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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6월 15일 월요일

책읽기(독서)는 스트레스 감소에 최고

http://www.telegraph.co.uk/news/health/news/5070874/Reading-can-help-reduce-stress.html

텔레그라프 2015년 5월 30일자


영국 서섹스대 데이비드 루이스(David Lewis)
6분 독서, 스트레스 68% 감소. 심박수 낮아지고, 근육 긴장 완화
첫째 독서(68%), 둘째 음악감상(61%), 셋째 커피마시기(54%) 넷째 산책(42%)
게임은 스트레스 해소에 도움을 주지만 심박수는 높여.
무슨 책인지는 중용하지 않다. 작가의 상상공간에 푹 빠지는 것이 중요.
스트레스-두통/소화불량/고혈압/면역력 감소

Reading 'can help reduce stress'

Reading is the best way to relax and even six minutes can be enough to reduce the stress levels by more than two thirds, according to new research.


And it works better and faster than other methods to calm frazzled nerves such as listening to music, going for a walk or settling down with a cup of tea, research found.
Psychologists believe this is because the human mind has to concentrate on reading and the distraction of being taken into a literary world eases the tensions in muscles and the heart.
The research was carried out on a group of volunteers by consultancy Mindlab International at the University of Sussex.
Their stress levels and heart rate were increased through a range of tests and exercises before they were then tested with a variety of traditional methods of relaxation.
Reading worked best, reducing stress levels by 68 per cent, said cognitive neuropsychologist Dr David Lewis.
Subjects only needed to read, silently, for six minutes to slow down the heart rate and ease tension in the muscles, he found. In fact it got subjects to stress levels lower than before they started.
Listening to music reduced the levels by 61 per cent, have a cup of tea of coffee lowered them by 54 per cent and taking a walk by 42 per cent.
Playing video games brought them down by 21 per cent from their highest level but still left the volunteers with heart rates above their starting point.
Dr Lewis, who conducted the test, said: "Losing yourself in a book is the ultimate relaxation.
"This is particularly poignant in uncertain economic times when we are all craving a certain amount of escapism.
"It really doesn't matter what book you read, by losing yourself in a thoroughly engrossing book you can escape from the worries and stresses of the everyday world and spend a while exploring the domain of the author's imagination.
"This is more than merely a distraction but an active engaging of the imagination as the words on the printed page stimulate your creativity and cause you to enter what is essentially an altered state of consciousness."
The research was commissioned by Galaxy choocalate to launch a campaign to give away one million books over the next six months.

2015년 6월 10일 수요일

햇볕과 정면으로 맞서는 낙타/이정모 서대문자연사박물관장

http://hankookilbo.com/v/b60772e921944f8f829f501b52f389e6

햇볕과맞서는낙타삽화
두툼한 입술, 요염한 콧구멍, 그리고 슬픔에 잠긴 듯한 눈망울을 가진 낙타의 고향은 놀랍게도 북아메리카다. 공룡이 멸종하고 2,000만년이 지난 후인 4,500만년 전 낙타의 먼 조상이 북아메리카에 등장했다. 처음엔 토끼만 한 크기의 동물이었다. 1,000만년이 지나자 염소만 한 크기로 성장했다. 이들은 계속 북아메리카에만 살았다.
하지만 고향에서의 삶이 그리 녹록하지만은 않았다. 몸집이 커다란 동물들이 많이 등장했기 때문이다. 경쟁에서 이기려면 몸집을 더 키워야 했다. 340만년 전에는 덩치가 요즘 낙타보다 30%나 더 커졌다. 발에서 어깨까지 높이가 2.7m나 되었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몸집을 더 키우는 데는 실패했다. 이제 남은 길은 두 가지뿐이다. 몸집을 줄여서 납작하게 엎드려 살든지 아니면 미련 없이 보금자리를 떠나든지.
낙타는 추운 북쪽 지방으로 점점 밀려났다. 추운 지역에 살기 좋게 굵은 털이 몸을 덮었고 발바닥은 넓적해져서 눈에 잘 빠지지 않았다. 또 등에 혹을 만들어서 지방을 갈무리했다. 낙타는 혹 속의 지방을 분해해서 양분으로 쓴다. 이때 지방이 공기 중의 산소와 반응해서 물을 만든다. 몸을 바꾸어도 살 수 있는 터전은 점차 좁아졌다.
마침 180만년 전 빙하기가 시작되었다. 빙하기의 영향으로 알래스카와 시베리아 사이의 베링해협이 육지로 연결되자 낙타는 북아메리카를 벗어나 시베리아를 거쳐 아시아로 이동했다. 빙하기가 끝난 후 북아메리카에는 단 한 마리의 낙타도 남지 않은 것을 보면 이것은 확실히 좋은 선택이었다.
아시아로 이동한 낙타는 두 종류로 분화되었다. 단봉낙타는 중동을 거쳐 아프리카에 정착했고, 아시아 초원에 머문 낙타는 쌍봉낙타로 진화했다. 북아메리카를 탈출했지만 아시아와 아프리카라고 해서 만만하지가 않았다. 결국 낙타들은 포식자들이 더 이상 쫓아올 수 없는 사막을 선택했다.
추운 숲에 적응한 몸은 사막에도 안성맞춤이었다. 두꺼운 털은 햇빛을 반사하고 뜨거운 사막 모래에서 올라오는 열을 차단했다. 단봉낙타의 넓고 평평한 발바닥은 모래 속에 빠지는 것을 막아주었다. 그리고 등에 달린 혹은 사막에서도 양분과 물의 저장소 역할을 했다.
낙타는 천신만고 끝에 마침내 전세계 아이들의 사랑을 받는 동물이 되었다. 나도 작년 여름 고비사막에서 쌍봉낙타를 껴안고 사진을 찍고 낙타젖 치즈를 사흘 동안이나 먹었다. 지금 생각하면 사려 깊지 못한 행동이었음을 고백한다. 영화 ‘쥬라기공원’에 나오는 공룡 티라노사우루스가 포효하는 소리의 실제 주인공인 고비사막의 쌍봉낙타를 만나자 흥분해서 저지른 일이었다.
이렇게 사랑스러운 낙타가 이제는 멀리해야 하는 대상이 되었다. 바로 메르스 때문이다. 메르스가 퍼지자 당국은 낙타를 멀리하고 낙타젖을 먹지 말라는 가정통신문을 보냈다. 덕분에 서울대공원의 단봉낙타와 쌍봉낙타가 지난 2일부터 4일 동안 자택격리 되기도 했다. 이 낙타들은 중동에 가 본 적도 없지만 사람들을 안심시키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 영향인지 서대문자연사박물관에도 혹시 낙타가 있느냐는 문의전화가 왔다. 없다. 있어도 죽은 지 오래된 박제일 뿐인데 그걸 왜 걱정한단 말인가. 도대체 메르스 바이러스를 가지고 있을 만한 낙타를 가까이 하거나 익히지 않은 낙타젖을 먹을 수 있는 곳이 우리나라 어디에 있기나 한지 알고 싶다.
이런 어처구니 없는 일이 일어난 까닭이 뭘까? 전염병 그것도 새로운 전염병은 모든 수단을 동원해서 초기에 막아야 한다는 것은 상식이다. 이때 기본은 정보를 투명하게 공개하는 것이다. 투명한 정보가 없으면 괴담이 퍼지는 법이다. 전염병을 통제할 컨트롤타워가 없었다. 지난 8일 청와대는 자기네가 메르스 사태의 컨트롤타워가 아니라고 친절하게 발표했다. 굳이 발표하지 않아도 시민들은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다. 작년 세월호 침몰 사고 때 청와대 스스로 자신은 컨트롤타워가 아니라고 당당하게 발표하던 장면을 우리는 똑똑히 기억하고 있다.
시민들은 메르스 사태 정도는 청와대에 의지하지 않고 스스로 극복할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다. 그러니 대통령은 메르스 사태를 너무 걱정하지 마시고 외교 행보에 전력하시기 바란다. 그런데 딱 여기까지다. 메르스는 전염력도 약하고 치사율도 상대적으로 낮은 신종 독감일 뿐이다. 그런데 이번에 퍼진 게 메르스가 아니라 탄저균이었다면 우리나라는 지금 어떻게 되었을까? 그때도 한가하게 나는 컨트롤타워가 아니라고 면피할 생각인가?
땡볕에 쉴 만한 그늘도 없을 때 낙타는 오히려 얼굴을 햇볕 쪽으로 마주 향한다. ‘낙타는 왜 사막으로 갔을까’의 저자 최형선은 그 이유를 햇볕을 피하려 등을 돌리면 몸통의 넓은 부위가 뜨거워져 화끈거리지만 마주 보면 얼굴은 햇볕을 받더라도 몸통 부위에는 그늘이 만들어져서 어려움이 오히려 줄어들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지도자가 최소한 낙타 정도의 지혜와 책임감을 갖추기를 기대하는 것이 그리 대단한 일일까?
이정모 서대문자연사박물관장
이정모 칼럼

