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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12월 27일 금요일

강우일 주교 성탄절 강정마을 미사 강론 전문

메리 크리스마스입니다!

강정 주민들, 그리고 강정에서 여러 해를 보내고 있는 평화의 지킴이들, 그리고 이곳을 방문한 형제 · 자매들에게 아기 예수님의 축복을 전합니다. 그리고 강정에서 지금도 망치를 두들기면서 공사하는 이들, 공사를 명령한 해군 군인들, 그리고 위정자들, 우리를 감시하는 경찰들, 이 모든 이에게도 아기 예수님의 탄생을 경축하는 천사들의 노래 소리를 전하고 싶습니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느님께 영광, 땅에서는 그분 마음에 드는 사람들에게 평화!” 이것이 천사들의 외침이었습니다.

“땅에서는 그분 마음에 드는 사람들에게 평화!” 이 외침에서 “그분 마음에 드는 사람들”이란 누구를 가리키는 말씀일까요? 성서에 이런 표현이 몇 군데 똑같이 등장합니다. 한번은 예수님께서 요르단 강에 가셔서,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라는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러 온 죄인들 사이에 끼어서 예수님도 세례를 받으시려고 합니다. 이때 요한은 “제가 선생님께 세례를 받아야 할 텐데, 선생님이 저한데 오시다니요” 하며 극구 예수가 무릎을 꿇는 것을 말리려고 합니다. 그래도 예수님은 “지금은 그대로 해달라”고 청하셨고, 세례를 받으신 다음에 요르단 강물에서 올라왔을 때 하늘이 열리고 하느님의 영이 비둘기처럼 보이며 이런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

세상에서 가장 의로우신 분이 온갖 죄인들과 같은 눈높이로 내려가셔서 그들의 좌절과 그들의 슬픔과 고통을 함께 나누시면서 그들을 모든 죄의 사슬에서 해방시키기를 원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죄인들을 질책하고 심판하시기보다 죄인들과 한 자리에 무릎을 꿇으면서 그들의 애환 속에 함께 어울리고, 함께 울고, 함께 가슴을 치고, 함께 하느님의 용서를 청하기를 선택하셨습니다.

공생활을 시작하기 전부터 예수님은, 선한 양 아흔아홉 마리보다 길 잃은 양 한 마리를 찾아서 강바닥으로 내려가시는 그 예수님이야말로 하느님 마음에 드는 아드님이셨습니다. 이 하느님의 마음을 닮은 마음으로 나아갈 때 우리도 천사들과 한 목소리로 구세주의 탄생을 노래하고 찬미할 자격이 생기는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 예수 그리스도의 강생을 경축하는 1년의 가장 위대하고 장엄한 구원의 신비를 기억하고 하느님께 찬미 드리는 성탄대축일 장엄미사를 여기서 지내고 있습니다. 하지만 지금 우리가 앉아 있는 이곳, 길바닥 천막 아래 이 장소는 장엄미사를 지내기에는 너무나도 초라한 장소입니다. 어떤 분들은 ‘왜 거룩한 미사를 길거리에서 지내는가? 아름다운 성당을 두고, 엄한 사람들이 다니고, 자동차가 왔다갔다 다니는 길바닥에서 미사를 지내는가? 거룩한 미사의 품위와 격을 너무 떨어뜨리는 것은 아닌가?’ 하며 안타까움을 표현하기도 합니다.

그런 염려와 안타까움을 저도 이해는 합니다. 그러나 저도 그렇고, 여기서 미사 지내는 사제들도 그렇고 이 시끄럽고 품위 없고 시끄러운 길바닥에서 간이 제대 놓고 미사 드리고 싶은 사람, 아무도 없습니다. 저도 주교회의 전례위원장을 9년이나 하면서 전례에 대해 애착을 가지고 있고, 전례의 규범을 아끼는 사람이었습니다. 하느님께 합당한 예배를 드리고 싶은 사람입니다. 그런데 차츰 나이를 먹어가면서, 이 강정의 일이 벌어지면서 미사가 무엇일까, 성체성사가 무엇일까, 새롭게 음미하고 반성하게 됩니다.



여러분이 알다시피 미사의 가장 중요한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당신 목숨을 바쳐 구현하신 십자가상 제사의 그 사랑을 기억하고, 그 사랑을 오늘 이 자리에서 재현해 내는 것입니다. 나머지는 다 부수적인 일입니다. 그 사랑을 더 잘 드러내기 위해 동원하는 인간적인 도구일 뿐입니다. 성당이란 건축물, 그 거룩한 공간, 제대라는 대리석으로 만든 물건, 사제가 입는 이 제의, 이 모두가 오늘 예수님의 사랑을 표현하기 위한 도구이지, 그것이 미사의 본질도 핵심도 아닙니다.

일상적인 상황에서는 아름답고 예술적인 공간에서, 성화가 잘 배치되어 있고, 스테인드글라스가 아름답게 비추어주는, 그런 성당에서, 저도 모든 형식을 제대로 갖추고 미사를 드리고 싶습니다.

그러나 이런 일상적인 환경이 허락되지 않는 경우가 있습니다. 비상시에는 예수님의 사랑을 표현하는 양식이 얼마든지 바뀔 수 있습니다. 옛날 조선 박해 시기에, 먼저 가신 순교 선열들은 아무도 제대로 된 성당에서 미사를 지낸 적이 없습니다.

