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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3월 28일 토요일

일제히 창의적이 되자?

민들레가 10주년이 되어 오는 3월 14일, 상암동 마포구청 대강당에서 피아니스트 임동창 씨를 모시고 10주년 잔치 한마당을 한다고 알려왔다. 현병호 선생이나 김경옥 선생이 보고 싶다. 자신의 이야기는 느리게 말하고 다른 사람의 이야기는 온전히 마음 깊이 새겨듣는 분들이다.

 

벌써 10년이 되었다. 민들레의 누리집(http://www.mindle.org/)에 오랜 만에 들어갔다 왔다. 현병호 선생의 칼럼을 읽는다. '일제히 창의적이 되자?'라는 제목의 글이다.

 

"스스로 서서 스스로 살리는 교육"의 가능성을 조금이라도 열어가려고 애쓰시는 분들의 노력에 경의를 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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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정상화를 애타게 그리워하는 어르신들이 이제 애들을 좀 ‘잡아야’겠다고 생각했는지, 일제고사를 부활시켰다. 같은 시간에 전국의 같은 학년이 같은 문제로 일제히 보는 일제고사. 꽤나 유서 깊은 물건인데, 역시 너무 낡았던지 그 ‘일제히’에 그만 구멍이 났다. 서울 지역의 초등학생 가운데 일제고사를 거부하고 체험학습 떠난 아이들이 160명에 이르고, 중학생은 150여 명이 거부했다.

수백만 명 중 불과 삼백여 명만이 시험을 거부했지만, 실제로 사보타지 수준의 거부를 한 아이들 수는 수십만 명에 이른다고 봐야 한다. 초등 아이들의 경우 시험이 뭔지도 모르고 본 아이들이 허다하고, 중학생들의 경우도 상위권 아이들-학급에서 10등까지-말고는 진지하게 시험을 본 아이들이 거의 없는 실정이다. 답안지에 자를 대고서 같은 번호에 죽죽 선을 긋고 엎드려 자는 아이들도 부지기수다. 중위권 아이들의 경우도 아는 문제만 풀고 모르는 문제는 애써 찍지도 않고 대충 답안지를 메우고 남는 시간은 엎드려 잔다고 한다. 내신에 반영되지도 않는 시험 성적에 연연해하지 않는 것이다.

그런데 단막극으로 끝날 듯하던 이 사건이 최근 2막으로 이어지고 있다. 제1막 ‘일제고사 거부’가 끝나고서 몇 달이 지난 다음에야 오른 2막의 주제는 ‘교사 징계’다. 1막으로 끝내기엔 뭔가 찜찜했던가 보다. 2막은 주인공도 바뀌고 연출자도 바뀌었다. 1막이 주연-아이들, 연출-학부모였다면, 2막은 연출-서울시교육청, 주연-교사로 막이 올랐다. 일제고사 대신 체험학습 가는 것을 허락했다는 죄목(?)으로 7명의 교사를 해임 또는 파면한 것이다.

2막은 1막보다 더 드라마틱하다.(역시 서울시교육청의 연출력은 학부모들보다 뛰어나다.) 시교육청은 교사들이 징계 다음날부터 나오지 않도록 해당 학교에 해임통보서를 징계 당일 반드시 전달하도록 주문해서, 어떤 교사는 밤 9시에 해임통보를 전달받기도 했다. 아마도 이튿날 시끄러워지는 것을 어떻게든 막아보려는 연출자의 치밀한 계산이었던가 보다. 하지만 교사들은 이튿날 모두 출근해 아이들과 동료 교사들에게 마지막 인사를 건네고서 눈물을 훔치며 교문을 나오고, 아이들과 부모, 동료들은 해임 결정이 부당하다고 징계 철회를 요구하는 시위를 대대적으로 벌이고 있다.

