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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8월 31일 수요일

<공공도서관 문 앞의 야만인들> 서평



‘야만인들로부터 공공도서관을 지키는 법’
-에드 디 앤절로의 <공공도서관 문 앞의 야만인들> 서평

안찬수(시인, 책읽는사회만들기국민운동 사무처장)
2011년 9월 <오늘의 교육> 기고문


지난 7월, 에드 디 앤절로의 <공공도서관 문 앞의 야만인들>(Barbarians at the Gates of the Public Library)이라는 책이 번역되어 소개되었을 때, 먼저 눈에 띄었던 것은 이 책의 역자들이었다.

한 사람은 차미경 교수, 또 한 사람은 송경진 씨. 차 교수는 우리나라 도서관정책의 정점이라 할 수 있는 대통령소속 도서관정보정책위원회의 위원이기도 하고, 송경진 씨는 한 때 경기도의 도서관정책을 담당했던 이다. 그래서일까. 책을 읽기 전까지는, 이 책이 도서관정책과 관련된 저서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가졌다. 국가적 차원이나 지방자치단체의 차원에서 도서관정책을 전개하려고 할 때 만나게 되는 장애는 한두 가지가 아니다. 그런 장애를 만들어내는 사람들을 ‘야만인들’이라고 이름 붙인 것일까? 책을 읽은 뒤에 알게 된 것이지만, 그렇기도 하고 그렇지 않기도 하다.

야만인의 정체

이 책의 저자인 에드 디 앤절로(Ed D'Angelo)는 공과대학을 나와 철학박사 학위를 받은 뒤 도서관학 석사를 받은 사람이다. 한때 대학의 철학과에서 강단에 선 뒤 지금은 공공도서관에서 사서로 일하고 있는 것으로 소개되어 있다. 내가 아는 한, 우리나라에서 이런 경력의 소유자를 만나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이 책이 전개하는 논의의 알맹이를 추려보자. 앤절로는 이런 질문을 던진다. “어떻게 우리는 도서관에 사서가 없는 지경에까지 이르게 된 것일까? 어떻게 우리는 ‘공공도서관’에서 ‘공공’을 떼어내 버리게 되었을까? 그리고 왜 우리는 이런 일들을 걱정해야 하는 것일까.”(29쪽) 이런 문제의식을 온전히 우리의 것으로 받아들이기에는 어려움이 있다. 왜냐면 거의 한 세기 이상에 걸쳐 도서관문화를 발전시켜 온 미국과 달리 우리나라는 아직도 도서관 확충기를 거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다음과 같은 질문은 우리나라의 현실 속에서도 곰곰이 곱씹어 보아야 할 것들이다. “무엇이 공공도서관을 시장의 다른 사기업들과 구분 짓는 근본적이고도 핵심적인 것인가.”(29쪽) “오락과 교육, 욕망과 교화, 시장경제와 민주주의 사이의 차이가 무엇”인가.(29쪽) 저자는 이런 질문들에 답하기 위해 정치, 경제 분야에 걸쳐 광범위한 탐색과 더불어 도서관과 사서직의 역사에 대해 탐구한다.

결론부터 살펴본다면, 이렇다. 공공도서관을 지탱하는 세 가지 기둥은 ‘민주주의와 시민교육 그리고 공익(democracy, civil education, and public good)’이다. 그런데 저자에 따르면 ‘포스트모던 소비자 자본주의’가 바로 공공도서관의 이러한 세 가지 기둥을 흔들어대고 있으며, 그것이 바로 민주적 문명사회를 파괴하는 야만인 것이다. 그 야만의 내용을 저자는 ‘포스트모던 소비자 자본주의'이라고 총칭하고 있지만, 그 세부는 민영화, 혹은 시장포퓰리즘으로 언급하고 있다. 시장포풀리즘의 현상은 이런 식으로 드러난다. “책은 더 이상 계몽을 위해 출판되지 않는다. 팔기 위해 출판된다. … 세상은 이미 카니발이 되었으며, 문지기와 비평가로서의 역할은 사라졌다.”(112쪽) 그리고 도서관의 “도서선정의 원칙은 아주 간단해졌다. 달라는 걸 줘버려.”(209쪽)와 같은 현상.

