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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12월 31일 금요일
우리의 이웃 은하, 안드로메다 은하여
안드로메다 은하는 직경 22만 광년 이상으로 지구에서 250만 광년의 거리에 위치한다고 합니다. 우리 은하와 1시간에 50만 킬로미터씩 가까워지고 있다고 합니다. 약 30억 년 뒤에는 안드로메다 은하와 우리 은하가 부딪칠 것으로 예상된다고...... 미 항공우주국(NASA)이 발표한 은하계의 사진을 보면 안드로메다 은하는 참 아름다운 은하입니다.
아무튼, 우리 은하에 함께 살고 있는 모든 '숨탄것들'께,
그리고 우리의 이웃 안드로메다 은하에게
새해인사를 올립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시길......
2010년 12월 29일 수요일
2010년 12월 27일 월요일
위기의 읽기문화, 어떻게 할 것인가
2010년 12월 24일 금요일
체제의 성장
이 경제체제의 발전은 이제 "무엇이 인간을 위해 좋으냐?" 하는 질문에 의해 결정되지 않고 "무엇이 체제의 성장을 위해 좋으냐" 하는 질문에 의해 결정되게 되었다. 사람들은 이 모순의 날카로움을 감추려고 체제의 성장(혹은 어느 하나의 대기업의 성장이라도)은 사람들을 위해서도 좋은 것이라고 가정하였다. 이 해석은 하나의 보조적 해석에 의해 보장되었다. 보조적 해석이란 체제가 인간에게 요구하는 제 특질--이기주의, 자기 중심주의, 탐욕 등--이 인간본성에 내재되어 있다는 것, 따라서 체제뿐만이 아니라 인간본성 그 자체가 그 제 특질을 조장한다는 것이었다. 이기주의, 자기 중심주의, 탐욕이 존재하지 않는 사회는 '원시적 사회'로, 그 주민은 '어린애 같다'고 생각되었다. 사람들은 이런 특질들이 산업사회를 존재하도록 하는 자연스런 충동이 아니고 사회적 환경의 '산물'이라는 것을 인식하려 들지 않았다.
2010년 12월 23일 목요일
돈보스코직업훈련원 북카페 '별마음방' 개관
돈보스코직업훈련원은 평생을 가난한 청소년들을 돌보는 데 헌신한 돈 보스코 성인의 교육철학과 예방교육 이념을 바탕으로 우리의 청소년들을 건강한 시민으로 길러내기 위해 힘쓰고 있는 청소년 복지 전문 기관입니다. 학교와 가정의 보살핌으로부터 이탈된 청소년들이 이곳에서 애정, 관심, 즐거움을 맛보고 재능을 살리는 직업훈련을 받으며 삶의 참된 행복을 찾고 자신감과 긍지를 기르고 있습니다.
‘희망 가득한 도서관 만들기’ 사업에서 처음 시도하는 청소년 북카페 조성을 위해 부천대학 실내건축학과 교수님들이 기꺼운 마음으로 설계를 맡아서 실무팀과 함께 머리를 맞대었습니다. 무엇보다 센터 내에 밝고 아늑한 쉴 곳이 필요하다는 판단이 있었고, 도서관 역할에 더해 여럿이 모여 휴식과 놀이 등 여가활동을 즐길 문화공간으로 기능해야 했습니다. 창가에 ‘볕드는방’을 만들어 따스한 볕을 받으며 책을 읽거나 음악을 들을 수 있도록 했습니다. 대형 텔레비전은 영화를 보거나 발표를 할 때에도 사용되지만 독서환경 조성을 위해 배경음악을 트는 데도 쓰입니다. 바둑, 체스, 보드게임 등을 즐기도록 비치한 평상은 소규모 발표회나 공연이 있으면 무대로 활용됩니다. 세 끼 밥만으로는 온종일 입이 궁금할 나이인 청소년들을 위해 조리대와 냉장고 등을 설치하여 일과가 끝난 후 도서관은 아이들이 직접 요리하는 간이 식당 겸 찻집이 됩니다.
이날 행사에는 부모님과 보호자, 친구, 봉사자 등 지인들이 참석하여 학생들이 1년 동안 활동해온 결과물을 관람하고 격려해주셨습니다. 귀금속, 원예, 도자기, 천연비누 등 학생들이 손수 만든 작품들이 전시되었고 사물놀이, 클래식 연주, 꽁트 연기, 미니 다큐 상영 등 다채로운 프로그램은 보는 이들을 흐뭇하게 해주었습니다. 행사가 끝나자 아이들은 선생님들과 함께 준비한 음식으로 손님들을 대접하였습니다.