2015년 6월 9일 화요일

대학교육에 대한 신자유주의 공세와 전쟁 [번역] 교수들의 황혼과 종말, By 마이클 슈월비. 번역 우동현


http://www.redian.org/archive/89341

이 글은 노스캐롤라이나 주립대학 사회학과 교수 마이클 슈월비가 ‘카운터펀치(Counterpunch)’ 주말판(2015년 6월 5~7일자)에 기고한 글을 우동현 선생이 필자의 동의를 얻어 번역해 기고하는 글이다. 대학 교육에서 좌파 교수들과 참여 지식인들에 대한 신자유주의적 공세가 커지고 있고 사회참여 활동 자체도 억압되고 있다는 내용이다. 한국의 현실과 다르지 않는 모습이다. 글의 원문 출처 링크<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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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으로부터 28년 전 러셀 자코비(Russell Jacoby)는 『마지막 지식인』(The Last Intellectuals)에서 2차 대전 이후 급속히 팽창한 미국의 고등교육이 자유롭고 지적인 말썽꾼보다는 교수가 되길 선택한 급진주의자들을 흡수했다고 주장하였다.
자코비에 따르면, 좌파 성향을 가졌던 많은 수의 교수들은 학계에서의 제약과 보상을 통해 효과적으로 탈정치화됐다. 그들은 당근과 채찍에 길들여져 교육받은 대중을 위한 일상어 대신, 한줌의 학자들을 위한 특수어로 글을 썼다. 결과적으로 그들은 대개 학계에서의 경력을 쌓는 데 정치력을 경주(傾注)하였다.
자코비는 괜찮은 삶을 좀처럼 살 수 없는 반체제적 사유가에게 대학이 안식처를 제공했다는 것을 인정한다. 그는 또한 출세주의가 급진적인 저작을 출간하거나 또는 자본주의 사회를 비판적으로 보라고 학생들을 가르치는 것과 그렇게 상충되지 않았다고도 지적한다.
문제는 오늘날 학계에서 경력을 쌓기 위한 이런저런 요구사항들로 인해 이전 세대의 참여적 지식인만큼의 성과를 내기가 어려워졌다는 것이다. 자코비를 부연하자면, 따라서 우리는 수천의 좌파 사회학자들 가운데 라이트 밀즈(C. Wright Mills)는 없는 그런 현실에 부닥치게 되었다.
마지막 지식인
자코비의 ‘마지막 지식인’ 표지
자코비의 책이 출간된 이래 상황은 무척이나 악화됐다. 여전히 미국의 대학에는 좌파 성향의 교수들이 꽤 존재한다. 그러나 고등교육의 고용부문에는 큰 변화가 있었다. 오늘날 진행 중인 강력한 보수화 추세는 수십 년 안에 미국사회에서 좌파세력으로서의 교수를 멸종시킬 것이다.
한 가지 중요한 변화는, 자코비가 관측한 학계에서의 일자리 팽창이 오늘날 줄어들고 있다는 점이다. 1960~70년대 교수직 시장이 커질 때에는 급진주의자도 대학에 자리를 잡고, 재직권(在職權)을 얻으며, 학계에서의 관습적인 보상에 대한 욕망에 왕왕 가려지긴 했어도 비판적인 작업을 수행할 수 있었다. 하지만 오늘날은 종신재직권을 보장하는 일자리가 거의 없는 거나 마찬가지이다.
대학당국은 줄어든 예산에 더불어 값싸고 고분고분하며 처분하기 쉬운 “유연한” 노동력을 얻고자, 종신교수직을 대폭 축소하는 대신 일시적이고 비(非)종신 시간제 교원을 선호한다. 이처럼 학계의 취업시장이 혹독해지자 남아있는 종신교수직을 둘러싼 경쟁이 격화되었다.
이와 같은 조건에서는, 매번 새로운 대학원생들이 목도하듯이, 인쇄물을 통해서나 수업에서 평지풍파를 일으키지 말고 학술잡지에 논문을 게재하기 위해 집중하는 것이 현명하다. 대학원생들은 미래의 고용주를 염두에 두고 페이스북(Facebook)이나 트위터(Tweets)를 하라는 조언을 받는다. 따라서 대학원생들은 경쟁적인 취업시장을 생각하며 일찍부터 보수적으로 바뀐다.

“미안하지만 당신의 수업은 없소”

오늘날 많은 대학원생들의 앞날이자 교원들의 피할 수 없는 현실인 바로 이 불안정한 고용은 더욱 보수적으로 바뀌고 있다. 모든 교수가 학문적 자유를 향유해야만 함에도 불구하고, 어떤 비전임 교수의 글쓰기나 수업이 문제를 일으킬 경우 해고를 면치 못한다. 계약이 갱신되지 않거나, 학과장이 “미안하지만, 당신이 가르칠 수 있는 수업은 없소.”라고 말하면 그게 바로 끝이다.
이러한 불안정한 상황은 몸가짐을 조심하게 하고, 어떠한 요구도 일축하며, 학생들을 계속 행복하게 만들도록 강요한다. 하지만 여전히 실제적인 문제가 남게 된다. 학기당 4개 이상의 강의를, 그것도 부당하게 낮은 임금을 받아가면서 겨우 삶을 연명하는 동시에 얼마나 많은 연구와 저술을 수행할 수 있을까?
구직경쟁 및 불안정 고용은 보수화를 이끄는 요인들 중 차라리 ‘보기 쉬운 것’이다. 다른 것들은 좀체 보이지 않는다. 이 중 하나가 바로 온라인 지침의 강화다. 수업, 즉 교수의 주관 하에 글과 즉흥성, 양자의 조합으로 이해되던 그 무엇은 이제 온라인 지침에 따라 행정적으로 검사될 수 있고 교체될 수 있는, 소유 가능한 어떤 지적 재산의 일부로 둔갑한다.
누군가가 교수자로서 하는 모든 일이 전자기록으로 남고 또 그것이 어느 때든 행정적 검토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은 기껏해야 몸을 사리게 하고 최악의 경우 살 떨리게 한다. 다시 말하지만, 가장 안전한 방책은 수업에서 자료와 대화를 이전처럼 유지하는 것이다.

