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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7월 5일 금요일

정치의 호연지기 / 도정일

다이달로스가 괴물 미노타우로스
를 미궁에 가두듯 우리 사회는 권
력 괴물의 발호를 막을 튼튼한 우리
를 만들 수 있을까?

출처: 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594400.html

한국 민주주의는 아직도 취약하다. 그냥 취약한 것이 아니라 ‘말할 수 없이’ 취약하고 연약하고 위태롭다. 왜 그런가? 국민은 그 답을 알고 있다. 한국 민주주의에 부단히 위기를 안기는 것은 ‘국가권력’이라는 이름의 괴물이다. 물론 국가권력이 언제나 괴물인 것은 아니다. 국가권력이 괴물이 되는 것은 집권세력과 국가기관이 정권 이익과 정파적 이해관계를 관철시키기 위해 국가권력을 조직적으로 남용하고 악용할 때이다. 국정원 선거 개입은 바로 그런 권력 남용과 악용의 적나라한 사례다. 국가기관과 집권세력이 권력 악용이라는 괴물을 풀어 민주질서를 왜곡하고 파탄시킬 때, 사회는 그 괴물을 유효하게 제어할 수 있을까? 고삐를 채울 수 있을까? 다이달로스가 괴물 미노타우로스를 미궁에 가두듯 우리 사회는 권력 괴물의 발호를 막을 튼튼한 우리를 만들 수 있을까? 이번의 국회 국정조사에는 바로 이 질문에 대한 해답 여부가 걸려 있다. 국정원의 선거 개입이 국기를 뒤흔든 사건이라는 것은 이미 검찰 조사를 통해 국민 모두가 알고 있는 바다. 지금 우리 사회의 성년 구성원들이 (미성년 고등학생들과 해외 교민들까지도) 목을 길게 빼어 주시하고 있는 것은 이번 조사가 국가권력의 ‘괴물화’를 차단할 결정적 계기를 만들어낼 수 있을 것인가 아닌가라는 문제다.
이 문제는 모든 각도에서 중대하다. 국민들에게 막대한 희생과 고통을 안긴 지난 수십년간의 사회 민주화 노력에도 불구하고 한국 민주주의가 계속 위기를 만나야 한다면 그 많은 희생과 고통의 의미는 무엇일 것인가. 민주주의는 ‘더 나은 사회’를 만들기 위한 정치적 수단이고 ‘더 나은 삶’을 향한 문화적 윤리적 요청이다. 우리가 민주화 과정에서 4·19 혁명, 부마사태, 5·18 광주민주화운동, 6·10 시민항쟁 같은 큰 고비와 난국들을 헤쳐온 것은 민주화가 더 나은 사회, 더 나은 삶을 향한 불가결의 조건이라는 공통의 인식과 합의가 있었기 때문이고 그 조건의 확보를 위한 노력에 큰 의미를 부여했기 때문이다. 그런 국민에게 국가권력이 다시 민주주의의 위기를 조성했다는 것은 국민에 대한 조롱이자 국민이 민주화에 부여해온 의미의 정면 부정이다. 의미의 부정은 삶의 부정, 가치의 부정, 역사의 부정과도 같다. 국정원 사태 앞에서 국민들이 분노하는 것은 그런 조롱과 의미 부정을 용납할 수 없기 때문이다.
국정조사에 임하는 정치세력들이 알아야 할 것은 바로 이 사실이다. 국정원 사태에 대한 국민 분노는 특정 정치세력에 대한 지지의 표현이나 특정 정파에 대한 증오의 발동이 아니다. 그 분노는 여야의 판도 분할을 넘어선 것이고 정파적 이해관계를 벗어나 있다. 여야는 이 사실을 철저히 인식해야 하며 그 인식의 공유 위에서 조사에 임해야 한다. 이것이 이번 국정조사에 거는 국민의 기대다. 한 번 더 강조하자. 국정조사는 여야 간의 정쟁거리가 아니고 정략 메뉴가 아니다. 누가 더 많은 몫을 가져가는가를 따지는 좀생이 수준의 ‘판돈 챙기기’도 아니다. 누가 더 유리해지고 누가 손실을 입을 것인가라는 문제에만 신경을 곤두세워 치졸한 ‘전술’을 동원하는 소인배적 정파 정치 놀음도 아니다. 굳이 판돈이라는 말을 쓴다면 이번 조사에 걸려 있는 것은 한국 민주주의의 건강성 회복이라는 더 큰 판돈, 국민 모두를 승자가 되게 할 ‘대국적’ 판돈이다.