‘청소년은 젊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사랑받기에 충분하다’는 돈 보스코 성인의 말처럼, 돈보스코직업훈련원의 청소년들이 이 사회의 관심과 사랑 속에서 가슴이 따뜻한 어른으로 성장하기를 바랍니다.
기적의도서관 1호, 그후 7년
천혜의 갯벌을 보유한 아름다운 생태도시 전남 순천. 인구 27만 명에 불과한 이 소도시의 별명은 ‘도서관 도시’다. 책을 읽고 싶으면 시내 어디에 있든지 10분이면 도서관에 갈 수 있다. 48개의 도서관이 거미줄처럼 네트워크를 형성하고 있기 때문이다.
순천시민들에게 도서관은 책만 읽는 공간이 아니다. 이웃을 만나고, 문화를 즐기는 ‘사랑방’이다. 어린이들은 젖먹이 때부터 책과 뒹굴며 또래와 어울린다. 주부들은 도서관 자원봉사로 나눔의 기쁨과 배움의 행복을 누린다. 고령자들은 아이들에게 책을 읽어 주며 삶의 활기를 되찾는다.
2006년 취임한 이래 지금까지 책 관련 행사가 열릴 때마다 아이들과, 주민들과 함께 책을 읽어 ‘책 읽어 주는 시장님’으로 불리는 노관규(50) 순천시장은 이렇게 말한다. “도서관은 빈부 차이, 세대 차이를 뛰어넘어 모든 주민이 함께 어울릴 수 있는 곳입니다. 어릴 때부터 읽기를 습관화하고 어른이 돼서는 평생학습을 실현할 수 있는 곳이죠. 품격 있는 도시를 만드는 데 반드시 필요한 곳입니다. 중소도시의 경쟁력은 바로 도서관에서 나옵니다.”
순천시가 ‘도서관 도시’로 변신한 데는 ‘기적의도서관’ 힘이 크다. 2003년 11월 10일 순천에 ‘제1호 기적의도서관’이란 명칭과 함께 생긴 이 어린이 전용 도서관은 도서관이란 곳에 대한 주민들의 인식을 확 바꿨다. 건축가 정기용씨가 “나는 이 도서관이 어린이로 하여금 상상의 여행을 떠나게 하는 작은 우주가 되길 바라는 마음으로 지었다”고 말한 곳이다.
지상의 아름다운 도서관의 저자인 부산대 최정태 명예교수는 곧 선보일 신간 지상의 위대한 도서관에서 순천 ‘기적의도서관’ 성공요인을 크게 네 가지로 분석한다. 우선 시작부터 운영까지 민과 관이 함께 마음을 모은 거버넌스의 새 모델이라는 점이다. 둘째로 젖먹이 아이부터 초·중학생, 엄마·아빠 모두가 함께 이용할 수 있는 가족도서관이라는 점을 꼽았다. 권위적이고 도식화된 도서관이 아닌 친환경·주민친화적인 아름다운 공간이라는 점도 높이 평가했다. 마지막으로 매혹적인 프로그램을 개발·보급함으로써 지금까지 소외되고 있던 지역주민을 도서관 안마당으로 끌어들였다는 점을 들었다. 순천에 ‘기적의 도서관’이 생긴 지 올해로 7년. 과연 기적의도서관은 어떻게 또 다른 기적을 만든 것일까.
2010년 12월 22일 수요일
2010년 12월 8일 수요일
나는 문명의 반대편에 설 수 있을까?
