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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9월 1일 월요일

오키나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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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섬’에서 ‘기지의 섬’으로 다시 읽는 오키나와의 진실
‘오키나와 현대사’ 등 3부작 출간

 

오키나와는 본디 ‘류큐’라는 독립왕국이었으나 임진왜란에 참전한 사쓰마 지방 무사 시마즈 요시히로가 1609년 침략해 정복했다. 하지만 류큐왕국이 일본 영토로 편입된 것은 메이지유신 이후인 1879년이었다.

 

‘평화의 섬’ 오키나와가 ‘기지의 섬’이 된 것은 일제가 동아시아를 침략하면서부터다. 태평양전쟁 말기 오키나와 전투에서 민간인 9만여명과 그보다 더 많은 일본군인들이 죽었다. 그때 1만여명의 조선인들도 희생당했다. 이후 미군기지들이 오키나와를 뒤덮게 되는데, 1960년 미-일 ‘안보개정’ 때 일본 본토의 미군기지는 4분의 1로 줄었으나 오키나와에선 오히려 2배로 늘었다.

1972년 오키나와가 일본에 반환된 뒤 일본 국토 면적의 0.6%에 지나지 않는 이곳에 주일 미군기지의 75%가 집중됐다. ‘평화국가’ 일본은 실은 ‘기지의 섬’ 오키나와의 희생 위에 구축돼 있고, 그런 오키나와의 현실은 평화국가 일본이란 이미지가 은폐하고 있다. 이 구조는 분단 한국과도 연계돼 있다. 번영하는 평화국가 일본이란 이미지 뒤에는 주한 미군기지가 들어찬 병영국가 한국이 있다. 이런 구조는 일본을 교두보로 한 미국의 동아시아 개입 전략의 근간을 이루고 있다.

도쿄대를 나와 오키나와 현대사를 전공하고 오키나와의 미군기지 반대운동에 앞장서 온 아라사키 모리테루(72) 오키나와대 명예교수의 <오키나와 현대사>(정영신·미야우치 아키오 옮김)는 그런 오키나와 현실을 파고든다. 지금 미국의 해외주둔미군재배치계획(GPR)에 따라 진행되고 있는 오키나와 미군기지 재편은 “동맹국을 미국의 세계전략에 한층 더 강하게 결부시키려는 의도”에서 시작된 것이며, 평택으로의 주한미군 재배치도 다르지 않다. 1972년 오키나와 반환 이후의 역사에 초점을 맞춘 이 책은 오키나와 현대사를 “미-일 동맹과 이에 대한 오키나와 민중의 투쟁사”로 파악하면서 평택 대추리의 투쟁 등 한국의 미군기지 반대투쟁에도 강한 연대감을 표시한다.

이 책을 낸 논형 출판사는 <기지의 섬, 오키나와- 현실과 운동>, <경계의 섬, 오키나와- 기억과 정체성> 2권도 동시에 출간했다. 정근식 서울대 교수(사회학)를 비롯한 22명의 국내 전문가들과 2명의 오키나와 교수들이 필자로 참여한 이들 두 권은 2004년부터 2년간 한국학술진흥재단의 지원 아래 서울대 사회발전연구소 동아시아연구센터에서 진행한 ‘오키나와 미군기지의 정치사회학’이라는 제목의 연구작업에서 발표된 29편의 논문을 검증하고 수정·보완해 묶은 것이다. 지금의 동아시아를 분석하고 연구하는 ‘방법으로서의 오키나와’에 주목한 이 공동연구 작업에는 사회학, 문화인류학, 국제정치학, 행정학, 역사학, 여성학 등 다양한 분야의 전공자들이 참여했다. 오키나와와 관련된 인접학문간 학제적 작업으로는 이제까지 없던 최대 규모다.

오키나와에 대한 연구가 일천한 우리 현실에서 미군기지 이후의 대안 모색이라는 실천적 의지를 담아 쓴 이들 3부작이 제공하는 깊이 있는 오키나와 얘기는 우리 현대사와 동아시아 역사 전체를 새롭게 바라볼 수 있는 폭넓은 안목을 제공한다.

한승동 선임기자 sdhan@hani.co.kr

 

 

"한국사회를 바라보는 거울, 오키나와"

'오키나와 미군기지의 정치사회학' 출간

한국에서 오키나와를 연구한다는 것, 더구나 미군기지를 연구한다는 것은 어떤의미일까?

서울대 사회학과 정근식 교수는 25일 연합뉴스와의 전화인터뷰에서 "오키나와는 중화체제, 일본제국체제, 전후 냉전체제를 경험하고 현재까지도 상당수의 미군이 주둔하는 등 아시아 주변부의 역사를 대표하기 때문에 한국은 물론 동아시아의 진보에 대한 대안 모색 차원에서 중요한 키워드가 될 수 있다"며 오키나와 연구의 의의를 밝혔다.

프로야구 전지훈련지, 쪽빛 바다로 둘러싸인 관광지, 일본 여가수 아무로 나미에의 고향으로 잘 알려진 오키나와를 정치.사회적인 관점에서 본격 조명한 책이 최근 출간됐다.