저자는 이렇게 단정한다. “공공도서관에서 문지기로서의 역할이 사라지자 대중문화가 고급문화를 압도했고, 오락이 교육을 대체했으며 이미지가 활자를 대신했다.”(209쪽) 그리하여 “독자들의 지적 성장과 발달을 진작시키는 것이야말로 사서들의 임무”라는 신념은 뿌리째 흔들리며 사서의 책무는 전통적인 그것이 아니라 ’고객(customer)‘을 맞이하여 ’고객 서비스‘를 수행하는 사람으로 전락하고 말았다고 한다. “미래의 어떤 리더는 대학에서 도서관학을 교육받은 사서를 없애고 적절한 고객 서비스 경험이 있는 글을 읽고 쓸 줄 아는 사람을 고용하려는 생각을 떠올릴 것이 분명하다”(213쪽)고 말한다.

공공도서관,
민주적인 문명사회의 상태를 가늠케 하는 리트머스 시험지

‘포스트모던 소비자 자본주의’가 공공도서관만 흔들어대고 있는 것은 아닐 것이다. 여기서 공공도서관이 특별하게 거론되는 이유는 “공공도서관은 마치 갱 속의 공기가 오염되었을 때 가장 먼저 갱 속으로 날려 보내지는 카나리아와 같다. 공공도서관은 민주화된 문명사회의 퇴조에 따른 영향을 감지할 수 있는 기관이며, 지식이 정보와 오락의 차원으로 퇴보할 때 가장 먼저 그 징후가 나타나는 곳”(17쪽)이기 때문에 “공공도서관에 대한 논의로 포스트모던 소비자 자본주의에 대한 분석틀”을 세우고 있는 것이다.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공공도서관이 처한 상황은 민주적인 문명사회의 상태를 가늠하는 리트머스 시험지와 같다. 민주적인 문명사회의 핵심가치를 위협하는 그 어떤 것도 모두 그 나라의 공공도서관 상황에 반영되며, 공공도서관에 대한 위협은 민주사회를 약화시킨다.(16~17쪽)
 저자가 주장하고 있는 핵심적인 의제, 즉 공공도서관이 민주적인 문명사회의 상태를 가늠하는 리트머스 시험지와 같다는 데 대해 우리는 충분히 공감한다. 여전히 도서관 확충기에 있는 우리나라에서도 이 점은 더욱 더 강조되어야 마땅할 것이다.

민주사회란 그것이 지역적인 차원이든 또는 국가적인 차원이든 혹은 더 나아가 인류적 차원이든 결코 정보와 지식에 대한 자유로운 접근을 막아서는 불가능한 사회이다. 우리 사회가 최소한의 건강성이라도 유지하려면 사회 구성원들이 정보와 지식에 자유롭고 평등하게 접근할 수 있어야 하며, 공공도서관을 통한 지식과 정보의 접근성 확대가 결국 민주사회에 기여하리라는 기대를 우리는 갖고 있다. 책읽기를 통한 민주시민 되기, 또는 민주시민으로서의 책읽기를 강조하게 되는 것은, 민주적인 의사 결정은 시민들이 광범위한 정보원에 담겨 있는 다양한 사실과 견해를 자유롭게 접근할 수 있을 때 가능하기 때문이다. 전체주의 혹은 파시즘 사회에서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하나의 현상은 ‘분서(焚書)’라는 말로 상징되는 책에 대한 공격, 비판적 역할을 담당하는 지식인들의 사회적 분리, 혹은 도서관과 박물관의 파괴와 같은 행위이다. 그것은 내가 가진 생각과 다른 생각을 관용하지 못하겠다는 태도의 표현이며, 자유로운 의사 표현과 그 사회적 유통을 근본적으로 봉쇄하려는 시도다. 그래서 공공도서관이 ‘민중의 대학(people’s university)’이 되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며, ‘공론장(public sphere)'으로서의 기능을 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이 책의 저자인 앤절로가 거듭 지적하는 것처럼 공공도서관이 민주화를 지원한다는 ‘도서관 신념’의 확인과 그 회복은 우리에게도 무척이나 중요하다. 바로 이 지점이 역자들이 이 책을 번역해야겠다는 동기를 불러일으켰을 것이다.

