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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9월 29일 월요일

Japan: a Reinterpreta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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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apan: a Reinterpretation

 


오늘의 일본을 만든 것은 1868년의 메이지유신과 1945년의 패전이다. 전자는 일본에 제철공장·조선소·철로와 같은 산업화를 가져왔고, 후자는 보통선거권·여성 해방·언론 자유 등의 미국식 민주주의를 이식했다. 외양만 살피자면 일본 근대사를 바꾼 두 번의 역사적 변환은 꽤 성공한 듯해 보이지만, <일본의 재구성>(2008)을 쓴 패트릭 스미스는 ‘반쪽’의 성취라고 말한다. 기술 발전과 공업화와 같은 근대화(modernization)에는 분명 성공했지만, 시민의 자주성을 척도로 하는 근대성(being modern)은 취득하지 못했다는 거다.

 

일본 근대화의 선구자들은 자신들의 정체성과 문화·전통을 지키기 위해서는 서구식 기술 습득이 필수라는 역설을 깨달았다. 다시 말해 일본은 근대화를 시도하던 애초부터, 근대화를 근대성 획득이 아닌, 일본 정신과 전통을 보존하기 위한 수단으로 삼았다. 물론 이런 식의 근대화 접근법이 딱히 일본만의 것이랄 수는 없다. 동아시아의 근대화 운동가들이 한입으로, 동도서기(한)·중체서용(중)·화혼양재(일)를 외쳤으니!

문제는 일본의 근대화 선구자들이 보존하려고 했던 이른바 ‘일본정신’과 ‘전통’이 실재한 바 없다는 거다. 좋은 예로, 메이지유신이 일어나기 전까지 일본은 천황의 나라가 결코 아니었다. 천황은 권력이나 대중과 먼 거리에 있었고, 정치판 역시 쇼군과 천황을 지지하는 세력으로 나누어져 있었다. 유신이 근대에 값하려면 쇼군으로 대표되는 봉건제와 천황으로 상징되는 군주제 모두를 혁파해야 했으나, 메이지유신을 담당한 무사 출신의 과두세력은 국가 통합을 위해 국체라는 아리송한 개념을 급조했고, 이때부터 일본은 천황의 나라가 됐다.

메이지 시대의 지배층은 전통을 재구성하는 작업을 통해, 서구인의 아무 가르침 없이 자생적인 오리엔탈리스트가 됐다. 오늘날 일부 한국인들이 부러워하고 무엇보다 일본인 스스로가 사로잡혀 있는 일본에 대한 고정관념의 대부분은 당시의 권력자들이 만들어낸 신화다. 그들에 의해 “부러울 정도로 철저한 일본인의 노동 윤리, 열악한 환경에 대한 참을성, 권위에 대한 묵종은 모두 전통으로 설명되었다. 화합과 합의가 중시되고 반목은 이질적으로 간주되었으며, 모든 일을 양보로 해결하는 겸손한 민족으로 꾸며졌다.”

 

하지만 그들이 순치하고자 했던 ‘일본 정신’이나 ‘전통’이 허구라는 것은, 도쿠가와 막부 250여년 동안 대략 3천건 이상의 농민봉기가 있었다는 사실이 반박하고도 남는다. 메이지 유신의 입안자들이 삭제와 왜곡을 통해 자기 역사와 민중을 배반한 이유는, 개인이 주체가 되는 근대성의 봇물을 막고 전국민을 사무라이와 같은 ‘멸사봉공’의 객체로 만들고 싶어서였다. 흥미롭게도 전쟁에서 승리한 미국은 중국이 공산화하자 일본을 민주화시키겠다던 목적을 포기한다. 일본인이 자주적이 되면 될수록 일본을 잃을 수도 있어서였다. 바로 그 유턴의 순간, ‘게이샤’ 학자라고 불리는 일단의 미국인 관변 학자들이 메이지 지식인들이 만든 오리엔탈리즘을 엄호하고 나섰다. 전후 일본을 접수한 보수 전범들에게는 천군만마를 얻은 거나 같았다. 장정일 소설가

 

