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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6월 15일 월요일

산해정, 그리고 을묘사직소

2009년 6월 10일, 김해시 대동면 주민들과의 만남이 있었습니다. 대동면으로 가는 길에 잠시 짬을 내어 대동면에 있는 산해정을 방문했습니다. 아주 짧은 시간이었지만, 남명 조식 선생의 어떤 기개를 느껴보고자 했던 것입니다.

 

잘 알려져 있는 것처럼 남명 조식 선생(1501-1572년)은 조선시대 초기의 빼어난 학자입니다. 영남의 낙동강 왼쪽에 퇴계 이황이 있다면, 그 오른쪽에는 남명 조식이 있다고 일컬어지는 분입니다. (왼쪽, 오른쪽이라 하지만, 그 방향은 지금 우리가 한반도 지도를 놓는 방향과 180도 반대입니다. 한양에서 볼 때 왼쪽, 오른쪽이라는 것이죠.) 그렇지만 북인정권이 서인의 쿠테타에 의해 붕괴되어 이 분의 선비정신이 재야에 묻혀버리고 빛이 바래어 버렸습니다. 하지만 명종이 불과 12살에 등극하고 문정왕후가 수렴첨정을 하여 외척들이 득세하고 을사사화로 수많은 선비들이 목숨을 잃게 되고 탐관오리들이 마치 제 세상을 만난 듯 백성들의 고혈을 쥐어짜자 남명 선생이 두려움 없이 일갈했다는 이야기는 잘 알려져 있습니다. 그것이 이른바 '을묘사직소'. 문정왕후를 과부라고 하고 명종은 고아에 불과한 철부지가 아니냐는 일갈이었습니다. 그 소를 오늘 다시 읽으니, 묘하게도 여러 지식인들의 '시국선언문'과 겹쳐져 읽힙니다.

 

그 목소리의 한 자락을 산해정 앞, 골짜기의 바람 소리 속에서 들었습니다.

 

집에 돌아와 인터넷으로 검색해보니, 다산연구소가 보내는 칼럼 가운데 하나로 신병주(건국대 사학과) 교수께서 쓴 "칼을 찬 선비 학자, 남명 조식"이라는 글을 찾을 수 있었습니다. 함께 읽고자 합니다.

 

산해정으로 들어서는 진덕문은 굳게 닫혀 있었는데, 발걸음을 돌리면서 낮게 마음속으로 떠오르는 시를 읊조려 보았습니다.

 

닫힌 진덕문

 

진덕문은 굳게 닫혀 있고

골짜기의 바람 속에서

남명 선생 호통치는 소리가 들리는 듯

 

발걸음을 돌리면서도

마음조차 돌릴 수 없음이여

 

산야에 묻혀서도

세상사를 나 몰라라 하지 못하는

글 읽는 이의 마음이

예나 지금이나

서글프게 생각됨은 어인 일인가

 

선비여, 차라리

칼을 차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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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금이 나라일을 잘못 다스린 지 이미 오래되어, 나라의 기틀은 이미 무너졌고, 하늘의 뜻도 이미 떠났으며, 백성들의 마음 또한 이미 임금에게서 멀어졌습니다. 비유하자면 큰 나무가 백년 동안이나 그 속을 벌레한테 파먹혀 진이 빠지고 말라죽었는데도 그저 바라보기만 하고, 폭풍우가 닥치면 견디어 내지 못할 위험한 상태가 언제 올지도 모르는 실정에 있은 지가 오랩니다.

조정에 있는 사람 가운데 충성되고 뜻있는 신하와 일찍 일어나 밤 늦도록 공부하는 선비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이미 나라의 형세가 극도에 달하여 지탱할 수 없고, 사방을 둘러보아도 손 쓸 곳이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낮은 벼슬아치는 아래서 히히덕거리며 술 마시고 즐기는 일에 정신이 없고, 높은 벼슬아치들은 위에서 거들먹거리며 오직 백성의 재물을 긁어모으는데 정신이 팔려 물고기의 배가 썩어 들어가는 것 같은데도 그것을 바로 잡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뿐만 아니오라 조정의 내신들은 파당을 세워 궁중의 왕권을 농락하고 외신들은 향리에서 백성들을 착취하여 이리떼처럼 날뛰면서도, 가죽이 다 닳아 없어지면 털이 붙어 있을 곳이 없는 이치를 모르고 있습니다. 이런 까닭에 신은 깊은 시름에 탄식만 길게 나올 뿐, 낮이면 하늘을 우러르기 수차례였고, 눈물과 한숨을 누를 길 없어 밤이면 잠못 이룬 지가 오랩니다.

자전(慈殿)께서는 생각이 깊으시기는 하나 깊숙한 궁중의 한 과부에 지나지 않고, 전하께서는 어리시어 다만 선왕의 한 아드님이실 뿐이니, 천가지 백가지의 천재(天災)와 억만 갈래의 인심(人心)을 무엇으로 감당해 내며 무엇으로 수습하겠습니까? 이런 때를 당해서 비록 재주가 주공과 소공을 겸하여 삼공의 위치에 있다 해도 손을 쓰기 어려운 형편이온데, 하물며 부족한 소신과 같이 아무 힘도 없는 자야 더 말해 무엇하오리이까? 위로는 나라의 위태로움을 조금이나마 부지할 수 없을 것이니, 임금님의 신하되기 또한 어렵지 않겠습니까. 추호라도 헛된 이름을 팔아 임금님의 벼슬을 도적질해서 그 녹만 먹고 하는 일 없이 지내는 그런 신하가 되는 것을 신은 원치 않습니다.

