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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12월 8일 수요일

나는 문명의 반대편에 설 수 있을까?

나는 문명의 반대편에 설 수 있을까?

'힌두 스와라지' 정신이 던지는 '난감한' 질문

 

2002년 03월 01일 (금) 04:02:00

한승오

 

 

나는 태어나서 지금까지 오로지 현대산업문명 속에서만 살아왔다.
20세기 말 한국에서 이루어진 근대화, 산업화의 물결을 따라 나의 인생도 요동을 쳤다. 그래서 나의 직접적인 체험에는 현대산업문명 이전의 것이 없다. 어찌 보면 내가 문명의 발전을 당연시해왔고 그 발전 방향을 진보라고 믿어온 것은 자연스러운 일일지 모른다.
물론 그 발전 과정에서 드러나는 여러 가지 문제들을 바라볼 수는 있었지만, 문명 그 자체를 근본적으로 의심하기에는 나 스스로가 너무나도 문명적이었다.

마약에 중독된 자가 스스로를 마약중독자로 인정하는 것이 어렵듯, 현대문명의 이기에 푹 빠져 있는 사람이 그 문명에 대해 근본적으로 회의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간디의 <힌두 스와라지>(안찬수 번역, 도서출판 강, 2002년)는 나에게 이런 질문을 던진다.
“나는 현대문명에 중독되어 있는 것은 아닐까?”

"삶의 목표를 '육체적 복지'에 두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현대문명이란 무엇인가?
간디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먼저 문명이라는 단어로 묘사되는 것이 어떤 상태인지 생각해보도록 합시다. 이 문명의 실제적인 판단 기준은 그 속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이 삶의 목표를 육체적 복지에 두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현대문명이라는 거창한 이름 밑에는 바로 몸의 편리함을 좇는 인간의 욕망이 깔려 있다는 말이다.

시골에서도 요즘은 우물을 쓰는 집이 드물다. 대부분 땅속 깊이 구멍을 뚫어 지하수를 끌어다 쓴다. 하지만 눈으로 물 밑바닥을 들여다볼 수 있는 우물을 써보면 사람은 물의 변화에 매우 민감해진다. 가뭄이 들고 물이 마르면 우물도 말라간다. 비가 쏟아지는 우기라고 우물물이 넘치도록 불어나지는 않는다. 적당한 양만큼 머금고 있을 뿐이다. 그러니 자연히 사람도 물을 아껴 써야 한다. 가뭄이 심하면 심할수록 물이 귀한 것이라는 진실은 사람 가슴속에 깊숙이 새겨진다.

그런데 지금은 집안에 있는 수도꼭지를 틀면 뜨거운 물, 찬물이 원하면 원하는 만큼 콸콸 쏟아진다. 웬만한 가뭄에도 수돗물은 마르지 않는다. 지난 날 우물에서 물을 긷던 시절과 비교해서 그것을 문명이라 한다. 그러한 문명으로 편안한 목욕을 즐긴다. 하지만 그 편안한 만큼 물을 쉽게 소비하고 또한 쉽게 고갈시키고 있다는 엄연한 사실을 자각하지 못한다. 물이 귀한 것이라는 진실을 잊어버린다.
이것이 혹시 문명의 중독 아닐까?

   
  ▲ 물레 앞에서 신문을 보는 간디. 사진 출처 : www.kamat.com ⓒ 1947 Margaret Bourke-White,LIFE Magazine  
 
