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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6월 3일 수요일

달팽이와 김환영

환영이 형

 

형의 시를 읽었어요. 보고 싶습니다.

 

시 같지도 않은 시를 시라고 발표하는 '거지보다 많은 시인의 세상'에서

우리는 지금도 여전히 숨을 호흡하며 살고 있지요.

 

형이 보고 싶어요.

얼마 전 영근이 형 기일에 언뜻 형을 생각했더랬어요.

 

그러다 오늘 <창비어린이>(2009년 여름호 통권 25호)를 읽다가 형의 시를 만났지요.

반갑고 미안했어요.

 

 

달팽이 집

 

 

                                        김환영(화가)

 

달팽이는 날 때부터

집 한 채씩 지고 왔으니,

 

월세 살 일 없어 좋겠습니다!

전세 살 일 없어 좋겠습니다!

 

몸집이 커지면

집 평수도 절로 커지니,

 

아사 갈 일 없어 좋겠습니다!

사고팔 일 없어 좋겠습니다!

 

뼛속까지 얼어드는

엄동설한에,

 

쫓겨날 일 없어 좋겠습니다다!

불 지를 놈 없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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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기 전에 한 번!

만날 날이 있겠지요?

정말?

그런 날이 올런가?

.......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원본크기로 보실수 있습니다.
*사진출처: www.changbi.com/author/content.asp?pAID=06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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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시간으로 오라



가평으로 들어온 지 꼭 10년이다. 옛날식으로 말한다면 강산이 한번 변했다. 요즘 식으로 말한다면 강산이 물구나무섰다고 해야 하나.

연고도 계획도 없이 빈집에 들어와 살기 시작했다. 무작정이었다. 짐이라야 빠렛트와 물감과 종이, 그리고 이불 한 채에 밥그릇 정도. 130만원 빌려 집값을 치뤘다.

처음 빈집에 들어왔을 때, 마루 벽 괘종시계가 멈춰 있었다. 태엽 감으려고 시계를 내리는데 머리 위로 지푸라기와 흙이 쏟아졌다. 시계 윗면에 새가 둥지를 튼 것이다. 아. 둥지 속 그림처럼 들어있던 앙징맞은 박새알 여섯. 흙벽마다 벌들이 구멍을 내어 살고 있었고 끈적거리는 거미줄이 얼굴을 휘감았다. 무릎까지 풀이 솟은 마당에는 율메기가 배를 밀며 사라지곤 했다. 시계가 멈춘 것이 아니라, 인간이 멈춘 공간이었다.

나는 모든 게 서툴렀다. 무엇 하나도 올바로 할 줄 아는 게 없었다. 하지만 모든 게 새롭고 놀라웠다. 그래서 행복했다. 사람들과 일정한 거리를 두고 사는 일도 행복이었다. 무엇보다 자연과 더불어 사계절을 살 수 있는 건 더할 나위없는 축복이었다.

아침이면 띠살문 한켠 애들 손바닥만한 유리로 햇살이 들이쳤다. 새소리에 시끄러워 잠이 깼다. 눈 감고 냄새나 느낌으로 시간을 가늠했다. 똥을 누면 똥물이 튀어 올랐다. 봄이 오면 들로 산으로 노랗고 붉은 꽃들이 폭죽처럼 터졌다. 죽어가던 몸의 감각들이 되살아나기 시작했다.

장마철에는 집도 나도 나무들처럼 후줄근하게 젖었다. 비가 오면 비릿한 비 냄새에 낡은 기억들이 되살아나곤 했다. 방바닥도, 그림 그리는 종이와 물감도 눅눅해져 그림 그리기가 쉽지 않았다. 그런 날은 마루에 앉아 종일 비 구경하며 술을 마셨다.

태어나 뭘 심어본 적 없다. 씨앗 넣으면 싹이 날 거라는 것조차 믿지 않았다. 도시에 길들여진 나는 아무것도 믿지 않았다. 하지만 때맞춰 씨앗을 넣기만 하면 어김없이 싹은 올라왔다. 눈곱만한 씨앗에 대체 무엇이 담겨있기에 배추도 되고 상추도 되고 호박에 가지가 매달리는지. 옥수수가 되고 해바라기가 되고 감자가 되고 서리태가 되는지. 그것들 올라오는 것 구경하느라 눈만 뜨면 밭으로 뛰어나갔다. 오줌 마려워 자다가 일어나도 미친놈처럼 손전등 들고 밭으로 들어간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그렇게 봄부터 가을까지 밭에서 살았다. 밭에서 살았다기 보다 거기는 내 일터였고 놀이터였고 밥상이었다. 가을이 되면 팔 걷어붙이고 텃밭에서 엉덩이만하고 방뎅이만해진 무 배추 뽑아 김장을 했다. 배추 100포기 무 200개 총각무 삼태기로 서넛, 대파 쪽파 갓 따위로 김치를 담았다. 그 일을 일주일씩 했다. 김장은 한해 식량이었다. 쌀만 있으면 살았다.