또 제가 요즈음 보건대, 변방에 일이 생겨 여러 대부가 제때에 밥을 먹지 못하지만, 저는 놀라워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이 일은 이십 년 전에 터질 것인데, 전하의 신무(神武)하심에 힘입어서 지금에야 비로소 터진 것이니, 하루 저녁에 생긴 것이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평소에 조정에서 재물로 사람을 임용하니, 재물만 모이고 백성은 흩어져 버렸습니다. 그래서 마침내 장수의 자격에 합당한 사람이 없고 성에 군졸이 없어서, 외적이 무인지경에 들어오듯 했으니 이것이 어찌 괴이한 일이겠습니까? 이번에도 대마도 왜노가 향도와 남몰래 짜고 만고에 끝없이 치욕스러운 짓을 하였건만, 왕의 신령한 위엄은 마치 한 모퉁이가 무너지듯 떨치지 못했습니다. 이는 옛 신하를 대우하는 의리가 혹 주나라 예법보다도 엄하여 원수를 총애하는 은덕이 도리어 재앙으로 송나라에 더해진 꼴이 아니겠습니까? 세종께서 남쪽 오랑캐를 정벌하시고 성종께서 북벌하신 일을 보아도 어디에 오늘날과 같은 일이 있었습니까?

그러나 이같은 것은 하찮은 피부병에 지나지 않고, 마음과 속의 병은 이보다 더 심각합니다. 이런 나라 형편을 바로잡는 길은 여러 가지 다양한 나라의 법령에 있지 않고, 오직 임금님께서 한번 크게 마음먹기에 달여있는 것입니다. 하오나 임금님께서는 홀로 임금님께서 하시려 하는 일이 무엇인지 아시지를 못합니다. 학문을 좋아하십니까? 음악과 여색을 좋아하십니까? 말타기를 좋아하십니까? 군자를 좋아하십니까? 소인을 좋아하십니까? 그 좋아하시는 것이 무엇이냐에 국가의 존망이 달여 있습니다. 진실로 임금님께서 하룻밤 사이에 깜짝 놀라 새사람이 되듯 깨달으십시오. 지금부터라도 학문에 힘써 덕을 밝히시고, 백성이 새로운 희망을 가지고 일어서게 하십시오. 착함과 덕을 펴는 정치를 하면 나라를 바르게 다스리고 흩어진 민심이 다시 임금님 곁으로 돌아오고, 위기를 평안하게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출처: http://dugok.x-y.net/urimunhoa/dansungso.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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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을 찬 선비 학자, 남명 조식


신 병 주(건국대 사학과 교수)


"전하의 나라 일이 이미 잘못되어서 나라의 근본이 이미 망했고 하늘의 뜻이 가버렸으며 인심도 이미 떠났습니다. 비유하면 큰 나무가 백 년 동안 벌레가 속을 먹어 진액이 이미 말라 버렸는데 회오리바람과 사나운 비가 어느 때에 닥쳐올지 까마득하게 알지 못하는 것과 같으니 이 지경에 이른 지가 오래됩니다. ... 자전(문정왕후)께서는 생각이 깊으시기는 하나 깊숙한 궁중의 한 과부에 지나지 않고, 전하께서는 어리시어 다만 선왕의 외로운 후계자(孤嗣)이실 뿐이니, 천 가지 백 가지의 천재(天災)와  억만 갈래의 인심을 무엇으로 감당하며 무엇으로 수습하시겠습니까?" (「을묘사직소」)

 

퇴계 이황과 함께 16세기 영남학파의 양대 산맥으로 불렸던 학자 남명 조식(曺植:1501~1572). 그는 1555년 단성현감을 제수를 받은 후에 올린 사직 상소문에서 당시 사회의 위기의식을 위와 같이 날선 문장으로 과감하게 지적하였다. 특히 실질적인 권력자 문정왕후를 과부로, 명종을 고사(孤嗣)로 표현한 부분은 문정왕후의 수렴청정과 이에 파생되는 외척정치의 문제점을 직선적으로 비판한 것이었다. 말 한마디로 목숨을 날릴 수 있는 절대군주 앞에서 일개 처사(處士)에 불과했던 남명은 이처럼 당당하게 정치현실을 비판하는 선비였다.


일개 처사(處士), 외척정치의 문제점을 곧바로 비판


남명이 살아간 시대는 사화의 시기였다. 50년간 지속된 사화로 말미암아 지방에서 학문적, 사회적 기반을 바탕으로 중앙정계 진출을 모색하던 사림파는 훈구파의 반격을 받아 좌절을 맛봐야했다. 을사사화 이후 사화의 끝이 보이는 듯했으나, 명종의 즉위와 문정왕후, 윤원형으로 이어지는 외척정치의 횡행은 국가의 기강 문란과 왕실 친인척을 비롯한 권세가들의 정치 독점을 강화시켰다.


남명은 이런 현실에서 선비가 서야 할 길은 비판의 목소리를 있는 그대로 전달하는 것으로 여겼다. 국왕에게 불경한 표현이 될지언정 현실을 바로 지적해주는 것이 선비의 몫이라 판단했다. 당시 이 상소문으로 조정은 발칵 뒤집혔다. ‘군주에게 불경을 범했다’는 이유로 남명을 처벌하자는 주장도 제기되었지만, 상당수의 대신이나 사관들은 ‘남명이 초야에 묻힌 선비여서 표현이 적절하지 못한 것이지 그 우국충정은 높이 살 만하다’거나, ‘남명에게 죄를 주면 언로가 막힌다’는 논리로 남명을 적극 변호함으로써 파문은 가라앉을 수 있었다. 정치의 문제점을 날카롭게 지적한 재야 선비의 발언을 존중한 당시의 분위기는 오늘날도 주목할 만하다. 