얼마 전, 사육하던 어린 반달곰을 지리산에 풀어놓았다는 뉴스를 접했다. 1985년에 설악산에서 밀렵꾼의 총에 맞은 반달곰을 마지막으로 발견하고 지금까지 반달곰의 존재를 더 이상 확인하지 못했다고 한다. 한반도의 남쪽 자락에는 반달곰이 멸종되었다는 뜻이다. 그래서 사육하던 반달곰을 지리산에 풀어놓아 야생 반달곰으로 자라도록 만들겠다는 의도였다. 지리산 정도의 크기라면 30∼40마리 정도의 곰이 서식할 수 있다고 한다. 이 나라가 본격적으로 산업화되기 전에는 그 정도의 곰이 지리산에 살고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인간의 발길은 지리산의 노고단 자락에까지 도로를 포장할 정도에 이르렀다. 야생의 생태를 침범하고 있는 것이다. 어느 산이고 인간의 발길이 닿지 않는 곳이 없도록 만들었다. 그래서 야생 동물은 인간에게 자리를 비켜주어야 했다. 지난 시절 큰산을 만나면 에돌아 가고 그러다 가끔은 야생 곰을 마주쳐 십년감수하던 시절과 비교해서 그것을 문명이라고 한다. 그러한 문명으로 사람은 산과 물의 경치를 즐기고 산을 깎아 위락시설을 만든다. 그런데 그 즐거움 만큼 야생의 생태는 망가지고 야생의 동물은 자기 터전에서 쫓겨난다는 사실을 바로 보지 못한다. 반달곰의 멸종은 바로 인간 문명에 대한 경고인 셈이다.
사람들은 그러나 곰 몇 마리를 산에 풀어놓는 것으로 진실을 가리려고 한다.
이것이 혹시 문명의 중독 아닐까?

석유를 '지구의 피'로 생각한 남미의 원주민 부족

   
 
소아마비가 정복되었고, 장티푸스가 정복되었으며, 폐렴과 결핵이 정복되었다고 한다. 과학적인 장비를 갖춘 병원은 더욱 많아지고 전문의사의 수도 더욱 많아졌다. 그런 의학의 발달을 문명이라 한다. 하지만 그런 현상을 뒤집어보면, 옛날에는 없던 무수한 병들이 현대문명과 더불어 생겨서 그것이 거꾸로 의학의 발전을 촉진시키고 있다. 이런 아이러니를 인식하는 것은 숨어 있는 암세포를 찾는 일처럼 어려운 일이다.
이것이 혹시 문명의 중독 아닐까?

남미의 어느 원주민 부족은 석유를 ‘지구의 피’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미국의 석유회사가 자신의 땅에서 석유를 채굴하려고 하자 그 부족은 목숨을 바쳐 그에 저항하고 있다고 한다. 모든 부족이 절벽에서 뛰어내리겠다는 경고를 그 회사에 보냈다는 소식도 전해진다. ‘지구의 피’가 없이는 자신들의 생명도 끝장난다는 의지의 표명이었다.

하지만 지구의 반대편에 살고 있는 우리는 석유를 양껏 소비하며 살아가고 있다. 밥을 할 때도 석유가 필요하고, 따뜻한 물로 몸을 씻을 때도 석유가 필요하다. 일하러 나갈 때도 자동차를 타고 이동한다. 추운 겨울을 따뜻하게 나려면 난방 보일러를 돌릴 수밖에 없다. 심지어 농사일에도 석유가 필요하다. 엄청난 양의 비료가 석유에서 추출된다. 사태가 이 지경이니 우리는 만약 석유가 없다면 세상일이 '올 스톱' 하리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석유의 고갈을 걱정한다.
그런데 그런 걱정 중에 한 번이라도 석유를 ‘지구의 피’라고 생각해보지는 않는다. 즉 그 석유가 곧 나의 피와 같은 것이라고는 결코 생각하지 않는다. 단지 석유 고갈을 대비해서 다른 대체 에너지를 찾을 뿐이다. 석유는 오직 소비의 대상일 뿐이다. 문명의 위기는 아마 석유의 고갈에서 오는 게 아니라 그와 같은 우리의 생각에서 오는 것일지도 모른다.

자연은 우리의 무한한 욕망을 채워줄 만큼 무한하지 않다. 아니 어쩌면 자연은 우리 욕망의 대상이 아니라 세상을 함께 살아가는 친구일 것이다. 그 친구를 잃으면 우리 목숨도 끝이 아닐까? ‘지구의 피’를 지키려는 남미 원주민의 저항은 바로 석유에 기반하고 있는 현대문명에 대한 저항 아닐까?
하지만 오늘도 우리는 그런 사실에 눈을 막고 지구의 심장에 있는 피를 파내고 있다. 그래서 석유가 없이는 하루도 살 수 없는 지경에 이르고 있다.
이것이 혹시 문명의 중독 아닐까?

당시 인도에서 현대문명의 핵심은 '철도'였다

간디는 문명의 중독을 이렇게 말한다.
“문명의 치명적인 결과는 사람들이 문명을 좋은 것이라고 믿는 그 믿음의 맹렬한 불꽃에 영향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문명으로부터 기쁨을 얻는 동안 문명은 생쥐처럼 우리를 갉아먹습니다.”

