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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9월 2일 수요일

치사하다

오늘 밤, 늦은 밤, 사무처의 멤버들과 밤새 논의를 하고 들어온 날, 나는 또 하나의 성명서와 만난다. 이 성명서의 배경은 '치사한 현실'이다. 한마디로 현임 정부가 들어선 이후 벌어진 일을 요약하면 '치사하다'는 것이다. 정말 '치사한 놈들의 짓거리'를 우리는 보고 있다. 그래서 이 포스트의 제목은 '치사하다'고 했다. '치사하다.'

 

치사(恥事)라는 말. 부끄럽다는 말이다. 영어로 가장 잘 옮길 수 있는 말이 'shame'이라는 말이다. 그리고 'disgrace' 즉 다시 말해 'grace'가 없다는 말이다. '우아함'이나 '염치'나 '예의' 같은 것이 없다는 말이다. 그리고 또 하나의 뜻. 'mean'의 뜻도 있다. 비열하다는 것이나 궁색하다는 뜻. 혹은 째째하다, 궁색하다, 더럽다는 뜻도 있다. 그리고 이런 뜻도 있다. 뒤떨어지다.

 

치사한 것은 그런 것이다. 째째하고, 궁색하고, 더럽고, 비열하고, 뛰떨어지고, 우아함이란 없고, 염치나 예의가 없고, 비열한 것이다. 2009년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은 그런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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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중권 씨에 대한 압력과 탄압을 중단하라!

미학자이자 사회비평가로서 대한민국의 지식계에 소중한 역할을 해왔던 진중권 씨가 현재 곤경에 처해 있다. 그가 미학 연구자
로서 관계해왔던 공립, 사립 대학교에서 연달아 그의 자리가 사라졌다. 또 그는 지금 여섯 개에 달하는 재판과 소송에 시달리고 있으며, 그밖에도 소득세 납부 등의 이유로 집요한 감사를 당하고 있다.

우리는 이러한 사태를 진중권 씨 개인의 문제로 국한하여 보지 않는다. 또 특정한 이념적 노선의 지식인들에 대한 사회적 탄압의 차원을 넘어서는 더 큰 차원의 문제가 있다고 생각한다. 현재의 사태는 우리 사회에서 과연 독립적 지식인 그리고 공공적 지식인이 설 자리가 존재하는가라고 하는 더 근원적인 문제를 우리에게 던지고 있다.

이 사태는 독립적 지식인의 위기를 웅변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이다. 민주주의 사회는 상상력과 비판과 제안에 관한 한 무제한의 자유가 허락되었을 때에 비로소 건강성을 유지할 수 있다. 이러한 무제한의 자유를 실현함에 있어서 권력이나 자본 나아가 대학이나 학제와 같은 일체의 제도적 배경으로부터 독립성을 유지하면서 지적 작업을 수행해나가는 독립적 지식인의 존재는 그래서 민주사회에 있어서 필수불가결의 존재이다.

또 이 사태는 공공적 지식인의 위기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사건이다. 오늘날의 제도화된 지식계는 갈수록 전문적인 세분화를 겪고 있으며 그 생산물
은 같은 분야의 전문가들도 이해하기 힘들게 암호화되어 가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의 분절화된 전문 분야를 넘어서서 사회 전체가 당면한 문제들과 대면하여 이를 공공이 이해할 수 있는 언어와 방식으로 소통할 수 있는 공공적 지식인의 존재가 또한 민주주의의 필수 요건이다. 이들이 없다면 민주주의는 다수 지배의 탈을 쓴 엘리트 지배나 중우 정치로 전락하고 말 것이다.

