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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5월 5일 화요일

영근이 형

어린이날, 아침 신문에서 고 박영근 시인의 추모 기사를 읽다. 문득 밤에 울리던 전화벨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부스스 푸시시 일어나 가까운 듯 먼 듯 형의 목소리를 듣는다. 찬수, 네 찬숩니다. 찬수, 네 찬숩니다. 그렇게 몇 번인가 이름을 부르고는 시 이야기, 끊나지 않는 시 이야기. 새벽까지 이어지는 시 이야기. 시는 말이야, 시는 말이야. 시는 거기까지야. 시는 거기까지일 거야. 그런데 거기는 어디야? 응 여기는 여기지 뭐.

 

또 언젠가는 환영이 형 집에서 전화를 하곤 했다. 야 찬수. 니가 남양주 산다고 내가 남양주까지 넘어왔는데, 넘어와라. 아 그러고 보니 환영이 형이랑 함께 보자고 한 약속이 꿀꺽 어느덧 몇 년째 약속 불이행이다. 영원히 불이행이다. 영근이 형. 술은 취했지만 세상에 취하지는 않는다. 다만 취한 척한 것일 뿐. 찬수, 뭐하냐. 형 전화 받고 있잖아. 나 안 취했다. 나는 취하지가 않아. 아니 취한 거예요, 그만 마시고 잠을 좀 자요. 잠이 안 와. 잠이. 나 안 취했다.

 

귀기 어린 시 몇 편이 나를 붙잡고 놓아주질 않는다. 서가를 둘러보니 2002년 11월에 펴낸 <저 꽃이 불편하다>가 손이 잡힌다. 시집 곳곳에서 귀기 어린 목소리들이 가득하다. 내 안의 나를 불편해하는 시인의 괴로움. 죽음 너머를 나 몰래 보게 되는 접신의 읊조림. 모든 작품들에 잠복해 있는 그 목소리들. 그런데 오늘 밤 영근이 형의 전화 목소리가 듣고 싶다. 영근이 형.

 

 

북두

 

환한 대낮인데

어디선가 나도 모르는 곳에서

흐느끼는 내 울음소리를 듣는다

 

칼날 위에서조차

차마 나에게조차 할 수 없었던 말들

 

텅 빈 방 그 낯선 시간들 속에서

소스라쳐 깨어나 홀로 울고 있을

전화벨 소리를 듣는다

 

어떤 바람이 죽음을 감춘 낡은 집을 덮고

새들

북쪽 우러러 일제히 날아간 뒤

그 위로 떠오르리라

나 지쳐 돌아가 누울 곳

일곱별자리 북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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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효숙, <행상길> 목판화, 박영근의 <취업 공고판 앞에서>의 표지로 쓰였던 것. '두렁'이라는 낙관이 남겨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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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중가요를 넘어 국민적 애창곡이 된 <솔아 솔아 푸르른 솔아>의 원시 저작자가 박영근 시인이라는 사실을 알려 주세요.”  오는 11일로 3주기를 맞는 노동시인 박영근(1958~2006·사진)의 부인인 성효숙씨는 4일 낮 서울 광화문에서 기자들과 만나 이렇게 호소했다. 현장에는 소설가 겸 문학평론가 김이구씨와 박영근 시선집 <솔아 푸른 솔아>(백무산·김선우 엮음)를 내는 강출판사의 대표인 문학평론가 정홍수씨가 동석했다. 1986~7년 연세대에 재학중이던 안치환씨가 만들어 불렀던 <솔아 솔아 푸르른 솔아>는 1984년에 나온 박영근의 시집 <취업 공고판 앞에서>(청사)에 수록된 <솔아 푸른 솔아-백제 6>과 <고향의 말 4>를 비롯한 시를 변형시켜 만든 가사에 안치환씨 자신이 곡을 붙인 노래다. 그러나 1989년 노찾사 2집 음반 첫곡으로 수록될 때 이 노래는 ‘노찾사’ 이름으로 발표되었을 뿐 작사·작곡자의 이름은 따로 공개되지 않았다. 1994년 안치환씨의 1+2집 음반이 나올 무렵부터 ‘안치환 작사 작곡’으로 통용되기 시작했으며, 1998년에는 한국음악저작권협회에도 ‘안치환 작사’로 등록되었다. 지난해 가을 동료 문인들이 만난 자리에서 이 노래의 원저작자를 찾아 주자는 이야기가 나와 안치환씨 쪽에 전달되었고, 이에 대해 안씨는 공동 저작으로 하자는 제안을 해 왔으나 유족이 동의하지 않자 올 1월께 일방적으로 한국음악저작권협회에 공동 저작자로 등록해 놓았다고 성효숙씨는 밝혔다. 한편 9일 오후 2~5시 인천 배다리 아벨서점 시다락방과 ‘허물어진 삶터’에서는 박영근 3주기 추모 심포지엄과 공연이 열린다. 문학평론가 고영직·이성혁·유성호씨가 발표하며, 안현미·박철·신현수 시인 등의 시낭송과 노래패 꽃다지의 공연 등이 이어진다. 최재봉 문학전문기자 bong@hani.co.kr,