그런데 그게 가능할까? 회의적 시각은 크게 두 갈래로 제기된다. 하나는 정치권이 너무도 오랫동안 정파적 손익계산과 눈앞의 이득에만 익숙한 ‘작은 정치’에 매몰되어 왔기 때문에 더 크고 더 본질적인 것을 보지 못하는 어리석음을 이번에도 벗어나지 못할 것이라는 관점이다. 대국을 보는 능력의 결여는 한국 정치의 지속적 결핍항으로 남아 있다. 그럴 능력이 있었다면 국가기관이 선거에 개입하는 일부터가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다. 둘째, 한국 정치는 정적을 거꾸러뜨리기 위해서라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는 잔인성, 권력을 잡고 유지하는 데 도움이 되기만 한다면 어떤 비열한 술수도 허용되고 어떤 왜곡, 어떤 난센스도 모두 정당화된다는 패도(覇道)의 정치관, 잡은 권력은 절대 놓쳐서는 안 된다는 집착, 이성의 공적 사용을 멸시하고 합리적 사유는 철저히 외면하기-이런 특징적 행동 방식들을 갖고 있다. 국민이 지켜보는 국정조사라 해서 한국 정치가 해묵은 행동 특성들을 청산하고 나설 가능성은 전무하다는 것이 회의론의 두 번째 시각이다. 청산의 의지와 능력이 조금이라도 있었다면 국가기관에 의한 권력 악용이 애당초 발생했겠는가.
이런 회의론은 국정조사의 전망을 우울한 것이게 한다. 국정조사에 대한 국민적 기대에도 불구하고 그 진행 전망과 관련해서는 회의적 태도가 고개를 드는 데는 타당한 근거들이 있다. 본격 조사가 시작되기도 전에 국정원이 취한 일련의 행동들과 집권세력이 내놓은 조사 대상 항목들을 보면 난센스, 오만, 판단 도착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국가 안보의 제1 요건은 민주주의 정치질서를 지키는 일이며 국민 생활의 현재와 미래를 안전하게 할 제1의 조건도 그 질서의 준수다. 헌법은 국민이 동의하고 합의한 최고 형태의 사회계약이다. 그 계약을 준수하고 수호한다는 것이 대한민국 대통령의 취임 선서다. 그 약속 문서에 명시된 민주주의의 원칙들을 망가뜨려 국가 기반을 뒤흔들고 국민적 약속을 배반하는 일보다 더 중대한 안보 위협이 어디 있는가. ‘인권’ 문제를 진정으로 중히 여기는 정치세력이라면 국가기관 직원들을 ‘명령’으로 묶어 불법적 선거 개입의 공범자가 되게 하는 행위의 반인권적 성격부터 먼저 성찰했어야 한다.
그러나 지금은 우리가 회의론에 빠져 있을 때가 아니다. 거듭 말하지만 이번 국정조사는 정쟁을 위한 자리가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여야 정치세력들이 소탐대실의 우를 벗어나고 당리당략의 계산법을 넘어설 ‘절호의’ 기회다. 국정조사가 국민의 기대에 부응하고 국민이 승자가 되게 한다면 그것은 여야가 함께 이기는 ‘윈윈’의 기회가 될 수 있다. 이는 한국 정치가 그 품위를 되찾고 국민 신뢰를 회복할 더없이 좋은 기회다. 여야가 서로 따질 것은 따지고 분명히 할 것은 분명히 하되 민주주의 질서의 토대를 다시 다지는 일은 여야의 공통 관심사이고 공통의 이익이라는 인식과 태도가 필요하다. 그것은 여의 이익, 야의 이익, 국민의 이익이기 때문이다. 이 공통의 수확을 거두는 것이 사회적 공동선에 대한 정치의 봉사다.
그 봉사에는 ‘큰 정치’를 해보려는 결의가 필요하다. 이 결의는 말하자면 ‘정치의 호연지기(浩然之氣)’ 같은 것이다. 작은 이해관계를 넘어 크고 넓은 공동선의 지평으로 눈 돌리는 것이 정치의 호연지기다. 호연지기를 기르는 일은 사람에게만 필요한 것이 아니라 정치에도 필요하다. 한국 정치는 그런 호연의 기세를 잃어버린 지 오래다. 그런데 호연지기는 큰 소리로 고함지른다고 길러지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옳은 일’(正義)과 ‘바른길’(正道)의 배합을 추구할 때에만 길러진다. 그 배합이 빠지면 호연의 기세는 금세 시들고 만다. 이것이 맹자가 말한 호연지기의 의미이고 그 양성법이다. 맹자의 언어가 2300년 세월을 넘어 오늘의 한국에 되살아나는 이유는 바른 일과 바른길의 배합이 지금의 우리 정치에 너무도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 배합을 요구하고 그것을 가능하게 할 궁극적 힘의 소스는 시민이고 국민이다. 국정원 국정조사가 길을 잃고 표류하지 않게 할 최종적 책임은 시민에게 있다. 우리가 국정조사의 전망을 놓고 회의론을 넘어서 보려는 이유도 시민의 힘에 대한 믿음 때문이다.
도정일 문학평론가·경희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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