현대문명에 대한 간디의 비판을 좀더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당시 인도에서 현대문명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철도’였다. 그에 대해서 간디는 다음과 같이 비판하고 있다.

   
  ▲ 활짝 웃는 간디 ⓒ Kamat's potpourri  
 
“철도가 없었더라면 영국인들이 지금처럼 인도를 장악할 수 없었을 거라는 점을 분명하게 말해야겠습니다. 철도는 또한 페스트를 퍼뜨렸습니다. 철도가 없다면 대중은 이동할 수 없습니다. 철도가 페스트균의 전염 매개체입니다. 옛날에는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격리되어 있었습니다. 또 철도는 잦은 기근을 불러왔습니다. 이동 수단이 편리해지자 사람들이 곡식을 내다 팔았고, 이 곡식은 가장 비싸게 값을 받을 수 있는 시장으로 옮겨졌기 때문입니다.…… 스스로 개화되었고 남들보다 뛰어나다고 생각하는 당신이나 나 같은 사람들이 인도가 수많은 민족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서로 구별된다고 생각하기 시작한 것은 철도가 들어온 이후부터입니다. 철도를 이용해 이런 구별을 없애기 시작했다고 말하는 것은 당신의 자유입니다. 아편을 먹은 뒤에야 아편 중독의 해독을 이해하기 시작했으므로 아편을 먹는 것이 이롭지 않느냐고 아편쟁이는 주장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인간은 손과 발이 이끄는 한도 내에서 움직이는 게 순리

아니! 철도 없이 살자는 말인가?
전국이 1일 생활권인 지금 자동차 없이 불편해서 어떻게 살겠는가? 지금과 같은 세계화의 시대에 비행기 없이 생존이 가능하다는 말인가?
간디의 비판은 문명에 중독되어 있는 우리의 귓전을 맴돌 뿐이다. 니코틴에 중독된 사람이 담배를 끊는 일도 만만찮은 일인데 하물며 문명의 중독에서 벗어나는 일은 얼마나 어렵겠는가!
그 시작은 ‘내가 현대문명에 중독되어 그것 없이는 하루도 살 수 없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고 자문해보는 일이다.
간디의 문명 비판을 좀더 들어보자.
그의 말은 점점 더 근원적인 지점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
“인간은 본래 자신의 손과 발이 이끄는 한도 내에서 움직이도록 만들어졌다는 점입니다. 우리가 철도나 그 밖의 미친 듯한 현대문명의 이기를 이용하여 한 장소에서 다른 장소로 이동하지 않는다면 많은 혼란을 미연에 방지할 수 있을 겁니다. 인간의 어려움은 인간 자신이 만들어낸 것입니다. 신은 인간의 육체를 만들 때 인간의 이동 욕망에 제한을 가했습니다. 인간은 그 제한을 넘어서는 수단을 지속적으로 발명해왔습니다.…… 나라는 한 개인은 가까운 이웃들에게만 봉사할 수 있도록 만들어졌는데, 이런 몸으로 우주의 모든 이들에게 봉사해야 한다는 사실을 발견이라도 한 듯 자만에 빠집니다. 이렇게 인간은 불가능한 것을 시도함으로써 다른 자연, 다른 종교와 접촉하게 되고, 몹시 당혹스러워합니다. 이런 추론에 따르면 당신은 분명 철도가 아주 위험한 제도라는 것을 알 게 될 겁니다. 인간은 신으로부터 너무 멀리 떨어져 있습니다.”

   
  ▲ 1930년 인도인들이 영국 사람이 만든 소금만을 사 먹게 한 '소금법'에 항의하며 벌이는 행진 모습 ⓒ Kamat's potpourri  
 
철도에 대한 구체적인 비판으로 시작된 간디의 문명 비판은 이제 인간의 무한한 욕망에 칼을 댄다. 간디는 이미 있는 철로를 뜯어내자는 주장을 하는 것이 아니다. 그 철로를 건설하여 무한한 욕망을 채우려는 우리의 마음을 뜯어고치자는 말을 하는 것이다.

