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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7월 20일 월요일

고백과 위안/ 강우일 주교

고백과 위안/ 강우일 주교
 
등록 :2020-07-16 18:21 수정 :2020-07-17 14:07
 
나는 가톨릭교회의 성직자로 46년을 살아온 사람이다. <한겨레>에서 기고 부탁을 받자 내 마음속에 이런 소리가 들려왔다. ‘내 나이에 또 무슨 말을 해서 사람들의 이목을 끌고 가르치려 하는가? 또 새로운 말을 해서 사람들을 깨우치기보다는 이미 쏟아낸 말만큼 살아오지 못한 일에 대해 고백하고 용서를 청하는 것이 내가 해야 할 도리가 아닌가?’
 
나라는 사람에게는 모자라는 구석이 많아서 제대로 살아내지 못하고 채우지 못한 부분이 참으로 많다. 하지만 그것은 고백소에서 하느님께 사죄를 드리고 용서를 청하면 될 일이지, 미주알고주알 늘어놓아 여러 사람들 귀를 어지럽힐 필요도 가치도 없다. 그런데 가톨릭교회를 공적으로 대표하는 성직자로 수십년을 살아온 사람으로서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그냥 넘어가기 어려운 고백 거리가 자꾸 머리에 떠오른다.
 
오래전부터 마음에 걸렸던 것이 3·1운동과 가톨릭교회의 관계다. 나는 해마다 3·1절이 되면 100년 전 우리 겨레가 일본제국의 침략과 억압에 짓눌려 고통받고 신음하고 있을 때 가톨릭교회는 무엇을 하고 있었나 하는 의문이 고개를 쳐들어 힘들었다.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33인 중 천주교 인사는 한 명도 없었다. 오히려 당시 조선천주교회를 대표하던 뮈텔 주교는 3·1운동 10년 전인 1909년에 일어난 안중근 의사의 이토 저격 사건을 탐탁지 않아 했고, 사형집행을 앞둔 안 의사가 개인적인 친분이 있었던 빌렘 신부의 방문과 고백성사를 청하는데도 허락하지 않았다. 빌렘 신부는 교구장의 뜻을 어기고 안 의사를 방문하여 고백성사를 주었고, 빌렘 신부는 장상의 명을 따르지 않은 탓으로 얼마 후 소임지를 떠나 프랑스로 돌아가야 했다.
 
19193·1운동이 거국적으로 전개될 무렵, 35일 대구 유스티노 신학교의 신학생들 약 60명이 운동장에 모여 독립 만세를 외쳤다. 그리고 39일 대구 약전골목 만세 행렬에 합류하기로 계획했다. 그러나 이 사실이 프랑스인 교장 신부에게 알려져 유인물과 태극기를 모두 압수당했다. 대구교구장 드망즈 주교는 신학교를 방문하여 신학생들을 한자리에 모으고 만세 운동의 참가를 금했다. 만일 만세 운동에 참가하면 신학교를 폐쇄하겠다고 밝혔다. 신학생들은 수업에 거의 참석하지 않음으로써 자신들의 소신과 심정을 표현했다. 서울 용산 예수성심신학교에서도 323일 밤 신학생들이 신학교 문을 나와 만세 운동을 펼치는 군중에 합류하였다. 이튿날 서울교구장 뮈텔 주교는 신학교로 달려갔다. 신학생들은 일본인들에게 짓밟힌 조국을 외면할 수 없다며 눈물로 호소하였다. 그럼에도 뮈텔 주교는 신학생들의 만세 운동 참여를 금하고 만세 운동을 주도했던 신학생들은 퇴학조처 되었다.
 
왜 당시 프랑스 선교사들이 이렇게까지 조선인들의 항일 운동에 부정적이었을까 그분들 입장을 헤아려 보았다. 조선천주교회는 100년에 걸친 조선조정의 혹독한 박해로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신자들과 12명의 프랑스 출신 선교사들이 목숨을 바쳐야 했다. 1899년에 이르러서야 교회는 조선 정부와 교민조약을 합의하고 신앙의 자유를 누리게 되었다. 당시 교회를 이끄는 성직자들의 입장이라면 순교자들의 피가 채 마르지 않은 시점에서 조선의 새로운 지배자로 등장한 일본제국과 또다시 맞선다면 교회는 감당하기 어려운 새로운 박해시대를 초래하리라는 우려에 시달렸으리라 짐작된다. 1866년 병인박해 시기에 헨리코라는 젊은 프랑스 선교사 신부가 한낮에 밖을 돌아다녔다. 이를 들은 장시메온(베르뇌) 주교는 이 젊은 신부를 불러 크게 꾸짖었다. “당신 혼자 체포되는 것도 문제지만, 당신 때문에 많은 신자들이 박해를 받고 죽임을 당할 수도 있는데, 어떻게 그렇게 가볍게 행동하느냐?”라고. 이 두 분 다 병인박해 기간에 체포되어 순교자들의 대열에 합류하였다.
 