남명은 무엇보다 학문에 있어서 수양과 실천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경(敬)과 의(義)는 바로 남명 사상의 핵심이다. 남명은 ‘경’을 통한 수양을 바탕으로, 외부의 모순에 대해 과감하게 실천하는 개념인 ‘의’를 신념화하였다. 경의 상징으로 성성자(惺惺子: 항상 깨어있음)라는 방울을, 의의 상징으로는 칼을 찼으며, 칼에는 ‘내명자경 외단자의(內明者敬 外斷者義: 안으로 자신을 밝히는 것은 경이요 밖으로 과감히 결단하는 것은 의이다)’라고 새겨 놓았다. 방울과 칼을 찬 선비 학자. 언뜻 연상되기 힘든 캐릭터이지만, 남명은 이러한 모습을 실천해 나갔다.


방울과 칼을 찬 선비


조정에 잘못이 있을 때마다 상소문을 통해 과감하게 문제점을 지적하고, 왜구의 침략에 대비하여 후학들에게는 강경한 대왜관을 심어 주었다. 1592년 임진왜란 때 정인홍, 곽재우, 김면, 조종도 등 남명 문하에서 최대의 의병장이 배출된 것도 남명의 가르침이 결코 헛되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남명이 스스로에 엄격했음은 ‘욕천(浴川)’이라는 시에서 가장 압축적으로 나타난다. "그래도 티끌 먼지가 오장에 남았거든 바로 배를 갈라 흐르는 물에 보내리라"는 시구에서 보이듯, 유학자의 입에서 나왔다고 믿기 어려울 정도의 과격한 표현을 썼으며, 이는 그만큼 자신을 다잡는 강한 의지에서 나온 것이었다.

 

경의(敬義)를 중시한 남명의 사상에서 의(義)는 실천적 행동을 의미했다. 남명의 의는 상벌에 엄격한 무인의 기질에도 어울리며, 그가 차고 다녔던 '칼'의 이미지와도 맥을 같이한다. 남명의 칼은 안으로는 자신에 대한 수양과 극기로, 밖으로는 외적에 대한 대처와 조정의 관료들에게 향해져 있었다. 남명이 1568년에 올린 상소문에서 주장한 ‘서리망국론(胥吏亡國論)’은 조선후기까지 조정에서 널리 수용되기도 했다. 칼로 상징되는 그의 이미지는 수양을 바탕으로 과감하게 현실의 부조리와 모순을 극복해 가는 실천적인 선비 학자의 모습 바로 그것이었다.


“평생 마음으로 사귀면서 지금까지 한번도 만나질 못했습니다. 앞으로 이 세상에 머물 날도 얼마 남지 않았으니, 결국 정신적 사귐으로 끝나고 마는 것인가요? … 요즘 공부하는 자들을 보건대 손으로 물 뿌리고 빗자루질 하는 절도도 모르면서 입으로는 천리를 말하여, 헛된 이름이나 훔쳐서 남들을 속이려 합니다. … 선생 같은 어른이 꾸짖어 그만두게 하시지 않기 때문입니다. … 십분 억제하고 타이르심이 어떻습니까” (『남명집』,「퇴계에게 드리는 편지」, 1564년)


위의 편지는 서두에서 남명이 퇴계와 한 번도 만나지 못한 아쉬움을 보였지만, 실제로는 당시 퇴계와 고봉 기대승 등에 의해 주도되고 있었던 성리학 이론논쟁의 문제점을 지적하고자 남명이 퇴계에게 충고의 형태로 쓴 편지였다. 이에 대해 퇴계는 이굉중에게 보낸 별지(別紙)에서 “이 말이 흠이 있기는 하지만 우리들은 여기에 깊이 스스로 경계하고 조심하지 않을 수 없다”고 하여 남명의 입장을 어느 정도 수용하였다.


좌퇴계 우남명


대부분 퇴계와 가장 선명하게 비교되는 인물로 율곡 이이를 손꼽지만 실제 퇴계의 가장 큰 학문적 라이벌은 남명이었다. 남명은 퇴계(1501~1570)와 동년인 1501년에 태어나 영남학파의 양대 산맥으로 인식되었다. 퇴계의 근거지 안동·예안은 경상좌도의 중심지, 남명의 근거지 합천·진주는 경상우도의 중심지였다. 낙동강을 경계로 ‘좌퇴계 우남명’으로 나뉜 것이다. 퇴계는 온화하고 포근한 청량산을 닮았고, 남명은 우뚝 솟은 기상의 지리산을 닮아 갔다. 조선후기의 실학자 이익은 남명과 퇴계를 영남학파의 양대산맥으로 규정하면서, ‘상도(上道)는 인(仁)을 숭상하고 하도(下道)는 의(義)를 주로 하며 퇴계의 학문이 바다처럼 넓다면 남명의 기질은 태산처럼 높다’고 함축적으로 대비시켰다.


남명 사상의 핵심은 철저한 자기 수양과 적극적인 현실대응으로 집약된다. 중앙 정치가 정쟁과 권력독점으로 인해 새로운 정치 비전을 제시해줄 수 없을 때 남명은 그 대안으로 보다 객관적이고 냉철하게 현실을 판단할 수 있는 비판세력의 현실참여를 적극 주장했다. 엄격한 자기 관리를 통해 비판자의 안목을 키우고 원칙과 양심에 비추어 옳은 것이라면 그 대상이 국왕이라도 결단코 주저하지 않았다. 그가 죽음에 이르면서도 현실비판자로 살아간 처사(處士)로 불려지기를 원했던 것도 자신의 소신을 지켜나간 것이었다.