대학에서의 문화전쟁, 계급전쟁

보수화의 힘은 종신재직권을 받지 못한 교수뿐만 아니라 종신교수에게도 영향을 미친다. 예산 감소에 따라 연구비를 따내라는 압력이 가중됐고, 정상과학 및 전통을 존중하는 학문이 선호된다. 긴축은 또한 자원을 둘러싼 내부경쟁, 즉 생산성 수요를 높이는 경쟁(우리가 더 많이 출간하지 않으면 다른 학과에 비해 무능하게 보일 거야!)을 격화시켰고, 동시에 종신교수직 검토 절차를 더욱 엄격하게 만들었다.
이러한 상황은 교수가 상상력이 빈핍(貧乏)한 학문적 작업만을 수행하도록 인도한다. 공공 지식인으로서의 자질을 기르는 데 필요한 규칙이 없는 속에서, 교수들은 여타의 노동자처럼 그들이 책임질 수 있는 것과 보상 받을 수 있는 바에만 몰두하게 된다.
종래의 보수파는 여전히 교수를 공격하고, 이는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니다. 아테네의 노인에서부터 앤드류 카네기(Andrew Carnegie)와 리드 어빈(Reed Irvine), 데이비드 호로위츠(David Horowitz)를 거쳐 오늘날의 무지(無知)한 공화당 의원에 이르기까지 심란한 질문을 제기하고 불편한 진실을 가리킨다며 교수를 꾸짖는 작태는 표준적인 문화·계급전쟁이다.
그러한 공격의 대부분은, 적어도 매카시 시대가 종언을 고한 이후부터는 언론 및 학계의 자유와 종신재직권에 의해 방향을 잃었다. 그러나 오늘날 새로운 정치·경제적 현실로 인해 보수파의 공격은 다시 한 번 더욱 불길한 것으로 바뀌었다.
우파 입법자들이 국가와 정부를 통제할 때, 그들의 반지성주의는 심각한 결말을 초래할 수 있다. 이는 단지 직업과는 별 관련 없는 고등교육에 대한 입법자들의 적개심에서 비롯된 공립대학에 대한 예산 감축과 그 가능성 때문만은 아니고, 오히려 교수들이 공적인 활동으로 인해 보복을 받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더욱 잘 인지하게 됐기 때문이다.
지난 몇 년간 이곳 노스캐롤라이나(North Carolina)주에서는 노스캐롤라이나 주립대학(UNC)의 일부였던 연구소와 기관이 문을 닫았는데, 이는 그러한 연구소 및 기관과 관련 있는 교수들이 공화당 의원의 기분을 상하게 했기 때문이었다. 교수들이 직장을 잃은 것은 아니었지만, 그 누구도 미리 경고를 받지 못하였다.
심지어 노스캐롤라이나주의 몇몇 공화당 의원들은 노스캐롤라이나 주립대학 교수들의 수업 강도를 높이려 했고, 교수를 포함한 공무원이 근무시간이나 주 자원을 이용하여 공적인 사안에 대한 논평과 같은 일을 하지 못하도록 만들려고 하였다.
두 제안은 즉각적으로 기각됐으나, 그것이 전달하고자 한 내용은 명백하였다. “우리는 너를 지켜보고 있고, 우리의 정치력을 발휘하여 너를 망신 줄 수도 있다.” 이는 노스캐롤라이나주에서만 벌어지는 특수한 싸움이 아니다. 위스콘신(Wisconsin)주와 미국입법교환위원회(ALEC)와 관련 있는 공화당 의원의 주들에서 비슷한 갈등이 불거지고 있다.

공공지식인으로서의 교수의 종말

신자유주의 이념이 미치는 범위가 확장되면서 이러한 위협은 더욱 강화되었다. 오스트리아학파를 추종하는 자유지상주의자들이나 자유시장주의자들은 공립대학을 직업기술학교처럼 운영하고, 대기업에 복무하는 두뇌집단으로 만들고자 한다. 그리하여 그들은 사회과학과 인문학의 제거를 핵심목표로 설정하였다. 주장의 근거는, 이러한 분과학문이 곧바로 취직으로 연결되지도 않고 또 자본주의적 경영을 돕지도 못하기 때문에 혈세를 들여 지원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시각은 임금이 정체됐고 내야 할 세금은 높아진 중산층과 노동자층 유권자에게 높은 호소력을 갖는다. 또한 이러한 시각은 결국엔 공립대학에서 교양교육을 뿌리 뽑을 것이며, 따라서 참여적 지식인으로 거듭나고자 하는 박사학위 소지자의 일자리 역시 박탈할 것이다.
필자는 주로 공립연구대학을 거론했는데, 부분적으로는 그러한 대학들이 내가 아는 한 가장 낫기 때문이다. 또한 그들 공립연구대학이 갖는 가치와 취약성을 세심히 고려해야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 대학들은 공익에 기여하는 방식으로 운영돼야 하고, 따라서 교수들에게 정책현안이나 사회문제에 대한 발언권을 보장해야만 한다.
그리고 교육에 초점을 맞춘 학교와 달리, 연구대학은 교수들에게 출간의 의무를 지운다. 이러한 이유로 인해, 공립연구대학은 비판적인 학문을 배양할 수 있었다. 그러나 정확히 납세자의 혈세가 그러한 대학들을 지원하기 때문에, 최소한 부분적으로는 신자유주의 이념가들의 공세에 맞서 대학은 취약할 수밖에 없다.
하버드
미국 하버드 대학 모습(위키피디아)
유수(有數)한 사립대학의 이야기는 또 다르다. 사립대학들에게 예산 조정과 혈세의 적절한 사용에 대한 선동적 수사와 같은 것은 그다지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러한 학교의 교수에게는 연구와 저술에 필요한 충분한 시간과 지원이 뒤따른다. 아이비 리그(Ivy League)의 교수들 중에는 유명해지는 사람도 많아 대학을 즐겁게 해준다.
그러나 소수의 사례를 제외하고, 대중적 인지도를 획득하는 아이비 리그 교수의 행태는 가내(家內) 지식인이 국가 엘리트에게 하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아서, 급진적인 비판보다는 현상을 정당화하고 유지시킨다고 할 수 있다. 하버드(Harvard)에서 종신교수직을 꿰차기 위해서는 『월간 비평』(Monthly Review)을 거칠 필요가 없지 않은가.
이렇듯 공공지식인으로서의 교수의 종말에 관해 필자와 대담을 나눈 몇몇 동료들은 필자에게 걱정할 필요가 없다고 말하였다. 그들이 인정하듯, 오늘날 우리에게 과거의 걸인(傑人)은 없더라도, 수천 개가 넘는 누리집(websites), 블로그, 트위터를 통해 그다지 알려지지 않은 평범한 교수도 광범한 청중에게 다가갈 수 있다는 것은 사실이다. 정말 우리는 누리망(Internet) 이전 시기보다 생각과 정보를 전달하는 더 많은 수단을 보유하고 있다.
그러나 필자는 여전히 편하지만은 않다. 왜냐하면 비판적 분석을 다양하게 담아낼 방도가 있더라도, 위에서 언급한 보수화의 힘(가혹한 구직경쟁, 불안정 고용, 감시가 가능한 온라인 지침, 연구비 취득 및 종래 형태의 생산성에 대한 요구, 더욱 엄격해진 자기검열체제, 행정적 감시와 이에 따른 공격) 또한 여전히 강고할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학계 바깥의 청중에게 다가갈 수 있는 새로운 수단이 있을지언정 대부분의 교수들에게는 그러한 수단을 일축할 이유가 충분하다. 트위터, 블로그를 하거나 누리집에 글을 쓰고 싶은가? 좋다. 남는 시간에 그렇게 하되 그에 대한 보상은 꿈도 꾸지 말라. 그리고 말조심해라.
2008년, 오하이오주립대학의 영어교수인 프랭크 도너휴(Frank Donoghue)는 『최후의 교수들』(2014, 차익종 옮김, The Last Professors)을 펴냈다. 그는 위신을 세워주고 보수도 괜찮으며 작업을 통제할 수 있는 자율성을 갖는 교수가 여전히 좋은 직업이라고 말하며, 필자도 이에 동의한다.
그러나 오늘날 대학당국의 통제와 횡포로 인해 교수직의 이점은 점점 저하되고 있다. 따라서 교수들, 특히 학계의 중견 및 소장학자들은 그들이 한때 그랬거나 그럴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의문을 제기하고 질문을 설정한 뒤 수행하는 작업을 그만두고 있다. 대학의 명백한 영리화(營利化)에도 불구하고, 필자가 도너휴의 책을 처음 접했을 땐 그가 너무 불필요한 우려를 자아내는 게 아닌가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지금, 필자는 그가 너무 신중했다고 생각한다.
자코비가 흠숭(欽崇)하는 참여적 지식인은 깨인 대중을 상대로 하여 자유롭게 글 쓰는 것으로 더 이상 먹고살 수 없게 되면서 사라지기 시작했고, 그러한 사정은 교수에게도 별반 다를 바 없다. 한때 대학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비판적이고 지적인 작업을 뒷받침하고 교수들에게는 광범한 청중에게 자본과 무관한 명철한 분석을 제공한 자리(niche)는 변모하는 중이다. 이러한 변화는 교수들, 심지어는 종신교수들 중에서 좌파적 공공지식인으로서 거듭나려는 열망을 품고 있는 이에게 차디찬 물을 끼얹을 것이다. 그 후 남는 것은 한낱 탁상공론(academic)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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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클 슈월비는 노스캐롤라이나 주립대학 사회학과 교수이다. 그의 이메일 주소는 다음과 같다. MLSchwalbe@nc.rr.com.