1900년대 초기 아직 조선천주교회 지도층 성직자들은 프랑스 출신 선교사가 대다수였고, 프랑스인으로서 선교사들의 일본에 대한 국가관은 조선인들과는 달랐다.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에 일본이 영국, 프랑스 쪽에 가담하니 프랑스 선교사들에게 일본은 우방으로 비추어졌고, 천주교 신자들과 성직자들을 오랜 세월 잔혹하게 박해하던 조선왕조의 몰락은 내심 꿈꾸고 기다리던 새로운 시대의 도래로 다가오지 않았을까? 그러나 조선의 백성들에게 하느님의 사랑과 구원을 전하기 위해 온갖 고초를 무릅쓰고 땅끝까지 달려온 선교사들이, 나라와 땅을 강탈당하고 조상 대대로 내려오는 문화와 언어와 이름마저 빼앗겨 목숨 걸고 저항하는 백성들의 통한과 피눈물에 연민과 연대로 다가가지 못하였음은 복음의 사도로서 치명적인 결격이다. 또 일본제국이 조선의 백성에게 자행한 사회적 불의와 억압에 무관심과 침묵으로 일관한 데 대해서는 100년이 지난 지금에라도 천주교 지도자의 한 사람으로 몇 번이고 사죄하고 용서를 청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런 가톨릭교회의 부끄러움을 안고 살던 내가 제주에 부임한 뒤 놀라운 사실을 접하게 되었다. 그것은 프랑스 선교사 구마실(라크루) 신부가 제주에 설립한 신성여학교의 1회 졸업생 강평국, 고수선, 최정숙세 가톨릭 여성들의 놀라운 행적이다. 신성여학교를 졸업한 이들은 모두 3·1운동이 일어난 당시 서울 경성여고보(경기여고)에 유학해 졸업을 눈앞에 두고 만세 운동의 대열에 참가했다. 이들은 3·1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33인 중 청년층 연락책 박희도 선생과 접촉하고, 소녀결사대에 가입하였다. 학교 당국은 학생들의 외출을 막았으나 이들은 문을 부수고 학교를 빠져나가 시위대열에 합류했다. 파고다 공원에서 시작된 시위에서 강평국은 안국동 쪽으로, 최정숙은 진고개 쪽으로 가다가 체포되었다. 최정숙은 회고록에서 죽을 것을 각오했기에 속옷에 주소, 성명, 학교, 고향, 부모 이름까지 써 붙이고 파고다 공원에 갔다고 썼다. 최정숙은 닷새 동안 심한 고문과 조사를 받고 서대문 형무소에서 8개월 가까운 수감 생활을 했다. 강평국은 352차 시위 때 검거되었다가 324일 풀려났다. 강평국과 최정숙은 그 후 고향에 내려와 여학생들을 위한 야학을 설립하고 여성 계몽운동에 앞장섰다. 고수선도 졸업 후 독립운동자금 모금과 전달에 관여하다가 경찰에 체포되었고, 손가락이 기형이 되도록 심한 고문을 받았다. 강평국은 그 후 동경여자의과대학으로 유학을 가 의학도의 길을 걸었으나 도중에 건강 악화로 귀국하였고, 불온단체 관련 혐의로 경찰의 조사와 고문에 시달리다 33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세 분 다 독립유공자로 서훈되었다. 천주교를 대표하는 지도자들은 3·1운동을 외면하고 겨레의 고통에 눈길을 주지 않았으나, 이 젊은 여성 세 사람의 용감하고 거룩한 생애는 우리에게 큰 위안과 희망을 준다.
 
강우일 베드로 주교
 

한국에서 가장 오래된 도서관 건축물은 무엇일까? - 도서관 건축물의 작은 역사 3 : 학교도서관/ 백창민

한국에서 가장 오래된 도서관 건축물은 무엇일까?
- 도서관 건축물의 작은 역사 3 : 학교도서관
백창민 2020720
 
앞서 공공도서관과 대학도서관에서 오래된 건축물을 다뤘습니다. 내친 김에 한 걸음 더 나아가 봅니다. ‘#학교도서관으로 쓰인 건물중 한국에서 가장 오래된 건축물은 무엇일까요?
 
경기고등학교도서관
 
근대적 의미의 학교도서관이 자리했던 건축물로, 현재 가장 오래된 곳은 옛 경기고등학교 도서관건물입니다. 이 건물은 현재 #정독도서관 입구에 있는 건물로 ‘#서울교육박물관으로 쓰이고 있습니다. 1927년 지은 건물로 추정되며, 정독도서관 건물군 중 가장 오래된 건물입니다.
 
