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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2월 16일 수요일

어떤 역사

거의 2주 동안 허리의 통증 때문에 책상에 앉기조차 힘이 들었다. 오늘에서야 무언가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아팠다. 그 동안 이 블로그에 무슨 새 소식이 없는가 하고 들어오셨을 분들께 송구한 마음이 없지 않다. 아무 말도 없이 새 소식으로 갱신되지 않으니 무슨 일이 있는 것 아닌가 하고 생각했던 것은 아닐까?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이 블로그가 무슨 특별한 블로그라고... 아무튼 신년 들어 몸을 챙기라고 몸이 말해왔다는 것. 천천히 아주 천천히 나에게 주어진 길을 가지 않으면 탈이 날 거라고 몸이 말해왔다는 것!



머리맡에 놓아두고 조금씩 넘겨보고 있는 책 가운데 최석두 선생께서 번역하신 <일본의 식민지 도서관>이 있다. 이 책은 일본에서 2005년에 간행되었고 번역되어 출판된 것은 '한울'에서 2009년.

그런데 첫 장부터 책장을 넘기기가 쉽지 않다.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를 복택유길로 읽고 있는 식이어서 사뭇 책장을 넘기면서 짜증을 부리지 않도록 애쓰지 않으면 안 된다. 이것은 번역자도 문제이지만 출판사 편집부의 심각한 문제이기도 하다는 생각이 버릴 수가 없다. 너무하다. 조금 과장해서 말하자면 이 책은 아직 번역 이전의 단계의 책인 듯싶다. 편집부의 무책임에 화가 난다. 아무튼 첫 장부터 생각할 거리를 메모하면서 넘겨보고는 있다. 그런 가운데 몇 사람에 대해 메모해 두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첫번째 인물이 최석두 선생이 '전중불이마'라고 번역한 '다나카 후지마로(田中不二麿)'.  이 사람은 1871년 '이와쿠라 토모미(岩倉具視)' 가 이끄는 메이지 정부의 구미 시찰 여행--당사 일본 정부의 젊은 지도자들이 50명에 가까운 간부들을 이끌고 1년 10개월간 구미 12개국을 돌아보았다 한다--에 참여하면서 일본에 도서관을 소개하게 되는 과정이 이 책에 설명되어 있다. 그리고 이 책에는 '다나카 후지마로의 공공 도서관 사상'이 한 절로 등장하고 있다.

"다나카의 주장은 일본에서 처음으로 공공 도서관의 필요성을 정부의 견해로 밝혔다는 의미에서 중요한 것이었다. 실제로 이 <공공 서적관의 설치를 필요로 한다>는 글에 자극을 받아 서적관 몇 개가 설치되었다."(위의 책, 22쪽)

그런데 이 '다나카 후지마로의 공공 도서관 사상'이라는 절의 끝 부분은 이러하다.

"요건대 다나카가 목표로 삼은 공공 도서관은 자유민권운동의 탄압과 재정적 핍박으로 성장의 싹을 잘리게 되었다. 일본의 근대 공공 도서관은 그 맹아기에 이미 국가의 통제하에 놓여 있었던 것이다."(위의 책, 24쪽)

이 책에는 다나카 후지마로가 구미의 도서관 '사상'을 어떻게 접하고 어떤 식으로 일본에 적용하려 하였는지 짧은 분량이지만 소개하고 있다. 그리고 그 '맹아'가 어떻게 굴절되었는지를 기록하고 있다. 핵심적 의제를 이야기한다면 그것은 '국가와 도서관의 관계'라고 할 수 있다.

또 한 사람은 '일본도서관협회와 송본희일(松本喜一)'이라는 절에 등장하는 '마츠모토 키이치'라는 인물.

인터넷을 통해 이리저리 조사해보니(예를 들어 야후재팬 등의 검색을 통해 마츠모토 키이치 저작 일람 등) 이 인물에 대해서는 일본 도서관계의 호불호, 혹은 찬반이 극명하게 갈리는 인물임을 알 수 있다, 그 초점도 역시 '국가와 도서관의 관계'라고 요약할 수 있다.

마츠모토는 1922년부터 1945년까지 24년간 제국도서관의 관장을 맡으면서 동시에 1931년 5월부터 1939년 8월까지 일본도서관협회의 이사장으로서 일본 도서관계를 이끌고 간 인물이라 할 수 있는데, <일본의 식민지 도서관>의 저자들은 한마디로 마츠모토를 "도서관계로서는 초대받지 않은 손님이었던 것 같다"(52쪽)이라고 평가하고 있다.

이 책에 따르면 일본도서관협회의 정사인 <근대일본도서관의 발자취 본편(近代日本図書館の歩み(本篇)>(1993년)에서는 마츠모토 이사장의 시대를 다음과 같이 평하고 있다고 한다.

"이 시대는 일본문고협회 결성 이래 가족적 분위기 속에서 아카데미즘의 양식을 견지해가면서 일본의 도서관을 키워온 리더들이 점차 편향하는 시대의 파도에 밀려 그 지도력을 잃고 관리화(官吏化)되어 교원이나 지방 관료들로 바뀌었으며 반관반민적인 교화단체로 변질해간 시기에 해당한다."

이런 평가는 매우 혹독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어찌 보면 '교원이나 지방 관료'로 바뀐 채로 본질적인 도서관 활동보다 변질된 내용을 더욱 소중하게 껴안고 있었던 일본 도서관의 역사가 이 사람으로부터 말미암은 바가 크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일본의 식민지 도서관>의 저자들은 이렇게 적고 있다.

"그런데 일본도서관협회라는 조직이 한통속이 되어 국가의 정책에 영합하였는가 하면 꼭 그렇지는 않았다. 물론 일본문고협회 창립 당초부터 간부의 면면을 보더라도 분명하지만 문부성과 깊은 관계가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문부성의 도서관 행정의 빈곤함에 대하여 구미 직수입적인 지식이라 하지만 일정한 도서관론을 제시하고 있었다. 그런 의미에서는 그들 자신이 국가와 함께 이 나라의 도서관정책을 영도하고 있다는 자부심이 있었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그래서 자신들의 도서관정책을 문부성에게 실현시키는 것이 국가로서도 유익하다고 믿고 있었음이 틀림없다. 틀림없이 그들의 뇌리에는 근대 시민사회에서의 주민교육권과 같은 발상은 없었으며 그런 것을 그들에게서 찾는 것도 불가능했을 것이다. 그들은 어느 의미에서는 '메이지(明治)의 사람이었다. 그런데 1930년에는 일본에게 좋든 싫든 이와 같은 '메이지의 정신'을 인정하는 여유가 없어졌다. 도서관계라는 작은 세계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문부관료 마츠모토 키이치가 반대와 장애를 무릅쓰고 도서관계에 등장한 것은 이를 상징하고 있었던 것이다."

어쨌든 이런 저런 자료를 찾다가 이런 자료와는 만나게 된다. 서울--식민지시대의 경성에서 열린 일본의 도서관대회 이야기.
特集:図書館人が植民地でやったこと 植民地での全国図書館大会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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