출처: http://www.hani.co.kr/arti/culture/book/312520.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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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대전 후에 창작된 일본의 이미지는 지금까지도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다. 이 이미지는 워싱턴이 도쿄를 어떻게 다루어왔는가를 반영하며, 제국주의 권력이 종속적 식민지를 다루는 방법과 매우 유사하다. 모든 것이 공산주의 견제라는 이름 아래 희생당했다.1948년이 채 끝나기도 전에 전전戰前 일본의 재벌 세력은 모두 제자리로 복귀했고 구시대의 정치엘리트 세력들이 다시금 일본을 다스리기 시작했다. 일본적 이데올로기는 각종 재료가 풍부히 뒤섞인 혼합물이었다. 전통의 조작은 비단 일본 엘리트들만의 작업은 아니었다.” _1부 가운데

“미국의 대담한 기만을 설령 용서한다 하더라도, 그로 인해 이후 반세기가 넘도록 일본국민이 겪은 고민과 혼란은 간과하기 어렵다. 덴노의 죄를 덮어버림으로써 점령군은 단숨에 ‘책임을 회피하는 문화’를 조장했고 이런 분위기는 오늘날까지 이어진다. 갑자기 역사는 부인할 수 ‘있는’ 것이 되었고, 대중은 지배자의 허울 좋은 기만에 대항하여 투쟁을 되풀이해야 했다. 승전자의 처분 때문에 한 나라의 전면 개조 계획이 뻔한 사기로 시작되고 말았다. ‘무책임’이라는 사조가 정치·교육·외교 등 각 분야에 파고들었다.” _2부 가운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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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트릭 스미스: 20여 년 이상 『인터내셔널 헤럴드트리뷴』『뉴요커』『파이스턴 이코노믹리뷰』 특파원으로 아시아 각지에서 활동했으며 일본에서는 1987년부터 1991년까지 『인터내셔널 헤럴드트리뷴』 도쿄 지국장으로 근무했다. 최근에는 『인터내셔널 헤럴드트리뷴』 아시아판 편집을 담당했다. 지은 책 중 『일본의 재구성』은 기리야마 환태평양 도서상과 해외언론클럽Overseas Press Club이 수여하는 국제문제 분야 최우수 도서상을 수상했고, 『뉴욕타임스』에 의해 「올해의 주목할 만한 도서」로 선정되었다. 2008년 현재 홍콩에 거주하면서, 네 번째 저서를 집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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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다’와 ‘없다’ 사이의 공백
최근 일본의 독도 도발은, 역사에 대한 올바른 이해와 공감 없이 한일 관계가 미래를 향해 나아가는 것이 결코 가능하지 않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확인시켜주었다. 가장 가까우면서 한 없이 먼 이웃인 일본과의 문제가 터질 때마다 우리는 투철하게 역사를 인식하고 일본을 잘 이해해야 한다고 목청 높여 외치지만, 우리의 일본 인식은 한때 논란이 된 ‘일본은 있다’와 ‘일본은 없다’ 사이에서 머물고 있을 뿐이다. 사무라이와 군국주의, 혼다와 하라주쿠 그리고 지루하게 이어지는 자민당의 장기집권 등 몇몇 전형적인 표상들로 대변되는 일본은 우리에게 부정의 대상이거나 극복의 대상, 혹은 소비의 대상일 뿐이다.

출간과 동시에 미국에서 엄청난 반향을 불러일으키고 각종 도서상을 휩쓸며 가장 탁월한 일본 개론서로 추천받은 패트릭 스미스의 『일본의 재구성』(원제 Japan: a Reinterpretation)은 고정관념에 갇힌 일본이 아닌 있는 그대로의 일본, 오늘의 일본을 독자들에게 선보인다. 이 책은 50여 년 전에 일본을 한 번도 방문한 적이 ‘없는’ 인류학자 루스 베네딕트가 쓴『국화와 칼』이 읽을 만한 거의 유일한 일본 개괄서로 자리 잡고 있는 국내출판계에 신선한 바람이 될 것이다.

