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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1월 15일 금요일

춘래불사춘--박래군

국가인권위원회의 웹진 <인권> 2006년 3월에 썼던 글이다. '래군이 형'이 춥지 않기를 바라면서, 여기에 옮겨놓는다.
 
그때는 평택 대추리에서, 작년부터 올초까지는 용산에서. 벌써 사람들은 평택 대추리는 아득한 옛날처럼 생각하는 것이겠지만, 그의 육신과 영혼 속에 그 싸움싸움의 갈피에서 식지 않는 뜨거운 핏덩어리 사람의 온기는 어떻게 잊혀질 수 있는 것이겠는가.

 

잊지 않기 위해서, 잊어버리지 않기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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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우리 자신의 진면목을 눈을 부릅뜨고 보아야 한다.
갈가리 찢긴 가슴과 마음이 검게 타버린 사람들의 눈물을 외면해서는 안 된다.
절망으로 고통을 호소하는 비명이 들려올 때 귀를 막아서는 안 된다. 누군가는 그 상처를 어루만지고 눈물을 닦아주려 손을 뻗어야 한다. 수고스럽지만 그 비명이 들려오는 곳으로 한 걸음 더 가까이 다가가서 귀를 기울여야 한다. 그런데 과연 누가 그렇게 할 것인가.

고통스러워하는 사람과 함께 눈물을 흘리며 그 눈물을 닦아주는 일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타인의 고통 속으로 들어가 그 고통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예민함과 섬세함이 있어야 한다. 인간 존재에 대한 깊은 연민과 두려움을 넘어설 수 있는 용기가 있어야 한다. 슬픈 진실을 직면하고 함께 아파하는 것은 힘이다. 그런 힘을 지닌 이를 무어라고 부를 것인가. ‘활동가’가 그런 사람이 아닌가.
 
‘활동가’라는 것이 결코 직업이 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박래군(46) 씨는 ‘활동가’를 직업 삼아 십수 년을 살아왔다. 그의 이력을 소개하는 난에 인권운동사랑방 사무국장, 국가보안법폐지국민연대 공동운영위원장,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조사3과장, 에바다복지회 이사, 인권재단 사람의 이사, 「사람」의 편집인 등등을 쓸 수도 있건만, 그이는 굳이 ‘활동가’임을 고집한다.

이를테면, 지난 2월 15일 철학카페 느티나무에서 열린 ‘군대 내 동성애자 인권침해 규탄과 군 당국의 조속한 해결 촉구를 위한 기자회견’에서도,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의 이석태 회장, 민주노동당 인권위원회 이덕우 위원장, 한국성폭력상담소 이미경 소장, 동성애자인권연대 황장권 사무국장과 함께, 인권단체의 견해를 밝힌 박래군은 인권운동사랑방의 상임활동가로 소개된다.
 

그렇다. 박래군은 활동가다. 그것도 상임활동가다.
그이의 활동은 낮과 밤이 따로 없고 일과 휴식의 구별도 쉽지 않다.
일년 삼백육십오일 매일 매일의 일상이 활동이고 싸움이다.
지난 십여 년 동안 우리 사회의 인권 문제 현장에는 항상 박래군이라는 이름 석자가 있었다.
 
박래군이 생각하는 인권운동은 ‘문서로 확인된 권리를 현실에서 확보해 나가는 운동’이면서 동시에 ‘새롭게 그 개념과 폭을 확대하고 재창조해 나가는 운동’이다.
 
박래군은 인권보고서를 손으로 쓰지 않고 가슴으로 쓰며, 언어로 쓰지 않고 눈물과 분노로 써 나간다.

