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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2월 4일 목요일

시민인문학

중앙일보 배영대 기자가 정리한 내용이다. '인문학 게릴라'라는 제목을 붙였다.

 

나는 '게릴라(guerrilla)'라는 말을 좋아하지 않는다. 스페인어에서 뻗어나온 이 말은 결국 '빨치산'을 말한다. 정규군이 아닌 비정규군을 말한다. 어찌 되었든 '인문학'과 '게릴라'는 서로 어울리지 않는 말이다.

 

이런 말보다는 '시민인문학' '실천인문학', 혹은 '사회인문학'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한다.

 

인문학 공부, 대학 강의실 안에서만 하는 게 아니다. 상아탑 밖의 열기가 오히려 더 뜨겁기도 하다. 자신만의 안목을 키우기 위해 ‘인문학 공부방’을 찾는 이가 적지 않다. 진정한 앎에 대한 갈증은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는다. 자기 선택에 따른 공부는 ‘스펙 쌓기’와는 무관한 일이다. 대학 밖 공부방에는 전공 간 장벽이 없다. 동·서양 고전이 시공을 초월해 자유롭게 대화를 나눈다. 대학이 지식의 정규군이라면 이들은 ‘인문학 게릴라’다. 그 영역도 점점 확대되는 추세다. 일종의 ‘인문학 시장’을 만들어가면서 대중의 발길을 끌어당기고 있다.

배영대 기자

인문학 공부, 대학 밖에서 더 활발하게 펼쳐진다. ‘인문학 게릴라’의 역사는 1990년대 초반 도올서원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도올 김용옥 전 고려대 교수의 고전 강좌는 지식 갈증을 달래려는 수많은 사람들로 붐볐다. 대학 밖 인문학 공부방의 성공 가능성을 예고했다. 사진은 90년대를 뜨겁게 달군 도올의 강연 모습. 사진작가 박옥수씨가 촬영했다. [통나무출판사 제공]

 

 

‘인문학 게릴라’의 역사는 1990년대 초반 ‘도올서원’으로 올라간다. 도올 김용옥 전 고려대 철학과 교수가 교수직을 사퇴한 후 자신의 아호를 딴 서원을 서울 동숭동에 열었다. 부정기적으로 열리던 도올의 대중강연이 자리를 잡게 되었다. 1994년부터 2001년까지 매년 겨울과 여름방학을 이용해 『논어』 『맹자』 『대학』 『중용』 등 동양 고전을 강의했다. 전통 서당식 공부 방식을 재현한 도올서원은 도올의 동서고금을 넘나드는 현란한 강의에 힘입어 큰 호응을 얻으면서 대학 밖 인문학 공부방의 성공 가능성을 예고했다.

지식 게릴라 시대는 2000년 이정우 서울과학종합대학원 교수가 철학아카데미를 열면서 본격화했다. 도올서원이 도올 1인 강좌를 방학 기간에만 개설한 것과 달리, 2000년 이후 등장한 다양한 인문학 공부방은 다수의 강좌를 동시에 개설하고 대학 학기 중에도 강좌를 열었다. 철학아카데미와 비슷한 시기에 이진경(본명 박태호) 서울산업대 교수와 고미숙·고병권 두 박사의 주도로 ‘연구공간 수유+너머’가 설립되며 인문학 공부방의 새로운 경지가 펼쳐졌다.

이들은 한국형 지식 게릴라의 한 전형을 만들어가고 있다. 박사학위를 받았으나 대학 교수직을 찾지 못한 젊은 연구자들이 삼삼오오 모여 만든 소규모 공부방이 지금은 인문학의 새 활로를 열어가고 있다.

대학 밖 ‘인문학 시장’은 대개 석 달(10~12주) 단위로 운영된다. 강좌당 수강료는 대개 10만원 안팎이다. 일률적인 것은 아니지만 1시간에 1만원꼴로 보면 된다. 일종의 시장가격이 형성돼 있는 셈이다. 인터넷은 게릴라들이 자신의 존재를 알리는 매우 효율적인 도구다. 단순히 자신을 알리는 차원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인터넷을 활용한 사이버 인문학 강좌도 잇따라 개설됐다.