역시 겨울은 문제였다. 홑벽에 바람벽이라 10월부터 이듬해 4월말까지 불을 때야 견딜 수 있었다. 마을에서 몇 해 묵은 표고목을 얻어 때기도 하고 뒷산에 올라가 나무를 하거나 삭정이를 긁어모아 아궁이 불을 지폈다. 손님이 올 때만 보일러 돌렸다. 겨우내 벽 틈으로 쥐가 들락거리곤 했다. 곡식과 씨앗들을 까먹었고 국수를 뽑아먹었다. 방 구석구석 오줌과 똥을 싸놓고 내 몸을 건너다니곤 했다. 수도가 얼고 보일러가 얼어 터졌다. 눈 녹여 밥 끓여먹고 눈 녹여 세수했다. 입춘어름이면 방에 딸린 부엌에서 분수소리가 났다. 겨우내 얼어붙었던 수도가 터지면서 방안이 물바다 되곤 했다.

공간이 달라지니 살림살이도 바뀌었다. 읍내 나가면 늘 철물점에 들렸다. 구두나 흰 운동화는 무용지물이었다. 삽이나 호미나 괭이, 망치나 톱, 목장갑이나 털신, 장화 따위가 필요할 뿐이었다.

날씨처럼 중요한 건 없었다. 하늘을 쳐다보는 게 버릇이 되었다. 땅 녹으면 마을 할머니들이 쭈그려 앉아 무언가를 했다. 호미로 땅을 파고 있으면 다가가 물었고, 나물 찾느라 땅에 고개를 처박고 다녔다. 신기한 풀이 있으면 다가가 보다가 큼큼 냄새를 맡고 입 속에 넣어 씹어 보았다. 식물도감이니 약초도감이니 나무도감이 필요했다. 그걸 주머니에 넣고 비닐봉지에 호미 넣어 들로 산으로 돌아다녔다. 인간하고는 권역이 다른, 하늘을 날다가 나무 꼭대기에서 맑고 높은 소리를 내며 우는 새의 이름을 불러주고 싶었다. 별자리와 계절마다 달라지는 별들의 운행도 알고 싶었다.

봄, 여름, 가을, 겨울이 그렇게 가고 그렇게 또 왔다.

그렇게 눈 깜짝할 사이에 10년이 지났고 어느덧 나는 오십 줄이 되었다. 김대중에서 노무현으로, 그리고 이명박이라는 임금들로 바깥세상은 저들 맘대로 인수인계되고 있었다. 그뿐이었다. 국가기념일이나 캐롤쏭은 도시의 것이었다. 쏟아져 나오는 새상품도 대형 광고판도 도시의 것이었다. 그것은 온통 국가와 자본의 것이었다. 저들 씨스템대로 돌아가는 이상한 나라의 엘리스였다. 테레비도 라디오도 신문이나 잡지도 보지 않았다. 9.11때도 사흘 뒤에야 이웃마을 놀러가서 우연히 보았다. 사람들은 웃었지만, 나는 영화인 줄로만 알았다. 테레비를 보고 있자니, 미디어나 광고 따위에 쏟는 에너지가 하루 세끼에서 한두 끼 분량은 족히 되지 싶었다. 이른바 뉴스라는 게 몇 십 년 전부터 한말 또 하고 한말 또 할 뿐이었다. 들을 것도, 배울 것도 없었다.

한날은 선배가 놀러 왔다. 미안한 얼굴로 내게 물었다.

“.... 괜찮니?”

그때 거울을 처음 봤던 것 같다. 행색이 거지처럼 남루해 보였을지 모른다. 정말 나는 거지였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내 마음 깊은 곳에서 새롭게 움트고 있는 무엇을 선배는 읽어내지 못했다.