“지난 입춘에 평택시 팽성에 있는 대추리에 갔다. 그날따라 입춘 추위는 유난히 매서웠다. 그곳에서 언 손을 비비며 빈 집 하나를 수리했다. 지하수를 끌어올리는 양수 모터를 달아 물을 끌어올리고, 싱크대를 설치하고, 호스 관을 모두 끊어놓은 보일러의 수리를 도왔다. 그 집 앞에는 미군 기지가 들어선다는, 지평선 너머 황해바다가 있는 그런 너른 들판이 있다.” 「사람」 2006년 3월호 권두언, ‘입춘, 대추리에서’

활동가 박래군 씨를 만나기로 마음먹은 날, 텔레비전 뉴스를 보고 있는데 그이의 얼굴이 언뜻 화면에 비쳤다.
 
대추초등학교에 대한 법원의 강제대집행을 다른 인권활동가들과 함께 그이도 온몸으로 막아서고 있었다. 문정현 신부는 말 그대로 흐느끼며 울부짖고 있었다.
 
“이럴 수는 없다, 이럴 수는 없다”고. 경찰 등 1200여 명을 동원한 정부는 그날 차마 주민 300여 명과 인권활동가를 짓밟지 못했다. 다행이었다. 그러나 아, 대추리는 어찌 될 것인가.
 
손전화를 연결하니, 마침 서울에 올라올 일이 있단다.
만나기로 한 곳은 월간 「사람」의 편집회의가 열리는 법무법인 다산 사무실.
김칠준 변호사를 비롯한 「사람」의 편집진이 일과를 끝낸 뒤 비어 있는 사무실에서 5월호의 편집안을 놓고 회의를 하고 있었다.
 
메이데이 특집을 어떻게 다룰 것인가, 여러 의견이 오고간다. 민주주의적 의사결정 문제를 포함한 노동조합 내 인권 문제를 다루자는 의견도 나오고, 조합 내 장애인 의무고용이나 성폭력 문제, 여성이 간부가 되지 못하는 현실까지 다루자는 의견도 나온다.

회의가 끝나자 편집진은, 부친상을 당한 활동가 강곤 씨를 문상하러 강남성모병원으로 가고, 박래군 씨와 단둘이 마주앉아 짧은 시간 긴 이야기를 나누었다.
할 일 많고 생각 많은 이들이 그러하듯, 그이의 말은 빠르고, 논리가 정연했다.

먼저 주5일제 시대에 주7일도 모자라서 야근에 특근까지 마다하지 않는 ‘활동가들의 인권’에 대한 이야기로 말머리가 잡혔다. 17~18년 동안 인권운동의 현장에 있으면서, 말하자면 활동가 가운데 맏형인 그이의 눈에 후배 활동가들은 어떻게 보일까.

“후배들이 여러 가지 이유 때문에 활동을 접을 때, 안타까워요. 활동가 층이 엷기 때문에 한 사람 한 사람이 무척 소중해요. 단지 인권운동 차원의 손실일 뿐만 아니라 사회 전체 차원에서도 큰 손실이에요.”

‘인권재단 사람’ (다산 인권재단의 이름이 이러저러한 혼동을 불러일으키기 때문에 이름을 바꾸었다고 한다) 이 고민하고 있는 영역도 바로 이 지점이다.
 
인권재단 사람은 인권단체의 필수요건인 재정적인 독립을 지원하기 위해 인권 단체 가운데 정말로 열악한 단체 스무 개쯤을 지원하여 운동이 지속될 수 있도록 돕겠다는 계획을 가지고 있다.
 
개별 단체도 단체지만 인권운동 전체 차원에서 인권운동을 지지하는 시민의 후원을 늘리기 위한 노력과 재정사업을 전개할 계획도 세워 두고 있다. 그것은 인권운동의 대중화를 위한 한 과정일 것이다.

“하반기에는 활동가들의 건강 검진도 추진하려고 마음먹고 있어요. 의사들이 모인 단체의 협조를 받아 무료로 건강 검진을 받을 수 있도록 해보려는 거죠. 사실 활동가들의 스트레스가 엄청난데 병이 나면 아무런 대책도 없는 실정이죠.”
 