주요 인문학 강좌의 특징을 살펴본다. 사방천지가 공부방인 시대. 급변하는 세상을 뚫어보는 ‘눈’을 키워보시길…. ‘학이시습지 불역열호(學而時習之 不亦說乎)’는 공자만의 전유물이 아닌 것이다.

연구공간 수유+너머

www.transs.pe.kr / 02-3789-1125


연구공간 수유+너머
국내를 대표하는 인문학 게릴라 모임이다. 2000년 서울 수유리의 작은 방에서 출발했으나 지금은 초기와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성장했다. 서울 용산동2가에 위치한 본원(‘수유너머 남산’이라고 부름)은 정규 대학의 한 단과대학을 연상시킬 정도다. ‘수유너머 남산’ 이외에 ‘수유너머 구로’ ‘수유너머 강원’ ‘수유너머 N’ ‘수유너머 길’ ‘수유너머 R’ 등의 분원도 생겨났다. 2000년 참여한 초기 멤버들이 10년의 세월과 함께 박사급 연구자로 성장해 분화를 이끌고 있다.

수유너머의 발전적 분화는 어디까지 전개될지 알 수 없다. 특별히 정해진 방향은 없지만 계속 새로운 가지치기로 이어질 전망이다. 사회학 박사인 이진경과 고병권, 그리고 국문학 박사인 고미숙이 모임의 세 기둥 역할을 하고 있다.

여러 지식 게릴라들과 차별화된 수유너머만의 독특한 운영방식이 있다. 공부와 생활이 분리되지 않는 것이다. 수유너머가 발군의 성장을 계속하는 배경이다. 회원들이 대부분의 시간을 함께 보낸다. 강좌 하나 듣고 끝나는 것이 아니다. 좋은 앎과 좋은 삶을 일치시키는 생활공동체가 이들의 지향점이다. 잠만 각기 집에서 잔다. 함께 공부하고, 함께 먹고, 함께 운동하는 이들의 존재는 국내뿐 아니라 해외에서도 주목을 받는다.

철학아카데미

www.acaphilo.or.kr / 02-2279-2871(서울 장충동)
www.acaphilo.org (서울 동교동)


철학아카데미
2000년 문을 열었다. 인문학 게릴라 시대의 출발을 알렸다. 대학에 자리를 잡지 않은 인문학 박사들이 대학 밖에서 힘을 합쳐 활로를 개척했다. 낯선 방식이었지만 대중과의 직접 소통은 학문적 문제의식을 구체화하는 것이기도 했다. 철학을 중심으로 사회문제와 문화예술을 포괄하는 강좌들이 개설됐다.

대중 강좌는 철학의 저변을 넓혔다. 특히 미셸 푸코·질 들뢰즈 같은 프랑스 현대철학자의 사상을 국내에 확산시키는 데 기여했다. 당초 서울 인사동에서 이정우·조광제 두 철학박사가 함께 문을 열었다. 하지만 2007년부터 둘로 나뉘었다. 하나는 서울 장충동에 있으며 조광제 박사를 중심으로 운영된다. 다른 하나는 서울 동교동에 있고 이정우 교수가 이끌고 있다. 이 교수는 오는 3월부터 좀 더 심화된 연구형 강의를 늘린다는 계획이다. 휴간 중인 잡지 ‘아카필로’ 복간도 준비 중이다.

아트앤스터디 /인문숲

www.artnstudy.com / 02-323-1081


2001년 시작한 아트앤스터디는 인문학의 블루오션을 개척했다. 사이버 인문학 강좌다. 현재 200여 강좌가 개설돼 있다. 이 중 60%는 철학 강의며, 나머지는 문화예술·문학 등이다. 지금까지 10년간 유료 회원 4만5000명이 최소 1강좌 이상을 이용했다. 대중적 재미와는 다소 거리가 있는 인문학의 특수성을 감안할 때 결코 적지 않은 숫자다. 고객은 30대가 가장 많다. 대학 시절 충족하지 못한 지식의 갈증을 해소하려고 찾는 것이다.

