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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10월 8일 화요일

인문의 조건

인문의 조건

(1)
인문의 위기, 인문의 실종을 말한다. 인문은 휴매니티스(humanities)라고 하는데, 간명하게 인간성, 인간성의 구성요소들이란 의미다. 좀 더 일반화시키면 존재를 구성하고 있는 구성요소에 대한 고민과 고민의 집적들이 인문이라고 할 수 있다.

인문의 오랜 숙제, 그것을 압축하고 있는 화두가 ‘나는 누구인가?’이고, ‘너 자신을 알라’이다. 또 다른 표현으로 ‘나는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이다. 

좀 더 풀어서 말하면, 나 자신이 지금 현재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이 어떤 결과로 연결될지의 인과관계를 추론하고 그 추론된 인과관계에 따라서 자기의 사고와 행위를 가져가는 것이다. 의지적 실천적으로 판단하고 자신을 조종할 수 있는 능력, 이게 인문의 능력이다. 

그러니까 지금 자기가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의 원인·결과관계를 예측하지 못하거나 인과관계를 무시 또는 착오하거나 망각하거나 한다면 인문이 아닌 거다. 또 결과가 예측된다 하더라도 그에 따라 자기 행위를 의지적으로 실천적으로 합목적적으로 조종할 수 없는 - 컨트롤하고 핸들링(handling)할 수 없는 거라면 그것도 인문이 아닌 거다. 

그래서 인문은 두 가지 조건을 갖추어야 한다. 
첫째, 내 위치와 그 위치에서 숨 쉬고 행동하는 것이 어떻게 결과할 것인가를 예측하는 능력을 갖추어야 한다. 일단 인과관계를 알아야 한다. 이것이 인문의 필요조건이다. 
둘째, 그 예측된 바에 따라 가장 가치적인 - 나에게도 너에게도 모두에게 이롭고 합목적적이고 가치적인 - 방향으로 사고와 행동을 조종할 수 있어야 한다. 이게 인문의 충분조건이다. 

인문의 필요조건과 충분조건을 갖추는 것, 이것이 소위 ‘깨침’이다. 깨침이란 말이, 신비적 개념으로 많이 윤색되어 버렸지만, 이룰 거두절미하고 단도직입적으로 말하면 ‘예측가능하다’는 것이다, 이 물건이 지금 어떻게 생각하고 행동하고 어떻게 결과할지, 달리 말하면 이 물건이 어떤 좌표에서 어떤 좌표로 이동할지를 안다는 것이다. 그걸 깨침이라고 한다. 단순히 알 뿐 아니라 의지적으로 목적적으로 핸들링 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 깨침이라는 할 수 있다. 

그러니까 깨치지 못하면 예측이 성립할 수 없는 인생이다. 정확한 좌표가 설정이 되지 않고 도 이게 어디로 튈지 모르는 럭비공과가 같은 인생이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믿음이란 게 성립할 수 없다. 인과에 대한 믿음도, 사회역사적 진보에 대한 믿음도 성립하지 않는다. 예측 불가한 자신에 대한 믿음자체가 성립할 수 없기 때문에. 


(2)
지금까지 살아온 방식으로는 더 이상 방법이 없다. 벼랑 끝이다. 우리의 삶도 벼랑 끝이다. 인간정신, 인문도 벼랑 끝이다. 그나마 믿어 왔던 근대인문조차도 벼랑 끝이고 사회경제적으로도 더 갈 데가 없다.

자본주의 4.0이니 그런 이야기를 하지만 사실 더 갈 데가 없다. 그러면서도 자본제 시스템에 의한 중력장, 기존의 관성을 쉽게 떨치지 못하고 있는 상태, 그게 살아가는 방법은 아닌데 끈을 놓치 못하는 어정쩡한 상태가 계속되고 있다. 

우리네 인생은 출발지도 목적지도 없고 그래서 인생의 내비게이션이란 게 없다. 우발적이고 우연적 요소에 의해 끌려 다닌 인생이지 자신의 의지에 의해서 가꾸어진 인생이 아니다. 이 벼랑 끝에서는 그런 인생이 더 이상 허용되지 않는다는 것, 설사 허용되어지는 것처럼 보여도 대단히 힘겹고 비참한 장래가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이전의 방식으로는 어느 쪽으로도 돌파구나 나올 수 없는 벼랑 끝이니까 방법을 찾아야 한다. 그 방법을 어떻게 찾을 것인가? 그런 의미에서 이제 깨침이라는 거는 사느냐 죽느냐의 물음과도 같은 절박한 물음이 되어버렸다. 깨침이란 게 특정한 수행집단, 출가자들의 호기어린 이야기가 아니다. 이제는 너 나 할 것 없이 우리 모두의 이야기이다.

추상적 인문이 아니라 구체적인 깨침이란 것이 자기 것이 되지 않으면 산다는 게 참 힘들고 비루하고 천덕꾸러기처럼 될 수 있다. 최소한의 자존감, 인격권을 거머쥐기 위해서도 이제는 깨침을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다. 

깨침이라 것, 이전에 이해해왔던 그런 방식의 깨침, 도덕군자연하고 연기만 모락모락 피우고 구체적으로 불을 보여주지 않는 그런 신비적 의미의 것들은 필요 없다. 깨침은 대답이 아니다. 해답이 아니다. 정답이 아니다. 우리는 깨침이란 걸 결과주의적 입장으로 이해하지만 결과가 아니다. 내 지금 어디에 있으며 이 순간 무엇을 해야 하느냐?라는 물음이다. 

배영순(영남대 국사과교수/ baeysoon@yumail.ac.kr

출처: http://www.munhwa.com/news/view.html?no=20131008MW0913127232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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