인권운동은 ‘자유 평등 박애’에서 ‘연대’로

월간 「사람」이 지난 1월 12일부터 14일까지 충주에서 열린 ‘제4회 인권활동가대회’에서 실시한 ‘인권활동가들의 경제생활 현황조사’에 따르면, 인권활동가들의 67.1%가 65만 원을 밑도는 활동비를 받으며 생활하고 있었다. 그러나 부족한 활동비로 인해 활동을 그만두려 한 적이 있다고 한 이들은 불과 18.6%밖에 되지 않았다.

이렇게 열악한 상황 속에서도 활동가들이 운동을 계속 펼쳐 나가려고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박래군은 한마디로 ‘운동의 운명’이라고 말한다.

“운동은 항상 제도권 밖에서 펼쳐집니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그런 것들 가운데 일부가 제도화합니다. 그러나 운동은 그런 이후에도 제도권 밖에서 더 진전된 이념과 활동 내용을 가지고 지속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앞서서 문제를 계속해서 던져 나가는 활동가들의 존재 때문에 인권운동은 ‘보편성의 함정’에 빠지지 않을 수 있다. 서구의 자본주의 역사과정과 궤를 같이하는 인권운동의 역사는 ‘모든 사람은 평등하다’ ‘모든 사람은 사상의 자유를 갖는다’는 식의 보편적 인권 개념을 전면에 내세웠다.
 
그러나
“인권은 천부적인 것도, 고정불변의 것도 아니다.
역동하는 인간의 역사에서 인간의 존엄함을 드러내는 투쟁 과정을 통해서 한 걸음 한 걸음 진전해온 것이 바로 인권이다.”‘ (인권, 인권운동이란 무엇인가’에서)
움직이는 인권, 살아 꿈틀거리는 인권이라는 개념은 인권 인식의 지평을 넓히는 데 매우 결정적이다. 왜냐하면, 인권이란 “인권을 추상화, 형식화하려는 지배세력과 실질적인 권리로 구체화하려는 피지배세력 간 대립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인권을 이렇듯 살아 꿈틀거리는 것으로 볼 때라야 민중의 힘이 성장함에 따라 그 개념의 외연과 내용이 확대된다는 사실을 정확하게 인식할 수 있기 때문이다.
 
과거사 청산 문제도 그렇고, 세계화시대의 노동권, 차별 문제도 본격적으로 제기되기 시작했습니다. 이제 시민 정치적 권리의 차원을 뛰어넘어 사회문화적 요구까지  포괄하는 인권이 제기되는 단계죠. 그러나 인권 문제의 근본적인 변화는 아직도 요원합니다. 인권 문제의 폭이 넓어진 것만큼이나 인권운동의 전문성이 높아지고 있지만, 총체적으로 볼 때 파편화의 수준을 극복하지 못하고 있어요. 어떤 면에서 보면 인권운동의 위기 상황이라고 할 수 있죠.”

2004년 5월 ‘인권단체 연석회의’가 결성된 이유는 바로 이러한 위기 상황을 극복하기 위한 것이다. 여러 인권단체가 수평적으로 모여 상호 교류하고 소통하면서 우리 사회가 요구하는 인권의 지평을 확인하는 한편, 장기적 인권 전략과 인권 의제를 찾아내어 제시하고자 한 것이다. 현재 ‘인권단체 연석회의’에는 노동권, 장애인 인권, 이주노동자 인권, 성소수자 인권, 국가폭력 청산을 위한 인권 등 다양한 분야의 인권단체 36개가 연대하고 있다.

“심화되고 있는 운동의 분절화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이를 극복할 이념과 논리가 필요합니다. 그리고 각 분야의 인권운동을 꿰어주고 집중이 필요할 땐 집중시키는 역할이 필요합니다.”

활동가 박래군은 스스로 그런 역할을 자임하고 있는 듯이 보였다.

