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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8월 24일 토요일

김별아 칼럼, 포악한 글쓰기

출처: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308232145205&code=990335

인터넷을 떠돌다가 우연히 역사학자 전우용씨가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올렸다는 글을 읽고 ‘울컥’ 했다.

“국정원 댓글 알바가 되면 Ctrl+X, Ctrl+V만 해도 잘 먹고 잘 사는 시대에, 모진 가난 속에서도 좋은 문장 하나 만들기 위해 하루하루 고뇌하는 이 땅의 모든 작가들에게 심심한 위로의 말씀을 전합니다.”

글쓰기는 애초에 ‘필패(必敗)’의 작업인지라, 고통은 필수요 그 고통에 대한 외로움도 필수다. 다만 오롯이 자기가 좋아서 하는 일에 엄살을 떨 수 없기에 비명이나 신음이 새어 나가지 않도록 어금니를 악물고 버틸 뿐이다. 그러다 일면식도 없는 이에게 때아닌 위로를 건네받으니 고맙고도 씁쓸한 마음을 가누기 어렵다.

하긴 꽤 오랫동안 궁금했다. 인터넷 기사나 게시판에 댓글로 달리는 끔찍하고 저급한 문장들은 대체 어느 누가 쓰는 것일까? 음습한 골방에 틀어박혀 피아(彼我)를 분간하지 못하는 독화살을 마구 쏘아대는 이단자, 손닿지 않는 세상에 대한 열패감과 적대감으로 똘똘 뭉친 패배자를 상상하면 어쩐지 분노보다 연민이 들기도 했다. 정말 그들이 댓글 작성자라면 ‘처벌’보다 ‘치유’가 더 시급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순진한 상상력에 기대어 감내하기에는 그 문장들이 뿜어내는 독기가 극악했다. 표현의 충동보다는 파괴의 의지에 넘쳐 단어 하나하나가 말 그대로 “부숴버리겠다!”며 덤벼드는 것만 같았다. 무엇을 부수겠다는 것일까? 무엇이 부서진 것일까?

그 댓글들을 보노라면 일반적인 견문과 보통의 이해력, 판단력, 사리 분별을 아우르는 ‘상식’이 부서진다. 독재자를 찬양하고, 학살자를 옹호하고, 반대자를 거침없이 낙인찍으며 당당하게 몰상식을 과시한다. 인권은커녕 이성조차 발붙이기 어려울 정도로 견강부회(牽强附會)를 일삼는다. 또한 댓글들은 용케 골라낸 흉악하고 비열한 단어들을 이어 붙여 ‘모국어’를 부서뜨린다. 오직 읽는 사람의 뇌수를 쪼고 상처에 소금을 뿌리기 위해 배열된 모진 문장들은 내가 아는 아름답고 풍부한 ‘어머니 말’이 아니다. 그리하여 댓글들은 끝내 건강하고 아름답고 합리적이며 상식적인 삶을 꿈꾸는 ‘마음’을 부순다. 그 마음을 조각조각 깨뜨려 그것에 의지하는 사람들을 분열시킨다.

드디어 그 포악한 글쓰기의 주인이 밝혀졌다. 현실은 상상보다 훨씬 추했다. 비루한 개인의 자발적인 게시를 넘어 세금으로 운영되는 국가기관에 의해 고용된 이른바 ‘알바’들이 조직적으로 문장을 만들어 유포했다는 것이다. 

글을 쓴다는 것은 그 글이 어떻게 쓰일지를 생각하는 일이다. 신분을 감춘 채 그림자라도 팔아버린 것처럼 양지에는 못 나오고 음지에서만 일하며, 조직적으로 민심을 동요시키고 구성원들의 분열을 획책하여 사회를 교란했던 이들이 ‘간첩’이나 ‘불순분자’가 아니라 그들을 잡겠노라는 국가정보원의 ‘요원’이거나 ‘알바’들이었다는 사실은 충격이다. 

자신의 호흡이나 마찬가지인 문장을 쓰기 위해서는 오랫동안 정교한 훈련이 필요하다. 영혼을 초토화하는 날 선 문장의 기지를 구축하기 위해 무술 연마와 체력 단련을 하고, 차마 입에 담을 수 없는 언어를 자유자재로 구사하기 위해 공수와 해양 훈련을 받았다는 사실은 충격을 넘어선 공포다. 

Ctrl+X와 Ctrl+V의 호흡을 체화하기 위해 지리산 종주까지 했다는 대목에 이르러서는 백두대간을 완주한 이십 년차 작가도 무릎을 꿇고 “졌다!”고 외칠 지경이다. 천왕봉에서, 노고단에서, 반야봉에서, 피아골에서, 벽소령에서, 세석평전에서…. 그 신비롭고 경이로운 풍광 앞에서 그들은 어떤 악심(惡心)을 다진 것인가? 

글을 쓴다는 것은 문장에 대한 자의식을 가지고 세계와 나의 관계를 톺아보는 일이다. 글쓰기 안내서의 고전인 <문장 강화>에서 이태준은 “문체란 사회적인 언어를 개인적이게 쓰는 것이다”라고 말한다. 중국의 사상가이자 문장가인 후스는 “언어만 있고 사물이 없는 글을 짓지 말 것, 아프지도 않은데 신음하는 글을 짓지 말 것!”을 주장한다. 시인 이성복은 <네 고통은 나뭇잎 하나 푸르게 하지 못한다>에서 문학은 “절망도(道) 절망군(郡) 절망읍(邑) 절망리(里) 희망에게” 쓰는, 혹은 죽는 날까지 결코 쓸 수 없는 편지임을 밝힌다.

살기로 번뜩이는 언어, 무언가를 부서뜨리겠다고 달려드는 문장들은 정확히 진정한 글쓰기의 대척점에 서 있다. 개인적인 언어는 사회적 언어의 폭력에 말살당하고, 가학적인 글은 타인의 신음과 비명소리를 즐긴다. 그것은 글쓰기라기보다 배설이다. 쓰고 읽는 사람 모두가 똥구덩이에서 뒹굴며 절망도, 절망군, 절망읍, 절망리에 사는 더럽고 황폐한 절망에게 구터분한 손을 뻗친다. 

글쓰기는 끊임없이 부끄러움을 확인하는 일이기도 하다. 쓰는 사람은 부끄러워하지 않고 읽는 사람만이 수치스러운 시대에 작가라는 초라한 이름이 슬프다. 아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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