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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4월 24일 일요일

질보다 양? ‘독서인증제’ 겉돈다

동아일보 2011년 4월 19일자 봉아름 기자의 보도, 질보다 양? ‘독서인증제’ 겉돈다

대입 입학사정관전형에 독서 중요해져
일부 고교 과열·편법운영으로 ‘독서인증’ 취지 무색

그래픽 이고운 leegoun@donga.com

《독서교육 강화를 목표로 일부 고교에서 시행 중인 ‘독서인증제’가 당초 취지와 달리 허울만 남은 제도로 전락하고 있다. 인터넷에 떠도는 독후감을 짜깁기해 독후감을 제출하는 것은 물론, 학원이나 논술강사가 건넨 도서 요약본만 읽고 책을 모두 읽은 것처럼 인증을 받기도 하는 것. 이런 편법들은 단순히 책을 몇 권 읽었는지, 독후감을 몇 편 제출했는지에 따라 인증급수를 부여하는 독서인증제 시스템의 제도적 맹점을 악용하는 사례다. 입학사정관 전형에서 진로와 관련된 도서를 얼마나 읽었는지, 지원자에게 영향을 미친 책은 무엇인지를 평가하는 등 대입에서 독서의 중요성이 강조되면서 편법을 써 독서인증을 받으려는 움직임은 암암리에 확산되고 있다. 이른바 ‘양 치기’(질이 아닌 양으로만 해결하는 행위)로 독서인증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이 독서인증제의 가장 큰 맹점이다. 책을 많이 읽을수록 높은 급수를 받을 수 있으므로 적잖은 고교생이 책을 읽지도 않은 채 인터넷에서 베낀 독후감을 제출한다. 학교가 직접 나서 독서인증제를 실시하고 독서활동을 관리하기도 하지만, 적잖은 학생들은 “공부할 시간도 빠듯한데 정직하게 독서활동을 해서 인증을 받기란 쉽지 않다”고 푸념한다.》

○ 독후감 제공·대행 사이트에서 돈 주고 거래


올해 경기지역의 한 고교를 졸업하고 서울 주요 대학에 입학사정관전형으로 합격한 박모 군(18). 그는 “책을 한 권도 제대로 읽지 않았지만 학생부에는 독서인증 1급 기록이 남았다”고 털어놨다.

박 군의 학교에선 권장도서 250권 중 20권 이상 책을 읽으면 독서인증 3급, 35권 이상은 2급, 50권 이상이면 1급을 부여했다. 자연계열이었고 고2 때부터 입학사정관 전형을 준비했던 박 군은 권장도서 중 과학 관련 독후감을 전략적으로 준비하기로 마음먹었다.

관심 있는 도서 50권 목록을 작성한 뒤 독후감을 제공하는 인터넷 사이트와 독후감 대행사이트를 이용했다. 독후감 제공사이트는 ‘부분보기’는 무료였고, 독후감 전체를 내려받을 때는 한 건에 1000∼2000원을 지불했다. 박 군은 이렇게 내려받은 독후감에만 기대기엔 불안했다. 일부 ‘인기 독후감’의 경우 조회수가 많게는 1만 건을 넘는 경우도 있어 자신과 똑같은 독후감을 다른 학생이 제출할 가능성도 없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에 박 군은 ‘학생수준에 맞춰서 100% 새롭게 써준다’고 주장하는 한 독후감 대행사이트에 맡기기도 했다. 독후감 분량에 따라 편당 1000∼3000원을 지불했다. 박 군은 “이런 식으로 ‘히포크라테스 선서’, ‘과학콘서트’,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실험 10가지’와 같은 과학 독후감을 작성해 제출했고 같은 내용을 서너 줄로 요약해 대학 자기소개서의 독서관련 질문에 대한 답변으로 작성했다”고 말했다.

학원강사가 감상문 대필하기도
한 고교의 ‘독서인증제’ 시행계획. 읽은 책을 독서기록장에 정리하고 온라인상에 독후감을 기록하도록 되어있다.


경기도의 한 고교는 1학년 때 26권, 2학년 26권, 3학년 13권을 읽어야 학생부에 독서인증기록을 남길 수 있다. 이 학교 2학년 김모 군(17)은 1학년 때 독서논술학원의 도움을 받아 3년 동안 읽어야할 60여 권의 독후활동을 모두 완성했다. 한 학년에 읽어야 할 권장 권수를 초과해서 읽으면 상위 학년이 되어 그만큼의 권수를 감하고 읽어도 된다는 점을 악용한 것. 고교 3년 간 이뤄져야 할 독후활동을 단 1년 만에 ‘벼락치기’로 완성한 셈이다.

