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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10월 10일 일요일

희망의 인문학과 인문학의 위기

노정태 전 <포린폴리시> 한국어판 편집장의 프레시안 북스 칼럼 ''죽은 철학자의 사회'…'희망의 인문학'은 없다!에서 한 대목. 

<희망의 인문학>에 내재된 인문학적 시각은 결코 그 자체로 지적 권위를 획득하고 있는 것이 아니며, 하나의 '입장'에 지나지 않는다. 그가 '희망의 인문학'을 진행하는 과정에서 보여주는 헌신과 열정에 대한 존경심과는 별개로, 얼 쇼리스가 제시하는 인문학에 대한 관점은 전적으로 옹호되기에는 무리가 많다. 우리가 정말 인문학을 통해 스스로 생각하는 법을 배운다면, 얼 쇼리스의 '인문학' 역시 그 반성적 고찰의 대상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이제 한 가지 질문을 던져보자. 인문학을 배우는 것이 누군가의 내면적 주체성을 북돋워줌으로써 그를 가난의 굴레에서 벗어나게 한다면, 왜 21세기 현재 대한민국에서는 그 누구보다 인문학을 열심히 공부하는 사람들이 줄줄이 자살하고 있을까? 다른 식으로 표현하자면, 왜 '희망의 인문학'이 승리하는 가운데, 인문학자들은 절망하고 좌절하여 목숨을 끊고 병에 걸리고 눈물을 삼켜야 하는가? (중략)

 

앞서 살펴보았듯이 클레멘트 코스에서 전제하는 '인문학'은 결코 인문학 전체를 포괄하는 개념이 아니다. 사람들에게 꿈과 희망을 불어넣어줄 수 있도록, 그와 같은 목적으로 편집된 인문학이다. 물론 그것도 하나의 인문학적 관점이겠지만 그것이 전체 인문학을 대변한다고 할 수는 없다. 모든 인문학이 대중들의 삶에 희망을 주기 위해 존재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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