정독도서관은 관립학교 터로 중등교육의 발상지입니다. 정독도서관 건물은 학교 건물 중 큰크리트로 지은 최초의 건물로 알려져 있습니다. ‘학교건축물사에서 의미있는 정독도서관은 학교도서관건축물 역사에서도 의미있는 공간입니다.
 
서울교육박물관 자리는 갑신정변의 주역 #김옥균 집터가 있던 곳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고균 김옥균은 과거에 급제한 후 왕실도서관인 규장각에서 관직을 시작했습니다. 갑신정변 실패 후 일본으로 망명한 김옥균은 상하이에서 홍종우에게 암살 당했습니다. ‘대역부도죄인으로 죽었지만 나중에 규장각 대제학에 추증되었습니다. 도서관에서 사회생활을 시작해서 ‘#도서관인으로 생을 마감했다고 해야 할까요.
 
#경기고등학교 학교도서관은 1958103일 개교기념일을 맞아 문을 열었습니다. 195742일 경기고등학교에 부임한 #김원규 교장은 #한국도서관협회 간사로 일하던 #김경일 선생을 사서교사로 영입해서 서울에서 가장 주목받는 학교도서관을 탄생시켰습니다.
 
지금도 남아있는 서울교육박물관 건물은 교실 7개 규모였습니다. 교실 1-2개 규모의 도서실도 있을까 말까 하던 그 시절, 경기고등학교 도서관은 규모나 시설면에서 단연 눈에 띄는 존재였습니다.
 
당시 경기고 도서관 개관식에는 문교부장관, 서울시교육감을 포함한 고관대작뿐 아니라 피바디 교육사절단의 도서관 전문가 #스와이거Swiger 여사도 참석했습니다. 동남아 교육 관계자가 한국을 방문할 때면 경기고 도서관은 꼭 들려야 할 견학 대상이었다고 합니다. 당시에는 일본을 제외하고는 동아시아에서 가장 좋은 학교도서관이라는 평도 들었습니다.
 
학교도서관으로 쓰이던 이 건물은 1970년대부터는 학생들이 합숙하며 리더십 교육을 받는 생활관, ‘화동랑의 집으로 쓰였습니다. 역사가 오랜 이 건물은 누가 설계했는지 알려지지 않고 있습니다.
 
서울교육박물관 건물 아래 계단에는 ‘#홍현紅峴이라는 표석이 서 있습니다. 이곳의 흙이 붉어 홍현이라고 불렸습니다. 정독도서관 자리는 #성삼문 집터였습니다. 홍현이라는 이름에서 단종의 복위를 꿈꿨던 성삼문의 붉은 단심丹心이 떠오르기도 합니다.
 
정독도서관에 있는 건축물을 연대순으로 나열하면, 학교도서관으로 쓰인 서울교육박물관 건물이 가장 오래되었고, 도서관 건물 3개 동 중 앞에 있는 2개 동과 식당 건물(경기고 시절에는 강당으로 쓰였습니다)이 그 다음입니다. 4개 건물은 일제강점기에 지었습니다. 역사가 오랜 이 4개 건물만 등록문화재로 지정되었습니다.
 
세 번째 동은 한국전쟁 이후인 1955년 지었습니다. 가장 늦게 지은 건물은 현재 직원식당으로 쓰이는 음악당건물입니다. 이 학교 출신 건축가 이천승이 지은 걸로 알려져 있습니다.
 
경기고등학교는 일제강점기에는 #경성제일고등보통학교(경성제일고보)라 불렸습니다. 굵은 흰테를 하나 두른 백선모자는 경성제일고보의 상징이었습니다. 두번째 관립학교로 세워진 평양고보는 백선이 2, 세번째 학교인 대구고보(지금의 경북고등학교)는 백선이 3개였습니다.
 
경성제일고보 시절부터 경기고는 진학 명문으로 꼽혔습니다. 첫번째 건물인 1동 교장실 옆에 도서실을 두고 학생들이 밤늦게까지 입시 준비를 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경성제일고보 시절 ‘#도서실이 있던 곳은 1동 오른편에 위치한 청소년관자리가 아닐까 추측합니다.
 
그나저나 경성의 제일고보가 어쩌다가 ‘#경기고등학교가 되었을까요? ‘경기공립중학교로 이름이 바뀌는 1938, 학교가 있던 경성은 조선의 수도가 아닌 경기도의 도청 소재지였습니다. ‘경기라는 학교 이름을 통해 우리는 식민지 시절 경성의 위상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숙명여자중고등학교도서관
 
그러면 지금도 학교도서관으로 쓰이는 건물 중 가장 오래된 곳은 어디일까요? 강남구 도곡동에 있는 ‘#숙명여자중고등학교 숙명도서관입니다. 숙명여자고등학교는 교무부장 아빠가 쌍둥이 자매에게 내신시험 문제를 유출한 사건으로 세인의 입에 오르내린 바로 그곳입니다.
 