일제고사 부활은 명목상으로 학습부진아를 찾아 지원하고 전체 학생들의 학력을 높이기 위한 것이라고 한다. 하지만 굳이 일제고사를 치르지 않더라도 학습부진아는 담임교사가 파악하고 있기 마련이다. 날마다 만나는 아이를 파악하지 못한다면 그건 교사의 능력 부족이니 교사 교육을 강화할 일이다. 사실상 일제고사는 아이들에 대한 통제력을 회복하기 위한 조치라고 보는 것이 정확할 것이다. 교사를 해임한 것은 바로 그 연장선에 있다고 볼 수 있다. ‘국가공무원’ 주제에 국가 시책에 거스르는 행동을 하다니, 용서할 수 없는 ‘범죄’를 저지른 셈이다.(성추행을 한 교사는 감봉 3개월 처분을 한 전례에 비춰 보건대, 범죄에 대한 교육청의 ‘교육적’ 관점이 새삼 궁금해진다.)

해임의 이유로 명령 불복종을 명시한 것은 그나마 정직한 처사였다. 사실 아이들을 잡으려면 먼저 교사를 잡는 것이 당연한 수순이다. 눈엣가시 같던 전교조를 길들이기 위한 희생양으로 삼은 것일 수도 있다. 역사교과서를 입맛대로 수정하듯이 교사들을 입맛대로 길들이지 않고는 체제 유지 또는 개편이 힘들다고 판단했을 것이다. 하지만 머지않아 깨닫게 되리라. 밥줄이 걸려 있는 교사는 잡을 수 있을지 모르지만 아이들은 잡을 수 없다는 것을. 아이들은 이전 모습으로 돌아가기에는 너무 멀리 와버렸다.
아마도 어르신들은 아이들이 시험을 거부할 수 있다는 걸 상상도 못했을 게다. 일제고사라면 누구나 가슴 졸이면서 고개 처박고 한 문제라도 더 맞추려 애를 쓰는 것이 당연한 것인 줄 아는 ‘교육자’들은 비록 몇 백 명일지라도 일제고사를 일제히 거부했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을 것이다. 게다가 시험치기를 장난치듯 하는 아이들을 보면서 아마도 어르신들은 또 대책을 강구하실 게다.

시험 성적이 내신에 반영되도록 하면 아이들이 시험을 제대로 볼까? 그럼 학력도 따라서 높아질까? 수십 억 예산을 들여 이런 시험을 치르는 교육당국의 교육관을 탓하기 이전에 현실파악 능력에 의문을 갖지 않을 수 없다. 시험지 몇 장으로 아이들을 잡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걸까? 아이들을 잡으면 학교가 ‘정상화’되고, 아이들은 교과서를 신주단지 모시듯 하면서 학력도 따라서 높아질까? 그들이 말하는 학력이란 대체 무엇일까? 단순히 시험 잘 보는 능력을 뜻하지는 않을 게다. 21세기 교육의 으뜸 목표로 창의성을 들고 있는 걸 보면 세상 돌아가는 걸 아주 모르지는 않는 것 같다. 그렇다면 일제고사가 과연 창의력을 길러줄까?

‘일제히’와 ‘창의적으로’가 전혀 차원이 다르다는 걸 정말 모르는 것일까? 그걸 모른다면 그 ‘무개념’에 경의를 표할 일이지만, 아마도 모르지 않을 게다. 그럼에도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으려 허둥대는 것은 말하자면 정신분열 상태에 놓여 있는 거라고 볼 수밖에 없다. 잘 먹고 잘 살려면 경쟁력은 있어야겠고, 그러자면 이제는 창의적이어야 하겠는데, 말도 예전처럼 고분고분 잘 들었으면 좋겠다는 거다. 참 어려운 인재다. 이런 인재를 기르기 위해 노심초사하는 어르신들의 건강이 염려스럽고, 그들의 노고가 인재(人才) 아닌 인재(人災)만 양산하는 결과를 낳을까봐 더 염려스럽다.

_현병호(민들레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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