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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11월 22일 금요일

[특별기고] ‘문화융성’의 조건 / 도정일

[특별기고] ‘문화융성’의 조건 / 도정일


문화를 죽이는 쥐약은 검열·강제·명령이다. 모든 검열제도, 강제와 명령의 체제가 문화를 융성하게 한 일이 없다는 것을 우리는 경험으로 알고 있고 역사를 통해 알고 있다. 나치의 문화정책이 무슨 문화를 가능하게 했는가?
현임 정부가 추진하고 있는 중요한 정책지표의 하나가 ‘문화융성’이다. 문화융성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고 무엇을 목표로 한 것인가라는 질문에 이르면, 정책으로나 프로그램으로서의 문화융성이 어떤 특별한 내용을 가진 것인지 어떤지는 아직 그리 선명해 보이지 않는다. “나라 문화가 융성해야 한다”는 의미의 문화융성이라면 그건 너무도 지당하고 당연한 말이어서 하나 마나 한 소리에 불과하다. “나라 문화를 융성하게 하자는 것”이라 말해도 속이 비기는 마찬가지다. 정부의 문화융성론이 훨씬 타당하고 절실한 내용을 갖자면, 적어도 다음 세 가지 질문에 응답할 만한 내용이 들어 있어야 할 것 같다. 문화융성이란 것은 어떤 문제의식에서 나온 정책인가? 그 정책의 목표와 실현방법은 무엇인가? 문화융성이 사회의 전반적인 발전정책과는 어떤 관계에 있는 것인가?
우리의 역대 정부 가운데 문화를 들먹거리지 않은 정부는 없다. 역대 대통령 취임사에서도 비록 구색을 맞추기 위한 것이긴 했겠지만 빠짐없이 언급되곤 하던 것이 ‘문화발전’이다. 현 정부가 특별히 문화융성을 정책목표로 들고나온 데는 무슨 특별한 이유나 문제의식이 있었던 것일까? 이를테면 문화영역이 그동안 상대적으로 위축되어 왔기 때문에 문화발전을 위한 새로운 정책이 필요하다거나, 국민의 문화활동을 훨씬 더 적극적으로 지원해야 한다거나 문화생활의 품질을 높여야 한다는 판단 같은 것이 있었다면 그런 것은 정책의 기초가 될 만한 ‘문제의식’에 속한다고 말할 수 있다. 나는 현 정부의 문화융성책이 이런 문제의식을 전혀 담고 있지 않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선의의 정책적 목표가 감지되는 부분들도 없지 않다. 나의 이런 생각이 아주 틀린 것이 아니라면, 바로 그 근거 위에서 나는 현 정부의 문화융성론에 몇 가지 고언을 보탤 필요를 느낀다.
첫번째로 지적하고 싶은 것은 문화와 시장의 관계에 관한 정책적 고려의 필요성이 과거 어느 때 못지않게 지금도 너무 절실하다는 사실이다. 문화와 시장, 또는 문화와 경제의 관계는 긴밀하다. 아무도 그 사실을 부정하지 않는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문화의 경제적 기여나 시장적 성격에 못지않게 문화의 ‘비시장적’ 성격을 존중하는 정책이 문화융성론의 핵심 가운데 하나로 추진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우리 문화가 새로운 융성의 계기를 가져야 한다고 말할 때 그 ‘융성’은 무엇보다도 문화의 비시장적 성격을 최대한 살려내는 일을 의미하는 것이어야 한다. 지난 10여년간 우리 문화가 겪어온 심각한 ‘위축’은 정확히 말해 문화의 비시장적 성격의 위축이기 때문이다. 이 위축이 의미하는 것은 한 사회의 지적·예술적·학문적 ‘창조성’의 위축이다. 창조성 자체는 정부 정책이 인위적 자원 투입만으로 진작시킬 수 있는 것이 아닐지 모른다. 그러나 정책은 한 사회적 지적 예술적 창조성이 분출될 수 있게 할 토대 조건을 조성해줄 수 있다. 이 토대 조건이 문화의 생태환경이다.
문화융성을 위한 생태환경의 조성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민의 자율성과 자발성이라는 두 개의 핵심가치다. 국가가 나서서 어떤 문화를 만드는 수도 없지 않지만 문화를 생산하고 향수하고 가치를 판단하는 제1의 행위자는 관이 아니라 민이다. 이 대목에서 우리가 강조해야 할 두번째 주요 정책적 의제는 문화영역에서 ‘민의 자율성’을 어떻게 최대한 존중할 것인가라는 문제, 그리고 ‘민의 자발성’을 어떻게 고무·자극·지원할 것인가라는 문제다. 과거의 경험에 비추어 말하면, 관이 주도하는 문화행사치고 성공한 사례는 찾아보기 어렵다. 이른바 ‘관제문화’는 문화가 아니다. 모든 문화 프로그램과 문화활동의 사활을 결정하는 것은 활동을 전개하고 사업에 참여하는 사람들의 자율성과 자발성이다. 자율성은 문화활동의 전 과정에 요구되는 기획과 판단, 선택과 실행의 자율성이다. 또 자발성이라는 것은 문화 생산과 활동의 전 과정에 필요한 참여와 결정의 자발성이다. 민의 자율성과 자발성이라는 두 가지 원칙이 존중되지 않는 곳에서는 창조적 아이디어가 나오지 않고 열정이 있을 수 없고 ‘흥’이 생겨나지 않는다. 문화는 강제의 영역이 아니다. 지시·명령·복종의 관계만 강조되는 곳에서 문화는 융성은커녕 위축·쇠퇴·실패를 자초한다.