Noam Chomsky: The Death of the American University

https://www.jacobinmag.com/2014/03/the-death-of-american-universities/

http://voxpopulisphere.com/2014/08/10/noam-chomsky-the-death-of-the-american-university/

On hiring faculty off the tenure track

That’s part of the business model. It’s the same as hiring temps in industry or what they call “associates” at Walmart, employees that aren’t owed benefits. It’s a part of a corporate business model designed to reduce labor costs and to increase labor servility. When universities become corporatized, as has been happening quite systematically over the last generation as part of the general neoliberal assault on the population, their business model means that what matters is the bottom line.
The effective owners are the trustees (or the legislature, in the case of state universities), and they want to keep costs down and make sure that labor is docile and obedient. The way to do that is, essentially, temps. Just as the hiring of temps has gone way up in the neoliberal period, you’re getting the same phenomenon in the universities.
The idea is to divide society into two groups. One group is sometimes called the “plutonomy” (a term used by Citibank when they were advising their investors on where to invest their funds), the top sector of wealth, globally but concentrated mostly in places like the United States. The other group, the rest of the population, is a “precariat,” living a precarious existence.
This idea is sometimes made quite overt. So when Alan Greenspan was testifying before Congress in 1997 on the marvels of the economy he was running, he said straight out that one of the bases for its economic success was imposing what he called “greater worker insecurity.” If workers are more insecure, that’s very “healthy” for the society, because if workers are insecure they won’t ask for wages, they won’t go on strike, they won’t call for benefits; they’ll serve the masters gladly and passively. And that’s optimal for corporations’ economic health.
At the time, everyone regarded Greenspan’s comment as very reasonable, judging by the lack of reaction and the great acclaim he enjoyed. Well, transfer that to the universities: how do you ensure “greater worker insecurity”? Crucially, by not guaranteeing employment, by keeping people hanging on a limb than can be sawed off at any time, so that they’d better shut up, take tiny salaries, and do their work; and if they get the gift of being allowed to serve under miserable conditions for another year, they should welcome it and not ask for any more.
That’s the way you keep societies efficient and healthy from the point of view of the corporations. And as universities move towards a corporate business model, precarity is exactly what is being imposed. And we’ll see more and more of it.
That’s one aspect, but there are other aspects which are also quite familiar from private industry, namely a large increase in layers of administration and bureaucracy. If you have to control people, you have to have an administrative force that does it. So in US industry even more than elsewhere, there’s layer after layer of management — a kind of economic waste, but useful for control and domination.
And the same is true in universities. In the past thirty or forty years, there’s been a very sharp increase in the proportion of administrators to faculty and students; faculty and students levels have stayed fairly level relative to one another, but the proportion of administrators have gone way up.
There’s a very good book on it by a well-known sociologist, Benjamin Ginsberg, called The Fall of the Faculty: The Rise of the All-Administrative University and Why It Matters, which describes in detail the business style of massive administration and levels of administration — and of course, very highly-paid administrators. This includes professional administrators like deans, for example, who used to be faculty members who took off for a couple of years to serve in an administrative capacity and then go back to the faculty; now they’re mostly professionals, who then have to hire sub-deans, and secretaries, and so on and so forth, a whole proliferation of structure that goes along with administrators. All of that is another aspect of the business model.
But using cheap and vulnerable labor is a business practice that goes as far back as you can trace private enterprise, and unions emerged in response. In the universities, cheap, vulnerable labor means adjuncts and graduate students. Graduate students are even more vulnerable, for obvious reasons. The idea is to transfer instruction to precarious workers, which improves discipline and control but also enables the transfer of funds to other purposes apart from education.
The costs, of course, are borne by the students and by the people who are being drawn into these vulnerable occupations. But it’s a standard feature of a business-run society to transfer costs to the people. In fact, economists tacitly cooperate in this. So, for example, suppose you find a mistake in your checking account and you call the bank to try to fix it. Well, you know what happens. You call them up, and you get a recorded message saying “We love you, here’s a menu.” Maybe the menu has what you’re looking for, maybe it doesn’t. If you happen to find the right option, you listen to some music, and every once and a while a voice comes in and says “Please stand by, we really appreciate your business,” and so on.
Finally, after some period of time, you may get a human being, who you can ask a short question to. That’s what economists call “efficiency.” By economic measures, that system reduces labor costs to the bank; of course, it imposes costs on you, and those costs are multiplied by the number of users, which can be enormous — but that’s not counted as a cost in economic calculation. And if you look over the way the society works, you find this everywhere.
So the university imposes costs on students and on faculty who are not only untenured but are maintained on a path that guarantees that they will have no security. All of this is perfectly natural within corporate business models. It’s harmful to education, but education is not their goal.
In fact, if you look back farther, it goes even deeper than that. If you go back to the early 1970s when a lot of this began, there was a lot of concern pretty much across the political spectrum over the activism of the 1960s; it’s commonly called “the time of troubles.” It was a “time of troubles” because the country was getting civilized, and that’s dangerous. People were becoming politically engaged and were trying to gain rights for groups that are called “special interests,” like women, working people, farmers, the young, the old, and so on. That led to a serious backlash, which was pretty overt.
At the liberal end of the spectrum, there’s a book calleThe Crisis of Democracy: Report on the Governability of Democracies to the Trilateral Commission, Michel Crozier, Samuel P. Huntington, Joji Watanuki , produced by the Trilateral Commission, an organization of liberal internationalists. The Carter administration was drawn almost entirely from their ranks. They were concerned with what they called “the crisis of democracy” — namely, that there’s too much democracy.
In the 1960s, there were pressures from the population, these “special interests,” to try to gain rights within the political arena, and that put too much pressure on the state. You can’t do that. There was one “special interest” that they left out, namely the corporate sector, because its interests are the “national interest”; the corporate sector is supposed to control the state, so we don’t talk about them. But the “special interests” were causing problems and they said “we have to have more moderation in democracy,” the public has to go back to being passive and apathetic.
And they were particularly concerned with schools and universities, which they said were not properly doing their job of “indoctrinating the young.” You can see from student activism (the civil rights movement, the anti-war movement, the feminist movement, the environmental movements) that the young are just not being indoctrinated properly.
Well, how do you indoctrinate the young? There are a number of ways. One way is to burden them with hopelessly heavy tuition debt. Debt is a trap, especially student debt, which is enormous, far larger than credit card debt. It’s a trap for the rest of your life because the laws are designed so that you can’t get out of it. If a business, say, gets in too much debt it can declare bankruptcy, but individuals can almost never be relieved of student debt through bankruptcy. They can even garnish social security if you default. That’s a disciplinary technique.
I don’t say that it was consciously introduced for the purpose, but it certainly has that effect. And it’s hard to argue that there’s any economic basis for it. Just take a look around the world: higher education is mostly free. In the countries with the highest education standards, let’s say Finland, which is at the top all the time, higher education is free. And in a rich, successful capitalist country like Germany, it’s free. In Mexico, a poor country, which has pretty decent education standards, considering the economic difficulties they face, it’s free.
In fact, look at the United States: if you go back to the 1940s and 1950s, higher education was pretty close to free. The GI Bill gave free education to vast numbers of people who would never have been able to go to college. It was very good for them and it was very good for the economy and the society; it was part of the reason for the high economic growth rate. Even in private colleges, education was pretty close to free.
Take me: I went to college in 1945 at an Ivy League university, University of Pennsylvania, and tuition was $100. That would be maybe $800 in today’s dollars. And it was very easy to get a scholarship, so you could live at home, work, and go to school and it didn’t cost you anything. Now it’s outrageous. I have grandchildren in college, who have to pay for their tuition and work and it’s almost impossible. For the students. that is a disciplinary technique.
And another technique of indoctrination is to cut back faculty-student contact: large classes, temporary teachers who are overburdened, who can barely survive on an adjunct salary. And since you don’t have any job security, you can’t build up a career, you can’t move on and get more. These are all techniques of discipline, indoctrination, and control.
And it’s very similar to what you’d expect in a factory, where factory workers have to be disciplined, to be obedient; they’re not supposed to play a role in, say, organizing production or determining how the workplace functions-that’s the job of management. This is now carried over to the universities. And I think it shouldn’t surprise anyone who has any experience in private enterprise, in industry; that’s the way they work…. [continue reading]
This is an edited transcript (prepared by Robin J. Sowards) of remarks given by Noam Chomsky in February, 2014 to a gathering of members and allies of the Adjunct Faculty Association of the United Steelworkers in Pittsburgh, Pennsylvania.
To read Noam Chomsky’s complete remarks published in Jacobin, click here.