정말 포스트모던 소비자 자본주의가 문제인가

그런데 ‘어떻게’ 그것이 가능한가라는 질문을 던진다면, 이 책은 거의 그 해답을 제시하지 않는다. 아니 제시하지 못한다. 비유하자면, “공공도서관 문 앞에 시장포퓰리즘의 야만인들이 득시글거린다, 공공도서관 문을 단속하자, 공공도서관의 그 ‘문지기(gatekeeper)'로서의 역할을 다시금 회복하자”는 정도일 것이다. 질문의 무게에 비해 그 해답이 궁색하다. 저자는 ’포스트모던 소비자 자본주의‘라는 자본주의 발전과정이라는 외재적인 변화가 공공도서관이라는 나약한 ’카나리아‘에 위협을 가하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래서일까. 저자의 논지만 쫒다 보면, 공공도서관 문 앞의 야만인들이 물밀듯이 도서관 문을 넘어서는 것은 어찌 보면 불가항력적인 것처럼 느껴지기조차 한다. 무언가 문제설정 자체가 잘못된 것은 아닐까. 포스트모던 소비자 자본주의라는 외재적인 변화만이 공공도서관 문 앞에 야만인들이 득시글거리게 된 이유일까?

우선 ‘포스트모던 소비자 자본주의’는 이 말 자체가 논쟁적이다. 우리 사회에서는 현재의 자본주의를 이와 같은 용어로 말하는 데 익숙하지 않다. 흔히 소비자 자본주의(Consumer capitalism)는 이론적으로 판매자의 판매행위를 위해 소비자의 요구를 대중적인 시장 체제 안에서 조작하고 있음을 지적할 때 쓰는 용어다. 이 말은 현재 우리 사회에서 널리 쓰이는 용어로 하자면, 신자유주의(neoliberalism)라 해야 할 듯싶다. 또 한 가지. 우리가 익히 잘 알고 있듯이, 시민들(citizen)이 소비자(consumer) 혹은 고객(customer)으로만 살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공공도서관의 문턱을 넘는 사람들 모두 포스트모던 소비자 자본주의 사회를 살고 있는 소비자 혹은 고객으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시민’이 ‘소비자’로 완전히 대치(38쪽과 9장 시민에서 소비자로)되는 것은 아니다. 앤절로는 이런 부분을 놓치고 있는 듯싶다.

이 책에는 소비자 혹은 고객이 시민일 수 있음을 고려하지 않는 것과 같은 사유 구조와 그에 따른 논의 전개가 거듭된다. 예를 들어 고급문화와 대중문화의 분리와 같은 것이다. 앤절로는 교육과 오락을 분리하며, 윤리적 자유주의와 경제적 자유주의를 분리해낸다. 한마디로 말해서 그의 사유방식은 플라톤주의(Platonism)의 그것이다. “사람들을 교화시키느냐 아니면 그들의 욕망에 영합하느냐에 따라 교육과 오락을 구분할 수 있다는 것이 플라톤 철학의 핵심”(69쪽)이라고 말하고 있는데, <국가론>에서 플라톤이 이상적인 국가의 진정한 정치인이 교육자인 철인왕이듯, 앤절로의 머릿속에서는 고급문화를 지키는 문지기로서의 공공도서관과 사서 상이 자리 잡고 있는 듯이 보인다.

앤절로에 따르면, 공도서관이 민주화를 지원한다는 ‘도서관 신념’은 공공도서관 조사(public Library Inquiry, 1947~1952) 시리즈 가운데 한 권인 <정치과정에서의 공공도서관>의 저자 올리버 가르소에 의해 처음 정의되었고, 미국도서관협회는 1948년 전후 계획위원회 활동으로 <공공도서관 서비스를 위한 국가계획>를 내놓았는데, 이 보고서는 제2차 세계대전 이전만큼이나 다가오는 시기에도 민주주의와 계몽된 시민의식이 공공도서관의 임무에서 중요한 것이라고 강조했으며, 1956년 ‘도서관법’이 제정되면서 미국에서 공공도서관은 학교 및 공중보건 등과 마찬가지로 삶의 필수불가결한 일부로 간주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1960년대와 1970년대 동안 이것에 변화가 생겨서, 국가적인 기준을 세우는 것에서 벗어나 개별 지역 도서관들이 스스로 사명을 개발할 수 있는 계획과정을 소개하는 것으로 방향을 바꾸었다고 한다. 예를 들어 1980년에 나온 매뉴얼 <결과 계획>과 1982년에 발표된 <공공도서관의 산출 척도>는 더 이상 민주주의를 위한 공공도서관의 역할이 공식적인 공공도서관의 기준에 속한 가치가 아니며, 국가적인 차원에서의 기준도 사라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에 대해 앤절로는 경제사회가 ‘포스트모던 소비자 자본주의’로 바뀌는 것에 상응한다고 말한다.

