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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2월 6일 수요일

현대카드 디자인라이브러리


‘아름다움의 정점’ 지향한 가회동의 디자인도서관…한국에 이런곳도 생겼네

헤럴드경제=이영란 선임기자

바야흐로 한국에 이런 곳도 생겼다. 그 곳만 떠올리면 가슴이 설레어지고, 찾아가고 싶은 곳. 그런 ‘매혹의 공간’이 가회동에 등장했다.

조선왕조의 정궐(正闕)인 경복궁과 아름다운 처마선을 지닌 한옥들이 빼곡히 자리잡은 서울의 북촌. 세련된 현대미술을 소개하는 유명 갤러리들과 아트센터가 모여있고, 한편에선 한국을 대표할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의 마무리공사가 한창인 곳에 지금껏 상상하지 못한 새로운 공간이 등장했다.

900여채 한옥이 들어선 ‘가회동 한옥마을’의 들머리인 가회동 129번지(북촌로 31-18)에 그 모습을 드러낸 ‘현대카드 디자인 라이브러리’가 바로 화제의 공간이다. 현대카드(대표 정태영)는 조선의 왕족과 사대부들이 모여 살던 옛 집터 초입에 신개념의 라이프스타일 공간을 선보였다. 그것은 바로 도서관이다. 도서관이되, 오만가지 책을 두루 소장한 도서관이 아니라 오로지 ‘디자인 서적’만을 집중적으로 보유한 도서관이다. 여태까지 당신이 꿈꾸던 도서관, 그 이상의 것을 보여주는 도서관이다.


                                                                                    [사진=김명섭 기자 msiron@heraldcorp.com]


▶아날로그적 공간에서 ‘몰입과 영감’의 시간을=지난해 초 현대카드는 가공할 정도로 빠르게 달려가는 이 디지털 시대에, 거꾸로 삶과 생각을 찬찬히 곱씹는 ‘아날로그적 삶’을 추구하자는 뜻에서 도서관 프로젝트를 기획했다. 모두가 ‘빠름’과 ‘효율’을 금과옥조처럼 여기는 시점에서, 매순간 즉발적인 반응만 해댈 게 아니라 생각할 시간과 여유를 가져보자는 취지 아래 ‘지식과 성찰의 공간’인 도서관을 만들어보기로 한 것이다.

이에 서울의 여러 곳이 물망에 올랐고, 가회동이 최종 낙점됐다. 가회동은 서울에서도 전통의 아우라가 가장 깊이 스며 있는 곳이자, 걸음까지도 느려질 정도로 ‘느림의 미학’을 지닌 곳이기 때문이다. 라이브러리라는 정체성과도 꼭 들어맞는 지역인 셈이다.

하지만 ‘현대카드 디자인 라이브러리’는 아날로그적 정서를 추구하되, 과거를 지향하지는 않는다. 서울에서도 가장 고즈넉한 곳이자 가장 오래된 곳에서, 미래를 지향하고 아름다움의 정점을 지향한다. 한 마디로 ‘오래된 미래’를 추구하는 셈이다. 또 현대인의 라이프스타일에 ‘이런 새로운 공간에서의 휴식과 몰입은 어떻겠소?’하고 또다른 제안을 해보겠다는 뜻도 품고 있다.
                 


지난 5일 첫 공개된 도서관은 역시 ‘현대카드스럽다’는 느낌을 주었다. 국내 기업 중 디자인에 관한한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로 열의를 보이고, 때로는 강박에 가까울 정도로 완벽을 추구해온 현대카드적 냄새(?)가 물씬나는 하나의 ‘섬세한 작품’이었다. 문고리 하나에서부터 선반이며 의자 하나, 심지어 코트 보관표까지도 현대카드다운 뛰어난 디자인통합을 이루고 있었다.

시중에 출시된 초록색 탁구대가 도무지 성에 차지 않아 미니멀한 탁구대를 따로 디자인해 쓰고, 생수병까지도 현대카드스럽게 디자인해 쓸 만큼 더없이 까다로운 현대카드의 디자인전략이 대중을 위한 도서관에서도 여지없이 반영된 것이다.

지상 1, 2층에 면적 495㎡(150평)의 별로 크지 않은 이 도서관은 더없이 아늑한 서재이자, 꿈속의 동굴같은 모습을 띠고 있다. 건물 중심부에 중정, 즉 네모난 앞마당을 둔 ㅁ자 형태의 건물은 사방이 유리로 뻥 뚫려 빛이 사방으로 쏟아져 들어온다. 한 마디로 빛의 공간이다. 때문에 따사로운 햇살을 받으며 안락한 소파에서 마음에 드는 디자인 서적이나 아트북을 뽑아 펼쳐보는 묘미는 각별하다. 그 순간만은 시간도 마냥 천천히 흐를 것 같다.

과거 갤러리서미가 화랑으로 쓰던 공간을 도서관으로 리노베이션한 건축가 최욱 소장(One o One건축)은 “메인 공간인 2층의 한쪽은 안채, 한쪽은 사랑채처럼 꾸몄다”고 했다. 안채에는 너른 테이블을 중심으로 사방에 서가가 빽빽이 들어찼다. 근사하고 호사스런 디자인 서적이며 잡지들이 ‘나를 한번 살펴봐달라’고 속삭이는 듯하다.