숙명도서관은 건물 전체를 도서관으로 쓰고 있지는 않습니다만, 건물 자체의 역사는 오래된 건축물입니다. 숙명여자고등학교 도서관은 1928도서실로 출발했습니다. 1930년부터 본관 2층 귀빈실을 도서실로 사용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숙명여자고등학교는 1981225일 강남구 도곡동 91번지로 이전한 후 본관으로 쓰던 지금의 건물을 복원해서 1-2층 공간을 도서관으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강남으로 이전하기 전 숙명여자고등학교는 종로구 수송동 80번지 코리안리 빌딩 자리(조계사 근처)에 있었습니다. 1906522‘#명신여학교로 출발해서 1909숙명고등여학교로 이름을 바꿨습니다.
 
개교한 지 114년이 넘은 유서 깊은 학교입니다. 월북 무용가 최승희와 소설가 박완서, 최정희, 한말숙, 권지예, 이화여대 총장으로 국무총리 후보자가 되었다가 낙마한 장상이 숙명 출신입니다.
 
#숙명도서관 건물의 건립연대는 1920년대로 추정되며 100년 가까이 된 건물입니다. 서울시는 이전 복원한 이 건물의 의미를 높이 평가해서 서울미래유산으로 선정했습니다. 본관으로 쓰던 이 건물이 도서관과 사료관으로 사용한 역사는 40년이 되지 않지만, 건물 자체의 역사는 경기고등학교 학교도서관으로 쓰인 서울교육박물관건물 만큼 오래되었습니다.
 
2004년과 20092차례 리모델링을 거치며 내부 공간을 현대적으로 단장했습니다. 영상실과 온돌방, 마룻바닥을 갖춘 지금의 모습은 리모델링 공사를 통해 탄생했습니다. 3층 규모 건물의 1-2층은 도서관으로 사용하며, 3층은 사료관으로 사용합니다. 중고등학생이 함께 사용하며 만화책 뿐 아니라 아동서도 비치하고 있습니다.
 
제물포고등학교도서관
 
가장 오랫동안 도서관 건물로 쓰인 건물은 따로 있습니다. 독립건물로 존재하는 건축물 중 학교도서관으로 가장 오래 쓰인 건물은 ‘#제물포고등학교 도서관이 아닐까 싶습니다.
 
19591127일 문을 연 제물포고등학교 도서관은 3층 규모의 독립건물에,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개가제도서관이었습니다. 개가제로 운영했을 뿐 아니라 열람실, 참고열람실, 직원 연구실, 정리실, 소지품 보관실, 음악감상실, 영화감상실, 정기간행물실, 제본실, 시청각 교육실을 갖추고 있습니다.
 
당시 왠만한 공공도서관보다 시설이 더 뛰어난 학교도서관이었습니다. 21세기로 접어든 지금 기준으로도 1950년대 제물포고등학교가 건립한 학교도서관 시설은 대단해 보입니다.
 
철근콘크리트로 지은 이 도서관을 짓기 위해 #길영희 교장은 기성회를 조직하고 미국군사원조처AFAK의 원조자금을 얻었습니다. 학생들과 함께 길영희 교장이 직접 등짐으로 벽돌을 나르며 이 도서관을 지었다는 얘기가 전합니다.
 
전국 최초의 개가제 학교도서관으로 아는 분도 있지만, 개가제의 역사는 경남고등학교 덕형도서관보다 뒤집니다. 제물포고등학교 홈페이지 학교 연혁에 올라와 있는 “19561120일 도서관 신축 개관정보 때문이 아닌가 싶습니다. 제물포고등학교 도서관은 1956년이 아니라 1959년에 신축해서 문을 열었습니다.
 
제물포고등학교 도서관에서 사서교사로 일했던 #최근만 선생은 그에 앞서 경기고등학교 도서관에서 1년 정도 일했습니다. 그후 모교인 제물포고등학교 도서관 건립과 함께 사서교사로 일했습니다. 경기고 도서관 개관 시점이 1957년이고 최근만 선생이 1년 정도 일한 후 제물포고등학교 도서관으로 옮겨 일했으니, 개가제로 탄생한 제물포고등학교 도서관은 1959년부터 운영된 것이 맞습니다.
 
2000년대와 2010년대 초반 인천 구도심 공동화되면서 제물포고등학교 수준이 떨어지고 있다는 문제 제기가 있었습니다. 이와 함께 인천 송도 같은 신시가지로 학교를 이전하자는 논의가 일었습니다. 제물포고등학교의 맞수로 인천의 명문으로 꼽힌 ‘#인고’(#인천고등학교)가 율목동에서 주안동으로 이전한 상황이라 ‘#제고도 이전하자는 움직임이 일어났습니다.
 
그때 제물포고등학교가 이전했다면, 올해로 건립 61주년 역사를 맞은 제물포고 도서관 건물은 사라졌을 겁니다. 제물포고등학교가 웃터골에 그대로 머물면서 가장 오랫동안 학교도서관으로 쓰인 제고 도서관도 우리에게 그대로 남았습니다.
 