나는 문명의 반대편에 설 수 있을까? | |||||||||||||||||||||||||||||||||||
'힌두 스와라지' 정신이 던지는 '난감한' 질문
2002년 03월 01일 (금) 04:02:00 한승오
나는 태어나서 지금까지 오로지
하지만 인간의 발길은 지리산의 노고단 자락에까지 도로를 포장할 정도에 이르렀다. 야생의 생태를 침범하고 있는 것이다. 어느 산이고 인간의 발길이 닿지 않는 곳이 없도록 만들었다. 그래서 야생 동물은 인간에게 자리를 비켜주어야 했다. 지난 시절 큰산을 만나면 에돌아 가고 그러다 가끔은 야생 곰을 마주쳐 십년감수하던 시절과 비교해서 그것을 문명이라고 한다. 그러한 문명으로 사람은 산과 물의 경치를 즐기고 산을 깎아 위락시설을 만든다. 그런데 그 즐거움 만큼 야생의 생태는 망가지고 야생의 동물은 자기 터전에서 쫓겨난다는 사실을 바로 보지 못한다. 반달곰의 멸종은 바로 인간 문명에 대한 경고인 셈이다. 사람들은 그러나 곰 몇 마리를 산에 풀어놓는 것으로 진실을 가리려고 한다. 이것이 혹시 문명의 중독 아닐까? 석유를 '지구의 피'로 생각한 남미의 원주민 부족 이것이 혹시 문명의 중독 아닐까? 남미의 어느 원주민 부족은 석유를 ‘지구의 피’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미국의 석유회사가 자신의 땅에서 석유를 채굴하려고 하자 그 부족은 목숨을 바쳐 그에 저항하고 있다고 한다. 모든 부족이 절벽에서 뛰어내리겠다는 경고를 그 회사에 보냈다는 소식도 전해진다. ‘지구의 피’가 없이는 자신들의 생명도 끝장난다는 의지의 표명이었다. 하지만 지구의 반대편에 살고 있는 우리는 석유를 양껏 소비하며 살아가고 있다. 밥을 할 때도 석유가 필요하고, 따뜻한 물로 몸을 씻을 때도 석유가 필요하다. 일하러 나갈 때도 자동차를 타고 이동한다. 추운 겨울을 따뜻하게 나려면 난방 보일러를 돌릴 수밖에 없다. 심지어 농사일에도 석유가 필요하다. 엄청난 양의 비료가 석유에서 추출된다. 사태가 이 지경이니 우리는 만약 석유가 없다면 세상일이 '올 스톱' 하리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석유의 고갈을 걱정한다. 그런데 그런 걱정 중에 한 번이라도 석유를 ‘지구의 피’라고 생각해보지는 않는다. 즉 그 석유가 곧 나의 피와 같은 것이라고는 결코 생각하지 않는다. 단지 석유 고갈을 대비해서 다른 대체 에너지를 찾을 뿐이다. 석유는 오직 소비의 대상일 뿐이다. 문명의 위기는 아마 석유의 고갈에서 오는 게 아니라 그와 같은 우리의 생각에서 오는 것일지도 모른다. 자연은 우리의 무한한 욕망을 채워줄 만큼 무한하지 않다. 아니 어쩌면 자연은 우리 욕망의 대상이 아니라 세상을 함께 살아가는 친구일 것이다. 그 친구를 잃으면 우리 목숨도 끝이 아닐까? ‘지구의 피’를 지키려는 남미 원주민의 저항은 바로 석유에 기반하고 있는 현대문명에 대한 저항 아닐까? 하지만 오늘도 우리는 그런 사실에 눈을 막고 지구의 심장에 있는 피를 파내고 있다. 그래서 석유가 없이는 하루도 살 수 없는 지경에 이르고 있다. 이것이 혹시 문명의 중독 아닐까? 당시 인도에서 현대문명의 핵심은 '철도'였다 간디는 문명의 중독을 이렇게 말한다. “문명의 치명적인 결과는 사람들이 문명을 좋은 것이라고 믿는 그 믿음의 맹렬한 불꽃에 영향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문명으로부터 기쁨을 얻는 동안 문명은 생쥐처럼 우리를 갉아먹습니다.” 현대문명에 대한 간디의 비판을 좀더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당시 인도에서 현대문명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철도’였다. 그에 대해서 간디는 다음과 같이 비판하고 있다.
인간은 손과 발이 이끄는 아니! 철도 없이 살자는 말인가? 전국이 1일 생활권인 지금 자동차 없이 불편해서 어떻게 살겠는가? 지금과 같은 세계화의 시대에 비행기 없이 생존이 가능하다는 말인가? 간디의 비판은 문명에 중독되어 있는 우리의 귓전을 맴돌 뿐이다. 니코틴에 중독된 사람이 담배를 끊는 일도 만만찮은 일인데 하물며 문명의 중독에서 벗어나는 일은 얼마나 어렵겠는가! 그 시작은 ‘내가 현대문명에 중독되어 그것 없이는 하루도 살 수 없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고 자문해보는 일이다. 간디의 문명 비판을 좀더 들어보자. 그의 말은 점점 더 근원적인 지점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 “인간은 본래 자신의 손과 발이 이끄는 한도 내에서 움직이도록 만들어졌다는 점입니다. 우리가 철도나 그 밖의 미친 듯한 현대문명의 이기를 이용하여 한 장소에서 다른 장소로 이동하지 않는다면 많은 혼란을 미연에 방지할 수 있을 겁니다. 인간의 어려움은 인간 자신이 만들어낸 것입니다. 신은 인간의 육체를 만들 때 인간의 이동 욕망에 제한을 가했습니다. 인간은 그 제한을 넘어서는 수단을 지속적으로 발명해왔습니다.…… 나라는 한 개인은 가까운 이웃들에게만 봉사할 수 있도록 만들어졌는데, 이런 몸으로 우주의 모든 이들에게 봉사해야 한다는 사실을 발견이라도 한 듯 자만에 빠집니다. 이렇게 인간은 불가능한 것을 시도함으로써 다른 자연, 다른 종교와 접촉하게 되고, 몹시 당혹스러워합니다. 이런 추론에 따르면 당신은 분명 철도가 아주 위험한 제도라는 것을 알 게 될 겁니다. 인간은 신으로부터 너무 멀리 떨어져 있습니다.”