정 교수를 비롯해 여성학, 문화인류학, 국제정치학, 행정학 등을 전공한 다양한 국내외 연구진 23명의 연구성과를 담은 '오키나와 미군기지의 정치사회학'(논형출판사 펴냄)이 바로 그것.

정 교수에 따르면 그간 오키나와의 민속학, 역사학을 부분적으로 다룬 책들은 있었으나 정치.사회학적 측면에서 1천페이지가 넘는 방대한 연구가 이뤄진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저자들은 이를 위해 2005년 5월부터 2007년 5월까지 약 2년간에 걸쳐 격주간으로 세미나를 가졌다. 또 정 교수가 이끄는 '오키나와 미군기지의 정치사회학 프로젝트팀'은 세 차례에 걸쳐 현지 방문조사를 실시했고, 개별적으로 추가조사도 병행했다. 한마디로 오키나와에 대한 정치.사회학적 연구의 집대성인 셈이다.

정 교수 등은 동아시아 전체 맥락에서 한국 문제를 조망하기 위해 이 연구를 시작했다. 오키나와는 전후 냉전체제가 여전히 작동한다는 점에서, 조선족 동포가 많은 연변과 함께 한국사회를 들춰볼 수 있는 중요한 거점이라는 판단에서였다.

주한 미군문제를 직접적으로 다루기 어렵다는 현실적 제약도 연구진이 오키나와에 천착한 이유 중 하나였다. 여기에 현대 일본 사회를 바라볼 때 중심보다는 주변을 통해 '우회적'으로 일본 사회를 재조명하자는 취지도 한 몫했다.

이런 목적하에 이뤄진 다년 간의 노력은 마침내 2권의 책으로 마무리됐다. 1권(612쪽) 제목은 '기지의 섬, 오키나와'이고 2권(472쪽)은 '경계의 섬, 오키나와'다.

책에 따르면 오키나와는 근대 이전까지만해도 '류큐 왕국'이라는 독립된 국가였다. 조선과 중국, 대만을 잇는 대외무역으로 나름대로의 성세를 누리고 있었다.

하지만 오키나와는 일본제국에 의해 강제 병합됐고, 제2차 세계대전 때는 섬 전체 민간인의 4분의 1이상이 사망하는 참변을 겪었다.

전쟁이 끝난 후에도 상황은 개선되지 않았다. 많은 미군이 상주하면서 오키나와는 점차 '기지화'됐기 때문이다.

오키나와는 이처럼 전쟁의 참화와 미군에 의한 기지화라는 '이중고'를 겪어야 했던 것.

정 교수는 "오키나와는 중화체제, 일본제국체제, 전후냉전체제 등을 겪었고, 일본내 미군 전용시설의 74.6%가 집중돼 있다"며 "일본에 속하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속하지 않는 오키나와와 같은 아시아 주변부를 통해 상대적으로 평화문제를 더 잘 들여다볼 수 있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서울=연합뉴스) 송광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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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동아시아를 분석하고 연구하는 ‘방법으로서의 오키나와’에 주목하면서 만든 공동연구의 성과이다. ‘방법’으로서의 오키나와라는 말에는 두 가지 문제의식이 녹아 있는데, 그 중 하나는, 각각의 개별 국민국가를 넘어 동아시아 전체를 사고의 대상으로 고려한다는 것이다. ‘중화체제’, ‘일본제국체제’, 그리고 전후 ‘냉전체제’로 이어지는 역사적 과정에서 동아시아 각 지역의 관련양상을 현재적 관점에서 바라본다는 것, 그것은 우리와 동아시아를 새롭게 접근하려는 노력의 출발이었다. 다른 한편으로 ‘방법’으로서의 오키나와라는 관점 속에는 미래에 대한 전망이 들어 있다. 동아시아의 현재의 지배질서 뿐 아니라 미래의 전망을 위해서는 미군기지문제는 더 없이 좋은 사고의 매개물이 된다. 한국과 동아시아의 평화와 진보에 대한 대안적이고 능동적인 구상을 위해서는 반드시 오키나와 문제를 경유해야 하기 때문이다. (정근식, 책머리에서)

본 연구팀의 작업은 이러한 기존 오키나와 연구에 이어, ‘9 . 11테러’ 사태 이후 진행된 미군의 군사전략적 재편의 핵심이 되었던 오키나와의 미군기지 문제를 중심으로 다루면서도 이와 연관을 맺는 오키나와의 역사, 문화, 지역사회, 사회운동 등 다방면에 걸친 영역을 검토하고, 그 성과를 다시 한국을 포함한 동아시아적 맥락에서 위치지우고자 하는 목표를 가지고 시도되었다. 그런 면에서 선행 연구성과를 계승하고 확장하는 작업이 된다. 이를 위해 본 연구팀의 작업은 사회학, 문화인류학, 국제정치학, 행정학, 역사학, 여성학 등 매우 다양한 분야의 전공자들이 참가하여 이루어졌는데, 아마도 이러한 시도는 오키나와와 관련된 인접학문 간 학제적 작업으로는 최대 규모의 시도일 것이다. 비록 오키나와 현지 및 일본의 오키나와 연구에 비해서는 일천한 것이라 할 수 있지만, 이제 걸음마 단계인 국내의 오키나와 연구에 있어서 앞으로의 발전을 위한 디딤돌을 마련했다는 의미를 부여할 수 있지 않나 싶다.