경남고등학교 덕형도서관
 
독립건물은 아니지만 경남고등학교에서 문을 연 ‘#덕형도서관에 대해 언급을 해야겠네요. 덕형도서관은 경남고 #덕형관 2층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덕형관은 경고’(경남고)를 상징하는 건물로 유명합니다. ‘덕형德馨이란 '너그러운 덕성에서 풍기는 그윽한 향기'를 의미합니다.
 
덕형관의 모양은 원통형입니다. 직사각형 형태의 학교 건물이 흔한 오늘의 관점으로 봐도 파격적인 건물입니다. 이 건물의 설계자는 천재 건축가 이천승입니다. 5층 규모 건물이며 연면적은 2,351.6입니다.
 
건물 중앙에 있는 나선형 계단으로 오르내릴 수 있습니다. 1층부터 4층까지 공간은 여섯 등분으로 똑같이 나뉘어 있고, 각 층은 5개 교실과 1개 화장실로 이뤄져 있습니다. 네모난 학교 건물 일색인 한국 학교건축물에서 보기 드문 원통형 건물입니다. 문화재청은 덕형관을 등록문화재로 지정했습니다.
 
경남고등학교는 1956년 학교도서관을 개관하고 1957년에는 개가제로 도서관을 운영했습니다. 덕형관에 자리한 경남고 학교도서관의 역사가 오래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경남고는 서울의 경기고, 인천의 제물포고보다 학교도서관 건립과 운영이 더 빨랐습니다.
 
뿐만 아니라 경남고는 개가제를 가장 빨리 도입한 학교도서관입니다. 경남고에서 혁신적인 학교도서관이 탄생한 배경에는 당시 교장이었던 #추월영 교장과 지리교사로 일하다가 사서교사로 근무한 #김두홍 선생의 역할이 컸습니다.
 
진주여자고등학교도서관
 
19523월 개관해서 #김종성 교수가 한국 최초의 근대적 학교도서관이라고 언급한 #진주여자고등학교 도서관도 있습니다. 진주여고 도서관과 5천여 권의 장서는 1957123일 발생한 화재 때문에 불타버리고 말았습니다.
 
마산여자고등학교는 1954년부터 학교도서관을 운영해서 진주여고와 함께 경남의 선구적인 학교로 꼽혔습니다만, 독립건물로 도서관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당시 마산여고에는 #박경원 교장과 훗날 이화여대 도서관학과 교수가 되는 #김세익 선생이 있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한 가지 생각할 대목이 있습니다. 우리 학교도서관사 연구가 한국전쟁 이후 시점부터 이뤄지고 있어서, 대한제국과 일제강점기 학교도서관 역사가 아직 묻혀있다는 점입니다.
 
광주 수피아여학교 커티스메모리얼홀
 
일례로 광주 수피아Speer여학교에 있는 ‘#커티스메모리얼홀’The Bell memorial chapel 지하에는 도서실이 있습니다. 조적조와 목조 트러스로 지은 이 건물은 지하 1, 지상 1층 짜리 건물입니다.
 
1925년 완공된 이 건물은 100년 가까운 역사를 자랑하는 근대 문화유산입니다. 이 건물 지하 공간이 언제부터 도서실로 쓰였는지 알 수 없지만 커티스메모리얼홀의 역사는 경기고등학교 도서관으로 쓰인 서울교육박물관 건물의 역사와 어슷비슷하거나 더 빠릅니다.
 
아펜젤러Appenzeller가 세운 배재학당의 경우도 도서실이 있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배재학당 '#동관'은 현재 정동에 남아 있습니다. 어쩌면 배재학당 동관은 학교도서관의 흔적을 품은 가장 오래된 건축물일 수도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개교 100년을 넘나드는 수많은 학교가 있습니다. 이들 학교에 ‘#근대도서관은 언제부터 생겨서 어떤 형태로 발전해 왔을까요? 한국 근대교육의 역사는 대한제국 시대로 거슬러 올라가는데, 근대 학교도서관 역사는 반세기 후인 한국전쟁 이후에야 시작된 걸까요?
 
한국전쟁 이후 학교도서관 운동사를 연구한 김종성 교수의 선구적 업적이 있긴 합니다만, 김종성 교수의 연구는 한국 ‘#현대학교도서관사일 뿐 한국 ‘#근대학교도서관사까지 포괄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학교도서관 운동의 선구자인 김경일 선생도 일제강점기와 해방 시기에 학교 현장에 도서관이 존재했음을 지적한 바 있습니다.
 
김종성 교수가 한국 최초의 근대적 학교도서관으로 언급한 진주여고 도서관도 최초의 근대 학교도서관이 아닌 현대에 들어 처음 문을 연 학교도서관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우리 학교도서관 역사 연구는 대한제국과 일제강점기를 미답의 영역으로 남겨 두고 있습니다.
 