                                                                                                                                         [사진=현대카드]



건너편 사랑채에는 ‘집 속의 집’이 만들어졌다. 최 씨는 “건물의 사방이 유리로 뚫려 있어 하나의 구심점이 필요했다. 해서 집 속의 집을 만들었다. 도서관다운 정적이 흐르는 곳, 벽이 둘러쳐진 열람실에서 마음껏 책에 빨려들도록 했다”고 밝혔다. 최 씨가 만든 집 속의 집은 어린 시절 마음껏 상상의 나래를 펼쳤던 다락방을 연상케 한다. 도서관 안에 별도로 지어진 이 작은 집은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공상에 빠져들 수 있는 나만의 다락방이라 하겠다.

또 하나, 옥상으로 이어지는 3층 통로에 조성된 내밀한 방도 도드라졌다. 책을 읽다가 잠시 휴식을 취할 수 있도록 디자인된 이 작고 간결한 방은 어쩌면 서울 북촌에서 가장 사랑스러운 공간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서울의 북촌은 물론 저 멀리 남산까지 조망할 수 있도록 한 이 내밀한 방은 해가 뉘엿뉘엿 지는 저녁 무렵이나 별이 뜨는 밤이면 방문객들을 더욱 사로잡을 듯 싶었다.



디자인 희귀도서 등 1만1500권의 국내외 도서 망라=현대카드가 공간 디자인 및 연출 못지않게 신경을 쓴 것이 바로 도서 선정이다. 이 회사는 바우하우스 이후의 디자인을 조망하는 국내외 유명 디자인 도서를 대거 구입했다. 바우하우스는 미니멀하고 모던한 현대 디자인의 원류로, 현대카드가 추구해온 디자인의 지향점이기도 하다.

현대카드 디자인 라이브러리에는 1차적으로 1만1500권의 책이 비치됐다. 비치 도서는 대부분 새로 수집한 것으로, 국내외 도서전문가들을 북 큐레이터로 초빙해 한 권, 한 권씩 큐레이팅한 것이 특징이다. 현대카드가 북 큐레이터로 선정한 이들 중에는 베니스건축비엔날레에서 상을 수상한 건축평론가 등 내로라하는 인물도 적지않았다. 이에 따라 전체 도서 중 70% 이상은 국내에 처음 선보이는 책들이다. 또 이 중 약 3000권은 더 이상 출판되지 않는 절판본이거나 희귀본이란 점에서 관심을 모은다.




이를 테면 포토저널리즘의 정수로 평가되는 ‘라이프’ 매거진의 전 컬렉션을 비롯해, 1928년 이탈리아에서 창간된 세계적 권위의 디자인/건축 잡지인 ‘도무스’ 등이 포함됐다. 여기에 세계적인 아트북 출판사인 파이돈, 타센의 한정판 화집과 도서도 비치됐다. 이들 희귀본 또는 명품 도서 구입에 현대카드는 가장 많은 예산을 투입했다. 

아울러 디자인 영역의 분류부터 도서선정 원칙, 도서라벨, 청구기호 등 라이브러리 운영 전반에 있어서도 기존 도서관과는 달리 고유한 방식을 새롭게 만들어 적용하는 등 모든 측면에서 고집스런 면모를 보이고 있다.

                


이 도서관은 유감스럽게도 현대카드 회원에게만 개방(월 8회까지 무료)된다. 회원에게 특별한 혜택을 주겠다는 전략 때문이자, 공간이 워낙 작기 때문이다. 단 비회원도 현대카드 회원과 함께 방문할 경우 무료(동반 1인)로 출입이 가능하다.

또 복닥거림을 피하기 위해 한 번에 50명까지만 입장할 수 있다. 따라서 주말에는 번호표를 받아 바깥에서 대기할 각오도 해야 한다. 운영시간은 화~토요일은 오후 1시부터 10시까지이며, 일요일은 오전 11시~오후 6시까지(월요일은 휴관)이다.

               


비치된 도서들이 모두 눈이 휘둥그래질만큼 근사하고(대부분 손길한번 안닿은 새 책이다), 아트북의 경우 숫자를 제한해 찍은 한정에디션(이를테면 크리스토와 잔느 클로드의 대지미술 프로젝트를 담은 아트북은 수십만원을 호가한다)이 많으며, 소파, 탁자 등 모든 게 명품급이라 도서관을 찾은 이들은 다소 주눅이 들 수도 있겠다. 경우에 따라선 ‘책과 공간의 우아함과 고급스러움이 하늘을 찌를만큼 압도적이니 어디 마음 편히 책을 뒤적일 수 있겠느냐. 사람들의 손길이 한번도 안간 고급 서적들과, 눈부시게 하얀 소파는 마치 내가 받들어 모셔야(?) 할 대상같다’는 지적이 나올 듯도 하다. 오래오래 수집되고 축적된 책들이 뿜어내는 도서관의 푸근한 공기에 익숙해진 이들에겐 이 최신의 럭셔리한 도서관이 더러 어려울 수도 있겠다. 하지만 그럴 필요가 없다. 현대카드는 방문객들이 이곳에서만큼은 누구의 간섭도 받지않고 마음 편히 디자인과 아트의 세계로 빠져들기를 바라고 있으니 말이다. 책의 이미지가 마음에 들 경우 사진촬영도 허락할 방침이다.

어쨌거나 현대카드가 오랫동안 추구해온 차별화된 브랜딩 역량이 총집결된 이 디자인 라이브러리는 제대로 된 전문도서관을 원했던 국내 디자인계는 물론, 신선한 문화예술공간을 원했던 대중들에게 반가운 공간임에는 틀림없다. 그리고 현대카드의 실험은 우리 문화예술계에도 큰 자극을 줄 것으로 보인다. 현대카드측은 1층에 꾸며진 작은 갤러리에서 다양한 디자인 전시와 렉처도 개최하겠다고 밝히고 있다.

yrlee@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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