책 속으로
오키나와는 ‘관광의 섬’ 이전에 ‘기지의 섬’이었다. 메이지유신 이후 근대 일본이 류큐왕국을 절멸시키고 병합한 것도 열강과의 생존경쟁 및 부국강병을 위한 군사전략적 목적에서였고, 그러한 일본을 패퇴시킨 미국이 오키나와를 직접 관장한 것도 동아시아와 태평양지역을 군사적으로 아우르기 위함이었다. 한국전쟁 시기부터 본격화된 오키나와의 군사기지화는 1972년에 미국으로부터 일본으로 오키나와의 시정권이 반환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계속되고 있을 뿐 아니라, 그동안 일본 본토의 미군기지가 감소되었다는 점, 또한 시정권 반환 이후 일본 자위대도 오키나와에 함께 발을 디디게 되었다는 점을 고려하면 오히려 상대적인 기지화의 정도는 더욱 높아졌다. 2006년 3월 말 현재, 일본 영토의 0.6%에 불과한 작은 면적에 37개(23,667.5ha)의 미군기지가 배치되어 있는 등 일본 내 미군 전용시설의 무려 74.6%가 집중되어 있는 것이 오키나와의 현실인 것이다.

1부 “방법으로서의 오키나와”에는, '오키나와 미군정사 연구의 현실과 도전'(임현진 . 정근식)을 실었다. 이 글은 1945년부터 1972년까지의 오키나와 미군정의 구조와 변동을 개괄하면서 동시에 미군정사 연구의 흐름을 비판적으로 조망하는 것을 목적으로 삼는데, 오타(大田昌秀)와 엘드리지(Robert D. Eldridge), 미야자토(宮里政玄) 등 기존 미군정 연구의 대표적인 성과를 기초로 하여 오키나와 미군정사를 추적하는 데 그치지 않고 이를 2자관계나 3자관계를 넘어서는 동아시아체제론의 시각에서 재해석할 필요성을 역설하며, 일종의 방법론적 시좌(視座)를 제시하고 있다. 또 이러한 작업은 한편으로는 오늘날의 오키나와 미군기지 문제의 기원을 탐구하기 위한 것인 동시에, 다른 한편으로는 한국의 미군정 및 1970년대 초반까지의 동아시아 냉전체제의 군사적 기반을 탐구하기 위한 예비적 작업의 의미를 지니기도 한다. 나아가 주로 문화론적 측면에서 논의되는 동아시아체제론을 정치경제적 영역으로 확대할 것을 제안한다.

2부 “동아시아 국제질서와 오키나와 미군기지”에서는 1부의 문제제기의 연장선상에서 한국과 일본을 중심으로 동아시아 냉전체제가 형성되고 각지에 미군기지가 정착하는 역사와 논리 및 냉전 후의 재편성 상황, 그리고 오키나와의 미군기지화를 총론적으로 다룬 글 네 편을 실었다. 이 작업들을 통해서 오키나와 기지 문제를 우선 2차 세계대전 이후 반세기 이상을 관통하는 통사적 시각 위에서, 또 미국을 정점으로 한 ‘‘동아시아형’ 냉전체제 - ‘분단(휴전)국가’ 한국 - ‘기지국가’ 일본 - ‘기지의 섬’ 오키나와’라는 구조적 차원에서 바라볼 수 있게 될 것이다.

3부 “미군기지와 오키나와 지역사회”에서는 일본 및 오키나와 내부의 시각에서 접근을 시도하였다. 오키나와는 현실 법제도상으로는 엄연히 일본이라는 국민국가를 구성하는 47개 행정구역의 하나로 위치 지워지고 있다. 그럼에도 ‘일본이되 일본이 아닌 곳’이라는 표현이 시사하듯 일본 사회 일반의 논리로는 쉽사리 해소될 수 없는 특수성을 지방 - 중앙정부 간 관계를 통해, 또 보수 - 혁신(자치)대립 구도와 관련하여 살피는 한편, 다시 오키나와 내부의 지역사회로 파고들어가 일상세계 및 촌락구성의 차원에서 미군기지 문제를 바라보는 네 편의 글을 실었다.

4부 “기지 성매매와 여성평화운동”에서는 여성 문제와 기지 문제가 중첩되는 부분을 다루었다. ‘탈냉전’ 이후 전 세계적으로 오키나와 문제를 주목하게 만든 계기가 1995년의 미군에 의한 소녀성폭행사건이었듯, 오키나와에서 여성 문제와 여성운동은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며 또한 기지 문제와 불가분의 관계를 이루고 있다. 이 부분에 대해 역사적인 경과와 사회운동의 특성 및 사례를 연구한 세 편의 논문을 실었다.