‘현장 속으로’라는 저널리스트의 모토와 엄밀한 문헌 연구(참고문헌 목록만 20쪽에 달하는)의 이상적인 조화로 저널리즘적 글쓰기의 전형을 제시하는 저자는 일본에 대한 우리의 관념이 지나치게 고정되어 있다는 사실을 비판하는 것으로 글을 시작한다. “마치 19세기 목판화에서 공중으로 치솟아오르며 부서지는 파도가 영원히 그 상태에 정지해 있는 것”처럼 일본을 바라보기 십상이지만 그 파도는 “지금 막 해안에 다다르려는 참”이라는 것이다. (21쪽)

재팬이 된 닛폰
2차대전 종전 직후, 인류 역사상 최악의 무기로 자신들의 도시를 파괴한 미군을 열렬히 환영한 일본인들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항복 직후 일본인들은 미국에게 무엇을 기대했을까? (33쪽) 미국의 호의와 함께 일본인 스스로 새로운 시작을 할 수 있으리라는 생각은 그리 오래 가지 못했다. 1946년 미국총선을 기점으로 미국의 일본 정책은 급선회한다. 이른바 역코스(reverse course) 정책의 시작이다. (우리의 해방전후사와 다르지 않게) 미국은 자신들의 국익을 위해 전전(戰前) 일본의 국가주의자, 재벌, 정치엘리트 세력을 복귀시킨다. (35쪽 이하) 잘못 채워진 단추의 시작이다. “터무니없이 부패하고 시장우월주의에 집착하고 환경보호에 무관심하고 개인을 숨막히게 하고 정치적 기능이 원활하지 않은데다 지도자가 부재하고 결단력 없는” 나라, 일본은 미국이 만든 일본상이며, 미국은 이런 일본을 자신들이 만들었다는 사실조차 잊고 있다고 저자는 말한다. 역코스에 이어 1947년 제정된 일본의 헌법(평화헌법)과 1951년 미일 상호안보조약은 모두 미국의 주도 아래 만들어진 문서로 “둘을 합치면 정치적?외교적 정신분열증의 걸작이자 일본이 지금까지도 겪고 있는 질병의 원인”이다. (37쪽)
메이지 유신 이래 제국주의적 야망을 불태우며 아시아의 이웃국가를 끊임없이 침략한 일본의 과거와 역사는 미국이 꾀하는 이익에 적합하도록 ‘재구성’되었다.

일본만 있고 일본인은 없다
자국민을 사지로 내몬 덴노(천황)는 전통의 이름이 되었고, 전범들이 득실대는 정치 중심지는 동아시아 최초로 활발한 의회민주주의를 실현하는 전당으로 여겨지게 되었다. 이런 역사왜곡과 만들어진 새로운 일본상을 뒷받침한 학자들이 바로 에드윈 라이샤워가 주도한 ‘국화회’이다. (44쪽 이하) 미국이 만들어냈고 일본이 거기에 자신을 맞춘 이 일본상의 해체가 바로 저자가 책 전체를 통해 노리는 바이다. 그리고 이 갈라진 틈바구니 사이로 생생한 일본, 정확히는 일본‘인’의 맨 얼굴을 보여주고자 한다.

저자는 종신고용과 무파업의 신화 속에 가려진 일본 노동운동의 역사와 서류가방을 든 사무라이라는 표상 아래 신음하는 일본 소시민들의 삶이야말로 우리가 알아야 할 일본의 오늘이라고 역설한다. (182쪽 이하)

스스로를 바라보기
일본이 스스로를 직시하지 못하는 것이야말로 현대 일본이 처한 문제의 핵심이라고 저자는 진단한다. 만들어진 과거, 의도적으로 잊힌 역사 속에서 개개인이 자신의 정체성과 주체성을 정립하기란 불가능하다는 설명이다. 과거사가 과거가 아닌 현재의 문제요, 타국과의 관계가 아닌 자신들의 문제인 까닭도 이 때문이리라. 저자는 이를 정치, 경제, 일상생활뿐 아니라 예술 문화의 영역을 통해서도 다채롭게 분석해 나간다. 특히 9장 ‘아직 끝나지 않은 꿈’은 메이지유신 시대부터 지금까지의 일본 소설에 비친 일본인의 자화상을 탐구한 뒤, 일본 문화예술이 처한 한계를 지적한다. “…무엇보다 국민총생산주의의 잔해로 보인다. 오카모토 타로가 말한 ‘인간이 자신의 과거와 맺는 살아있는 연관’을 국민총생산주의가 말소해버렸다. 단절된 관계를 다시 엮어나가기란 보통 어려운 것이 아니다. … 그러나 젊은 예술가들은 이런 현실을 직시하는 대신 이 단절을 무시하기로 결심했다. 역사 없이도 삶을 영위하고 창조적 활동을 할 수 있는 척했다.” (396~397쪽) 예컨대 일본적인 소재를 찾아보기 힘든 하루키의 소설 역시 국제주의적인 것이 아니라 자신의 역사에 대한 의도적 외면으로 읽힐 수 있다는 것이다. 반면에 일본 고유의 것이라는 환상과 과거가 현대의 보호막이 되길 원하는 꿈은 유키오의 할복으로 귀결될 뿐이다. (384쪽) 저자는 침묵하는 과거와 불협화음 가득한 현재에다 뒤섞인 일본을 그저 있는 그대로 묘사하는 일이 일본 작가들에게 주어진 과제이자 일본인이 자신들을 찾는 길이라고 주장한다.