최근 남명 사상의 핵심인 경의 사상이 지니는 실천적인 측면에 주목하여, 남명을 실학의 선구적인 학자로 조명하는 움직임도 일어나고 있다. 남명의 사상을 실학의 선구로 파악하는 견해는 앞으로 계속 검토될 부분이지만, 그의 사상이 16세기 조선 사상계를 성리 철학과 이론 중심으로 파악하는 흐름에 새로운 자극과 대안이 됨은 분명하다. 


 


글쓴이 / 신병주

· 건국대학교 사학과 교수

· 저서 : 『규장각에서 찾은 조선의 명품들』, 책과함께, 2007

          『제왕의 리더십』, 휴머니스트, 2007

          『하룻밤에 읽는 조선사』, 중앙M&B, 2003

          『고전소설 속 역사여행』, 돌베개, 2005

          『조선 최고의 명저들』, 휴머니스트, 2006 등

 

출처: 다산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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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명 조식선생의 을묘사직소(1555년)(일명 단성소)
사림(士林)의 종사(宗師)로 추앙받던 남명 조식(曺植)선생이 단성현감에 제수된 것은 국정의 피폐함이 극에 달했던 명종 11년이었다. 남명은 현감직을 받는 대신 상소문을 단성소 혹은 을묘사직소(乙卯辭職疏)라고 한다.

남명은 丹城懸監의 사직소와 함께 당시 정치제도나 군신간의 절대적인 분별, 즉 왕을 신성불가침의 존재로 규정짓던 시 대의 상소문으로서의 누구도 감히 상상 할 수도 없었던 破天의 極言을 왕에게 올렸다. 왕과 대비를 진노하게 하고, 조정의 중신들을 놀라게 하고 사람들까지 겁에 질려 손에 땀을 쥐게 한 이른바 '丹城 疏'는 다음과 같다.

★ 남명의 단성소(을묘사직소)-1555 - 남명의 上疏文

☆ [번역1]
남명은 丹城懸監의 사직소와 함께 당시의 정치제도나 군신간의 절대적인 분별, 즉 왕을 신성불가침의 존재로 규정짓던 시대의 상소문으로서의 누구도 감히 상상할 수도 없었던 破天의 極言을 왕에게 올렸다. 왕과 대비를 진노하게 하고, 조정의 중신들을 놀라게 하고 사람들까지 겁에 질려 손에 땀을 쥐게 한 이른바 '丹城疏'는 다음과 같다.

선무랑으로서 단성현감에 새로 제수된 조식은 진실로 황공하여 머리를 조아리며 주상전하께 소를 올립니다.

엎드려 생각하옵건대 선왕(중종)께서는 신이 변변치 못한 사람이라는 것을 모르시고 처음에 참봉에 제수하셨습니다(1538년임) 그리고 전하께서 왕위를 이으신 뒤에 주부로 제수하신 것이 두번이었는데 지금 또 제수하여 현감으로 제수하시니 떨리고 두렵기가 언덕과 산을 짊어진 것 같습니다. 그런데도 아직까지 감히 황종(?) 한 자쯤 되는 땅에 나아가서 하늘의 해와 같은 은혜에 사례드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임금이 사람을 쓰는 것은 목수가 나무를 쓰는 것과 같습니다. 깊은 산과 커다란 못 어느 곳에 있는 것이든 재목을 버려두지 않고 그것을 가져다가 커다란 집을 짓는 일을 이룩하는 것은 훌륭한 목수가 하는 것이지 나무가 스스로 참여할 수는 없는 일인 것입니다.
전하께서 사람을 쓰시는 것은 나라를 다스리시는 책임 때문입니다. 제가 걱정이되어 견딜 수 없는 것은 이 때문이니 감히 그 큰 은혜를 저 혼자 누릴 수는 없습니다만 머뭇거리며 나아가기 어려워하는 뜻을 끝내 측석(어진 신하의 자리)아래 감히 말씀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신은 벼슬에 나아가기 어려워하는 뜻은 두가지가 있습니다. 지금 저의 나이는 예순에 가깝고 학문은 어두우며 문장은 과거시험에 끝자리에도 뽑힐 수 없고 행실은 물 뿌리고 비질하는 일을 제대로 해 내기에도 모자랍니다. 과거시험을 보기 10여년 동안에 세번이나 떨어진 뒤 물러났으니 애초부터 과거공부를 일삼지 않은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만약 과거를 탐탁하게 여기지 않는 사람이 있다고 해도 그런 사람은 성질이 급하고 마음 좁은 평범한 백성에 지나지 않을 뿐이니 큰 일을 할 만한 온전한 인재는 아닙니다. 하물며 그 사람 됨됨이가 선한가 선하지 않은가는 과거를 보려고 하느냐 과거를 보려고 하지 않느냐 하는 데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닙니다. 보잘것 없는 신이 이름을 도둑질하여 집사(추천관원)에게 제가 훌륭한 인물이라고 잘못 판단하게 했고 집사는 이름만 듣고서 전하에게 제가 훌륭한 인물이라고 잘못 판단하도록 한 것입니다.