5부 “미군기지와 반기지운동의 국제적 현황”에서는 미군기지와 반기지운동을 비교사적 시각에서 살피기 위해 각각 독일, 필리핀, 한국의 사례를 다룬 세 편의 논문을 실었다. 기지 문제 전문가가 아닌 이상 대부분의 독자는 자기나라의 일부 현황이나 매스컴에 오르내린 기지관련 사건 정도를 기억하는 것이 대부분일 것이다. 동아시아 및 전 세계의 상황에 대한 윤곽이라도 그리기 위해서는 각 지역 사례에 대한 객관적 자료의 수집과 분석이 필수적이다. 여기 실린 글들은 이를 위한 예비적 시도다.


오키나와의 실상이 상당 정도 알려진 오늘날 ‘기지의 섬’이라는 이름붙이기는 상투적인 표현일 수 있으며, 또 무엇보다도 오키나와의 이미지를 고정시켜버리는 ‘낙인찍기’가 될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것은 표현이나 이미지 차원 이전에 지금도 여전히 지속되는 현실적 고통이다. 이에 대해서는 그 아픔을 안은 채, 있는 그대로를 직시하고 언표하는 것이 옳다고 판단하였다. 아울러 역사를 돌이켜 볼 때 이러한 이름붙이기가 가능해진 것은 기실 그리 오래된 일도 아니다. 역사 속에서 항구 불변한 것은 없다. 이 책의 목표는, 바로 책 제목과 같은 이름붙이기가 사라지는 것이며, 그와 더불어 이러한 책도 사라지는 것이라고 감히 말해본다. (이지원, 서장에서)

 

1부. 방법으로서의 오키나와
1장. 오키나와 미군정사 연구의 현실과 도전 (정근식·임현진)

2부. 동아시아 국제질서와 오키나와 미군기지
2장. 동아시아에서 점령의 문제와 점령기 인식 (정영신)
3장. 한국전쟁과 ‘기지국가’ 일본의 탄생 (남기정)
4장. 냉전체제의 붕괴와 미일동맹의 변화 (마상윤)
5장. 오키나와의 기지화 ? 군사화에 관한 연구 (정영신)

3부. 미군기지와 오키나와 지역사회
6장. 지방정부와 중앙정부 관계에서 본 오키나와 문제 (장은주)
7장. 현대 오키나와에서 ‘혁신’의 의미와 특징 (이지원)
8장. 오키나와 기지촌의 형성과 미군-주민 관계 (전경수)
9장. 미군기지 마을 여성들의 성차별에 대한 도전과 한계 (진필수)

4부. 기지 성매매와 여성평화운동
10장. 미군 점령기 오키나와의 기지 성매매와 여성운동 (박정미)
11장. 오키나와 반기지 투쟁과 여성평화운동 (문소정)
12장. 오키나와 여성운동의 정치학 (문소정)

5부. 미군기지와 반기지운동의 국제적 현황
13장. 독일 미군기지의 역사와 현황 (임종헌)
14장. 국가-시민사회 관계와 필리핀의 반기지운동 (여인엽)
15장. 주한미군의 정치사회적 동학과 한국의 미군기지반대운동 (정영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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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조: http://www.hanbitkorea.com/technote/read.cgi?board=freeboard&y_number=265

 

제목 : 오키나와 미군 주둔의 역사


오키나와

1. 미군 주둔의 역사

오키나와는 일본 최남단에 있는 섬들의 모임으로 구성되어 있다. 도쿄와 마닐라의 중간 지점에 위치하고 있으며, 그 위치상의 전략적 중요성 때문에 군사 전략가들에게는 "Keystone of the Pacific"(태평양의 요충지) 이라고 불리고 있다. 이곳이 바로 1945년의 미군과 일본군 사이의 격렬한 전투가 있었던 장소이다. 오키나와의 전쟁에서 200,000여명의 오키나와 인들이 살해당하였는데, 일부는 일본군에게 살해당하였다. 다수의 사람들이 동굴 속 등에 숨어서 생명을 건질 수 있었다. 전쟁이 끝나자, 미국이 일본의 전후 관리의 권한을 갖게 되었다. 참혹한 전쟁으로 인해 뿔뿔이 흩어진 오키나와 인들은 미군이 그들의 기지로 사용할 부지를 선정하기 전까지 그들의 땅으로 돌아갈 수 없었다. 오키나와 인들의 생활을 유지해주는 가장 생산성이 높은 땅들 중 일부가 미국의 군사적 용도로 사용되었다. 새로 건설된 마을들은 미군 기지 근처에 작게 축소되어 건설되었다.

일본 영토의 0.6%밖에 차지하지 않고 있는 오키나와에 자그마치 75%의 미군이 주둔하고 있다. 오키나와의 군사시설에는 대략 30,000여명의 미군 병력과, 22.500여명의 가족들이 거주하고 있다. 오키나와현을 총 통틀면 대략 1,200,000명의 사람들이 있다. 이는 괌의 두배에 이르는 크기이며, Oahu(하와이)보다는 작은 규모이다.