그들 안의 타자
저자는 일본의 문제는 일본‘인’의 문제가 아니라 일본에 사는 모든 구성원의 문제라는 것을 놓치지 않고 일본 내의 타자들인 피차별부락민, 아이누족, 오키나와인, 재일 한국인, 외국인 노동자의 현실에 주목한다. (10장) 저자는 일본 내의 타자들을 직접 찾아가 인터뷰를 통해 그들의 차별 받는 삶을 생생하게 전하는 동시에 역사적인 배경을 파헤친다. 이 과정에서 저자는 일본의 외국인 기피증과 차별이 보여주는 위선과 부당함을 비판하지만 이를 결코 변치 않는 일본의 국민성 등으로 설명하지 않는다. 저자는 오히려 변화하려고 애쓰는 사람들의 노력에서 일본이 나아가야 할 바람직한 모습을 발견한다.

미래를 비춰주는 거울인가 반면교사인가?
『일본의 재구성』이 비단 이웃 나라의 이야기에 그치지 않는 까닭은, 일본과 일본인의 모습에서 우리의 그림자를 때로는 흐릿하게 때로는 너무나 생생하게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일본이 10여 년 전에 겪은 부동산 거품 붕괴에 따른 경제 침체가 머지않은 미래의 우리 모습일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은 차치하더라도, 개발지상주의와 대외 과시를 위해 수도권과 지방을 철저히 분리한 토건국가, 정부보조금에 의해서만 지탱될 수 있으면서도 영원한 고향이라는 이데올로기로 작동하는 농촌, (253쪽 이하) 신병훈련소 같은 신입사원 연수시설 등을 묘사하는 구절에서 우리의 얼굴을 찾기란 그다지 어렵지 않다.

그러나 무엇보다 씁쓸한 대목은 일본 교육에 관한 구절들이다. 유아기 때부터 학원에 다니지 않으면 뒤처진다고 생각하는 학부모들의 심정, 1960년대 일본의 한 학원이 개발한 방식인 모의고사 제도에 목을 매는 학생과 교사 등 일본 교육의 문제는 점점 더 악화일로로 치닫는 우리 교육의 모습과 정확히 일치한다. “끔찍스런 경쟁과 비판적 사고력이 거세된 강제주입식 학습법은 졸업생들의 성향을 결정짓는다. 입시 지옥에서 다른 학생들을 적으로 여기며 몇 년씩 경쟁할 것을 요구하는 현 일본 교육체계는, 결국 탐구하는 지성인을 양성하기보다는 편협하고 기계적인 인간을 길러낸다.” (136쪽) 너무 익숙한 구절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우리는 이런 교육이 만들어낸 젊은이들, 어떤 일에도 분노할 줄 모르고 부당함 자체를 자각하지 못하는 20대들을 오늘 만나고 있지 않은가.

평화헌법의 딜레마
일본의 군국주의 야욕에 가장 큰 피해를 입은 우리의 입장에서 평화헌법은 일본이 감내해야 할 당연하고도 최소한의 구속 장치라고 생각하는 것이 보통이다. 하지만 저자는 평화헌법을 둘러싼 논쟁을 진지하게 다시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 새로운 인식을 요청하며 생각할 거리를 제공하는 것이 이 책의 큰 장점이다.