2020년 7월 16일 목요일

금민과의 기본소득 대담/ 류보선 교수, 정리 이건민 상임연구원

지난 11() 11시 정치경제연구소 대안에서 모두의 몫을 모두에게: 지금 바로 기본소득(동아시아, 2020) 저자 금민과의 기본소득 대담 행사가 성황리에 개최되었다. 대담자로는 저자인 금민 소장(정치경제연구소 대안, 기본소득한국네트워크 이사)과 류보선 교수(군산대, 문학평론가, 기본소득한국네트워크 이사)가 참여했다. 동갑내기 대담자들의 대화의 합과 기지가 빛을 발한 시간이었다. 적절한 위트와 유머, 긴장감, 서로에 대한 존중 등이 대담의 흐름 속에서 적재적소에 배치되어 재미와 의미를 모두 잡았다. 온라인과 오프라인을 합쳐 약 100여명이 함께하여 귀중한 자리를 더욱 빛냈다.
 
저자는 모두의 몫을 모두에게가 출간된 4월 초 정도를 기점으로 기본소득에 대한 논의와 논쟁이 활발해지긴 했지만 이는 시대가 변해서이지 이 책으로 인한 것은 아니라고 했다. 이 책이 여러 미디어에 소개되고 스포트라이트도 많이 받은 것은 사실이지만, 출간 후의 삶이 출간 전과 크게 달라지지는 않았으며 책의 영향력은 아직 미미하다고 말했다. 주변 반응에 대해서도 글의 구성에 관한 지적들이 대부분이었다고 밝혔다. 하지만 저자 자신의 이러한 평가는 겸손의 발로인 것으로 보인다. 류보선 교수는 기본소득 논의의 지평을 한 단계 끌어올린 책”, “앞으로 기본소득 세상이 되면 기본소득의 논의의 새로운 변곡점을 마련했다고 평가받을 책”, “최근에 나온 기본소득 관련 책 중에 모두의 몫을 모두에게가 가장 압권 아니냐”, “기본소득 논의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으며 한 단계 비약시켰다등 이 책에 관한 주변의 평가를 소개했다.
 
모두의 몫을 모두에게사회적 공화주의, 좌파당의 길, 진짜 민주주의(오준호와의 대담집)에 이은 저자의 네 번째 책이라 할 수 있다. 그가 기본소득에 관심을 가진 지가 오래 된 것을 감안한다면 기본소득을 주제로 한 본격서가 나오는 데까지는 꽤 많은 시간이 흐른 셈이다. 이에 대해서 그는 하루 중에서 새로운 것을 흡수하고 생각하는 데 꽤 많은 시간을 보내며 막상 글 쓰는 시간은 그리 많지 않은 생활습관 때문이라고 밝혔다. 좌파당의 길진짜 민주주의는 팜플렛 성격이 강하고 사회적 공화주의는 각론에 대한 서술이 대부분이며 총론은 10여 페이지에 불과하기 때문에, 사실상 이론서로서는 이번이 첫 번째 책이라고 스스로 평가했다. 2013년경부터 기본소득에 대한 글을 많이 쓰기는 했지만, 일관되고 통일된 체계를 갖춘 서술로 종합하는 것은 만만한 작업이 아니었음을 밝혔다. 또한 이 책이 나올 수 있게 한 수많은 사람들의 기여와 지지에 대해서 감사의 마음을 전했다.
 
류보선 교수는 이전 저작들에서의 힘 있고 선동적인 문체가 모두의 몫을 모두에게에서는 매우 분석적인 문체로 바뀌었음을 지적했다. 그리고 예전의 문체가 독자로 하여금 삶의 변화를 촉구하는 힘을 지녔다는 점에서 이러한 변화에 아쉬운 점도 있다고 말했다. 저자는 문체의 변화를 인정했다. 그리고 이전의 예언적 문장 쓰기는 대부분 마감에 쫓겨 퇴고를 보지 못하고 글을 넘겼기 때문에 발생한 것으로, 가능한 한 압축적으로, 분석적으로 글 쓰는 것을 선호한다고 밝혔다. 기본소득에 관한 책쓰기는 2013년경부터 진지하게 생각했으며, 다양한 주제들에 관해 머릿속에서 계속 생각했기 때문에 이 책이 분석적인 글이 될 수 있었다고 자평했다.
 
책에서 가장 핵심적인 주장, 힘들여 쓴 주제가 무엇이었냐는 류보선 교수의 질문에 대해 저자는 1부와 2부 중에서는 1부가, 1부 중에서는 1~3장이 핵심적이라고 답했다. 1부에서는 공유부 배당, 공유부 분배정의 등에 관한 철학적 분석과 플랫폼 자본주의, 빅데이터 문제 등에 대한 정치경제학적 분석을 수행했다고 하였다. 이 책의 핵심 개념은 공유부이며, 핵심 주장은 공유부는 모두의 것이므로 무조건적, 보편적, 개별적 형태로 모두의 몫으로 분배되어야 한다라고 밝혔다.
 