전하께서 과연 신을 어떤 사람이라고 생각하십니까.도를 지니고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문장에 능하다고 생각하십니까. 문장에 능한 사람이라고 해서 반드시 도를 지닌 사람은 아니며 도를 지닌 사람은 반드시 신처럼 이렇지는 않습니다. 신에 대해 다만 전하께서 아시지 못한 것일 뿐만아니라 재상도 또한 알 수 없는 것입니다. 그 사람을 알 지 못하면서 등용하여 훗날 국가의 수치가 된다면 어찌 죄가 보잘것 없는 신에게만 있겠습니까. 헛된 이름을 바쳐 몸을 파느니 알찬 곡식을 바쳐 벼슬을 사는 것이 낫지 않겠습니까. 신이 차라리 신의 한몸을 저버릴 지언정 차마 전하는 버릴 수 없습니다. 이것이 나아가기 어려운 첫번째 까닭입니다.

 

또 전하의 國事가 그릇된 지 이미 오랩니다. 나라의 기틀은 이미 무너졌고, 하늘의 뜻도 이미 전하에게서 멀어졌습니다. 비유컨데 큰 나무가 백년 동안이나 그 속을 벌레에게 파먹혀 진이 빠지고 말라 죽었는데도 그저 바라보기만 하여 폭풍우가 닥치면 견디어 내지 못할 위험한 상태가 언제 올지도 모르는 실정에 있는지가 오랩니다. 조정에 있는 사람가운데 충성된 뜻있는 신하와 일찍 일어나 밤 늦도록 공부하는 선비가 없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이미 그 형세가 극도에 달하여 지탱할 수 없고 사방을 둘러보아도 손쓸 곳이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小官들은 아래에서 히히덕거리며 주색이나 즐기고 大官은 위에서 거들먹거리면서 오직 뇌물을 긁어 모으는 데 혈안입니다. 고기배가 썩어 들어가는 것 같은 데도 그것을 바로잡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뿐만 아니오라 內臣들은 派黨을 세워 궁중의 왕권을 농락하고 外臣들은 향리에서 백성들을 착취하여 이리떼처럼 날뛰면서
가죽이 다 닳아 없어지면 털이 붙어 있을 곳이 없는 이치를 모르고 있읍니다. 이런 까닭에 신은 깊이 생각해 보면 탄식만 길게 나올 뿐, 낮이면 하늘을 우러르기 수차례였고 눈물과 한숨을 누를 길 없어 밤이면 잠을 이루지 못한지가 오랩니다. 나라가 이지경이고 보면, 慈殿께서는 생각이 깊으시기는 하나 밖의 소식이 막힌 깊은 궁궐안의 한 과부에 지나지 않고 전하는 나이 어린 先王의 한 외로운 자식일 뿐입니다.
저 많은 天災와 , 천가래 만가래로 흩어진 민심을 무엇으로 막고, 어떻게 수습할 수 있겠습니까? 냇물이 마르고(국어) 곡식이 비처럼 내리니(회남자) 그 조짐이 무엇이겠습니까. 노랫가락이 구슬프고(예기) 입는 옷이 흰색이니 나라가 어지러울 형상이 이미 나타났습니다. 이런 때를 당해서 비록 재주가 公과 公을 겸하여 三公의 위치에 있다해도 손을 쓰기 어려운 형편이온데, 하물며 微臣과 같이 아무 힘도 없는 자야 더 말해 무엇하리이까? 위로는 나라의 위태로움을 조금이나마 부지할 수 없을 것이며, 아래로 터럭만큼도 백성들을 구제할 수 없을 것이니, 전하의 신하되기 또한 어렵지 않습니까. 추호라도 헛된 이름을 팔아 전하의 벼슬을 도적해서 그 녹만 먹고 하는 일 없이 지내는 그런 신하가 되는 것을 신은 원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나아가기 어려운 두번째 까닭입니다.

또 제가 요즈음 보건대 변방에 일이 있어 여러 대신들이 밥도 제 때에 먹지 못한다고 들었는데 신이것을 이상하게 여기지 않습니다. 그것은 일찌기 20년 전부터 이 일이 생겼던 것을 전하의 靈明하심에 힘입어 이제야 발각된 것이요, 하루 아침에 된 것은 아닙니다. 평소 조정에서는 재물로 사람을 임용하니 재물만 모이고 민심이 흩어져 결국 쓸만한 장수도 없게 되고 성안의 병사 한 사람 남아있지 않기에 이르렀으니 적이 무인지경으로 쳐들어 온 것은 오히려 당연한 일입니다. 이번에도 대마도 왜노가 향도와 남몰래 짜고 만고에 끝없는 치욕스러운 짓을 하였건만 왕의 신령한 위엄이 떨치지 못하여 마치 절하듯하였습니다. 이는 옛 신하를 대우하는 의리가 혹 주나라 예법보다 엄하면서 원수를 총애하는 은덕이 도리어 망한 송나라보다 더한 경우가 아니겠습니까. 세종께서 남쪽 오랑캐를 정벌하시고 성종께서 북벌하신 일을 보아도 어디에도 오늘날과 같은 일은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같은 것은 하찮은 피부병에 지나지 않고, 마음과 속의 병은 이 보다 더 심각합니다. 가슴과 배의 통증이란 걸리고 막히어 위 아래가 통하지 않게 되는 것이니 이것은 곧 공경대부가 목이 마르고 입술이 타들어가도록 열심히 일하지만 수레는 달리고 사람은 달아나는 것과 같은 일입니다.

