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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6월 23일 화요일

`나의 죽음을 기억함`

가능하면 제 블로그에 다른 사람의 글을 퍼오는 것, 이른바 '펌질'을 하지 않으려고 마음 먹었습니다만, 오늘은 '펌질'을 해야 할 듯싶습니다. 용서해주시기 바랍니다.

 

국민적 관심사가 되어버린(정말 '되다' 그리고 '버렸다'는 느낌, 즉 '되어버렸다'는 느낌) 어느 방송사의 작가 이야기입니다. 김은희라는 사람의 이야기입니다.

 

오늘 이 여인의 글을 읽어습니다. 참으로 안타깝습니다. 제가 뭐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하지만 그 여인의 반대편에는 너무도 막강한 권력체들이 버티고 있기에 제 블로그라도 그이를 위로해야 할 것만 같아 '펌질'을 무릅씁니다.

 

그 어떤 법적인 결말 같은 것, 그런 것은 최근 퇴임한(퇴임할 수밖에 없다는) 검사 나리님에게 물어보시기 바랍니다. 법이 무너지고 또 무너지고 '법치'는 거의 흉기로 변해버린 듯한 느낌입니다. 사회적으로 우리가 최소한 지켜야 하는 마지노선이 무너진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뿐입니다. 언론사도 이제 거의 '막장' 분위기입니다. 청와대 대변인의 브리핑을 '막장 브리핑'이라는 수사를 달고 보도하는 기사도 있더군요. 정말 끝까지 가는 겁니까?

 

이래서는 안 되는데, 이래서는 안 되는데, 하는 말을 계속 되뇌고 있습니다. 2009년 6월 22일 국회를 개원하고야 말겠다는 집권여당의 '고뇌에 찬' 결단을 보면서, 갑자기 제 뇌리에는 1933년의 일이 떠올랐습니다. 히틀러 통치 하의 이른바 국회 방화사건이 떠올랐습니다. 이제 국회도 '눈치' 같은 것, '염치' 같은 것은 아랑곳하지 않는 곳이 될 것만 같습니다,.

 

최근 먼 곳에 떨어져 있는 제 벗은 '촌티'를 이야기했습니다. 신 정부의 '인사'를 보니, 정말 '촌티'가 난다는 것이었습니다. 특히 한국예술종합학교 사태를 보면 너무 '촌티'가 나지 않느냐는 것이었습니다. 

 

"이번에 한국예술종합학교의 황지우 총장을 쫓아내는 것을 보니, 진중권의 말대로 완장 찬 용식이가 자전거를 타고 지게 작대기를 휘둘러대는 꼴이다. 쫓아내는 것까지는, 굳이 이해를 해주자면 할 수가 있겠다. 그 핑계가 너무 웃긴다. 예술종합학교에 코미디과를 신설하겠다는 것도 아니고, 고도의 지적 논리로 운영되어야 할 예술학교에서 "상부에 보고 않고 (주말을 이용해) 외유갔다"는 것을 징계 사유로 내세웠다는 뉴스를 보면서, 화가 나다가 웃음이 나다가, 나중에는 좀 허무하고 쓸쓸했다. 이건 허무 개그였다."(원문출처: http://bomnamoo0420.tistory.com/)

 

정말 허무한 개그입니다. 하지만 무서운 개그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촌티'가 아닙니다. '염치'조차 없어진 지 오래입니다. '염치'와 '촌티' 사이의 그 간극은 북극과 남극만큼 아득합니다.

 

아득합니다. 앞으로 가야만 하는 길, 살아야 할 길, 그 길이 아득합니다.

정말 숨이 턱턱 막히는 나날입니다.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원본크기로 보실수 있습니다.
김은희 작가
*사진출처: http://www.mediatoday.co.kr/news/articleView.html?idxno=80694 

 

아래 원문출처:

http://www.mbcwriter.com/mbcboard/view.php?id=board01&page=1&sn1=&divpage=1&sn=off&ss=on&sc=on&select_arrange=headnum&desc=asc&no=368

 

 

이름 : 김은희 2009-06-22 14:37:02, 조회 : 218, 추천 : 0



후아-

먼저 심호흡부터 하고 시작해야겠습니다.
가만히 있어도 숨이 탁탁 막히는 나날입니다.