진중권 씨는 지난 10년에 이르는 기간 동안 척박한 한국의 지적 토양에서 이 두 가지 역할을 몸소 구현한 이이다. 그는 권력이나 자본은 물론 좁은 의미에서의 대학이나 학제와 같은 제도에 의존하거나 구애받지 않은 채 자신의 독특한 논지와 주장을 벼려온 이로서 널리 인정받아 왔다. 또 특정 분야의 전문성에 갇히지 않고 제도적 지식인들이 기피하는 예민하고 어지러운 논쟁 구도에 거침없이 뛰어들어 사회 전체의 소통과 공론의 장을 만들기
위해 애써왔다. 이러한 그의 독특한 위치는 그가 내놓은 다양한 분야의 서적들과 그 각각이 거두어온 놀라운 대중적 성공이 여실히 증명한다.

지난 몇 개월간 이 사회의 각종 권력 제도는 자신들이 이러한 독립적 지식인 그리고 공공적 지식인을 얼마나 기피하고 위험시하는지를 스스로 폭로하였다. 한마디로 비열
하고 치사하다고 밖에 달리 말을 찾지 못하겠다.

비열하다. 어느 하나의 기관이나 제도도 아니다. 어느 하나의 사유와 명분을 공유하는 것도 아니다. 정부 기관에서 공립 대학, 사립대학에 이르는 지식계의 다양한 "기존 권력"이 다양한 이유를 들면서 공모라도 한 듯 똑같은 행동의 보조
를 맞추고 있다.

치사하다. 그의 자리를 빼앗으며 내건 이유들, 명분들이라는 것이 참으로 안쓰러운 것들이다. 진중권 씨가 학위
가 없다거나 다른 기관에 직함을 가지지 않았다는 것이 도대체 지난 몇 개월간 새로 발생한 사유인가? 어째서 지난 몇 년간 문제가 되지 않았던 일들이 지금 이 몇 개월 사이에 한꺼번에 문제가 된단 말인가?

이번 일을 겪으면서 우리는 한국 사회에서 어떤 제도나 권력에 기댈 곳을 마련하지 못한 지식인이란 실로 바람 앞의 촛불처럼 취약하고 위태로운 처지에 있다는 사실을 절감하게 되었다. 진중권 씨와 같이 대중적 관심과 지지를 얻고 있는 지식인도 이럴진대 그조차 갖지 못한 이들은 이 사회에서 과연 권력, 자본, 대학에 어서 빨리 자리를 마련하기 위해 일렬종대로 늘어서는 것 이외에 다른 지적 작업을 할 용기를 감히 낼 수 있을까?

또 민주사회의 주인인 공공 대중의 의식을 풍부하게 하고 소통시키기 위한 작업에 과연 과감하게 적극적으로 나설 수 있을까?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지금 진중권 씨를 지켜내는 일이 진중권 씨보다 불리한 환경에서 작업하고 사유하는 지식인들 일반을 보호하기 위한 공공성을 가진 일이라고 믿기에 이렇게 뜻을 같이 하게 되었다.

우리는 야유한다. 힘없고 가진 것 없어도 그저 지적 자유를 만끽하고 이웃과 공유하는 것 하나를 인생의 기쁨이자 소명으로 여기는 지식인들에게 이 사회의 기성 권력이 돌려준 대접에
대해서. 또 우리는 충고한다. 국민의 태반이 대학을 졸업하고 독자적 사유와 토론 능력을 가진 오늘날의 우리 사회에서 지식 사회의 대세를 행여 몇 가지의 알량한 제도적 권력을 휘둘러서 통제 아래에 둘 수 있다는 낡은 생각을 포기할 것을.

진중권 씨에 대한 유형무형의 압력과 탄압을 중지하라. 우리 인문사회과학 저자들은 이미 우리 사회에 단단하게 기둥
을 박은 공공장의 담론의 힘을 믿으며, 우리의 독자들 그리고 공공 대중과 함께 연대하여 진중권 씨를 지키고 지식 사회의 건강성을 유지하기 위해 분투할 것이다.

강준만(전북대 교수), 고종석(<한국일보> 객원논설위원), 김규항(<고래가 그랬어> 발행인), 우석훈(<88만 원 세대> 저자·연세대 강사), 홍기빈(<거대한 전환> 역자·국제정치경제칼럼니스트) 이상 5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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