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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2월 1일 수요일

'교육폭력'

2012년 2월 1일 한국일보, 도정일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대학장의 칼럼. '교육폭력'이 더 문제다

폭력, 갈취, 왕따에 시달리다 못해 자살해버리는 아이들을 보면서 지금 우리 사회는 해결책을 찾느라 부산하다. 사실은 학교폭력이 어제 오늘의 일도 아닌데 그동안 우리는 무얼 하다가 이제야 요란을 떠는 것인가. 이 '뒷북치기'는 우리 사회가 얼마나 고통에 무감각한 마비의 사회인가를 잘 보여준다. 아픔이 있어도 그 아픔을 느끼지 못하는 사회, 문제가 있어도 그것을 문제로 인식하지 못하는 사회가 '마비사회'다. 마비사회는 잔인한 사회다. 학교폭력의 해법을 찾는 일은 더 늦기 전에, 더 많은 아이들이 울면서 골목을 돌고 돌다가 망울째 시들어 떨어지기 전에, 학교폭력의 밑바닥에 깔린 사회적 잔인성의 뿌리가 무엇인지 깊게 성찰하는 일을 동시에 수반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 성찰의 첫 번째 수순은 우리가 지금 학교폭력이라는 현상만을 놓고 이런저런 진단과 처방을 내리는 데 분주한 나머지 더 본질적이고 근원적인 문제는 놓치고 있다는 사실에 눈 돌리는 일이다. 더 본질적이고 근원적인 문제는 무엇인가. 학교폭력은 실은 그보다 더 큰 어떤 폭력으로부터 빚어지는 현상적 측면의 하나다. 그 더 큰 폭력은 '교육폭력'이다. 학교폭력이 일부 학생들의 폭력, 갈취, 위협 같은 일탈적 행동을 의미한다면 교육폭력은 우리 사회 전체가, 학교와 학부모와 정책당국이 똘똘 뭉치다시피 해서 감히 교육의 이름으로 교육을 파괴하는 행위, 곧 '교육 그 자체의 폭력성'을 지칭한다. 사람을 사람다운 사람으로 키우고 북돋우자는 것이 교육의 본질적 목적이고 교육의 가치이며 교육이 교육인 이유다. 그런데 우리는 교육의 그 본질 목적, 가치, 그것의 양보할 수 없는 내적 선(善)을 시궁창에 내던진 교육, 아이들을 키우고 살리기는커녕 죽이는 교육을 교육의 이름으로 자행하고 강제해오지 않았는가. 이 차원에서의 교육폭력은 학생들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어른들의 문제이며 교육 그 자체의 문제, 사회 전체의 '공모'가 개입된 문제다.
아이들을 잡고 망치기로 작정한 사회가 아니라면, 우리는 지금쯤 마땅히 우리네 교육의 이 폭력성을 어떻게 줄이고 제거할 것인가에 온 신경을 쏟아야 한다. 이것이 학교폭력의 문제를 풀기 위한 근본적 노력의 하나로서 우리가 교육폭력에 눈 돌릴 때의 두 번째 수순이다. 성찰이 진정한 성찰이 되자면 실행과 실천이 따라 붙어야 한다. 지금 같은 경쟁 일변도의 교육, 성적만으로 아이들을 줄세우고 '인간 등급'을 매기는 파괴적 교육, 오로지 점수 올리기에만 목표를 둔 시험위주 교육, 시장주의에 지배되는 교육, 사교육 팽배와 공교육 붕괴, 선행학습의 비교육적 파괴적 영향, 인성함양교육의 도외시 같은 교육 현안들에는 정말로 해법이 없는 것인가. 우리가 언제까지 이런 '상식적' 지적만을 되풀이 하면서 손 놓고 있을 것인가.

해법을 '찾지 않기로' 공모한 사회에서는 해법이 있어도 없어 보일 뿐이다.

공교육 파행을 지적하는 일도 사실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문제는 그런 지적이 수없이 되풀이되어 왔음에도 불구하고 학교 교육과 교실 현장은 변하지 않는다는 데 있다. 초중등 교사들이 절망하는 이유도 거기 있다. 이것도 마비사회의 한 단면이다. 이 마비를 뚫을 방법이 정말로 없는 것일까. 아니다. 방법은 얼마든지 있다. 그러나 바꿀 의지가 없는 곳에서는 어떤 변화도 일어나지 않는다.

총선과 대선을 앞둔 정치권에서는 요즘 각종의 '정책'들을 제시하느라 분주하다. 교육 그 자체는 정치적 문제가 아닐지 모른다. 그러나 아이들을 죽이는 교육을 어찌할 것인가라는 문제는 교육정책의 문제이다. 교육폭력은 교육의 현안임과 동시에 사회적 문제이고 정치적 문제다. 아이들을 어떻게 키우는가에 한 사회의 미래가 달려 있다. 어떤 인간을 길러내는가에 한 나라의 명운이 걸려 있다. 아이들이 어떤 사회에서 어떤 인간으로 자라는가에 따라 개인의 운명이 달라지고 사회공동체의 삶의 품질과 행복이 좌우된다.

제대로 된 사회라면 반인간적, 반사회적, 반문명적 교육을 방치할 수 없고 조장할 수 없다. 어떤 교육정책을 세워야 하는가, 어떤 변화가 어떻게 강구되어야 하는가. 정치권은 이런 문제를 숙고하고 정책의 차원에서 그 해법을 내놓을 수 있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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