태어나 이렇게 많은 전화와 문자를 받은 적도 처음입니다.
통화를 하고 있는 중에도 쉴 새 없이 전화와 문자가 들어오는 경험을 하며
처음엔 그저 어리둥절했고, 나중엔 신기했습니다.
내게 현실을 실감하게 해준 것은 바로 그런 전화와 문자들이었습니다.

‘부엉이 바위는 꿈도 꾸지 마’ 라는 문자도 있더군요.
‘딴 생각 못하시게 옆에서 잘 감시하래요.’ 후배작가가 말했습니다.
‘별일 아닌 것처럼 보낼 수 있지? 은희야. 그럴 수 있지?’
속상해 술을 마시고 들어온 선배언니가 내 손을 붙잡고 몇 번씩 같은 말을 했습니다.
‘며칠만 지나면 과거가 될 거예요. 견디고 버티세요.’ 지인이 메일을 보내주었습니다.
가장 많이 들었던 말은 이 두 개의 문장이었습니다.
‘밥은 꼭 챙겨먹어. 잠은 꼭 자고.’
‘기사도 댓글도 절대 보지 마라.’

외면하려 애쓰지만 잘 안 되는 경우들이 있지요.
누군가에게 마음을 뺐기는 경우가 그렇듯.

내 손끝이 만들어낸 사소한 문장들이
악의와 음모를 가진 누군가의 손에 들어가면
나를 찌르는 섬뜩한 흉기가 될 수도 있음을 알았습니다.

사람 하나 짓밟는 것쯤 눈 하나 깜짝 안 하는 이들을 보며
‘살의’라는 단어 이외의 표현은 생각나지 않더군요.
글로 사람을 죽일 수 있다는 말, 이제 나는 믿을 수 있습니다.

어쩌다 이렇게 됐을까요. 어쩌다.
가족들이 걱정할 만큼 일밖에 모르고
일이 끝나면 사랑하는 조카들과 노는 것을 가장 큰 행복으로 아는,
그저 말보다 글을 좋아하고
이런저런 상념을 글로 남기는 것을 지친 일상의 위안으로 삼아온
30대 평범한 대한민국의 여성이
어쩌다 졸지에 국가 전복의 음모를 가지고 국민들을 선동한
대단한 반정부적 인사로 낙인찍혔을까요.
어쩌다 촛불집회 군중들 뒤에서 음흉하게 키득거리는 마녀가 되었을까요.
부엉이 바위로 보내고 국민장을 치러야 한다는 저주를 받게 되었을까요.

그러나, 괜찮습니다.
부끄러워해야 할 사람은 제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제가 받은 치욕과 상처는 시간이 지나면 조금씩 치유될 것입니다.
그러나 부끄러움은 쉽게 치유되기 어려운 트라우마를 남기기 마련이지요.
부끄러움을 아는 자들이라면, 저보다 더 긴 시간을 보내게 될 것입니다.

지치고 힘든 하루를 보낸 밤, 나는 이런저런 상념을 글로 쓰거나
주변사람들에게 써 보내며 마음을 추스르곤 했습니다.
일상에서 겪은 소소한 일들과 살면서 겪게 되는 불만들과 만난 사람들과 훌쩍 떠난 여행기와 허무맹랑한 공상과 우스꽝스러운 농담이 있었습니다.
어떤 날은 골목길에서 마주친 파지 할머니를 두고 몇 장의 글을 썼고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음악 한 곡, 빗소리, 신문기사 하나로도 밤을 지새웠습니다.
그 많은 글들 중엔 남들이 봐서는 안 되는 사생활도 들어있었습니다.

누구나 상념이라는 것이 있지요.
공적인 영역에서 일하며 공적인 언어만을 써야 하는 방송작가이기에
할 수 없는 말, 쓸 수 없는 얘기들이 있습니다.
개인 김은희가, 지극히 사적인 언어로 쓴,
단 한 사람에게만 읽도록 허락한 글들이었습니다.
상대와 나의 말투, 글투, 성격, 관계가 녹아있는 글들이었고
농담도 과장도 정제되지 않은 표현들도 있었습니다.
모두 내가 잘 알고 나를 잘 아는 지인들에게 보낸 개인 서신들이었기에
따로 설명할 필요가 없는 문장들이었습니다.

그것을 다른 누구도 아닌 검찰이 강제로 헤집고 들여다봤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나는 잠을 이루지 못할 만큼 고통스러웠습니다.
그런데, 검찰은 그것을 ‘작가 김은희’의 글로 세상에 공개했습니다.
그것도 수많은 메일 중, 수 천 수 만 개의 문장 중
정치적으로 활용하기 좋은 문장들만 짜깁기해서 말이지요.
개인적인 상념이 대중들에게 공개된 순간,
그것은 설명하고 해명해야 할 것이 되어버렸습니다.