같은 강좌를 반복해 들을 수 있는 것은 인터넷 강좌의 장점이다. 이정우·박정하·진중권씨 등이 인기 강사로 꼽힌다. 현준만 대표는 온라인 아트앤스터디의 성공을 오프라인으로 이어갈 계획을 세워놓고 있다. 최근 ‘인문·숲’이라는 오프라인 배움터를 서울 동교동에 마련했다. 희랍어·라틴어 같은 철학 공부와 관련이 많은 기초 어학 강좌가 개설된 점이 눈에 띈다.

문지문화원 사이

www.saii.or.kr / 02-323-4207


문지문화원 사이
문학과지성 출판사가 2007년 자매기관으로 설립한 아카데미다. 인문학 대중강연 이외에 전시·공연 등도 기획한다. 인문학 전반에 걸쳐 강좌가 개설됐다. 특히 문학과 예술 분야가 강세다. 과학을 주제로 한 대중강좌도 주목을 받고 있다. 다른 공부방과 달리 모든 강좌를 오후 7시 이후에 배치했다.

소설가 장정일의 ‘현대 문명의 드라마: 입센과 체호프 이후의 현대 희곡’, 황지우 시인의 ‘명작 읽기’ 같은 비교적 전통적 방식의 강좌는 기본이다. ‘재앙과 이미지’ ‘한국의 대중음악: 몇 가지 의심과 질문들’ ‘한국의 남성복 패션디자이너들’ ‘두뇌가 만들어주는 우리의 세상’ ‘4차원을 만지는 암호’와 같은 개성 넘치는 강좌가 개설됐다.

다중지성의 정원

www.daziwon.net / 02-325-2102


‘즐거운 지식, 공통의 삶, 다중의 지성공간’을 모토로 내걸고 2007년 문을 열었다. 이곳에서는 자율주의의 주창자로 널리 알려진 이탈리아 정치철학자 안토니오 네그리의 강좌가 집중 개설된다. ‘에스페란토어 강좌’ 같은 특수어 강의와 ‘세계화 이후의 세계와 세계화의 갈림길’ 같은 현실 변화의 맥락을 짚는 강좌가 눈길을 끈다. 갈무리 출판사와 웹진 ‘자율평론’이 자매기관이다.

사이버서당

www.cyberseodang.or.kr / 02-762-8401


전통문화연구회 사이버서당
전통문화연구회(회장 이계황)가 2000년 개설해 운영하고 있는 인터넷 동양 고전 강좌다. 『논어』 『맹자』 『주역』 등 동양 고전에 대한 강의가 집중 개설돼 있다. 사이버서당과 함께 전통문화연구회는 오프라인에서 고전연수원도 운영하고 있다.

예술의전당 ‘문화+인문학 강좌’

02-580-1608


예술의전당 미술아카데미가 주관한다. 소규모로 진행해오다 2005년부터 본격 대중강좌로 확대했다. 2010년 봄 학기에는 ‘권용준의 열정적 예술사 탐구-근대편’ ‘제대로 읽는 세계의 고전’ ‘뮤지엄 탐방-세계편’ ‘깊게 보는 세계의 미술-미국편’ 등이 개설된다. 3월 2일부터 6월 19일까지 12주에 걸쳐 진행된다.

※도움말(가나다순)=고미숙 수유너머 연구원(고전평론가), 이정우 철학아카데미 원장(서울과학종합대학원 교수), 전호근 전통문화연구회 상임연구위원(동양철학박사), 조정환 다중지성의 정원 대표(갈무리출판사 대표), 주일우 문지문화원 사이 기획실장, 현준만 아트앤스터디/인문·숲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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