비록 지금은 오키나와가 일본의 일부가 되었지만, 많은 오키나와 인들은 일보의 식민주의와 자민족 중심주의에 대해 나쁜 인상을 가지고 있다. 일본은 1879년에, 자신들만의 독자적인 언어와 문화를 가지고 있는 왕국이었던 오키나와를 자신들의 나라에 병합시켰다. 많은 사람들이 오키나와에서의 미국의 군사활동에 대해 반발심을 가지고 있으며, 일본이 일본 본토보다 25년이나 더 긴 기간동안인 1972년까지, 오키나와를 미국의 지배하에 놓음으로써 일본 전체의 굴래인 미군의 주둔을 오키나와에게 이리도 무겁게 지도록 했다는 사실에 분개하고 있다.

2. 미군 기지가 오키나와 주민들에게 미치는 부정적인 영향

2/1.군을 상대로한 매매춘과 여성과 어린이들에 대한 폭력

과거에는, 30명중 1명의 오키나와 여성들이 미군을 상대로한 A(Approved) 술집에서 매매춘 여성으로 고용이 되었었다. 오늘날에는, 자국의 경제가 훨씬 연약한 7,000여명의 필리핀 여성들이 오키나와에서-연예인 비자를 가지고- 일본에서는 매매춘이 불법임에도 불구하고, 미군을 위한 매매춘 여성으로 고용되고 있다. 이러한 여성들은 보통 가난한 지방의 가정에서 왔고, 어린시절에 폭력과 성폭력을 경험한 경우가 많다. 이들은 경제적 어려움으로 인해 매매춘을 하도록 강요당한다, 그들의 선택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들에게는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기 때문이다. 비록 이 여성들의 고용 행위는 지하경제에 속하는 것이나, 이 수천명의 필리핀 여성들이 벌어오는 외화의 총 액수는 필리핀 경제의 외화 벌이에 커다란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것도 사실이다.


1995년, 9월 4일, 12살 짜리인 한 여자 아이가 저녁 8시 30분에 미군 기지 근처인 동내안의 한 가게에서 장을 보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그녀는 3인의 자동차를 탄 미군 에게 유괴당하여, 손, 눈, 그리고 입이 테이프로 묶인 상태에서 성폭행 당한 뒤, 자동차에서 던져져, 길가 근처에 버려졌다. 그녀를 성폭행한 군인들- 두 해병과 한명의 해군-은 기지 내에서 자동차를 빌리고, 테이프와 콘돔을 구입하였으며, 여성을 납치하여 성폭행할 목적으로 기지를 떠났다.

이 사건은 전후 오키나와에서 계속적으로 있어왔던 여성에 대한 폭력의 긴 역사에 한건의 사건을 추가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하지만, 이 사건은 다른 사건들과는 사뭇 다른 몇가지의 성격을 지니고 있었고, 이로인해 대규모의 오키나와인들의 한탄과 증오가 터져나오게 되었다. 그 성격들은 이러하다: (1) 피해자가 소송을 제기하였다. (2) 이 성폭행이, 성폭행을 인권에 대한 유린이라는 규정을 내린 -이 결정이 오키나와의 여성들에게 자신감을 주었다- 제 4회 UN 여성에 관한 컨프런스가 중국 베이징에서 열리던 도중에 발생하였다. (3) 이 사건은 제 2차 세계대전의 종결 50주년을 기념하는 연도, (오키나와에서 미군이 50년간 주둔한 것에 대한 것을 반영하는 연도이기도 한) 에 일어났다. (4) 피해자의 나이가 이러한 종류의 폭력은 희생자의 나이를 불문한다는 것을 확실하게 해 주었다.

이 여자아이에 대한 성폭력 행위는 전세계에 보도되었으나, 대다수의 미군에 의해 발생한 범죄(성범죄, 폭행, 그리고 살인을 모두 포함)는 보도되지 않았다. 공식 보고에서, 1972년 이후 오키나와 사람들에 대한 미군의 범죄는 4,700건이 넘을 것으로 예상하고 있으며, 그중 509건은 특히 잔혹한 범죄들이다. 많은 수의 범죄, 특히 여성에 대한 폭력에 관한 범죄는 보고되지 않은 경우도 많이 있기 때문에, 이 수치들은 극히 형식적인 수치일 뿐이다. 기지들은 마약의 사용과도 연관이 되어 있으며, AIDS를 퍼뜨리는데도 많은 관련을 가지고 있다. 미군 아버지를 가진 인종이 섞인 혼혈 아동들은, 그들의 아버지들에게 버림받는 경우가 많고, 또한 그들은 지역사회에서 심한 차별을 경험한다.