"우리 인도인이 기계를 발명할 줄 몰랐던 게 아닙니다" “마음이란 쉴새없이 날아다니는 새라는 걸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더 많은 것을 소유할수록 더 많은 것을 바라게 되며 만족하지 못하게 됩니다. 열정에 빠져들수록 점점 더 고삐가 풀린 것처럼 방종하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 선조는 우리의 방종에 제한을 가했습니다. 우리 선조는 행복이란 어떤 마음의 상태라고 보았습니다. 사람이 부유하다고 해서 반드시 행복한 것은 아니며 가난하다고 해서 꼭 불행한 것은 아닙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앞으로도 가난을 벗어나지 못할 것입니다. 우리 선조는 이를 감안하여 우리에게 사치와 쾌락을 금하도록 했던 것입니다. 우리는 수천 년 동안 쟁기로 일을 해왔습니다. 옛 모습 그대로의 농가를 유지하고 있으며 고유한 교육도 예전과 달라진 것이 없습니다. 우리에게는 생명을 갉아먹는 경쟁 체제가 없습니다. 각자 자신의 생업이나 무역에 종사하면서 정상적인 대가를 요구했습니다. 우리 인도인이 기계를 발명할 줄 몰랐던 게 아닙니다. 그 반대로 우리 선조는 우리가 그런 물건에 마음을 빼앗기면 노예가 될 것이고 도덕 정신을 상실할 거라는 사실을 알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오랜 심사숙고를 거친 후에 손과 발로 할 수 있는 일만 해야 한다고 결정했습니다. 진정한 행복과 건강은 손과 발을 적절하게 사용할 때 가능하다고 보았던 것입니다. 나아가 선조들은 대도시를 일종의 덫이자 쓸모 없이 거추장스러운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곳에 사는 사람들은 행복하지 않을 것이고, 매춘과 악이 들끓고 도둑과 강도들이 떼를 지어 다닐 것이며, 부자들이 가난한 사람들을 착취할 것이라고 판단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작은 마을에 만족했습니다.” 간디의 이러한 문명 비판은 <힌두 스와라지>의 출발점이다. 간디는 문명 중독증을 벗어나지 않는 한 ‘힌두 스와라지’ 즉 ‘인도의 자치’는 요원한 것으로 보았던 것이다. 그리하여 다음과 같은 '출사표'를 던진다. "폐병 환자의 얼굴은 매력적인 느낌마저 줍니다.그래서... " “서양 문명에 감염된 사람들만이 노예 상태에 빠져 있습니다. 우리는 이 세상을 우리의 보잘것없는 척도로 측정하곤 합니다. 우리가 노예일 때는 세상 전체가 노예 상태에 빠져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비참한 상황에 처해 있기 때문에 우리는 인도 전체가 그런 상황에 처해 있다고 생각합니다. 사실은 그렇지 않지만 우리의 노예 상태를 인도 전체에 전가하는 것이 속 편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우리가 해방된다면 인도도 해방될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생각을 바탕으로 스와라지를 정의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다스리는 것, 그것이 스와라지입니다. 따라서 그것은 우리 손에 달려 있습니다. 이런 스와라지를 꿈이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가만히 앉아만 있는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지금 그려 보이고자 하는 스와라지는 그것을 한번 인식한 뒤에는 우리 삶이 끝날 때까지 다른 사람도 그렇게 행동하도록 설득하고 노력하는 그런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스와라지는 각자 스스로 경험해봐야 합니다. 물에 빠진 사람이 다른 사람을 구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 자신이 노예인 주제에 다른 사람을 해방시키겠다고 생각하는 것은 단지 가식에 불과합니다.” 인도인을 향한 간디의 출사표가 나의 가슴을 겨누고 있다. 나는 과연 문명의 노예인가 아닌가? 나는 과연 문명의 반대편에 설 수 있는가? “문명이 악이라는 말의 참뜻을 이해하기란 어렵습니다. 폐병 환자는 죽을 지경이 되어서도 삶에 집착한다고 의사들은 말합니다. 폐병은 눈에 띄는 상처를 만들지 않습니다. 폐병에 걸린 환자의 얼굴은 매력적인 느낌마저 줍니다. 그래서 모든 것이 정상이라고 믿게 됩니다. 문명도 그와 같은 질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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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12월 2일 목요일
껍데기는 가라
<미디어오늘> 2010년 12월 1일자 고영재(언론인)의 칼럼 '껍데기는 가라'에서 한 대목 옮겨 놓는다.
