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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3월 2일 수요일

무역흑자, 물가폭탄, 국가파산 위기

1. 1990년 거품 파열 이후에도 일본은 계속 '무역흑자 행진'을 계속해 왔다. 그러나 내수경제는 계속 곤두박질쳤고, 정치권과 건설족이 결합해 경기부양에 아무런 쓸모없는 토목중심적 경기부양책만 펼치다가 국가부채가 GDP 200%를 넘어서면서 국가파산 위기에 직면했다. 지금 한국은 일본이 빠져든 '장기 스태그플레이션'의 전철을 충실히 밟고 있는 중이다.

2. IMF사태 발발 과정에도 재경원은 끝까지 종금사를 감쌌다. 1997년말 IMF에 구제금융을 신청하기에 앞서 IMF가 강도높은 종금사 정리를 요구하자, 그해 11월22일 재경원은 30개 종금사 가운데 12개사에 대해 외환업무 중지를 명령했다. 그러나 IMF실사단이 그해 말 실사후 우선적으로 문을 닫도록 통고한 종금 9개사의 명단은 재경원 명단과 일치하지 않았다. 재경원이 끝까지 자신들과 밀착한 종금사들을 감쌌다는 얘기다. 당시 '한국 경제식민지 총사령관'이었던 미셸 캉드쉬 IMF총재는 공개적으로 "한국 관료와 종금사는 근친상간 관계에 있다"고 질타하기도 했다. 오만하던 재무관료들은 아무 소리도 못했다. 그후 나머지 종금사들도 모조리 셔터를 내려야 했다. 국가를 부도로 몰아넣은 종금사는 더이상 시장에서 영업을 할 수 없는 국민의 '공공의 적'이었기 때문이다. 끝까지 종금 문을 닫지 않으려 한 대기업들도 시장에서 혼쭐이 났다. 그런 대표적 예가 LG그룹이었다. "LG라는 간판이 붙은 계열사의 문을 닫을 수 없다"는 오너의 고집으로 끝까지 LG종금의 셔터를 내리지 않으려 했던 LG그룹은 그룹 자체가 쓰러질 뻔했다. 당시 LG그룹 금융담당 최고위 임원은 "LG종금을 살리려다가 한때 거의 4조원이 빠져나갔다"며 "금융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가를 그때 뼈저리게 체험했다"고 토로했다. 결국 LG종금도 퇴출됐다.

3.물가폭탄은 오는 3~4월 더욱 격렬한 형태로 폭발할 것이란 게 대체적 관측이다. 1월 수입물가가 이런 관측의 바로미터다. 전년 동기보다 14.1%나 올랐다. 23개월래 최대 폭등치다. 수입물가는 일반적으로 두세달후 국내 소비자물가·생산자물가에 영향을 준다. 물가폭탄의 가공스러움은 국민 살림살이를 팍팍하게 만드는 데 그치지 않고 사회·경제·정치 전분야에 걸쳐 전방위적 후폭풍을 몰고온다는 데 있다. 우선 예상되는 '사회 후폭풍'부터 살펴보자. 3~4월 물가폭등은 곧바로 격렬한 '춘투'로 이어질 게 확실하다. 지난 3년간 노동계는 상대적으로 조용했다. MB정부가 강도높게 눌렀고 국제금융위기 때문에 임금투쟁이 활발할 수 없었다. 일자리를 지키는 최우선이었다. 그러나 올해 사정은 다르다. 물가가 폭등하는만큼 최소한 물가 상승률만큼 임금이 오르지 않으면 실제 소득이 줄어들게 돼, 높은 수준의 인상 요구가 급확산될 전망이다. 이미 MBC노조가 12%대 임금인상을 요구하는 등 두자리 숫자 임금 인상 요구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더욱이 한국노총에 컴백한 이용득 신임위원장이 한나라당과의 연대 파기 선언후 "지난 지도부는 현장에 찬물을 끼얹었는데 나는 휘발유를 붓겠다. 현 정부, 한번 붙어보자"고 말할 정도로, 노동 현장에선 이미 MB 레임덕이 시작된 양상이다. 정부와 재계는 당연히 과도한 임금인상 요구를 막으려 할 것이다. 필연적으로 이 과정에 격렬한 춘투가 벌어지고, 외국인의 한국 탈출은 더욱 가속화하면서 주가는 곤두박질 칠 공산이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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