“자유.평등.박애에서 연대로 나아가야 합니다. 우리 사회 전반의 인간화를 위해서는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라는 질문이 필요한 거죠. 신자유주의 세계화 과정 속에서 생존권 문제는 이제 근본 문제가 되고 있습니다. 절망의 빈곤을 극복하는 일이 모든 운동의 주제가 되고 있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인권운동이 이 문제를 중심으로 사유하고 움직여 나가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인권운동이 사람을 중심에 놓고 사회변화를 추구하는 운동이라 한다면 그 어떤 운동보다도 이 문제를 고민의 초점에 놓을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이야기는 자연스레 국가인권위 설립과 함께 나타난 인권운동의 지형도 변화에 가 닿았다.

“국제인권 기준을 우리 현실에 적용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은 큰 진전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국가인권위가 흡사 하나의 사법기구와 같은 이미지를 구축해가는 것은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또 인권교육을 놓고 봐도 인권교육은 매우 중요한데 국가인권위가 인권교육에 접근하는 방식이 너무 양적인 것에 치중하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인권교육은 한마디로 ‘인권 감수성’을 키워 나가는 일이다. 인권 감수성을 키우기 위해서는 ‘생활화’가 관건이다. 하지만 ‘생활화’라는 것이 말처럼 쉬운 일일까.

“하다 보면 됩니다. 처지를 바꾸어 한번 생각해보자는 것이니까요. 참여형으로, 스스로 생각하고 스스로 느낄 수 있도록 어릴 때부터 인권 감수성을 키울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한국의 인권운동은 한편에서는 노동자, 농민, 여성, 어린이, 장애자, 이주노동자, 동성애자 등 사회적 소수자이기 때문에 차별받는 약자들의 권리를 위해 싸우고 있다. 그리고 그 각각의 영역에서 펼쳐지는 독자적인 활동이 상호 교류하고 연대하는 틀이 만들어지고 있다. 그러나 다른 한편에서는 사회적 권리의 박탈과 배제로 귀결되는 빈곤의 세계화로 말미암아 지금까지 쌓아놓은 인권의 보루가 무기력하게 무너지는 상황이 전개되고 있다. 그리하여 인권의 이름으로 발전의 문제도 제기하고,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의 문제까지 개입해 들어가서 새로운 대안을 만드는 일을 전개하지 않으면 안되는 현실이다. 이 모든 투쟁과 연대와 문제제기의 최전선에 활동가 박래군이 서 있다.

“벌써 40대 중반을 넘어서고 있는데, 오늘 내가 내린 이 판단은 정말 올바른 판단인가. 진땀날 때가 많습니다. 그래도 ‘인권운동사랑방’의 경우에는 다른 활동가들과 함께 의견을 나누고 결정해 나갈 수 있기 때문에 다행이라고 생각하죠.”

인권이 영원한 진보 이념이고, 인권운동이 끊임없이 비제도권으로 그 영역으로 넓혀갈 수밖에 없는 운명을 지닌 운동이라면, 인권운동 활동가는 그 무거운 짐을 기꺼이 제 등에 짊어진 사람이다. 어느덧 선배보다 후배가 더 많아진 박래군은 미분화 상태의 우리 인권운동을 온몸으로 감당해 나간 첫세대이자, 자본주의의 모순을 인권 문제의 본질로 파악하는 세대의 대표자인지 모른다.

“곧 봄이다. 지독히도 추웠던 겨울이 끝났다는 것만으로도 안심이지만, 계절의 봄이 인간사회의 봄으로 곧바로 이어지지는 않는다. 봄은 봄이로되 봄이 아닌 암울해만 가는 인권의 현실 속에서 인권활동가는 무엇으로 희망을 삼을 것인가.” 「사람」 2006년 2월호 권두언 ‘인권활동가의 봄은?’
 

과연 봄이 오고 있기는 한 것일까.
 
활동가 박래군 씨는 오늘도 실낱같은 희망을 찾아
 
묵묵히 그이의 손길이 필요한 현장으로 발걸음을 옮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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