2015년 6월 8일 월요일

한국 사회과학의 서구중심주의 논쟁… 서강대 김경만 교수 VS 강정인 교수

http://goo.gl/vSllFs


최근 일주일 간격으로 서강대 다산관을 잇달아 찾았다. 4층 연구실의 사회학과 김경만 교수(57)와 6층의 정치외교학과 강정인 교수(61)를 만나기 위해서다. 

두 학자는 2007년 이 건물에서 ‘한국 사회과학의 서구의존성 누구 책임인가’라는 주제로 4시간 동안 지적 대결을 펼친 적이 있다. 이후 ‘학문적 긴장’을 유지하며 지내온 이들은 공교롭게도 비슷한 시기에 다시 한번 자신의 주장을 펼쳤다.

김 교수는 신간 <글로벌 지식장과 상징폭력>(문학동네)에서 강정인, 한완상, 조한혜정 등 동료 학자들을 실명비판했다. 세계 학계의 보편적 흐름과 분리된 채 ‘토착’ 이론을 추구하는 이들의 활동을 ‘학문적 옹알이’라고 했다. 강 교수는 5일 열린 ‘서구문명 바로/삐딱하게 보기’ 학술회의를 주최해 다시 한번 서구중심주의를 비판했다. 두 학자의 말을 전한다.

김경만 서강대 교수가 지난달 26일 다산관 연구실에서 서구이론으로부터의 독립을 주장하는 동료 학자들을 비판하는 자신의 주장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 김정근 기자 jeongk@kyunghyang.com

■ 김경만 교수
“세계 학문 전통 외면하는 한국 ‘지적 고아’로 고립 못 벗어나”
“서구의 ‘개념적 자원’ 거부할 수 없어… 독자적 이론 불가능”


김경만 교수는 <글로벌 지식장과 상징폭력>이 ‘미래 한국의 피에르 하버마스’를 위한 책이 됐으면 좋겠다고 했다. ‘피에르 하버마스’란 세계 사회학계의 거두인 피에르 부르디외와 위르겐 하버마스를 합해 지은 이름으로, 한국에서도 세계적 석학이 나왔으면 한다는 뜻이다. 그는 세계적 기준에 못 미치거나, 학계 규칙을 무시한 채 ‘혼잣말’을 하는 한국 학계의 학풍을 질타한다. 때로 ‘폐기물 재생업자’와 같은 표현까지 서슴지 않는다. 

- 한국에서 실명비판은 여전히 드물다. 

“한국에서 다른 학자를 비판하면 인신공격이라고 하지만, 사실 더 많이 비판해야 한다. 비판하고 합리적으로 답하는 문화가 정착돼야 한다. 우리 사회는 물질적으로는 발달했지만, 진짜 좋은 사회는 이야기하고자 하는 걸 이야기할 수 있는 사회다. 물론 이런 학문적 전통은 하루아침에 생기지 않는다.”

-우리나라에 세계적 학자가 없다고 생각하나. 