밭일과 긴 겨울로 내 옷은 변해갔다. 도시에서 입던 멀쩡한 옷들은 불에 그을리거나 기름때가 묻거나 불똥이 튀어 담배빵이 났다. 대개의 옷들에는 흙물이 들었다. 옷들은 빠르게 작업복으로 바뀌어 갔다. 일 보려고 서울 나가면 종착역인 청량리 역 앞에서 나 어린 전경들에게 검문 당하곤 했다. 얼굴은 햇빛에 그을려 검붉어져있었고 입성도 허름한데다가 대도시의 날씨와 맞지 않았다. 등산화 비슷한 신발은 흙을 철떡철떡 끌고 다니기 일쑤였다. 바라던 대로, 나는 촌놈이 되어가고 있었다.

지금도 가끔 볼 일 보러 열차 타고 청량리에 떨어지면, 내가 이 도시 한복판에서 어떻게 40년을 살았나 싶게 정신을 차릴 수가 없다. 도시는 내 눈과 귀와 입과 정신을 교란하고 압박했다. 희고 깨끗하게 빼입은 촌하고는 종이 다른 사람들. 새로 나온 공산품들과 갈수록 커지고 화려해지는 거대한 광고판들, 스물네 시간 잠이 없는 네온, 거리를 들었다 놓는 비트가 센 빠른 음악과 눌러대는 크락션 소리, 도시 곳곳에 넘쳐나는 젊은이들과 이 도시의 활기만큼이나 아프리카를 먹여 살리고도 남을 쌓이는 음식쓰레기..... 이 모든 걸 맛에 빗대자면, 달고, 맵고, 짜다. 어중띠거나 심심한 맛들은 죄다 사라지고, 통각만을 자극하는 욕망체계다.

쑈윈도에 전시된 예쁘고 실용적인 물건들을 보면 의당 나도 현혹된다. 세련되고 매혹적이다. 하지만 집으로 돌아오면 그뿐이다. 언제나 하는 생각이지만, 안 사기 잘했다. 그런 것 안 먹고 안 입고 안 사고도 부족한 것 못 느끼고 잘 살았다. 살아가는 데 필요한 물건은 따지고 보면 그리 많지 않다.

옷장을 열어보면 저 옷 내가 죽을 때까지 다 떨어뜨릴 수 있을지 모르겠고, 신발장을 보면 저 신발들 다 떨어질 때까지 살지나 모르겠다. 책꽂이에는 뭔 책이 그리 많은지 저 책들 살아있는 동안 제대로 씹어 먹어 볼 수나 있을지 모르겠다. 이 집도 나 사는 동안 쓰러지지는 않을 것 같다. 때 되면 산과 들에 절로 올라오는 나물들이 나 하나 못 먹이겠나. 텃밭에 푸성귀와 잡곡들 심으면 마을에서 쌀 한가마니 사고 가끔 읍내 장에 나가 비린 것들 사먹으면 된다. 물론 양육비도 벌어야 하고 각종 세금과 의료보험비에 기름값도 필요하다. 다치거나 아프면 병원에도 가야한다.(이 나라 의료체계가 무서워 침뜸 배우다 시방 이태동안 휴학 중이다.) 살다보면 그것 말고도 돈 들어갈 구멍은 훨씬 더 있을 것이다.

그러니 이쯤에서 나는 물어야 한다. 이 글의 목적은 무엇인가. 고작 10년간의 시골체험 간증인가.

두 말하면 숨 가쁜 얘기지만, ‘인간과 인간’, ‘인간과 자연’이라는 이 두 항은 이제 완전한 대립 항이 되어버렸다. 임금이 전직 건설업주로 바뀌고 나서는 더욱 그렇다. 어떻게 해야 하나. 그러나 나는 일평생 내 존재와 세상을 묻고 그것을 드러내는 한명의 화가일 뿐이다. 예견되는 세계적인 불황과 국내정치상황에 대해 논리적으로 설명할 깜냥도 못된다.

다만 내가 겪어서 알고 있는 것은 있다. 하늘과 땅과 계절과 그날의 날씨와 바람과 별과 낮과 밤 이외의 대개의 것은 제도에 의해 제작되고 날조된다는 점이다. 그러니 제도나 체제야 바꿀 수 있는 것이고, 좋든 싫든 언제라도 바뀌게 되어있다. 나는 내 삶의 축을 체제와 자본과 제도의 바깥, 좀체로 변하지 않는 대자연 가까이에 두어 보려는 것이다. 벌레나 짐승의 눈으로 아이들을 보고 인간을 보고, 도시와 자본을 읽어보고 싶은 것이다. 이제 이 땅에서, 코앞에 도로가 뚫린다면 코앞에서는 더 이상 도로가 뚫리지 않는다는 이야기로 번역해 읽어야 한다.