"우리 인도인이 기계를 발명할 줄 몰랐던 게 아닙니다"

“마음이란 쉴새없이 날아다니는 새라는 걸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더 많은 것을 소유할수록 더 많은 것을 바라게 되며 만족하지 못하게 됩니다. 열정에 빠져들수록 점점 더 고삐가 풀린 것처럼 방종하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 선조는 우리의 방종에 제한을 가했습니다. 우리 선조는 행복이란 어떤 마음의 상태라고 보았습니다. 사람이 부유하다고 해서 반드시 행복한 것은 아니며 가난하다고 해서 꼭 불행한 것은 아닙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앞으로도 가난을 벗어나지 못할 것입니다. 우리 선조는 이를 감안하여 우리에게 사치와 쾌락을 금하도록 했던 것입니다. 우리는 수천 년 동안 쟁기로 일을 해왔습니다. 옛 모습 그대로의 농가를 유지하고 있으며 고유한 교육도 예전과 달라진 것이 없습니다. 우리에게는 생명을 갉아먹는 경쟁 체제가 없습니다. 각자 자신의 생업이나 무역에 종사하면서 정상적인 대가를 요구했습니다. 우리 인도인이 기계를 발명할 줄 몰랐던 게 아닙니다. 그 반대로 우리 선조는 우리가 그런 물건에 마음을 빼앗기면 노예가 될 것이고 도덕 정신을 상실할 거라는 사실을 알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오랜 심사숙고를 거친 후에 손과 발로 할 수 있는 일만 해야 한다고 결정했습니다. 진정한 행복과 건강은 손과 발을 적절하게 사용할 때 가능하다고 보았던 것입니다. 나아가 선조들은 대도시를 일종의 덫이자 쓸모 없이 거추장스러운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곳에 사는 사람들은 행복하지 않을 것이고, 매춘과 악이 들끓고 도둑과 강도들이 떼를 지어 다닐 것이며, 부자들이 가난한 사람들을 착취할 것이라고 판단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작은 마을에 만족했습니다.”

간디의 이러한 문명 비판은 <힌두 스와라지>의 출발점이다. 간디는 문명 중독증을 벗어나지 않는 한 ‘힌두 스와라지’ 즉 ‘인도의 자치’는 요원한 것으로 보았던 것이다. 그리하여 다음과 같은 '출사표'를 던진다.

"폐병 환자의 얼굴은 매력적인 느낌마저 줍니다.그래서... "

“서양 문명에 감염된 사람들만이 노예 상태에 빠져 있습니다. 우리는 이 세상을 우리의 보잘것없는 척도로 측정하곤 합니다. 우리가 노예일 때는 세상 전체가 노예 상태에 빠져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비참한 상황에 처해 있기 때문에 우리는 인도 전체가 그런 상황에 처해 있다고 생각합니다. 사실은 그렇지 않지만 우리의 노예 상태를 인도 전체에 전가하는 것이 속 편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우리가 해방된다면 인도도 해방될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생각을 바탕으로 스와라지를 정의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다스리는 것, 그것이 스와라지입니다. 따라서 그것은 우리 손에 달려 있습니다. 이런 스와라지를 꿈이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가만히 앉아만 있는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지금 그려 보이고자 하는 스와라지는 그것을 한번 인식한 뒤에는 우리 삶이 끝날 때까지 다른 사람도 그렇게 행동하도록 설득하고 노력하는 그런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스와라지는 각자 스스로 경험해봐야 합니다. 물에 빠진 사람이 다른 사람을 구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 자신이 노예인 주제에 다른 사람을 해방시키겠다고 생각하는 것은 단지 가식에 불과합니다.”

인도인을 향한 간디의 출사표가 나의 가슴을 겨누고 있다. 나는 과연 문명의 노예인가 아닌가? 나는 과연 문명의 반대편에 설 수 있는가?

“문명이 악이라는 말의 참뜻을 이해하기란 어렵습니다. 폐병 환자는 죽을 지경이 되어서도 삶에 집착한다고 의사들은 말합니다. 폐병은 눈에 띄는 상처를 만들지 않습니다. 폐병에 걸린 환자의 얼굴은 매력적인 느낌마저 줍니다. 그래서 모든 것이 정상이라고 믿게 됩니다. 문명도 그와 같은 질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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