1958년 소련의 흐루시초프가 일본엔 지진과 화산 말고 다른 게 무엇이 있냐고 말했다. 이런 모욕적인 발언에 일본은 흔한 외교적 항의조차 하지 않았다고 한다. “전후 일본인에겐 단지 두 가지의 선택이 있었다. 에드윈 라이샤워 같은 사람이 독려한 대로 ‘국제주의자’가 되든지 아니면 국가주의자로 남는 수밖에 없었다. 사실상 선택의 여지가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국가주의는 지극히 위험한 이데올로기로 낙인찍혔으니 말이다. “그리하여 대다수 일본인은 자명한 길을 선택한다. 국제주의자가 된다는 것은 미국이 일본에게 준 헌법, ‘평화헌법’ 지지를 뜻했다. ‘일본인은 누구이며 착한 일본인이 되려면 어찌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데 대해서도 미국 및 기타 나라의 견해를 수용한다는 의미였다.” (442쪽) 저자는 평화헌법의 골자인 9조, 즉 법률로 명기된 사항만 자위대의 활동을 허락하는 조항이 매번 국내외에서 보여준 일본의 정신분열증적인 행동의 원천이라고 지적한다. 1960년대 초 남극에 관측선을 보내기 위해서도 헌법을 개정해야 했고, 도쿄올림픽에서 자위대가 교통규제에 동원되어야 할 때도 법을 바꾸어야 했으며, 1995면 고베지진이 발생했을 때에도 피해자를 돕기 위해선 이틀을 기다려야만 했다는 것이다. 걸프전 당시 국제사회에서 큰 비난을 받았던 일본의 소극적이고 수동적인 태도 역시 평화헌법을 두고 어찌해야 할지 모르는 일본의 딜레마였다고 설명한다. 전후 일본인이 선택해온 국제주의는 국제 문제에 관여하지 않는 것, 경제규모에 걸맞는 국제적 책임을 돈으로 외면하려는 것일 뿐인 수치스런 외교 정책이라는 것이다. (449쪽) 저자는 “일본은 미국이 준 (심지어 영어로 초안이 마련되고 일본어로 번역된) 헌법을 찢어버리고 자기 손으로 헌법을 만들어 새출발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무엇이든 스스로 결정해야 할 때가 왔다는 것이다. (454쪽)

자주독립국이 자신들의 국가정체성을 스스로 세워나가야 한다는 저자의 주장은 어쩌면 당연한 말이다. 하지만 과거사 문제가 청산되기는커녕 친일파가 다시 부활한 듯한 우리의 현실 속에서, 우리는 평화헌법을 어떻게 보아야 할까? 일본의 딜레마임과 동시에 우리의 딜레마가 아닐까?

우리에게 일본은 무엇인가?
일본드라마, 음악, 소설, 만화 등에 열광하면서 동시에 일본인을 쪽바리라고 서슴없이 폄훼하는 우리, 일본의 경제력과 저력을 가장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우리에게 일본은 여전히 가깝고도 낯설다. 우리에겐 친일과 반일 두 가지 선택지밖에 없는 듯 보이기도 한다. 동시에 우리는 민족주의자가 극단적인 친일인사로 변모하는 것(조선시대 말에서부터 지금도)을 너무도 자주 목격한다. 이런 극단 사이의 횡단을 피하는 길은 반민족적인 친일과 극단적인 반일 이전에 필요한 지일(知日)이 아닐까. 『일본의 재구성』은 오늘의 일본, 우리와 비슷한 고민을 하고 사는 일본인들을 색안경 없이 만날 수 있는 좋은 기회이자 우리와 공유하는 많은 문제들을 우리보다 먼저 겪고 있는 일본의 모습은 우리를 되짚어 볼 수 있는 거울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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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om Library Journal
Smith, a journalist (New York Times, International Herald Tribune), attacks the view of Japan held by most Americans. Articulated best by Edwin O. Reischauer (The Japanese, 1977; updated as The Japanese Today, LJ 1/88), it sees the Japanese as "our hard-working, uncomplicated, compliant friends." This view, argues Smith, glosses over many unattractive things about Japan, including the subservient position of women, violence in the educational system, poverty in rural areas, and undue stress in the workplace. Smith believes that by acting as apologists for Japan, Reischauer and others in what has become known as the Chrysanthemum Club have failed to allow the Japanese their own past. After examining Japanese history, society, and culture, Smith sees the Japanese "re-creating themselves, making themselves anew." This will allow them to see themselves as they actually are. A thoughtful work; highly recommended.?William L. Wuerch, Micronesian Area Research Ctr., Univ. of Guam
Copyright 1997 Reed Business Information, Inc. --This text refers to an out of print or unavailable edition of this title.

 

출처: http://www.amazon.com/gp/product/product-description/0679745114/ref=dp_proddesc_0?ie=UTF8&n=283155&s=book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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