 많은 자료들이 디지털로 변환되고 있으니 도서관이 쓸모없는 것이 될 것이라는 신화입니다. 이는 아주 잘못된 신화입니다. 이러한 신화는 도서관의 기능을 단순히 책만 있는 곳으로 여기는 사람들에 의해 퍼진 것입니다. 도서관은 책만 있는 곳이 아닙니다. 도서관에는 사람이 있습니다. 사서와 이용자인 시민이 있습니다. 도서관에는 만남이 있습니다. 도서관은 사회적 관계의 가치를 말하는 사회자본이 만들어지는 곳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이렇게 이야기해야 합니다. “세상이 디지털의 세계로 바뀔수록 도서관은 더욱 중요해진다.”

다섯 번째는 미래 세계는 디지털의 세계가 되리라는 신화입니다. 단턴은 아마도 이것은 사실일 것이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오해가 있다고 말합니다. 누구나 십 년, 오십 년, 그리고 백 년 뒤의 세계를 생각할 때 디지털문화가 지배하게 되리라고 예측합니다. 하지만 아무리 전자적 형태의 소통이 지배한다고 해도 책의 중요성이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미디어 전문가들의 연구에 따르면, 구텐베르크 혁명 이후에도 필사본은 삼백 년이나 지속되었다고 합니다. 라디오가 신문을 대체하지 못했으며, 텔레비전이 라디오를 대체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므로 세계가 디지털화한다고 해도 그것의 본질은 미디어가 더욱 풍성해지는 것이지, 기존의 미디어들이 새로운 미디어로 완전히 대체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단턴이 정리한 정보시대의 다섯 가지 신화를 한 가지로 뭉뚱그려 말한다면 “책은 죽었다”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단턴이 지적하듯 책은 죽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렇게 말해야 합니다. “책은 죽지 않는다. 그리고 세계가 디지털의 세계가 될수록 도서관은 더욱 중요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