저자는 이 책의 핵심 개념과 주장은 기존의 사회복지와 기본소득을 뚜렷이 구분시켜 준다고 말한다. 공동체의 유지와 재분배 등을 위해 국가가 재량적으로 접근하는 기존의 사회복지와는 달리, 기본소득은 국가의 재량권이 없으며 기본소득의 재원으로 확보된 공유부는 모두의 몫으로서 무조건적, 보편적, 개별적으로 분배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는 특정 개인이나 가구 밖에서 마련되는 외부재원뿐만 아니라 개인소득세와 같은 내부재원역시도 기본소득의 정당한 재원임을 분명히 한다. 모든 소득은 전승된 공유부인 지식에 의존한다는 점에서 모든 소득에는 공유부가 끼어 들어가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류보선 교수는 공유부, 공통부, 공동부 중에서 어떤 용어가 더 적합하다고 생각하는지를 저자에게 물었다. 질문하는 과정에서 류 교수는 개인적으로는 새롭게 만들어진다는 의미를 주는 공통부가 더 적합하다는 느낌이 든다는 견해를 밝히기도 했다. 저자는 모두의 몫을 모두에게에서는 공통부개념을 사용했다고 하였다. 처음에는 공유부라고 썼으나 이 용어 자체가 특정한 소유 방식을 떠오르게 하므로 폐기했다고 밝혔다. 특정한 소유형태에 중립적이라는 것을 더 잘 드러낸다는 점에서 공유부보다는 공통부가 더 낫다고 말했다. ‘공동부가 대안이 될 수는 있으나, 이 용어는 함께 갖고 있다는 느낌은 주지만 함께 생성(창출)하고 있다는 느낌은 잘 안 준다고 판단했다고 하였다. 이러한 이유로 저자는 공통부라는 용어를 채택한 것이다. 류 교수는 현재 기본소득한국네트워크 정관에는 공유부라는 용어를 쓰고 있으므로, 앞으로 공유부’, ‘공통부’, ‘공동부중에서 어떤 용어로 통일하여 사용할 것인지, 용어 사용에 대한 합의가 요구되는 것인지 등을 둘러싼 논의가 더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일반 사람들에게 공통부는 아무래도 낯선 개념이다. 오히려 사유화가 익숙하다. 현실 사회주의 국가에서는 국유화 방식을 취했다. 이러한 맥락에서 류보선 교수는 이전 체계와 비교해서 왜 공통부여야 하는지를 질문했다. 저자는 1장과 2장에서 이 문제를 분석했다고 하였다. 현행 법률을 보면 사유재산권은 배타적·절대적 권리가 아니며 공공복리에 의해 제한된다고 밝히고 있다. 저자는 사유재산권 이론의 전제에는 원래는 인류 모두의 공동의 재산(자산)이었다라고 하는 원천적 공유개념이 자리함을 강조했다. 원천적 공유를 전제해야 동의나 노동투입에 의해서 사유재산을 정당화할 수 있다는 것이다. 원래 모두의 것이라는 관념은 사적소유권을 성립시킴과 동시에 사적소유권의 제한조건을 부착시킨다. 그는 18세기 말에 펼쳐진 토마스 페인의 지적 혁명을 치밀하게 분석하고 재해석한다. 똑같이 원천적 공유를 전제하더라도 아퀴나스와 비베스에게서는 부자나 정치공동체의 부조의 의무만이 도출되었을 뿐이며, 토마스 페인에 이르러서야 이중적 소유권 이론’(사적 소유가 성립될 경우 원천적 공유가 사적 소유로 변화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적 소유인공적 소유로 이중화된다는 것. ‘인공적 소유상태에서의 노동투입으로 인해 창출되고 증대된 가치는 오롯이 인공적 소유의 몫으로 귀속되는 것은 아니며 자연적 소유의 가치 역시 양적으로 표현될 수 있게 한다는 것. 그리고 여기서 양화된 자연적 소유의 가치는 사회적 협동의 몫으로 해석될 수 있다는 것)을 통한 공통부배당론이 등장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는 공공소유(public ownership)를 의미하는 국유화는 국가가 처분, 결정의 권한을 가지는 반면, 공동소유(common ownership)는 공유자(commoner)가 처분, 결정의 권한을 가지며 국가의 재량이 개입할 여지는 없다고 역설했다.
 