2/2. 왜곡된 지역 경제와 토지의 사용

오키나와는 일본 전역에서 다른 지방보다 두배 이상의 실업율을 가지고 있는 일본에서 가장 가난한 지역이다. 관광과 농업이 전체 경제를 지배하고 있다. 미군 기지가 오키나와 전체의 20%의 국토를 차지하고 있다- 이 토지들은 오키나와 주민들을 위해 훨씬 더 생산적으로 사용될 수 있는 가능성을 지니고 있는 토지들이다. 미군들이 담으로 막혀있는 광대한 풍요로운 장소에서 살고 있는것은-어떤 곳에는 골프장과 수영장까지 갖추고 있는- 근처의 좁은 공간에 번잡하게 살고 있는 도시들과 매우 큰 대조를 이룬다. 10,000여명의 인구를 가진 오래된 마을인 킨을 예로 들자면, 이 마을은 5,000여명의 해병을 수용하고 있는 Hansen 기지와 바다 사이의 좁은 공간에 끼어있다. 기노완 도시는,  불규칙하게 계속 뻗어나가고 있고, 아시아 최대 규모중 하나이기도 한 Futenma Marine Corps Air Station의 바깥쪽을 둘러싸며 건설되었다. 지역의 주민들은 기지 안으로 출입할 수가 없다. 기지를 돌아서 이동하는 것은 그들의 매일 움직임의 거리를 멀게만 할 뿐이다.

기지 근처에 형성된 지역사회의 고용은 미군을 위한 서비스 업종이 다반수이다.-가게, 자동차 수리, 식당, 술집, 그리고 매매춘. 이에 더하자면, 약 8,000여명의 지역주민들이 기지 내에서 일하고 있다. 그러나, 오키나와 경제는 예전보다는 미군에게 덜 의지하고 있는 편이다. 미군기지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수가 줄어들었고, 기지활동에 관한 렌트와 수입이 전체 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작아졌다. 일부의 토지주인들은 미군에게 자신들의 땅을 빌려줌으로써 임대수입을 받기를 원하는 사람들도 있다. 다른 사람들은 자신들의 가족의 땅을 도용하는 미군에 대해 언제나 반대를 해왔다.

일본 정부는 매년 일본에 주둔하고 있는 미군 개인들에게, 약 $100,000를 지급한다. 이는 기지의 전기세, 고속도로 이용료등을 지급하는 것이다. 일본의 세금은 쇼핑센터, 학교, 도서관, 그리고 교회(비록 일본 헌법은 교회와 정부를 분리하고 있지만)를 지원한다. 미군 기지가 주둔하는데 드는 연 비용의 70%는 일본이 지급하고 있는 것이다.

1998년 11월에 있었던 오키나와 주지사의 선출의 가장 큰 관심사는 경제적인 문제였다. 일본 전체의 경제 지수가 하락하고 있던 것과는 별개로, 오키나와의 다른 일본과는 취약한 경제구조가 강조되었다. 미군 기지에 대하여 비우호적이었던 현직 주지사 오타는,도쿄 정부의 지원을 받고 있었으며, 경제적 측면을 강조한 그의 경쟁자인 케니치 이나미네에게 세 번쩨 총선에서 폐배하였다. 1998년 여름, 오키나와의 실업률은 9.2%로 매우 높았다. 이 사실은 오키나와의 작은 섬들을 포함해, 오키나와 전역에 광고되었다. 사람들은 불안을 느꼈다. 대다수의 오키나와의 유권자들에게즌 이나미네의 경제회복의 약속이 선택의 폭이 좁았던 선거에 있어서 중요한 결정요소가 되었다.

2/3. 환경 오염

암 발생확률이 매우 높은 물질(연료, 기름, 용제, 중금속)들은 군사 작전도중 일반적으로 누출되었고, 이는 땅, 물, 공기, 바다, 그리고 사람들의 건강에 영향을 미쳤다.

오키나와의 주민들은 저공 비행하는 군용 비행기들의 시끄러운 소리로 인해 고생하고 있다. 일본의 다른 지역에서는 미군 비행기들은 7:00 p.m. 이후 착륙할 수 없게 되어있다. 그러나 카데나 공군기지(오키나와)에서는 비행기들이 모든 시간대에 이착륙할 수 있고 하루 종일 극심한 소음을 발생시켜도 상관이 없다. 1996년, 이 기지 근처에서 출산하는 영아들에 대한 공식 보고서에서, 이 지역에서 출생하는 아기들은 다른 지역에서 출생하는 아이들보다 출생시 몸무게가 극히 적었다. 조사에서 이 원인을 이 지역에서 발생하는 비행기 소음이 그 원인이라고 지적했다. 기지 근처에 있는 학교에 다니고 있는 학생들은 비행기 소음으로 인해 학업에 자주 지장을 받고 있으며, 집중력 부족에 시달리고 있다.

실탄은 사용한 정기 훈련은 산불, 토사, 진동, 사고 등을 발생시켰다. 1996년, 미국 해병대는 바다 속으로 우라늄 실탄을 발사하였다. 미군은 이를 일반 무기라고 정의하지만, 일본에서 이를 발사하는 것은 허용되지 않는다. 미군의 핵잠수함의 정박지인 오키나와의 White Beach는 높은 아동 백혈병 발병률과 성인 암 발병률을 보이는 대표적인 지역중의 하나이다. 1998년을 예로 들자면, White Beach의 바다에서 일반적으로 조개와 해초를 따던 두 여성이 간암으로 사망하였다. 또한 지역 주민들은 때로 미군이 일으킨 교통사고로 인한 피해를 받는데, 간혹 사망하기도 한다. 1998년 10월을 예로 들자면, 젊은 여성이 미군 해병이 일으킨 뼁소니 사고로 인하여 목숨을 잃었다.