 

*기사 출처: http://www.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353214.html

 

1958년 9월 3일 전북 부안군 산내면(현 변산면) 마포리 산기마을에서 부 박창기(朴昌基)와 모 이옥례(李玉禮)의 2남 1녀 중 막내로 태어남.

1964년(6세) 부안군 산내면 마포국민학교 입학.

1968년(10세) 부모님의 교육에 대한 열의로 국민학교 5학년 때 전북 익산으로 전학함. 익산시 평화동 셋째이모 집에 거주.

1974년(16세) 익산 남성중학교를 졸업하고 전주고등학교에 입학, 전주에서 하숙생활 시작함. ‘홈룸’시간에 시국에 관한 발언으로 학교에서 요주의 인물이 됨. 학교 도서관에서 많은 책을 읽고 고향 친구와 선배 집에서 김지하 고은 황석영 이호철 최일남의 작품과 『창작과비평』 『사상계』 등을 탐독함. 더이상 억압적인 학교생활이 불필요하다고 판단하여 자퇴. 문학을 하겠다는 꿈을 품고 상경하여 이후 1년 동안 당시 교사로 근무하던 형 박정근의 집(성동구 능동)에서 생활함.

1975년(17세) 고등학생 문학써클 모임에 오봉록 등과 함께 참여하고, 전주 풍년문화원을 빌려 시화전 개최. 쏘비에뜨 혁명 등을 빗댄 창작시 때문에 경찰조사, 가택수색을 당함. 김지하의 『오적』을 소지한 혐의로 보안대에서 조사받음. 종로 보신주단을 빌려 개최한 시화전에 참여.

1976년(18세) 『학원』 4·5월호에 시 「눈 1」 「눈 2」가 입선작으로 수록.

1976~78년(18~20세) 종로에서 민청학련 관련인사 김기선을 만나 홍영표(이후 노동운동에 투신, 대우자동차에서 해고됨), 박형규(이후 하늘땅출판사 설립) 등과 함께 리영희의 『8억인과의 대화』 『우상과 이성』 등을 읽으며 민주화운동에 관한 토론모임을 가짐.

1977~79년(19~21세) 양천구 신정동 뚝방촌에서 생활. 인천 동일방직 노동자들과 토론 등을 통해 교류. 종로 초동교회에서 청년회 활동을 하며 교회 내 대학회지에 시와 문학비평문 등을 기고. NCC(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를 비롯해 민주화를 바라는 기독교 및 재야인사들의 모임에 참여함. 대학연합문학써클 ‘청청(靑靑)’에 참여해 시창작 활동을 하고, 시화전 등을 개최함.

1981년(23세) 군 제대 후 민중문화운동, 민중신학, 학생운동, 기독교계 관련인사 등 각계각층과 교류하며 신촌에서 쌀가게를 운영함. 동인지 『말과힘』을 발간. 『반시(反詩)』 6집에 시 「수유리에서」 등을 발표하면서 등단함. 1970~80년대 노동운동을 정리하는 프로젝트에 참여하면서 성효숙을 만남.

1982~83년(24~25세) 구로3공단 삼립빵공장 부근에 살면서 3공단 등지의 제본회사, 곤로회사 등에 취업. 권오광 등 학생운동, 노동운동계의 벗들과 교류함.