정치인, 관료, 기관장으로 성공한 학자는 많다. 하지만 진정한 의미의 ‘학계’는 없다. 한국에서 공부해봐야 뭐하나. 사회과학계에 변변한 상 하나 없다. 그러니까 모두 텔레비전, 신문에 나가 대중지식인이 되려고만 한다. 요즘 교수들은 연예인이 다 됐다. 그러려고 미국에서 10년 동안 공부해서 박사 따온 건가. 학자의 목적은 학문의 장에서의 성취이지, 대중과의 소통이 아니다. 우리에게도 세계적 학자가 될 만한 사람들이 있었다. 그러나 스스로 포기하고 대중지식인이 됐다. 난 그것이 학자로서 성공할 수 있는 길이 한국에서는 애초에 닫혀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김 교수는 학문을 등산에 비유한다. 산악인 박영석은 이미 세계적인 등반가였으나 또다시 새로운 안나푸르나 루트를 개척하려다가 세상을 떴다. 학자들도 마찬가지다. 돈, 사회적 지위가 아니라 ‘동료 학자들의 인정’이 우선이다. 김 교수는 이를 ‘일루지오’라는 부르디외의 개념으로 설명한다. 일루지오는 ‘장(場)의 환상’ 정도로 해석될 수 있는 개념으로, 참여자들은 이 장에서 중요하다고 설정된 가치를 획득해 영향력을 발휘하려고 노력한다. 장 바깥의 일반인들이 관심을 못 느끼는 일일지라도 학자들은 전 생애를 건다. 

-그래도 지식을 대중에게 나눠주고, 사회변화에 기여하는 일은 학자의 의무처럼 여겨지고 있다. 

“하버마스와 로티는 사회·정치 이론이 사회개혁에 얼마나 효과적인지를 두고 지난 수십년간 논쟁해왔다. 바우만 역시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노력했으나 실패했다고 고백했다(바우만은 조국 폴란드의 사회개혁에 뛰어들었으나 성과를 내지 못한 채 영국으로 떠났다). 러셀은 사회개혁에 참여했지만 철학자가 아니라 상식인으로서 참여한다고 말한 적이 있다. 우리나라에 교육학 박사가 엄청나게 많다. 그런데 공교육은 왜 망하고 있나. 혹자는 ‘상아탑에 안주한다’고 표현하지만, 상아탑에 있다는 건 엄청난 고통이다. 매일 쏟아져나오는 세계적인 책, 논문을 다 읽어야 한다. 마이클 샌델이 마이크 차고 대중강연을 하지만, 그는 그 이전에 세계적 연구로 큰 업적을 쌓은 학자다.”

김 교수는 학계에는 ‘거부할 수 없는 준거점’이 있다고 본다. 부르디외, 기든스, 하버마스 같은 세계적 학자들이 만들어낸 ‘이론적 자원’을 뜻한다. 이 상징공간에 진입하려면 진입비용을 내야 한다. 비용은 이들의 이론을 충실히 이해하기 위한 공부의 시간으로 갈음된다. 일각에서는 유학 등 한국의 전통 사상을 응용하거나, 한국 현실에 맞는 이론을 새로 만들자고 제안하지만 김경만은 이것이 불가능하다고 여긴다. ‘계급’ ‘불평등’ ‘이데올로기’ 등 현대사회의 문제를 분석하기 위한 개념은 모두 영미와 유럽의 ‘개념적 자원’이기 때문이다. 

-대학과 정부가 어떻게 해야 하나. 

“연구 주제에 따라 연구비 지원 심사에 외국 교수들도 참여하도록 하고, 또 필요한 경우엔 계획서도 영어로 쓰게 해야 한다. 그렇게 해서 세계의 학문적 전통에 참여해야 한다. 우리는 지금 ‘지적 고아’나 마찬가지다.” 

강정인 서강대 교수가 지난 2일 다산관 연구실에서 서구중심주의를 극복하고 한국적 이론을 추구해야 한다는 주장을 펼치고 있다. | 이준헌 기자 ifwedont@kyunghyang.com

■ 강정인 교수
“외국과 한국의 화두 다르다면 연구방법도 다를 수밖에 없어”
“서구 학문 배우지 말자는 게 아니라 우리 것도 키우자는 것”


강정인 교수는 스포츠에 해박했다. 프로야구, 프로축구 등의 사례를 통해 서구중심주의를 극복해야 하는 이유를 설명했다. “류현진, 기성용이 잘하는 것, 물론 중요하죠. 하지만 그들이 잘해봐야 미국 프로야구, 영국 프로축구를 키워주는 거예요. 중요한 건 한국과 동아시아 리그 아닙니까.”

‘서구문명 바로/삐딱하게 보기’는 다양한 지역 학자들이 제기한 서구중심주의의 문제점을 살피는 자리였다. 아프리카, 라틴아메리카, 인도, 동남아 등의 사례를 통해 과거와 현재, 동양과 서양, 세계와 지역의 관계를 이야기했다.

- 수십년간 서구중심주의를 비판하는 흐름이 있었지만 아직도 이런 학술회의가 열린다는 건, 서구중심주의 극복이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뜻 아닐까. 

“2차 세계대전 이후 신생국들은 독립을 얻었으니 해방됐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집트 학자 사미르 아민이 1989년 <유로센트리즘>을 내면서 서구중심주의의 문제가 다시 불거졌다. 러시아 혁명 이후 계급은 해방됐지만 새로운 억압이 생겼고, 흑인은 시민권을 얻은 뒤에도 다른 방식의 억압을 받았다. 인간에 의한 인간의 지배는 존재양식이 바뀌어 계속 발생한다. 정치적·경제적 지배 문제도 중요하지만 문화적 지배 문제도 독자적 층위를 가진다.”

- 서구중심주의를 극복하기 위한 다양한 노력 중 가장 눈길을 끄는 움직임은 무엇인가. 

“라틴아메리카에서 서구중심주의를 극복하려는 학자들은 대부분 좌파다. 이들은 자본주의를 타파하지 않으면 서구중심주의를 극복할 수 없다고 본다. 그래서 문화의 문제에는 상대적으로 신경을 덜 쓴다. 반면 한국, 일본 등 동아시아 국가는 자본주의에 성공적으로 적응했다. 여기선 자본주의를 타파하지 않아도 문화적으로 서구중심주의를 극복할 수 있다고 본다. 결국 이번 학술대회는 코끼리를 여러 사람이 만지는 격이라고 보면 된다. 여러 의견을 종합하면 코끼리를 알 수 있다.”

- 정말 유교 같은 전통 사상이 서구 의존성을 극복하는 대안이 될 수 있다고 보는가. 

“서구의 초기 페미니즘은 기독교 사상을 가부장제의 원천으로 보고 강하게 비판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여성신학이 등장했다. 성경도 본질적으로 남녀평등을 추구한다고 해석한 것이다. 우리도 전통이 여성·계급 억압적이라 여기고 치워버리기보다는, 여성·계급 해방적 요소를 찾아서 현대적으로 새로 만들어 나가면 된다. 서구의 학문을 배우지 말자는 주장이 아니다. 다만 우리 것도 키우자는 얘기다.”

- 한국에 세계적 학자가 없는가. 

“퇴계는 ‘해동’ 유학자였고, 최치원도 당나라의 주변부 지식인이었다. 마루야마 마사오는 유명한 정치학자지만, 어디까지나 ‘일본 사상가’다. 하지만 푸코를 ‘프랑스 사상가’라고 하지는 않는다. 중국에선 세계적 학자가 나올 수 있다. 예를 들어 왕후이만 해도 서구에서 자꾸 초청해 이것저것 물어본다. 중국의 국력 때문이다. 학자에게 어느 나라에서 태어났는지는 중요하다. 하지만 국적을 선택할 수는 없는 일 아닌가.”