오늘도 대한민국은 껍데기가 판치는 세상이다. 언론은 진실을 말하지 않는다. ‘사회적 목탁’으로서의 언론의 지위는 옛 교과서에만 실려 있다. 정치는 비틀거린다. 국민들은 정치를 믿지 않는다. 거리낌 없이 거짓말을 내뱉기 때문이다. 껍데기 세상의 두 주역은 정치와 언론이다. 무엇보다 언론의 죄가 무겁다. 언론이 ‘껍데기 정치’를 채찍질하는 것을 스스로 포기한 터다. 정권은 고삐 풀린 망아지가 되어 무한권력을 휘두르며 날뛴다.
참말이 사라진 시대다. 적어도 건강한 민주주의 국가 징표로서의 언론은 없다. 국민이 언론에서 진실을 찾는 시대는 분명 아니다. 언론을 신뢰하지 않는 현상은 언론의 죽음을 의미한다. 언론의 침묵과 과장은 위험수위를 넘었다. 가장 많은 발행부수를 자랑하는 한 신문은 한 때 ‘할 말을 하는 신문’이라는 캐치프레이즈로 독자들을 유혹했다. ‘진실’과 ‘정의’, ‘정론’은 이른바 조·중·동의 한결같은 다짐이다. 그러나 그들은 이명박 정권의 독선과 무지, 위선과 거짓에 한없이 너그럽다. 한때 높아진 신뢰도를 바탕으로 막강한 영향력을 자랑하던 ‘국민의 방송’도 국민의 뜻을 저버린 채 ‘MB찬가’를 부르기에 바쁘다.
강은 왜 흘러야 하는가. 고위 관료는 어째서 도덕적으로 떳떳해야 하는가. CEO식 대통령의 독선은 왜 문제인가. 국가 권력의 탈선은 또 얼마나 위험한 일인가. 불법적인 민간 사찰은 누가 무엇을 위해 저지른 짓인가. 이 헌법 체계를 우롱한 행위에 청와대는 어디까지 관여한 것인가. MB의 유별난 과시욕이 빚어낼 위험성은 어디에 도사리고 있는가. 최고 권력자는 왜 말과 행동이 일치해야 하는가. 부자감세가 가져올 국가재정상의 위험과 국민 사이의 위화감은 없는가. 대통령의 고유권한이라지만 ‘강부자’, ‘고소영’ 인사는 정당한가. 4대강 사업 하청공사가 왜 동지상고 출신에 집중된 것인가. MB 정권이 추구하는 일관된 미래전략이 존재하는가. 그 전략은 정교하고 합당한 것인가. 무소불위의 검찰권은 무엇 때문에 최고 권력자 앞에 작아지는가. 주류를 자처하는 언론들은 하나처럼 ‘정권의 문제’를 외면한다. 이는 MB 정권에게도 불행이다. 궤도 수정과 자기 성찰의 기회를 원천적으로 박탈당한 터다.
빈 수레 요란하듯, 엉뚱한 호들갑은 언론의 또 다른 병이다. G20 정상회의를 전후해 쏟아진 갖가지 보도와 특집 프로그램은 오히려 그 효과와 정당성을 깎아내렸다. 최근 연평도 사태 보도를 보아도, ‘알맹이와 껍데기’가 뒤집혀 있다. 한반도 문제 해결의 변함없는 전제조건은 평화다. 북한의 도발행위를 분노하고 비판할 수 있는 근거가 거기에 있다. 현 사태를 ‘군사적 게임’의 차원에서 보더라도, 흥분은 도움이 되지 않는다. 한반도 게임은 광저우 아시안게임과는 비교되지 않는 무서운 게임이다. 금메달 과녁을 명중시킨 열여덟 살 소년의 냉정·침착성을 따라가지 못해서야 되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