역사상 미사의 효시라고 볼 수 있는 최후의 만찬은 성전에서 이뤄지지 않았고, 예루살렘 어느 사가의 다락방에서 이뤄졌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사랑의 완성이라고 하는 십자가 제사는 뭇사람들이 지나가며 쳐다보는 길거리에서 이뤄졌습니다. 십자가에서 당신 목숨을 바쳐 사랑을 구현하신 예수님은 당신 옷을 다 뺐기고, 벌거벗은 몸으로 품위도 위엄도 없는 비참한 모습이셨습니다. 머리에 가시관을 뒤집어쓰시고, 사지에 피가 낭자하게 흐르는 처절한 광경, 지나가는 사람들이 다 눈길을 돌렸을 것입니다. 제대로 바라보기에는 너무나 처참한 광경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런 참담한 몰골을 한 예수님의 그 십자가상의 세 시간, 그것이 미사의 참모습입니다. 이런 위대한 사랑의 제사를 완성하신 그 주변에는 아름다운 성가대나 찬미의 노래를 부르는 사람들이 있기는커녕, 주님을 고발한 원수들의 저주와 조롱, 그리고 옆에 달린 죄수까지 비웃고 있는 그런 암담한 현장이었습니다. 어떤 의미로 미사의 본래의 원형이 너무나도 참담하고 끔찍하기 때문에, 교회는 부활하신 예수님 안에서 예수 수난의 고통을 승화시키기 위해 예술가들을 동원해서 되도록 아름답고 격조 높게 그리고 조각해온 게 아닌가, 그런 생각을 합니다.

용산 사태 때 자기들 집에서 용역들 폭력에 피눈물 흘리며 쫓겨나고, 두들겨 맞고, 불에 타죽고, 장례도 못 치르고, 분노와 절망에 자지러진 사람들 곁에 사제들이 다가가서 그들의 슬픔과 고통을 함께 나누었고, 그들에게 희망을 불어넣기 위해 기도하면서 매일 미사를 지냈습니다. 그 덕에 희생자 유족들은 그나마 절망 속에서 버틸 수 있었고, 그리고 나중에는 서울시와 협상을 타결할 수 있었습니다. 그 미사를 집전하고, 거기에 동참했던 이들은 누구보다도 고통 받는 이들과 함께한 이들이고, 그들을 사랑한 사람들입니다. 이들이야말로 미사의 핵심을 가장 잘 구현한 예수님의 제자들이었습니다.

서울에서도 가장 자동차가 많이 다니고 시끄러운 대한문 앞에서 1년이 훨씬 넘도록 많은 사제들이 와서 미사를 지내고, 많은 신자들과 행인들이 이 미사에 참여했습니다. 그들도 고통 받는 이들과 함께하기 위해 그 소란스러운 길거리에서 미사를 지냈습니다. 집단 해고를 당해서 살길이 막막하고 억울해서 절망의 심연에 울분을 토하다 차례로 죽음을 택한 23명의 노동자들, 그 동료 노동자들의 분노와 절망을 조금이라고 함께 연대하면서 덜어주고 용기를 북돋아주려고 매일 미사를 지낸 덕에 노동자들의 자살 행렬이 중단되었고, 세상에 쌍용차 노동자들의 고통에 대한 연민과 공감대가 확산될 수 있었습니다. 미사의 본질이 구현되는 현장이었습니다. 이곳 강정도 마찬가지고, 송전탑 건설을 온몸으로 울부짖으며 막고 있는 밀양도 마찬가지입니다.


저는 이런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우리 많은 신자들이 성지와 순교지들을 순례하는데, 옛날 순교자들이 목숨을 바친 순교지와 성지를 순례하고 거기서 기도합니다. 그러나 몇 천년 전, 또는 몇 백년 전 우리 선조들이 목숨을 바친 곳을 우리가 몇 백만 원씩 들여서 순례하기 전에, 살아있는 우리 형제들이 정의에 목말라하면서, 불의에 항거하면서 울부짖고 싸우고 얻어맞고 끌려가서 감옥에 갇히는 오늘의 순교적인 현장들을 순례하면 예수님께서 훨씬 더 기뻐하시고 우리를 어여삐 여기실 것입니다.

형제 · 자매 여러분, 예루살렘 성전이 예수님께는 하느님께 기도하는 거룩한 장소이기도 했지만, 형식적인 그곳 예루살렘 성전에서 매일같이 동물을 잡아 희생 제물을 바치는 데만 매달리는 수석사제들을 향해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가서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자비다.’ 하신 말씀이 무슨 뜻인지 배워라.” 그리고 체포되시기 전에 마지막으로는 “이 성전을 허물어라. 그러면 내가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 이 말씀은 그 거룩한, 인간이 만든 물질적인 공간에 집착하는 그 시대 제관들에게 예수님께서 내려주신 결정적인 깨우침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친애하는 교형 자매 여러분, 하늘 높은 데서는 하느님께 영광, 땅에서는 그분 마음에 드는 사람들에게 평화. 무엇이 우리로 하여금 하느님 마음에 드는 사람으로 만들 수 있을까요. 예수님의 발자취와 예수님이 사신 모습, 예수님이 기도하신 그 순간순간들을 상기하면 해답은 너무나도 분명합니다.

잘 꾸며진 성당에 앉아서 경건하게 기도하고 미사를 지내는 것도 좋지만 예수님이 가장 가까이 다가가시려고 노력하셨고, 항상 아끼셨던 세상의 가장 작은이들, 가장 어려운 이들, 그런 이들 곁에 우리가 함께하려고 노력할 때, 그때 우리는 하느님의 마음에 드는 사람들 대열에 낄 수 있는 게 아닌가 생각합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와주신 엄청난, 온 우주도 담지 못할 분이 작은 아기로 우리 가운데 와주신 것을 감사하며 찬미하는 이 미사에서, 우리가 그분의 엄청난 사랑과 자비를 온몸으로 받아들일 수 있도록 은혜를 구하며 이 미사를 봉헌합시다.

강우일 주교 (베드로)
제주교구장, 한국 천주교 주교회의 의장

출처 http://www.catholic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114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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