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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년 5월 22일 수요일

방콕의 5·18… 광주의 5·18

2002년 5월 18일.
광주의 5·18묘지에는 `5·18민주화운동 22주년 기념식`이 거행되었다. 유명한 정치인들이 5·18 유족들과 함께 이 기념식에 참석했다는 보도가 전해진다.

17일엔 1980년 당시의 시위와 무력진압을 재연하는 횃불시위와 차량행진, 주먹밥 나누어 먹기와 함께 노래극 공연과 통일해원 상생굿도 열렸으며 5·18을 되새기는 각종 문화행사가 이어졌다.

이런 기념식과 행사를 보면, 5·18민주화운동은 이제 한국민주화 운동사의 한 장으로 조용히 그러면서도 확고하게 자리잡아 나가고 있는 듯이 보인다.

1995년 5·18특별법이 제정되었고, 1997년에는 5·18이 국가기념일로 지정되었다. 무엇보다도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의 `주인공`이었던 김대중이 1998년 대선에서 승리하여 대통령이 되었고 벌써 임기 말년을 맏고 있다.

광주의 망월동 묘역은 깔끔하게 단장되어 추모객들을 맞이하고 있다.
5월의 그날을 기억하려던 대학생과 청년들이 참으로 힘들게 경찰의 저지선을 뚫고 찾아가야만 했던 망월동 묘역. 그곳에 여야의 유명 정치인들이 모여들어 추모식을 거행하는 모습을 보면 분명 달라졌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과연 5·18 기념식과 문화행사에 대한 소식만으로 충분한 것일까.

"5·18을 왜곡한 그 언론인들이 변함없이 언론을 지배"

한겨레 신문 손석춘 기자가 몇 해 전에 쓴 칼럼에 이런 지적이 있었다.

"무엇보다 오월이 제기한 두 핵심적 과제는 미완으로 남아 있다. 먼저 미국의 존재다. 미국이 우리에게 무엇인가를 오월은 온몸으로 드러냈다. 분단체제와 독재정권 쪽에 미국이 서 있다는 역사적 진실을 피투성이로 증언했다. ……또 하나는 실질적 민주화다. 오월의 무장항쟁이 없었다면 6월 대항쟁은 불가능했다.……우리는 그해 오월의 민중들이 열망하던 민주주의를, 그날의 정의를, 오늘 구현하고 있는가. 아니다. 단적으로 5·18을 왜곡한 그 언론, 그 언론인들이 변함없이 언론을 지배하고 있지 않은가."(<5월의 고독>에서)

이런 지적을 되새겨 보면, 아직도 5·18은 광주의 오월에 머물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고 생각하게 된다. 부산의 광주, 대전의 오월, 서울의 꽃잎, 대한민국의 민주영령이어야 할 터인데 말이다.

1919년의 3·1운동이 중국의 5·4운동, 인도의 제1차 사티아그라하운동, 이집트의 반영자주운동, 터키의 민족운동 등 아시아와 중동의 민족운동에 큰 영향을 끼쳤듯이, 5·18광주민주화운동(광주항쟁)은 태국, 필리핀, 미얀마, 인도네시아, 동티모르, 중국(천안문사태) 등 아시아 여러 지역의 민주화에 직간접적으로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오늘 우리는 광주민주화운동 22돌이지만 태국에서는 방콕의 5·18 십주기였다. 방콕의 5·18, 과연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인가.
태국은 오랜 왕권 국가였다. 그러던 것이 1932년 인민당이 무혈 쿠데타를 일으킴으로써 입헌군주제로 바뀌었다. 1932년의 개혁은 인권이나 민주주의와 같은 서구적 개념을 전혀 경험하지 못했던 태국인들이 새로운 시대를 열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기존의 반동적인 세력 때문에 새로이 제기된 이념은 철저하지 못했으며, 따라서 `입헌군주제`라는 절충적인 제도로 개혁할 수밖에 없었다. 또한 인민당 내부의 분쟁이 끊이지 않았기 때문에 정권 교체가 계속되었다.

입헌군주국가임에도 전통적으로 군부독재가 실시되어 온 상황에서 1988년 차티차이 춘하반(Chartchai Choonhavon)이 총리에 취임하자, 위상저하를 두려워하는 군부와 정부 간에 갈등이 계속되었다.

아무리 선거에 의해 문민정부가 들어선다 해도 권위주의적 문화가 존재하는 한, 지식인 계급과 중간계급의 눈에는 정부의 여러 정책이 부패와 부정행위의 결과로 드러나기 때문에 정부는 계속해서 정통성 문제에 봉착하게 되었던 것이다.
타티차이 춘하반의 문민정부도 혹독한 비판에 직면했으며 총체적인 부패 때문에 비판을 받았다. 정부의 부패는 군부에게 쿠데타를 일으킬 빌미를 제공하게 되었다.

1990년 11월 각군 사령관들이 개각에 불만을 품고 전원 국방회의에 불참함으로써 정부와 군부 간의 긴장이 고조되었는데 1991년 2월 순톤 군(軍)최고사령관이 1932년 이래 17번째의 쿠데타를 일으키고 아난드(Anand)를 총리로 하는 과도정부를 수립하였다.
아난드의 문민정부가 행정을 이양받은 후 여러 분야에서 다소 신임을 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1991년 10월에는 신군부의 실세인 수친다(Suchinda Kraprayoon)가 군최고사령관에 취임하였고, 1992년 4월에는 총리에 올랐다. 그는 총선에서 당선되지도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총리에 올랐던 것이다.

우리가 오늘 찾아야 할 유골은 어떤 것인가…

마침내 1992년 5월 17일 수친다의 퇴진을 요구하는 대규모의 시위가 일어났다.

이 봉기에 각계각층의 수십만 국민들이 참여하였으나 군부는 시위대를 폭력적으로 진압했다. `피의 오월(Bloody May)` 사건이 일어난 것이었다.

1992년 5월 17일부터 5월 20일까지의 `피의 오월`사태는 부미폴(Bhumipol)왕의 중재와 수친다 장군의 총리직 사임 후 망명으로 진정되었다. 그리고, 9월에 있었던 총선에서 반군부세력인 민주당이 승리하여 추안 리크파이가 총리로 선출되었다.

딱 10년이 지난 태국 `피의 오월` 사태를 22돌을 맞은 우리 나라의 `5·18광주민주화운동`의 경과와 비교해보면 한가지 뚜렷하게 대조되는 것이 있다.

5·18 광주민주화운동은 `실패`했으나 방콕의 5·18은 `성공`했다는 점이다. 이 차이의 원인이 무엇인지, 우리는 똑바로 응시해야 한다.

당시 방콕에 특파되었던 한국일보의 최해운 기자는 1992년 5월 25일자 칼럼에서 이렇게 적고 있다.

"언론이 일어나고 있는 상황을 국민들에게 제대로 알려야 사태는 국민이 원하는 해결점을 찾을 수 있다. 소련사태에서는 군부가 언론을 통제하지 않아 정권탈취에 실패했고 광주사태 천안문사태 버마민중봉기는 언론이 입을 다물었기 때문에 민주화 요구는 군대에 비참하게 무릎을 꿇어야 했다. 태국사태는 언론의 힘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가를 다시 한번 인식케한 역사적 사건이었다. 그래서 우리의 언론을 다시 한번 돌아보게 한다."

외신은 방콕의 5·18 십주기를 맞아 유골을 찾고 있는 소식을 전하고 있다. 우리가 오늘 찾아야 할 유골은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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