문화를 죽이는 최대의 쥐약은 검열·강제·명령이다. 모든 검열제도, 강제와 명령의 체제가 문화를 융성하게 한 일이 없다는 것을 우리는 경험으로 알고 있고 역사를 통해 알고 있다. 나치의 문화정책이 무슨 문화를 가능하게 했는가? 과거 소비에트 체제나 아직도 지구상 여기저기에 일부 남아 있는 ‘전체주의’가 추악한 관제문화 말고 무슨 문화를 만들어내었는가? 검열과 통제와 억압이 어떻게 문화를 옥죄고 사회의 창조적 에너지를 고갈시켰는가는 우리에게도 남의 얘기가 아니라 과거 경험이 충분히 말해주는 바다.
민의 창조적 에너지가 자유로이 분출될 수 있게 하고 상상력이 날개 달 수 있게 하며 표현의 역량을 최대화하는 데 기여하는 일-이것이 문화 융성을 위한 생태환경 만들기의 시(始)이자 종(終)이다. 그것은 모든 종류의 문화정책에 필요한 기본 자세이고 접근법임과 동시에 정책의 출발점이자 최종적 목표지점이다. 그런 생태환경을 조성한다는 것 이상으로 중요하고 의미있는 문화정책은 따로 없기 때문이다. 나는 우리 정부의 문화정책 담당자들이 이런 사실을 모른다고는 결코 생각하지 않는다. 창조경제를 말하는 사람들이나 창조경제와 문화융성을 연결시키는 사람들도 이런 생태환경 만들기의 본질적이고 기본적인 정책적 중요성을 망각하고 있으리라고는 결코 생각하지 않는다. 그런데도 나는 왜 이런 소리를 하고 있는 것인가? 이건 내가 거꾸로 되묻고 싶은 질문이다. 왜 우리가 이런 문제를 놓고 염려해야 하며 ‘고언’을 마다하지 않아야 하는가?
과학을 하는 데는 민주주의가 필요하다고 말한 사람들이 많다. 버트런드 러셀도 그랬고 제이컵 브로노스키도 그렇게 말한 바 있다. 주어진 틀에 갇히기를 거부하는 것이 과학하기의 출발점이다. 과학과 예술은 인간 문명의 꽃이다. 인간의 창조적 능력이 최선의 형태로 발휘되는 두 개의 대표적 영역이 과학과 예술이기 때문이다. 과학하기에 민주주의가 필요한 것은 그 체제하에서만 자유로운 탐구, 비판과 이의 제기, 오류 수정, 진실 존중 같은 일들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창조적 과학을 가능하게 하는 사회적·문화적 생태환경을 가장 잘 만들고 제공하는 것이 민주주의다. 예술의 경우도 그러하다. 틀에 갇히기를 거부하는 것이 예술이다. 가장 좋은 의미에서의 창조적 문화도 틀을 넘어서고자 하는 순간에 만들어지고 탄생한다.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지금까지 내가 문화의 생태환경이라 불러온 것이 사실은 과학, 예술, 그리고 경제까지도 포함해서 한 사회가 작심하고 조성해야 할 문화적 창조성의 에코시스템이라는 사실이다.
문화정책은 한 사회의 전반적 발전을 위한 포괄적 정책의 일부다. 문화정책이 중요한 것은 사회 전체의 가치 지향과 발전 목표에 연결되어 있을 뿐 아니라 결정적으로 사회발전의 방향을 안내하는 것이 문화정책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경우, 지금까지 사회발전의 목표와 지향을 대변하는 것은 경제발전과 민주주의 발전이라 여겨지고 있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문화정책은 민주주의 발전이라는 우리 사회의 기본 목표와 불가분의 관계로 연결되어 있어야 한다. 이것이 문화융성론에 내가 전달하고 싶은 세번째 ‘고언’의 내용이다. 문화가 중요한 이유는 경제적 기여를 포함해서 여러 가지일 것이다. 그러나 그 가장 중요한 이유는 문화가 사회의 민주적 발전이라는 기본 가치와 목표를 담고 있다는 것이다. 문화정책은 이 기본적 가치와 목표 지향에서 벗어나 있을 수 없고 벗어나서도 안 된다.
도정일 문학평론가·경희대 후마니타스 칼리지 대학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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