행정협정(SOFA, Article 4)하에서, 미국은 땅, 물에 대한 환경 정화의 책임을 지지 않는다.한국과 필리핀에서 그런것처럼, 주둔지의 정부는 미군으로 인한 환경 오염에 대해 적절한 정보를 가지지 못한다. 일본 정부는 이에 대한 정보를 공개하지 않는다. 미국 정부는 지역 관계자들에게 군사 작전이 있을때마다 보고해야 한다고 하는 규정이 있었는데, 위에서 말한 사건인 우라늄 실탄을 바다에 발포한 사건 이후 오키나와 주민들은 이것이 정말로 적용된다고는 믿지 않게 되었다.

수년간 지역 주민들이 실탄 발포에 대한 원망의 목소리가 계속되자 일본 정부는 이들 주민들을 일본 본토중, Yausubetsu(북해도), Kita-Fuji, Higashi-fuju (후지산 근처), 그리고 Yufuin (오이타 현)중 한 장소로 이사를 할 수 있도록 하였다. 이 땅에 대한 파괴와 실탄 사격으로 인한 불 이외에도 다른 환경 문제는, 불발탄 문제를 들 수 있다. 과거에는 오키나와 현이 이들을 치우기 위한 비용을 부담해야 했다. 지금은 군용 헬기로 이 지역에 씨를 뿌리고 있다. 언덕은 이제 초록빛이 되었으나 지역 주민들은 안전에 대한 걱정이 많다. 이 옛 사격 연습장이 모두 씨가 뿌려진 뒤에는 불발탄을 찾아내기가 불가능해질 것이기 때문이다.

3. 조약과 협약

행정 협정(SOFA)는 일본 내에 주둔하고 있는 미군에 대한 규율을 결정한다. 미군은 보통 지역법과 관습에 대한 면책 특권을 받으며, 미국 관계자들이 지역 경찰과 협조하기로 결정하지 않는 이상 일본 법 체계에 대하여 처벌을 받지 아니한다. 대다수의 경우, 일본에서 범죄를 행한 미군은, 만약 처벌을 받기나 한다면, 미군 관계자들에 의해 처벌을 받는다. 일본에서 사람을 폭행, 또는 살인을 하기까지 한 미군은 지방 법원에 결코 서지 않는다. 이는 이러한 미군의 행위를 보아온 일본인들의 분노를 사고 있으며 미국의 거만함과 무관심함을 보여주고 있다. 그들은 SOFA를 개정하여 지역 주민들에게 더 많은 안전을 보장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12살난 어린 오키나와 여자아이가 미군에게 성폭행 당한 사건에서 미국은 이들 세 명의 군인들을 일본에 넘겨주었고, 이들은 일본 법정에 서게 되었으며 유죄 판결을 받았다. 현재 이들은 7년, 6년 6개월 형을 선고받고 일본의 감옥에 수감 중이다.

1995년 11월 4일, 오키나와 현 정부는 "지역 주민의 안정성과 지역 경제의 발전"을 보장하기 위한 SOFA의 개정을 할 것을 요구하는 안건을 일본 정부에 제출하였다. 이에는 10가지의 주요 내용이 있었다: 지역 주민들이 필요로 하는 토지의 반환, 소음공해의 축소, 사고를 일으킨 미군에 대한 처벌, 민간 공항에서의 미군 비행기의 이착륙 금지, 지역 정부 관계자들의 미군기지 출입 허용, 민간 지역에서의 미군 활동 금지, 미군 운송수단에 식별 가능한 번호판을 설치, 범죄자들을 일본에 인도할 것, 범죄나 사고에 대한 보상 지급, 미국-일본 합동 커미티에 지역 주민들의 참여 허락.

일본 정부에게 오키나와에 미군 부대의 집중으로 인한 "짐"을 덜어낼 것을 청원하는 것과 더불어, 오키나와의 지사들은 지난 10년간 미국으로 8회의 공식 방문을 하여, 오키나와의 기지수의 축소와 기지 관련 문제들에 대한 해결 방안을 모색하고자 하였다.(2회는 Nishime 지사에 의해, 6회는 Ota 지사에 의해 이루어짐) 이러한 청원과 방문들은 실탄 사격 연습장의 일본 본토로의 이전과 오키나와 내부에서 이루어지는 일상적 미군 활동에 대한 작은 변화를 이루는 결과를 가져왔다.