그래서 앤절로의 논의를 쫒다 보면, 어느덧 복고주의(revivalism)나 위계적인 질서(hierarchical order)에 대한 유혹을 받게 된다. 하지만,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고전이 재미없는 책이 아니며, 교육과 오락이 완전히 상호 배제․분리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또한 시민들이 도서관보다는 상점을 이용한 ‘손님’으로서의 경험이 훨씬 많다는 점을 고려한다 하더라도 도서관이 서점이나 쇼핑몰처럼, 아니 그런 것들보다 훨씬 더 이용자 친화적으로 바꾸어 나가는 것도 생각해볼 수 있는 것이다.

공공도서관을 지키기 위하여

앤절로의 논의 가운데 가장 역설적이라고 생각되는 부분은, 앤절로는 시민의 요구가 ‘소비자’의 요구인 것으로 표현되고 그에 따라 상향식으로 무언가(예를 들어 도서관의 장서를 어떻게 결정한 것인가와 같은 사례를 생각하면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가 결정되는 것에 대하여 지속적으로 우려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 대목에서 다시금 이 책의 기본 의제인 민주주의란 과연 무엇인가를 되새겨보게 된다. 물론 시민(소비자)의 요구에 따르는 것이 반드시 전체 사회의 민주적 의지에 따르는 것이 아닐 수 있다. 그러나 시민들의 바람직한 요구에 의거하지 않고 어디서 공공도서관이 ‘민주적인 문명사회의 상태를 가늠하는 리트머스 시험지’가 될 수 있을 것인가. (이 책의 논의 과정에서도 언급되고 있듯이 이러한 문제는 루소가 말한 ‘전체의지will of all'와 ’일반의지general will'의 구별처럼 사람들이 실제로 원하는 것이, 사람들이 자신들의 최대 이익에 대해 충분히 잘 알았다면 원했을 것과 반드시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루소가 말했듯 정당한 민주국가는 전체의지와 일반의지의 합의가 필요하다.) 포스트모던 소비자 자본주의만이 공공도서관 문 앞에 야만인들을 득실거리게 했는가? 도서관과 사서가 시장 포퓰리즘으로부터 도서관을 지키는 문지기로서의 역할만 다시 철저히 하면 문 앞의 야만인들이 사라지는가? 아닐 것이다. 오히려 앤절로가 계속해서 ‘소비자’라고 표현하며 그들의 의사표현에 우려를 표하는 시민들과 적극적으로 도서관을 함께 만들어갈 때, 민주주의와 시민교육, 공익을 위협하는 야만인들로부터 도서관을 지켜낼 수 있을 것이다.

앤절로 논의의 이런 점을 생각할 때, 우리는 공공도서관의 책무나 도서관인(사서), 그리고 도서관 이용자의 역할과 임무에 대해 새롭게 정의를 내려야 할 필요성이 있음을 느끼게 된다. 그것은 도서관 이용자가 ‘고객’이 아니라 ‘시민’이라는 것이며, 공공도서관의 책무는 바로 이러한 시민들을 위해 공공 서비스를 제공하는 기관이자 시설, 공간, 장소, 그리고 제도로서 민주적 문명사회에 기여해야 한다는 것이다. 도서관인(사서)은 ‘소비자’인 ‘고객’을 위한 서비스를 위한 훈련을 받은 사람이 아니라 지역사회(community) 속에서 시민들과 함께 호흡하며 시민사회의 질적인 발전을 위해 노력하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도서관 이용자인 시민과 도서관인인 시민들은 직접적이며, 참여적일 뿐만 아니라 그 어떤 의사결정 과정에서 합의적 의사결정(consensus decision making)을 위한 장을 만들어가려는 노력을 하지 않는다면, 공공도서관이 ‘민주적인 문명사회의 상태를 가늠하는 리트머스 시험지’가 되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이 책의 서문을 쓴 캐슬린 드 라 페냐 매쿡(사우스플로리다대학 도서관정보학과 석좌교수)의 다음과 같은 말을 조금은 우리 현실에 맞게 수정․보완해서 받아들이게 된다.