- 학문의 세계적 흐름을 따라갈 필요는 없을까. 

“외국 학술지에 투고하려면 그들의 유행에 맞춰야 한다. 외국과 한국의 화두가 같다면 좋겠지만, 다르다면 따로 갈 수밖에 없다. 에이즈 치료법을 개발하면 세계 의학 발전에 큰 도움이 될 것이다. 하지만 한국에 유행성출혈열이 크게 퍼졌다면 이 병부터 연구해야 하는 것 아닌가. 이명박 정부 때 정의 문제가 큰 이슈였다. 우리 같은 민주주의 신생국에서 정의는 과거사 청산 문제와 반드시 연결된다. 그러나 롤스나 샌델의 정의론을 봐도 과거사 청산 문제는 나오지 않는다.”

- 학계에서도 세대 간에 생각이 다를 것 같다. 

“정부와 학교가 영어 논문을 강조하면서 인문·사회과학 공동체가 무너지고 있다. 학과나 학회에 나오기보다는 해외 학술지에 투고하는 데 바쁘다. 국내에 있으면서도 두뇌가 유출된다.”

텅 빈 민주주의 /박상훈 | 정치발전소 학교장

http://goo.gl/6FQqWX

인간이 만든 정치체제 가운데 민주주의만 유일하게 ‘목적을 전제하지 않은 체제’로 불린다. 민주주의에서만 공동체가 지향해야 할 목적을 시민이 참여하는 공적 논의를 거쳐 결정하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보면 민주주의란 시민 모두가 의견을 가질 권리를 향유하는 체제라고 할 수 있는데, 이를 가장 날카롭게 비판하고 나선 사람은 플라톤이었다. 그는 시민 대중의 불안정한 의견에 의존한다는 이유에서 민주주의를 나쁜 체제로 보았다. 불안정한 의견이 아니라 확고한 진리 위에 체제를 세워야 한다고 생각한 그가 주창한 것은 이를 이해할 수 있는 ‘철학자 왕’ 내지 교육받은 소수 엘리트에 의한 지배였다. 민주주의자라면 플라톤에 동의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가 제기한 문제, 즉 ‘시민의 자유로운 의견에 기초를 둔 공적 결정의 체계가 과연 잘 작동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 대해서는 적절한 답이 있어야 할 것이다.

20세기 최고의 민주주의 이론가라고 불리는 정치학자 로버트 달은, 민주주의의 본질이 실질적 내용에 있지 않음을 다시 강조했다. 민주주의냐 아니냐를 구분짓는 것은 공적 논의와 결정의 과정에 평등한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절차적 조건이 어떠냐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결국 어떤 조건에서 의견의 자유가 공익적 결정과 양립할 수 있는지를 탐구하려 한 것인데, 그는 그 핵심을 ‘사회적 힘의 균형’에서 찾았다. 시민은 개인으로서가 아니라 집단으로 행동할 수 있어야 하며, 이들 시민집단 사이의 힘의 균형 위에서 민주정치가 작동해야 한다는 것이다. 

마치 건축물의 단단한 기반처럼 시민 개개인이 다양한 집단으로 결속되어 있고, 그 위에 기둥을 세우듯 몇 개의 공적 의견이 형성되어 경합할 때 민주주의는 그 이상에 가깝게 실천될 수 있다고 보았다. 이런 이론적 기초 위에서 자본주의가 만들어내는 경제적 불평등 효과를 제어하고 노사를 포함한 주요 생산자 집단들 사이의 힘의 균형을 다루는 민주주의론의 발전이 있었다. 시민의 의견을 사회적으로 조직하는 것의 한계를 넘어 정치적 조직화의 중요성이 강조되기도 했다. 요컨대 민주주의는 집단과 조직, 결사체의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시민 참여와 의견 형성 과정으로 이해된 것이다.

이런 기준에서 오늘의 한국 민주주의를 보면 국가와 개인 사이가 텅 빈 공간처럼 다가온다. 누가 그 공간을 채우는가. 언론과 행정이다. 지난 세월호 참사 때도 그랬지만 이번 중동호흡기증후군(MERS·메르스) 사태에서도, 국가와 개인 사이의 공허한 공간을 주도했던 권력은 이들이었다. 이들에 의해 사회적 의견이 형성되는 과정에서 시민 개개인이 어쩔 줄 몰라 하는 상황은 이번에도 반복되었다. 이들이 유능하고 책임감이 있어서가 아니다. 오히려 무능하고 무책임함에도 위기 때마다 이들의 존재가 더욱더 크게 부각될 수밖에 없는 것은, 시민 개개인의 입장에서 볼 때 달리 의존할 수 있는 대안적 판단의 원천이 없기 때문이다. 혹은 대안적 정보와 의견을 공유할 다양한 중간집단에 결속되어 있는 시민의 규모가 형편없이 작기 때문이다. 그나마 이번엔 보건의료노조가 합리적 의견 형성에 일정한 역할을 했지만, 노조나 정당 등 자율적 결사체에 참여하고 있는 시민의 수는 너무 적다. 이런 상황 속에서 시민은 행정권력과 언론권력에 욕하면서도 매달릴 수밖에 없다.

사실이 더 많이 알려지고 투명하게 공개된다고 해서 해결될 일이 아니다. 옳고 정확한 사실은 어딘가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그런 것이 아니다. 인간은 특정의 인식 틀을 통해 사실을 받아들인다. 따라서 사실보다 중요한 것은 사실이 해석되고 판단되는 사회적 과정이 어떠냐 하는 데 있다. 민주주의도 일종의 정보처리 체계라고 할 수 있다. 당연히 정보가 선별되고 교환되는 과정에서 다양한 집단과 조직, 결사체들이 역할을 해야 하고, 시민 개개인 역시 이 과정에 결속되어 있어야 한다. 그래야 시민은 자신이 속한 집단의 의견을 통해 좀 더 신뢰할 수 있는 공적 판단을 가질 수 있고, 또 그래야 언론과 행정의 기능에 수동적인 소비자로 전락하지 않을 수 있다. 중대한 사안일수록 더욱 그렇다. 

사회적 힘의 균형을 말하기 이전에 국가와 개인 사이가 텅 비어 있는 것 같은 지금의 상황이 달라지지 않는 한, 우리의 민주주의가 행정권력과 언론권력에 휘둘리는 상황은 피할 수 없을 것이다. 이런 민주주의에서 시민이 향유할 수 있는 것은 욕할 자유뿐이다. 이래저래 시민은 더 사나워지고 사회는 더 분열되는 일만 많아지는 것 같아 걱정이다.