김 군은 왜 이런 일을 도모했을까? 내신 2.5∼4등급인 김 군. 원하는 대학에 가려면 최소 전 과목 내신 성적을 2등급 이내로 끌어올려야 했다. 광범위한 독서보단 교과서와 문제집이 중요했다. 정규수업과 보충, 야간자율학습이 끝나면 오후 10시. 자정이 넘어서까지 공부를 하고나면 독서는 우선순위에서 밀렸다.

학원은 자체 보유한 도서요약본을 △인문 △사회과학 △교양서적으로 구분해 속속들이 제공했고, 학원 강사는 김 군이 1차로 쓴 감상문을 수정·보완한 뒤 김 군의 아이디와 비밀번호를 이용해 인터넷 창의적 체험활동 시스템에 김 군의 이름으로 독후감을 올렸다.

김 군은 “담임선생님이 ‘독서인증을 받아놓으면 수시 지원할 때 도움이 될 수 있다’고 하셨다”면서 “특수교육학을 전공하고 싶은데 독서인증을 받은 것이 도움이 되면 좋겠다는 생각에서 마음이 급해졌다”고 말했다.

서울 강남구의 한 고교 국어교사 이모 씨는 “남자 고교생들의 경우 제출한 감상문에서 ‘낭만적’ ‘아름다운’과 같은, 평소 구사하기 쉽지 않은 어휘가 자연스레 발견되는 경우는 학력수준이 높은 학부모나 전문 강사가 대필했을 가능성이 크다”고 말했다.

인증과정이 형식적으로 이뤄진다는 점은 독서인증제의 큰 한계. 많은 학교가 한 학기에 한 번 독서활동기록 작성용지를 나눠준 뒤 읽은 책 목록과 감상평을 채워 오도록 하는 식으로 진행한다.

올해 대구의 한 고교를 졸업한 최모 군(18)은 “한 학기에 10권 목록을 채워야 했는데 하루 만에 해결했다”면서 “전날 인터넷을 검색해 서너 권을 정리하고 학교에 와서 친구들이 정리한 감상평을 단어와 문장만 바꾼 뒤 조합해서 제출하는 경우가 허다했다”고 전했다.

학교가 나서 편법 동원하기도

절대적 기준 없이 학교마다 나름의 기준에 따라 학생들의 독서여부를 판단할 수 있는 것도 독서인증제의 시스템적 허점이다. 이를 이용해 일부 고교에선 전교생에게 특정 도서에 대한 독서인증을 일괄적으로 부여하는 과열 현상도 나타나고 있다. 단체로 같은 책을 읽도록 한 뒤 해당 도서에 관한 객관식 시험을 치러 일정 점수를 넘으면 독서인증사실을 학생부에 기록하는 것.

한 외국어고에선 매달 독서퀴즈를 실시한다. 전공학과별로 매달 한 권 추천도서를 지정하고 전교생이 15∼20문항의 객관식 퀴즈를 푼다. 일정 점수를 넘은 학생은 학생부에 독서인증이 기록된다. 이 학교 2학년 정모 양(17)은 “독서퀴즈 전날 야간자율학습시간엔 학생들이 2∼3시간 동안 교과서 암기하듯 밑줄을 치면서 추천도서 속 키워드를 외운다”면서 “학생부에는 퀴즈를 본 책 제목과 함께 3줄 안팎으로 요약된 도서 감상평이 기록됐는데 이 감상평은 국어선생님이 일괄적으로 작성한 내용”이라고 말했다.

최근 서울시교육청의 감사에서는 고3 수십 명의 학생부에 빈칸으로 남아있던 ‘독서활동영역’ 난에 비슷한 내용의 독서기록을 뒤늦게 추가 입력한 한 자율형사립고가 적발되기도 했다.

서울의 한 사립대 입학사정관은 “독서인증제가 독서를 통한 학생의 발전적 변화를 도모하자는 당초 취지와 달리 도서명과 권수 채워 넣기로 일부 변질되고 있다는 점을 상위권 대학 대부분이 파악하고 있다”면서 “이에 따라 대입에서 수험생이나 학부모가 생각하는 것만큼 독서내역이 비중 있게 평가되지 않을 수도 있다”고 말했다.

독서인증제에 대한 대학들의 신뢰가 떨어질 경우 오랜 시간을 들여 진정성 있고 체계적으로 독서를 관리해온 적잖은 학생들이 선의의 피해를 입는 2차 피해도 예상된다.

봉아름 기자 eri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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