만일 공공도서관 사서들이 지적인 엄격함, 민주주의에 대한 헌신 그리고 인류의 기록에 대한 평가와 같은 우리의 기본을 지키는 데 다시 관심을 갖는다면 공공도서관의 문은 부서지지 않고 지탱될 것이며, 문 앞을 지키던 야만인들은 물러나게 될 것이다.(22쪽)
즉 “만일 공공도서관 사서들이 시민의 일원으로서 좀 더 지역사회 공동체에 대해 민주적으로 접근하면서 도서관 이용자인 시민들과 함께 참여적으로 지역사회 공동체의 문제를 해결하려고 노력해나간다면, 공공도서관 문 앞의 야만인들조차 어쩌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그 문제의 핵심에 민주적인 문명사회의 핵심가치를 지켜내는 공공도서관이 자리 잡고 있다”고 말이다.(*)

2011년 8월 3일 수요일

'피동형 기자들'



(서울=연합뉴스) 고미혜 기자 = "정부의 5ㆍ17 조처는 심상찮은 북괴의 동태와 전국적으로 확대된 소요사태를 감안한 것으로 풀이되며, 나아가서 이를 계기로 국가안보적 차원에서 부정부패와 사회불안을 다스리려고 결심한 것으로 관측된다."

1980년 5월17일 신군부가 비상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하고 5ㆍ18 민주화운동을 진압한 뒤 한국일보에 실린 20일자 사설이다.

당시 대부분의 신문과 마찬가지로 비상계엄 확대 조처가 불가피한 것이었다는 주장을 펴면서 이 신문은 '풀이되며' '관측된다'와 같은 무주체 피동형 표현을 썼다.

30년간 일간지 기자로 근무해온 김지영 한국신문윤리위원회 심의위원은 "이런 표현은 1980년 5월 무렵 펜을 잡았던 기자들의 심리 상태를 잘 드러내고 있다"며 "그 의견이 양심에 맞지 않고 떳떳하지 않음을 문체를 통해 스스로 드러낸 셈"이라고 말한다.

김씨의 책 '피동형 기자들'(효형출판 펴냄)은 피동형 표현을 비롯해 한국 신문기사 문장의 오염 실태를 파헤친 책이다.

1980년대의 피동형 표현은 군부의 언론 탄압 속에서 기자적 양심을 차마 저버리지 못해 나온 고육지책이라고 볼 수 있는데 이러한 습관은 현재까지 이어졌다.

"피동문 기사에서는 글을 쓴 행동주체인 기자가 잠적한다. (중략) 이로써 자연히 글의 책임성이 부족해지는 것이다. 책임성이 적다 보니 객관성을 지닌 글로 오인할 수도 있다. 하지만 실은 어법을 어기면서 기자의 의견을 일반화ㆍ객관화하는 오류를 범하기 때문에 객관보도 원칙에 어긋난다."(50쪽)

이 책에서는 또 객관보도를 해치는 공범으로 정체불명의 '전문가들'과 같은 익명 표현, '…라고 전해졌다'라는 식의 간접인용문, '…라는 전망이다'와 같은 가정판단서술 등도 꼽았다.
러한 표현은 언론의 객관성뿐 아니라 전반적인 언어 습관에도 악영향을 미칠 수 있다.

저자는 "신문ㆍ방송은 국민에게 '매일의 국어 교과서'"라며 "언론계와 정부, 학계 등 3자는 함께 협력 체제를 갖추고 공공 언어 관리에 나서야 한다"고 제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