4.기지 전환/ 경제 발전

오타 지사(1990~1998) 하에서 오키나와현은 미군 기지를 2015년까지 모두 몰아내는 계획을 새웠다. 이 계획의 가장 핵이 되는 부분은 오키나와의 세계주의적 도시에 대한 것인데, "21세기를 겨냥한 새로운 오키나와의 계획"을 표방하고 있어, 평화, 공존, 그리고 자립에 대하여 강조하고 있다. 이 계획은 오키나와의 지정학적 위치, 자연 환경, 그리고 역사적 경험을 바탕으로 국제 교류의 확대를 이루고, 타국과의 신용으로 인한 결합, 특히 아시아 국가들과의, 경제뿐이 아닌 과학, 문화, 개인들을 위한 훈련 프로그램 등의, 협력을 위하여 새워진 것이다. 강조되는 부분은 오키나와의 더 확대된 경제적 자립, 정보 기술의 이용, 자연환경의 회복, 지속 가능한 계발, 그리고 평화의 교육과 조사를 위한 센터의 구성을 포함한 연구소의 건설 등이다. 현재 미국이 사용중인 토지 대한 계획적이고 단계적인 반환은 이 모든 계획의 중요한 요소이다.

이 발전 계획에서 중요한 부분의 하나는 오키나와가 일본 본토와 경제적 동등한 수준을 이루어야 한다는 것이다. 전후 일본의 발전은 대규모 산업화, 산림 파괴, 땅과 물에 대한 오염, 그리고 "셀러리맨" 문화를 가져왔다. 일부의 오키나와 환경운동가들과 여성 운동가들은 이러한 형태의 발전은 지속하기 부적절한 불안정한 구조라고 주장한다. 그들은 미군이 기지 전환을 위한 자금을 사용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일자리, 교육, 그리고 훈련이 기지에 의존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을 위하여 제공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지속 가능한 발전은 세계적 대기업 또는 관광업이 주가 되어야 한다고 한다. 지역 주민들이 전환에 필요한 계획과 결정을 주도해야 한다고 말한다.

5.오키나와 내부의 미군 활동에 대한 반대

오키나와 주민들에게는 몇대쩨 계속되어오고 있는 강한 반 군사주의 전통이 존재한다. Ryukyu 왕국(오키나와의 전 이름)은 13세기부터 무역에 관계를 가지고 있었다. 이곳 사람들은 타지인에 대한 열린 태도를 지니고 있으며, 이렇게 다른 사람들과 관계를 가지는 것에 대한 열린 태도와는 반대로 군사주의적 태도에 대해서는 강한 거부감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뿌리깊은 반 군사주의적 태도는 1945년에 있었던 오키나와에서의 전투에서의 참상으로 인해 더욱 강화되었다.

미군 기지의 계속되는 주둔은 반 전쟁주의 토지소유자들, 노동 조합, 종교 단체, 여성단체, 정치 단체 등의 지난 몇 년간 계속되어온 자립에 대한 요구로 인하여 도전을 받고 있다. 위에서 언급한 12살 박이 어린 여자아이에 대한 납치, 강간 사건은 미군 기지에 대한 반대운동에 활기를 불어넣게 되었다. 1996년 10월에 있었던 이 사건 일년 이후에 있었던  총선에서 대다수의 유권자들은 미군의 주둔에 반대하는 데에 의견을 모았다.

Special Action Committee on Okinawa(SACO)의 지휘하에 작성된 미국-일본 제안에는 현제 미군이 사용하고 있는 토지의(Futenma Marine Air Corps Station을 포함한) 20%를 반환할 것을 요구하는 부분이 있다. 그러나 Futenma는 Nago의 해변 근처에, 일본 정부가 자금을 지원할 "floating heliport"로 대체될 것이라 한다. 이 헬리콥터 발착소는 그 지역의 산호 지역을 파괴하여, 오키나와의 특별한 해우인 오키나와 해우의 생태를 파괴할 것이다. 이 해우는 멸종 위기에 처해있는 동물이다. 도쿄에서의 강한 압력에도 불구하고, 마고의 지역 주민들은 이지역의 헬리콥터 발착소의 건설(non-binding, 비 강제적)의 제의에 대한 국민투표에 반대표를 던졌다. 1997년 12월, 오타 지사역시 이에 반대하였는데, 이로인해 도쿄로부터 커다란 불이익을 당하였다. 현제 이 제안에 대한 상황은 불확실하다. 새로 부임할 지사인 Inamine는 이 오키나와 북부의 새로운 통상적-군사 비행기지에 대한 제안에 긍정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으며, 이는 타협의 일환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Inamine 지사의 선출 이후, 35개의 헬리콥터 발착대 건설 반대 단체 및, 환경단체들이 Anti-Relocation Association이란 이름으로 연합을 이룬 상태이다.

오키나와 Women Act Against Military Violence에서는 SACO가 미군 세력의 축소에 대한 주장을 하지 않고 있다는 것에 대하여 지적한다. 그들은 시설들이 다른 지역으로 옮겨지질 것이기 때문에, SACO의 제안들은 오키나와의 미군 시설들에 대한 현대화와 확대를 대변한다고 주장한다.

반 군사주의 단체들 또한 일본 정부의 미군 활동에 대한 전적인, 필요시에는 일본 전역의 공항, 항구, 고속도로, 통신 시설, 그리고 병원 등의 사용을 가능하게 하는 것을 포함하는, 협력을 정당화시키는 "New Defense Guidelines"에 대하여 반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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