근위병을 불러모으고 나라일을 정돈하는 것은 자질구레한 정치나 형벌에 있지 아니하고 오직 전하의 마음에 달려 있습니다. 방촌(마음)의 사이에서 말이 땀을 흘리는 것처럼 노력하여 만 마리의 소가 밭을 갈아야하는 너른 땅에서 공을 거두는 그 기틀은 자기 자신에게 있을 뿐입니다. 유독 전하께서 종사하시는 일이 무슨 일인지 모르겠습니다. 學問을 좋아하십니까? 聲色을 좋아하십니까? 弓馬를 좋아하십니까? 君子를 좋아하십니까? 小人을 좋아하십니까? 그 좋아하는 것이 무엇이냐에 국가의 존망이 달려 있습니다.

진실로 전하께서 활연히 깨달으시어 분연히 학문에 진력하사 明德.新民의 도를 얻으신다면 거기에 萬善이 갖추어져 있어 백가지 應策이 연이어 나올 것이니 그것으로 조치를 취하신다면 나라를 바르게 다스리고 백성을 평화롭게 위기를 평안하게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요약해서 간직하시기만해도 마음이 비지 않음이 없으며 저울질이 고르지 않음이 없으며 사특한 생각이 나오지 아니할 것입니다.

불교에서 말하는 진정이란 것도 다만 마음을 간직하는 데에 달려있을 뿐이니 위로 하늘의 이치에 통하ㅔ 되는 데 잇어서는 유교와 불교가 한 가지입니다. 다만 사람의 일을 시행함에 있어서는 다리가 없이 땅을 밟고 있는 형국이므로 우리 유가에서는 본받지 아니할 뿐입니다. 전하께서는 이미 불교를 좋아하시니 그것을 학문하는데로 옮기신다면 이것이 바로 우리 유가의 일입니다. 이는 어렸을 때 집을 잃었던 아이가 자기집을 찾아 부모 친척 형제 친구를 만나보는 일과 같은 것이 아니겠습니까.

더구나 정치를 하는 것은 사람에 달려 있고 사람을 쓰는 것은 몸으로써하고 몸을 수양하는 것은 도로써하는 것입니다. 전하께서 만약 사람을 쓰는데에 몸으로써 하신다면 유악안에 있는 사람은 사직을 보위하지 않는 자가 없을 것이니 아무 일도 모르는 보잘것 없는 저 같은 자가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만약 사람을 눈으로만 뽑으신다면 잠잘 때 이외에는 모두 속이고 저버리는 무리일 것이니 이 경우에도 앞뒤가 막힌 보잘 것 없는 저 같은 자가 무슨 소용이 이겠습니까. 다른 날 전하께서 왕천하의 지경에 이르도록 덕화를 베푸신다면 저는 마구간의 말석에서나마 채찍을 잡고 그 마음과 힘을 다해서 신하의 직분을 다할 것이니 어찌 임금을 섬길 날이 없겠습니까.

엎드려 원하옵건대 전하께서는 반드시 마음을 바로하는 것으로써 백성을 새롭게하는 요점으로 삼으시고 몸을 수양하는 것으로서 사람을 쓰는 근본으로 삼으셔서 완도의 법을 세우십시오. 왕도의 법이 왕도의 법답지 않으면 나라가 나라답게 되지 못합니다. 밝게 살피시길 엎드려 비옵니다. 신은 떨리고 두려운 마음을 감당할 수 없습니다. 죽음을 무릅쓰고 전하께 아룁니다.
을묘년(1555년) 월 일 조식

☆ [번역2]
선무랑(宣務郞:종6품 품계)으로 새로 단성현감(丹城縣監:종6품직)에 제수된 신 조식, 황공하여 머리를 조아리고 주상 전하께 상소를 올립니다. 삼가 생각하건대 선왕(先王)께서 신의 변변치 못함을 모르시고 처음 참봉(參奉:종9품직)직을 제수하셨습니다. 그리고 전하께서 왕위를 계승하신 후에 주부(主簿:종6품직)를 두 번씩이나 제수하시었고 이번에 다시 현감에 제수하시니, 두렵고 불안한 것이 산을 짊어진 것 같습니다. 그런데도 오히려 임금 앞에 나아가 하늘과 같은 은혜에 사례하지 못하는 것은 임금이 인재를 취하는 것이 장인(匠人)이 심산대택(深山大澤)을 두루 살펴 재목이 될 만한 나무를 빠뜨리지 않고 다 취하여 큰 집을 짓는 것과 같아서, 대장(大匠)이 나무를 취하는 것이지 나무가 스스로 쓰임에 참여하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전하께서 인재를 취하시는 것은 임금으로서의 책무이니, 신은 그 점에 대한 염려를 금할 수가 없습니다. 이에 감히 큰 은혜를 사사로이 여길 수는 없으나 머뭇거리면서 나아가기 어려워하는 뜻을 끝내 측석(側席:곁 자리) 아래에서 감히 주달(奏達:임금께 아룀)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신이 나아가기 어렵게 여기는 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지금 신의 나이 육 십에 가까웠으나, 학술이 거칠어 문장은 병과(丙科:과거 급제 마지막 등급)의 반열에도 끼지 못하고 행실은 물을 뿌리고 빗질을 하는 일을 맡기에도 부족합니다. 과거 공부에 종사한 지 10여 년에 세 번이나 낙방하고 물러났으니, 당초에 과거를 보려 하지 않았던 것이 아닙니다. 설사 과거를 탐탁하게 여기지 않았다 하더라도 마음이 조급한 평범한 한 사람에 불과하고 큰일을 할 만한 온전한 인재가 아니온데, 하물며 사람의 선악이 결코 과거를 도모했느냐의 여부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닌 데이겠습니까.