경험과 상상력이 턱없이 모자라지만, 이제 벌레나 짐승의 처지로 말해 보겠다. 나름 사정이야 밤하늘 별 만큼이나 많겠지만, 지금보다 더 많은 이들이 도시를 벗어나 흩어져 살면 좋겠다. 편식되고 있는 이 땅의 골골로 뿔뿔이 흩어져 들어가 빈자리를 채워줬으면 좋겠다.

다른 누구보다도 우선 회사로 출근 안 해도 되는 작가들이 그리 해줬으면 좋겠다. 그 가운데에도 어린이 책 작가들이 꼭 좀 그렇게 해주면 좋겠다. 아이들을 위해서라도 ‘학교-학원-집’이라는 끝도 없이 돌고 도는 트라이앵글을 고만 내려놓으면 좋겠다. 그래야 이 땅의 이야기들이 도시적이고 주류적인 편견 없이 속속 드러나지 않겠나.

‘학교-학원-집’이라는 몇 십 년 동안 동어 반복하는 시공간에 신물 낼 때도 되었다. 그러니 자신의 작품세계를 개척하기 위해서라도 그랬으면 좋겠다. 좁은 국토지만, 그것도 두 동강이 난 땅덩어리지만, 골골마다 날씨가 다른 걸 보면 그래도 이 땅은 넓다. 이야기가 널린 땅이다. 비유컨대, 거기 헤아릴 수 없는 벌레와 뭍짐승들의 삶도 등장시켜주면 좋겠다. 좀처럼 눈에 띄지 않는 미물들의 일대기까지.

이 땅 어디고 다 도시다. 이 땅 어디고 공사판이고 전쟁터다. 산이고 언덕이고 밀어버렸고 철탑을 박아버렸고 강과 바다는 뒤집어지고 있다. 굽은 길들은 죄다 펴놓았고 골짜기마다 살아 숨 쉬던 옛 신화들마저 파헤쳐버린다. 이 땅 어디나 도시란 말은 맞지만, 그러나 그렇다고 해도, 도시와 촌구석은 명백히 다르다. 자라나는 아이들에게 이 간극은 소중하다. 우리는 자연으로 더 깊이 들어갈 수 있다.

작은 텃밭 하나로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할 지도 모른다. 어쩌면 그것이 자급자족하는 삶에 씨앗을 뿌릴지도 모른다. 어쩌면 그 속에서 소박하고 작은 평화의 씨앗을 얻을 수도 있을 것이다. 점차로 자신을 둘러싼 식의주에 관련해 도시에서와는 판이한 생각을 갖게 될 수도 있다.

그래서 나는 꿈꾼다. 우리 가운데 한명이라도 더 산간벽지로 들어가기를. 뿔뿔이 흩어지기를. 그리고 그것이 보다 자급자족의 주체적 삶으로 나아가기를. 녹슬고 닫힌 폐교된 교문이 다시 열리기를. 공염불이 될지라도, 그래서 우리의 아이들이 활자와 분칠 가득한 책과 교과서가 아닌 대자연이 품에서 말과 글과 숫자를 터득하기를. 그 속에서 생명에 대한 경외와 문리를 틔우기를. 동식물들과 사계절의 변화와 별자리를 사귀고 익히기를. 바라건데, 우리의 아이들이 자본의 바깥으로 깊이 뿌리 내리기를!

이 되도 않은 글을 쓰고 있는 내내, 지난 가을 털어낸 집터에서 일흔 일곱 할머니가 흙바닥에 철퍼덕 주저앉아 돌을 주워내고 있다. 거기 쇳조각들과 콘크리트와 비닐들과 플라스틱과 석면을 골라내고 있다. 오물로 더럽혀진 집터는 한 주일만 지나면 들누워도 좋을 만큼 깨끗한 안방이 될 것이다. 거기에 퇴비를 얹고 고랑을 내고 씨앗을 넣을 것이다. 그 터는 오래된 시간 속으로 되돌아갈 테고 머지않아 시퍼런 푸성귀와 울울창창한 곡식들이 알곡을 터트릴 것이다.

-'더 나은 세상을 꿈꾸는 어린이책 작가들의 모임'까페 <더 작가의 목소리>방에서 퍼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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