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이지

2009년 3월 17일 화요일

어린이에게 나온 것이니 모두 어린이에게 돌려주라

권정생 선생께서는  "어린이에게 나온 것이니 모두 어린이에게 돌려주라"는 뜻을 남겼습니다. 그 뜻은 높고 높습니다. 그 뜻은 저처럼 어리숙하고 어리석은 사람으로서는 그 발끝에도 가까이 하기 어려울 만큼 잡된 것이 섞이지 않은 마음입니다. 권정생 선생은 속된 세상을 살았으되, 속되지 않았던 분이었습니다.

 

권정생 선생의 유언을 오늘 다시금 읽어보았습니다. 선생은 유언장에 남긴 것처럼 "용감하게" 죽었습니다. 부럽습니다.

 

그리고 이십대 청년으로 다시 태어나 어느 아가씨와 재미나게 연애하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상상해봅니다. 혹시 주변에 어여쁜 아가씨 앞에서 쑥스러워하며 싱거운 웃음을 짓는 이가 있다면 얼굴을 한번 보아주시기를 바랍니다.

 

쑥스러워하는 청년,  바로 그이가 권정생 선생일지도 모릅니다.  

 

-------------------------------------------------

내가 죽은 뒤에 다음 세 사람에게 부탁하노라


 

  1. 최완택 목사, 민들레 교회
  이 사람은 술을 마시고 돼지 죽통에 오줌을 눈 적은 있지만 심성이 착한 사람이다.


 

  2. 정호경 신부, 봉화군 명호면 비나리
  이 사람은 잔소리가 심하지만 신부이고 정직하기 때문에 믿을만하다.


 

  3. 박연철 변호사
  이 사람은 민주 변호사로 알려졌지만 어려운 사람과 함께 살려고 애쓰는 보통 사람이다. 우리 집에도 두세 번 다녀 갔다. 나는 대접 한 번 못했다.


 

  위 세 사람은 내가 쓴 모든 저작물을 함께 잘 관리해 주기를 바란다. 내가 쓴 모든 책은 주로 어린이들이 사서 읽은 것이니 여기서 나오는 인세를 어린이에게 되돌려 주는 것이 마땅할 것이다.   만약에 관리하기 귀찮으면 한겨레신문사에서 하고 있는 남북어린이 어깨동무에 맡기면 된다. 맡겨 놓고 뒤에서 보살피면 될 것이다. 유언장이란 것은 아주 훌륭한 사람만 쓰는 줄 알았는데 나같은 사람도 이렇게 유언을 한다는 것이 쑥스럽다.
  앞으로 언제 죽을지는 모르지만 좀 낭만적으로 죽었으면 좋겠다. 하지만 나도 전에 우리 짐 개가 죽었을 때처럼 헐떡헐떡 거리다가 숨이 꼴깍 넘어가겠지. 눈은 감은 듯 뜬 듯 하고 입은 멍청하게 반쯤 벌리고 바보같이 죽을 것이다.
  요즘 와서 화를 잘 내는 걸 보니 천사처럼 죽는 것은 글렀다고 본다. 그러니 숨이 지는 대로 화장을 해서 여기 저기 뿌려 주기 바란다.
  유언장 치고는 형식도 제대로 못 갖추고 횡설수설 했지만 이건 나 권정생이 쓴 것이 분명하다. 죽으면 아픈 것도 슬픈 것도 외로운 것도 끝이다. 웃는 것도 화내는 것도, 그러니 용감하게 죽겠다.
  만약에 죽은 뒤 다시 환생을 할 수 있다면 건강한 남자로 태어나고 싶다. 태어나서 25살 때 22살이나 23살쯤 되는 아가씨와 연애를 하고 싶다. 벌벌 떨지 않고 잘 할 것이다. 하지만 다시 환생했을 때도 세상엔 얼간이 같은 폭군 지도자가 있을 테고 여전히 전쟁을 할 지 모른다.
  그렇다면 환생은 생각해 봐서 그만 둘 수도 있다.


  2005년 5월 10일 쓴 사람 권정생
  주민등록번호 370818-*******
  주소 경북 안동시 일직면 조탑리 7

 

--------------------------------------------------------------------

한겨레 신문에 '권정생어린이문화재단'이 출범한다는 소식이 올라왔습니다. 반갑게 옮겨놓습니다. 어여쁜 아가씨 앞에 앉은 청년처럼, 쑥스러워하며, 또 싱겁게 웃으며 좋은 일 많이 하시기를 멀리서나마 기원합니다. 일을 꾸리느라고 아마도 안상확 시인께서 수고 좀 하셨을 것입니다. 앞으로도 계속 수고해주십시오.



원문출처: http://www.hani.co.kr/arti/society/life/344658.html

 

 

» 권정생어린이문화재단 현판

 

아동문학가 권정생 선생의 뜻을 기리는 권정생어린이문화재단이 19일 경북 안동시 명륜동 재단 사무실에서 현판식을 열고 본격 활동에 들어간다. 현판(사진) 글씨는 선생의 유언장과 소설 <한티재 하늘> 원고에서 집자를 하고, 판화가 류현복씨가 판각을 했다.

 

재단은 “어린이들이 사서 읽는 것이니 거기서 나온 것을 모두 어린이들에게 돌려주라”는 선생의 유언을 실천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선생은 유언장에서 “심성이 착한 사람인 최완택 민들레교회 목사, 잔소리가 심하지만 정직하기 때문에 믿을 만한 정호경 신부, 어려운 사람과 함께 살려고 애쓰는 보통 사람 박연철 변호사” 등 3명에게 뒷일을 부탁했다. 이 3명 가운데 정 신부만 건강상 이유로 빠지고 대신 이현주 목사, 아동문학가 강정규씨, 최윤환씨 등이 합류해 5명으로 이사진이 꾸려졌다.

선생이 남긴 10억여원의 유산과 앞으로 나올 모든 인세는 재단기금이 돼 남북한과 분쟁지역 어린이들을 돕는 사업에 쓰이게 된다. 선생이 살던 옛집은 조만간 보수해 선생의 2주기 때부터 작가들의 체험·창작 공간으로 활용할 예정이다.

재단의 안상학 사무처장은 “물질적인 도움보다는 불우한 어린이들이 삶을 주체적으로 살 수 있도록 정신적으로 북돋우는 사업을 고민하고 있다”고 밝혔다.

재단은 선생의 2주기인 5월 17일 안동시 조탑동 선생의 옛집과 안동 일원에서 다채로운 행사를 준비할 계획이다.

안동/박영률 기자 ylpak@hani.co.kr

 

----------------------------------------------------

 

*오늘 사무처를 내방해주신 문학평론가 손경목 선배께서 앞으로 블로그에 글을 쓸 때, 누구의 글인지 분명하게 구분되도록 글에 색깔을 입히라고 꾸지람을 주셔서, 이후에는 그렇게 하겠노라고 아뢰었습니다. 색깔을 입힌 글, 너그러이 보아주시기를. 제가 선택한 색깔은 녹색입니다.  

댓글 없음: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