미천한 신이 분수에 넘치는 헛된 명성으로 집사(執事:신하)를 그르쳤고 집사는 헛된 명성을 듣고서 전하를 그르쳤는데 전하께서는 과연 신을 어떤 사람이라 여기십니까. 도(道)가 있다고 여기십니까, 문장(文章)에 능하다고 여기십니까. 문장에 능한 자라 하여 반드시 도가 있는 것은 아니며, 도가 있는 자가 반드시 신과 같지는 않다는 것을 전하께서만 모르고 계신 것이 아니라 재상들도 모르고 있습니다. 사람의 됨됨이를 모르고서 기용하였다가 훗날 나라의 수치가 된다면 그 죄가 어찌 미천한 신에게만 있겠습니까. 헛된 이름으로 출세를 하는 것보다는 곡식을 바쳐 벼슬을 사는 것이 낫지 않겠습니까. 신은 차라리 제 한 몸을 저버릴지언정 차마 전하를 저버리지 못하겠으니, 이것이 나아가기 어려워하는 첫째 이유입니다.

전하의 국사(國事)는 이미 그릇되었고 나라의 근본이 이미 망하여 하늘의 뜻이 이미 저버렸고 인심도 이미 떠났습니다. 비유하자면, 마치 일백 년이 된 큰 나무에 벌레가 속을 갉아 먹어 진액이 다 말랐는데 회오리 바람과 사나운 비가 언제 닥쳐올지를 전혀 모르는 것과 같이 된 지가 이미 오래입니다. 조정에 충의(忠義)로운 선비와 근면한 양신(良臣)이 없는 것은 아니나, 그 형세가 극도에 달하여 지탱해 나아갈 수 없어 사방을 돌아보아도 손을 쓸 곳이 없음을 이미 알고 있기에, 아래의 소관(小官:하급관리)은 히히덕거리면서 주색(酒色)이나 즐기고 위의 대관(大官:상급관리)은 어물거리면서 뇌물을 챙겨 재물만을 불리면서 근본 병통을 바로잡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더구나 내신(內臣:경관직 관리)은 자기의 세력을 심어서 못 속의 용처럼 세력을 독점하고 외신(外臣:외관직 관리)은 백성의 재물을 긁어 들여 들판의 이리처럼 날뛰니, 이는 가죽이 다 해지면 털도 붙어 있을 곳이 없다는 것을 모르는 처사입니다. 신은 이 때문에 낮이면 하늘을 우러러 깊은 생각에 장탄식을 한 것이 한두 번이 아니며, 밤이면 멍하게 천정을 쳐다보고 한탄하며 아픈 가슴을 억누른 지가 오래입니다.

자전(慈殿:문정대비)께서 생각이 깊으시다고 하지만 역시 깊은 궁중의 한 과부(寡婦)에 불과하고 전하께서는 어리시어 단지 선왕(先王)의 한낱 외로운 후사(後嗣)에 불과합니다. 그러니 수많은 종류의 천재(天災)와 억만 갈래의 인심을 무엇으로 감당해내며 어떻게 수습하겠습니까. 강물이 마르고 곡식이 비오듯 내렸으니, 이는 무슨 조짐입니까. 음악 소리는 슬프고 옷은 소복이니, 형상에 이미 흉한 조짐이 나타났습니다. 이러한 시기를 당해서는 아무리 주공(周公)과 소공(召公)의 재주를 겸한 자가 대신(大臣)의 자리에 있다고 하더라도 어찌할 수가 없을 것인데, 더구나 초개(草塏:지푸라기)같은 일개 미천한 자의 재질로 어찌 하겠습니까. 위로는 위태로움을 만 분의 일도 구원하지 못하고 아래로는 백성에게 털끝만큼의 도움도 되지 못할 것이니, 전하의 신하되기가 역시 어렵지 않겠습니까. 하찮은 명성을 팔아 전하의 관작(官爵:관직과 작위)을 사고 녹(祿:녹봉)을 먹으면서 맡은 일을 해내지 못하는 것은 또한 신이 원하는 바가 아닙니다. 이것이 나아가기 어려워하는 둘째 이유입니다.

그리고 신이 보건대 근래 변방에 변(變)이 있어 여러 대부(大夫)들이 제때 밥을 먹지 못합니다. 그러나 신은 이를 놀랍게 여기지 않습니다. 이번 사변은 20년 전에 비롯되었지만 전하의 신무(神武)하심에 힘입어 지금에야 비로소 터진 것으로, 하루 아침에 생긴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평소 조정에서 재물로서 사람을 임용하여 재물만 모으고 민심을 흩어지게 하였으므로, 필경 장수 중에는 장수다운 장수가 없고 성(城)에는 군졸다운 군졸이 없게 되었으니 적들이 무인지경처럼 들어온 것이 어찌 괴이한 일이겠습니까. 이것은 또한 대마도(對馬島)의 왜놈들이 몰래 향도(向導:앞잡이)와 결탁하여 만고의 무궁한 치욕을 끼친 것인데, 왕의 위엄을 떨치지 못하고 담이 무너지듯 패(敗)하였으니, 이는 구신(舊臣:오랜 신하)을 대우하는 의(義)는 주(周)나라 법보다도 엄(嚴)하면서도 구적(仇賊:원수)을 총애하는 은덕은 도리어 망한 송(宋)나라보다 더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세종(世宗)께서 남정(南征)하시고 성종(成宗)께서 북벌(北伐)하신 일을 보더라도 언제 오늘날과 같은 적이 있었습니까. 그러나 이와 같은 것은 겉에 생긴 병에 불과하고 속에 생긴 병은 아닙니다. 속병이란 걸리고 막히어 상하(上下)가 통하지 못하는 것이니, 이 때문에 경대부(卿大夫:신하)가 목이 마르고 입술이 타도록 분주하게 수고하는 것입니다. 근왕병(勤王兵)을 불러 모으고 국사(國事)를 정돈하는 것은 구구한 정형(政刑)에 있는 것이 아니고, 오직 전하의 한 마음에 달려 있을 뿐입니다.