어떤 기자가 ‘필이 꽂히다’라는 표현에 대해 묻더군요.
필이 꽂히지 않으면 일을 할 수 없을 만큼 힘든 게 작가의 일이고
기자들이 그렇듯 시사 프로그램 작가들 역시
우리 사회의 큰 이슈, 중대한 사안일 경우 더 필이 꽂히기 마련이라고
나는 ‘설명’해야 했습니다.

‘광적으로’ 일을 했다는 표현을 문제 삼았더군요.
광적으로 일한다는 것이 ‘열정’의 또 다른 표현이며
사생활도 뒤로 할 만큼 프로그램에 올인하는 것이
이 거친 방송계에선 작가의 ‘미덕’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대체 어떻게 납득시켜야 할 지 모르겠습니다.

저는 최근에 배우 김명민에게 ‘필이 꽂혔고’
그가 출연한 드라마며 영화들을 편집실에 모아두고
며칠 밤을 새워 ‘광적으로’ 수백 권의 테잎을 보았습니다.
그렇게 ‘김명민은 거기 없었다’를 구성하고 대본을 썼습니다.

메일 계정 안에 모아두었던 수백 페이지의 메일 중
시국 관련이나 정치적인 것으로 읽힐 수 있을 만한 내용은
검찰이 공개한 그것이 거의 전부였습니다.
그것도 앞뒤 맥락과 취지가 모조리 왜곡된 채로 공개됐고, 활용되고 있습니다.
검찰에서 저는 그 문구들의 맥락과 취지에 대해 설명하기를 거부했습니다.
제가 메일을 읽도록 허락한 단 한 사람 외에
누구도 그에 대한 설명을 내게 요구할 권리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국가 기관과 거대 언론사로부터 일방적 ‘폭력’을 당한 한 개인이
할 수 있는 유일한 저항의 방법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말해야겠습니다.
검찰이 멋대로 발췌해 공개한 문구들에 대해 경위를 설명해야 하는 상황이
참으로 어처구니없지만, 비록 ‘개인 김은희’는 짓밟히더라도
‘작가 김은희’가 열정을 다해 만들었던 프로그램의 정당성까지
함부로 훼손되고 공격받는 것만은 참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공개된 메일 문구들이 훌륭하다고는 말 못하겠습니다.
만약 그것이 ‘작가 김은희’의 글로 어딘가에 공개되고
다른 누군가 읽게 될 것이라 생각했다면
같은 내용이라도 그렇게 쓰지는 않았겠지요.
그러나 그 문장들이 담고 있는 나의 ‘상념’은 분명히 앞뒤 맥락과 경위가 있었고
검찰은 나의 ‘진의’를 왜곡하고 거짓말을 했습니다.

그러나 설사 내용이 그보다 더한 것이라 해도
그것이 피디수첩 보도 내용의 진실성을 훼손할 수는 없습니다.
개인 상념이 무엇이든, 방송 프로그램은 방송 프로그램의 제작 시스템과 보도방식이 있고
시사 프로그램은 ‘사실 취재’를 바탕으로 하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김은희 개인을 짓밟고 죽여도
‘미국산 쇠고기의 광우병 위험성과 정부의 졸속협상’이라는 진실은 달라지지 않습니다.

검찰은 나의 이메일 공개가 ‘범죄의 의도’ 입증 차원에서 꼭 필요하다고 주장했더군요.
달리 말해 광우병 프로그램 자체가 하나의 '범죄' 또는 '불법 행위'라는 것인데,
그렇다면 피디수첩 보도가 범죄, 불법행위가 아닌 것으로 판명될 경우
나의 이메일 공개에 대한 책임을 지겠다는 의미이겠지요?
아마도 그렇게 될 것입니다.


나의 벗이 내게 일러주었습니다.
검사가 아무리 힘이 세도, 한 인간의 진실을 모조리 부정할 만큼의
대단한 권력을 가지고 있진 않다고.
이 경우 우리가 기대야 할 것은 언제나 진실과 진정이라고.

김은희 개인은 보잘 것 없지만
진실과 진정의 힘은 그렇지 않습니다.

격려와 응원, 늘 마음에 새기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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