류보선 교수는 저자의 핵심적 주장을 이해하면서도, 일반 사람들은 대개 기원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으며 기원을 고려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기원을 생각해봐라고 말하면서 설득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기획이 아니냐고 물었다. 저자는 이러한 문제제기에 동의하면서, 일반 대중에게 기본소득을 설득하는 것은 철학적 논변만으로는 부족하며 사회정책적 논변 역시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그리고 현재의 극심한 부동산 문제를 해결하는 데 매우 효과적인 방안인 토지보유세-토지배당 정책을 하나의 예로 제시했다. 이러한 정책이 토지보유세() 자체를 탄력적으로 운용할 수 있게 함으로써 지대추구 행위를 줄이고 자산가격을 낮추며 토지를 더욱 생산적으로 활용할 수 있도록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철학적 논변과 사회정책적 논변은 함께 결합되어야 함을 역설했다.
 
정치경제학적 분석이 돋보이는 3장 역시 주목할 만하다. 2008년 이후, 전 세계는 디지털 경제로 넘어갔으며, 현재는 디지털 전환 시대, 플랫폼 자본주의 시대라고 규정할 수 있다. 여기서 데이터의 중심성(centrality of data)’이 디지털 경제의 핵심을 잘 드러내준다. 저자는 3장에서 빅데이터가 새로운 인공적 공통부다라고 주장했다. 알고리즘과 함께 가동되는 빅데이터는 끊임없이 갱신되고 형성되면서 특정 서버에 기록되는 디지털 기록물이라 할 수 있다. 그는 우리는 빅데이터의 이러한 사회적인 존재 형태에 충분히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개별 데이터의 가치는 보잘 것 없으며 빅데이터는 개별 데이터의 총합이 아니라는 점을 환기시켰다. 공동소유형 모델, 공유지분권 모델, 빅데이터세 등을 정책 대안으로 고려할 필요가 있음을 역설했다.
 
이 책에서 너무 많이 한 말안 하고 있는 말이 무엇인지 궁금하다는 류보선 교수의 질문에 대해 저자는 공통부개념이 어쩔 수 없이 많이 할 수밖에 없었던 말이며 화폐금융제도 개혁을 통한 기본소득 지급방안이 그 중요성에도 불구하고 이 책에서 아예 다루지 못한 주제라고 답했다. 아울러 소득재분배 효과, 노동시장 효과 등 기본소득의 다양한 효과에 대해서는 다른 연구물들을 요약, 정리, 소개하는 정도에 그쳤는데, 이러한 주제와 관련해서는 이미 훌륭한 연구자들이 많이 있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이는 생산적 생략이라고 볼 수 있다고 평가했다.
 
저자는 최근의 기본소득 논쟁이 2016년 논쟁의 데자뷰인 것처럼 느껴지며 일종의 레토릭 전쟁인 것처럼 보인다고 말했다. 그는 희화화된 논쟁에서 벗어나 생산적인 논의로 나아나기를 희망했다. 그리고 시간이 반비판을 해주는 측면도 있음을 지적하면서, 기본소득을 더 쉽게 설명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주장했다. 레토릭의 함정에 빠지는 사람들도 있기 때문에 이에 대한 지속적인 대응이 필요하다는 류보선 교수의 지적에 대해서, 저자는 레토릭에 대한 비판이 필요하다는 것에 수긍하면서 향후 논쟁에 대해서 지속적으로 관심을 갖고 지켜보겠다고 대답했다.
 
끝으로 저자는 기본소득 운동 이야기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밝혔다. 기본소득은 순수혜자 측면에서는 칠팔십퍼센트 이상의 사람들이 이해관계를 갖는 주체라고 할 수 있으며, 지급대상 측면에서는 사회구성원 모두가 주체라고 할 수 있다. 기본소득은 특정 주체에 대한 귀속성이 떨어진다고 볼 수 있는데, 주체의 보편성 자체가 오히려 문제시되는 것이다. 그는 이 문제에 대한 정해진 답은 없다고 생각하며, 사회마다 나름의 경로를 갈 것이라고 보았다. 정치가 중요하지만, 정치의 토대는 참여와 이해 등 사회의 두께라고 덧붙였다. 기본소득에 대해서도 단순히 좋아요에 그치는 것은 태부족이며 기본소득의 실현을 위한 진지한 이해와 참여가 필수적으로 요구된다는 점을 강조했다. 기본소득에 대해 확신하는 사람이 최소 25%는 되어야 사회가 바뀔 것이라고 전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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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의 몫을 모두에게: 지금 바로 기본소득(과 대담에서 류보선 교수가 제안한 바와 같이, 향후 발간될지도 모르는 모두의 몫을 모두에게의 영문판이나 화폐금융제도 개혁을 통한 기본소득 지급방안을 주제로 한 모두의 몫을 모두에게2 )기본소득 논의의 지평을 한 단계 끌어올리고 비약시키며 기본소득 운동의 새로운 변곡점을 마련함으로써 바람직하고 해방적인 형태의 기본소득 세상을 앞당기는 데 기여하기를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