2015년 6월 4일 목요일

메르스 사태, 국가는 어디에 있나/우석균 건강권실현을 위한 보건의료단체연합 정책위원장ㆍ의사

http://www.hankookilbo.com/v/71d422ddf8b0456cbf8032f59d4b83f3

또 다시 국가는 어디 있는가를 묻는다. 어느 때이건 내가, 내 가족이 아프면 ‘어느 병원으로 가야할지’를 알려주는 것이 정부가 할 일이다. 그런데 지금 사람들이 불안과 공포에 떠는 이 상황에서도 내가 갈 수 있는 병원이 어딘지 알 수가 없다. 이제 사람들은 ‘어느 병원을 가지 말아야 할지’를 묻는다. 이조차 정부가 알려주지 않으니 사람들은 자신들끼리 정보를 나누고 각자 알아서 살 길을 찾는다. 그런데 지금 정부는 사람들이 나누는 귓속말을 ‘괴담’으로 몰아가고 조금 큰소리로 말하면 잡아가겠다고 한다. 국민을 도와야 할 국가는 없고 정보를 알려주어야 할 역할조차 하지 않으며 살길을 찾는 국민들을 범죄자로 몰아간다. 도대체 국가는 어디에 있는가?
애초 정부가 초기 대응을 잘했더라면 지금 같은 상황도 없었을 일이다. 이른바 B병원에서의 초동대응이다. 정부는 한 병실에 있던 사람들만 격리조치 했을 뿐 8층 같은 병동의 여러 사람들에 대한 격리조치를 하지 않았다. 정확한 정보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이 병동을 비웠다는 이야기도 있다. 그런데 바로 이 병동 입원 환자들 중 상당수가 메르스 확진환자로 드러났다. 이 환자들을 격리하지 않고, 또는 병동에서 내보내기까지 했다면 그 환자들은 어디로 갔을까? 입원환자들이니 결국 다른 병원에 입원해야 했을 것이다.
정부 초동대응의 문제는 환자를 놓친 것만이 아니다. 사실 정부는 환자들을 지역사회병원으로, 또 더 먼 병원까지 흩어놓았다. 그리고 이 환자들이 제2의 감염원이 되어 3차 감염자들을 만들어 내고 있는 것이 지금 우리가 목도하고 있는 상황이다. 정부는 어디 있었나를 넘어 도대체 어떤 일을 저질렀나를 묻지 않을 수 없다.
그렇다면 B병원의 같은 병동환자들을 어떻게 해야 했을까? 그대로 그 병원에 가두어놓아야 했을까? 민간 중소병원에서 이를 감당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다른 병원으로 옮겨야 했을 텐데 어느 병원으로 보내야 했을까? 이것이 정말 따져보아야 할 질문이다. 그 8층 병동의 환자들은 그러면 어느 병원으로 보내야 했을까?
대답부터 하자면 그 8층의 환자들을 보낼 병원은 애초에 없었다. 다른 병원으로 보내서 격리했어야 할 터인데 자신들의 입원환자를 비우고 그 환자들을 받아줄 병원이 그 지역에는 없었다. 아니 한국의 어떤 지역도 그런 병원은 없다. 바로 적절한 감염격리 시설을 갖춘 지역공공병원 말이다.
지금 한국의 현실이 바로 그 모습을 여실히 보여준다. 고위험 감염병 환자 30명이 넘어간 시점에, 이미 환자들은 서울의 국가중앙병원급 격리병실을 다 채웠고, 벌써 전국 각지에 흩어져있다. 의심환자와 격리대상자까지 따지면 이미 한국이라는 한 나라의 해결능력을 넘어버린 것처럼 보이기까지 한다. 30명 환자가 국가재난이 된다. 이것이 105개 국가지정 격리병상(‘병실’숫자로 세면 이보다도 적다)의 실체이고 한국 공중보건의료체계의 실체다.
신종플루 때 영국의 대응과 매뉴얼을 따져보는 것이 지금 우리 상황을 이해하는데 타산지석이 될 것이다. 영국에서는 감염병이 발생하면 지역거점 공공병원이 중심적인 역할을 한다. 지역의 1차 동네의원들은 환자들을 그 거점병원으로 보낸다. 핫라인도 개설되어 질병에 대한 상담을 하고 의심이 되면 각 지역의 거점병원을 알려준다. 감염병이 확산되면 그 지역 거점병원은 입원환자들을 주변 병원으로 보내고 감염병동을 운영한다. 이 지역거점 공공병원은 물론 감염격리병실과 감염격리병동까지 갖추고 있다. 그리고 이것은 영국만의 예가 아니다. 선진국이라는 나라들의 대응매뉴얼은 대체로 이와 같다.
그런데 이런 대응이 가능하려면 중요한 전제가 있다. 바로 병원 중 공공병원이 상당한 비중으로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른바 음압격리병실(약한 음압이 걸려 병실 내 병균이 바깥으로 나가지 못한다)과 음압격리병동까지 갖추려면 돈이 든다. 병실의 공기조절을 별도로 해야 하고 전기료도 많이 든다. 또 격리병실은 평소에는 환자가 없을 수도 있어 ‘비효율적’이고 돈을 못 벌 수 있다.
별 자세한 이야기를 다 한다 싶겠지만 바로 이 때문에 수익성을 최우선으로 따지는 민간병원에서는 이런 병실을 짓지 않는다. 병실도 이런데 음압격리 ‘병동’은 말할 것도 없다. 수익성을 따지지 않는 공공병원만 이를 운영할 수 있다는 얘기다. 현재 한국의 몇 안 되는 격리병실과 격리병동의 거의 대부분을 공공병원이 운영하고 있다.
그런데 한국의 공공병원은 몇 개나 되나.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 공립병원 비중은 73%이고 대부분의 나라들이 80%가 넘는다. 가장 적은 미국과 일본만 하더라도 공립병원이 30% 정도다. 최소한 지역병원 3개 중 하나는 공립병원이라는 이야기다. 한국은 어떤가. 병원수로는 6%, 병상수로는 10%다. 병원 20개 중 하나만 공립병원이라는 소리다. 이런 한국의 의료전달체계에서는 감염격리병실 혹은 병동을 갖춘 지역거점병원은 애초에 불가능하다는 얘기가 된다.
지금 온 나라가 난리인데 무슨 공공병원 이야기를 하는가고 물을 수 있겠다. 그러나 우리나라 의료의 공공병원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사스, 신종플루, 그리고 이번 메르스 사태 때 발생하는 문제들을 반복할 수밖에 없다. ‘50년 주기’ 홍수 대비 댐이 없으면 홍수에 대한 방도는 없다. 소방서가 수익성 때문에 필수적으로 사용해야 할 장비를 갖추어 놓지 않는다고 생각해보라. 그런데 한국이 바로 그런 상황이다. 필수 의료시설인 감염 격리시설이 절대부족한 상황이 바로 지금 한국의 상황이고 바로 이 때문에 30여명 환자로 온 나라가 혼란에 빠져있다. 소방서 20곳 중 1곳만 돈 안 따지는 소방서인 나라가 있다면 그 나라가 정상일까.
공공의료체계는 댐이나 소방서 같은 ‘사회적 인프라’다. 이것이 없는 상황에서 모든 대책은 임시방편일 뿐이다. 이제 환자가 더 늘어나면 병원 마당에 텐트라도 치고 컨테이너라도 들여놓아야 할 판이다. 언제까지 이런 상황을 되풀이해야 하는가.
메르스 사태는 한국의 공중보건의료체계의 파산을 여실히 보여준다. 공공병원이 지금보다 훨씬 더 많아야 하고, 민간병원들이 수익을 따지기 전에 공공적 역할을 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세월호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메르스 사태에서도 국가는 없다. 이제라도 시민들이 국가를 만들어내야 한다.
우석균 건강권실현을 위한 보건의료단체연합 정책위원장ㆍ의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