알지 못하겠으나, 전하께서 좋아하시는 바는 무엇입니까. 학문을 좋아하십니까, 풍류와 여색을 좋아하십니까, 활 쏘기와 말 달리기를 좋아하십니까, 군자를 좋아하십니까, 소인을 좋아하십니까. 좋아하시는 바에 따라 존망(存亡)이 달려 있습니다. 진실로 어느날 척연히 놀라 깨닫고 분연히 학문에 힘을 써서 홀연히 덕(德)을 밝히고 백성을 새롭게 하는 도리를 얻게 된다면, 덕을 밝히고 백성을 새롭게 하는 도리 속에는 모든 선(善)이 갖추어 있고 모든 덕화(德化)도 이것에서 나오게 될 것이니, 이를 들어서 시행하면 나라를 고루 공평하게 할 수 있고 백성을 화평하게 할 수 있으며, 위태로움도 편안하게 할 수 있습니다. 그러한 요체(要諦:요점)를 보존하면 모든 사물을 정확하게 볼 수 있고 공평하게 헤아릴 수 있어 사특(嗣慝:간사하고 못됨)한 생각이 없어질 것입니다. 불씨(佛氏:불교)가 말한 진정(眞定)이란 것도 이 마음을 보존하는 데 있을 뿐이니, 위로 천리(天理)를 통달하는 데 있어서는 유(儒)와 불(佛)이 마찬가지입니다. 다만, 인사(人事)를 행하는 데 있어 실제 실천하는 것이 없기 때문에 우리 유가(儒家)에서 배우지 않는 것입니다. 전하께서는 이미 불도(佛道)를 좋아하시니, 만약 그 마음을 학문하는 데로 옮기신다면 이는 우리 유가의 일이니, 어렸을 때에 잃어버렸던 집을 찾아와서 부모와 친척, 그리고 형제와 친구를 만나보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더군다나 정사(政事)를 하는 것은 사람에게 달려 있는 것이고 사람을 임용하는 것은 자신의 몸을 닦음으로써 하는 것이며, 몸을 닦는 것은 도(道)로써 하는 것입니다. 전하께서 사람을 등용하는 데 자신의 몸을 닦음으로써 하신다면 유악(유幄:진영) 안에 있는 사람은 모두가 사직(社稷)을 보위하는 사람들일 것인데 아무 일도 모르는 소신 같은 자가 무슨 필요가 있겠습니까. 만약 사람을 겉만 보고 취한다면 자리 밖에서 모두 속이고 등지는 무리일 것인데, 주변 없는 소신 같은 자가 또 무슨 필요가 없겠습니까. 뒷날 전하의 덕화가 왕도(王道)의 경지에 이르게 되신다면 신도 마부의 말석(末席)에서나마 채찍을 잡고 마음과 힘을 다하여 신하의 직분을 다할 것이니, 전하를 섬길 날이 어찌 없겠습니까.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반드시 마음을 바로잡는 것으로 백성을 새롭게 하는 요체를 삼으시고 몸을 닦는 것으로 사람을 임용하는 근본을 삼으셔서 왕도의 법을 세우시기 바랍니다. 왕도의 법이 법답지 못하게 되면 나라가 나라답지 못하게 됩니다. 삼가 밝게 살피소서. 신 조식, 황송함을 가누지 못하고 삼가 죽음을 무릅쓰고 아뢰옵니다.


★ " ..... 전하의 국사가 그릇된지는 이미 오랩니다.... 자전께서는 구중 궁궐의 한낱 과부요, 전하께서는 단지 선왕의 외로운 아들에 불과합니다. 저 많은 천재(天災), 흩어진 민심을 무엇으로 막고, 어떻게 수습하실 수 있겠습니까? 전하의 국사는 이미 틀렸고 나라의 근본은 사라졌으며 하늘의 뜻은 떠나고 인심도 흩어져 거두어 들일 길이 없습니다."


소(疏)중의 이 대목은 조정을 발칵 뒤집어 놓았다. 명종 임금은 대로(大怒)하여 불경군 상죄(不敬君上罪)로 다스리라고 승정원에 명한다. 그러나 승정원에서는 남명을 일사(逸士)로 조정에 추천된 사람이며 그의 소(疏)는 우국 충정의 발로(發露)라고 극구 말려 가까스로 무마된다. 또한 실록을 편찬하는 사관들도 한결같이 찬탄을 아끼지 않았다. 대비를 한낱 과부로, 임금을 고아로 표현한 것은, 당시로서는 죽음을 각오하지 않고는 나올 수 없는 소리였다.


http://www.nammyung.pe.kr/namjarosil/nsaeng5-1.html
http://compedu.cue.ac.kr/~moed/lecture/kthought/k-th08.htm
http://www.nammyung.org/na-wb/wb-19ho/19-swlee.htm
http://dugok.x-y.net/urimunhoa/dansungso.htm
http://www.nammyung.pe.kr/nsaeng/nsaeng26.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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