1983~85년(25~27세) 구로동과 철산리 산동네에서 생활하며 고(故) 조영관 시인 등을 만나고 노동운동가, 민중문화운동가 들과도 교류함. 노동자 생활이야기를 쓴 첫번째 산문집 『공장옥상에 올라』(풀빛 1983) 출간. 마포 아현동 애오개소극장에서 미술동인 ‘두렁’을 비롯해 정희섭 김영철 김원호 등과 교류하면서 홍제동 성당, 성문밖교회 등에서 열린 각종 문화행사와 집회에 참여. 시국집회에서 현장시를 낭송하기도 함.

1984년(26세) 청계피복 노동자들과 교류하며 동대문 근처에서 소모임을 가짐. 민중문화운동협의회 회원으로 활동하며 시국집회와 철야농성 등에 참여함. 신경림 임진택 정희성 김정환 이영진 하종오 등과 함께 민요연구회를 창립하고 창립간사로 일함. 첫시집 『취업공고판 앞에서』(청사) 출간. 이해 12월부터 1987년까지 자유실천문인협의회 재창립회원으로 김정환 김사인 김남일 고(故) 채광석 등과 함께 활동함.

1985년(27세) 고(故) 김도연이 설립한 공동체출판사 편집위원으로 활동함. 노동문화패들과 함께 인천 5·3항쟁에 참여함. 이해 가을 근거지를 부평으로 옮긴 ‘두렁’의 성효숙과 함께 산곡동으로 이사함.

1986년(28세) 강형철 김형수 이산하 안수철 등과 함께 학습소모임을 가지고 활동함.

1987년(29세) 인천 보르네오가구 등에 생산직으로 취업. 유월항쟁과 노동자대투쟁 관련 집회에 참여함. 두번째 시집 『대열』(풀빛) 출간.

1987~89년(29~31세) 민중문화운동연합 회원으로 활동. ‘두렁’과 함께 박종철 열사에 대한 영상제작에 참여함.

1989~90년(31~32세) 인천과 서울을 오가며 노동자문화예술운동연합에서 김정환 이용배 문승현 등과 함께 활동하면서 영화분과 일을 맡음. 하늘땅출판사 편집위원, 잡지 『예감』 편집위원으로 활동함.

1993년(35세) 부평 산곡동에서 부평4동으로 이사하여 2005년 11월까지 생활함. 세번째 시집 『김미순傳』(실천문학사) 출간.

1994년(36세) 노동과 현실에 투철한 문학정신을 평가받아 제12회 신동엽창작상을 수상함.

1995년(37세) 송성섭(풍물) 허용철(미술)과 함께 인천민예총 창립.

1997년(39세) 네번째 시집 『지금도 그 별은 눈뜨는가』(창작과비평사) 출간.

1998년(40세) 12월 신현수 이경림 이세기 등과 함께 민족문학작가회의 인천지회를 창립하고 2000년까지 부회장으로 일함.

1999~2002년(41~44세) ‘인천문화를 열어가는 시민모임’ 창립회원으로 최원식 박우섭 이남희 김창수 등과 함께 활동함. 인천민예총 사무국장으로 일하며(2000~2001), 강광 이종구 등과 함께 활동함.

2002년(44세) 다섯번째 시집 『저 꽃이 불편하다』(창작과비평사) 출간, 이 시집으로 2003년 제5회 백석문학상을 수상함.

2002~2006년(44~48세) 인천민예총 부지회장(2002~2005), 민족문학작가회의 시분과위원장(2004~2005), 민족문학작가회의 이사(2002~2006) 역임. 산문집 『오늘, 나는 시의 숲길을 걷는다』(실천문학사 2004) 출간. 2004년 8월 몽골에서 진행된 ‘한·몽 시인대회’에 이시영 고형렬 김용락 한창훈 김형수 등과 함께 참가함. 2005년 11월 인천 용현동으로 이사함.

2006년(48세) 5월 11일 오후 8시 40분 결핵성 뇌수막염과 패혈증으로 타계.

 

약력 출처: 오도엽 시인의 블로그 http://blog.jinbo.net/odo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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