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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1월 11일 토요일

[서예로 찾은 우리 미학](15) 임신서기석과 당유인원기공비

ㆍ송곳 같고 고졸한 필획… 화랑도의 ‘젊은 지성’ 보는 듯

출처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401102054465&code=960202

전쟁만큼 문화를 파괴하는 것도 없지만 이보다 다른 문화를 강력하게 전파시키는 계기도 없다. 비근한 예로 6·25전쟁은 우리가 서구문화를 봇물 터지듯 수용하는 계기가 되었다. 서예문화의 전파 또한 전쟁의 영향을 벗어날 수 없다. 한사군 설치, 신라의 삼국통일과 나당연합군의 활약, 몽골군의 침입, 임진·병자 양난, 일제강점 등을 통해 중국이나 일본의 서예가 수용되고 우리 것으로 소화됐다. 

660년에 신라는 나제동맹을 깨고 나당연합군을 결성해 백제를 멸망시켰다. 이로써 신라는 삼국통일의 일차 교두보를 마련했다. ‘당유인원기공비(唐劉仁願紀功碑)’(663, 보물 제21호)는 이때 활약한 당나라 장수 유인원의 공적을 기록한 비다. 그래서 우리나라 비석이 아니라 실질적으로는 당비(唐碑)다. 중국 사람의 필적인 이 비석의 글씨가 우리나라 서예사에서 주목되는 이유는 당시 선진문물로 여겼던 당의 글씨문화가 직접 전파된 증거이기 때문이다. 이우가 지은 <대동금석서>(1668)에는 유인원의 필적으로 전해지는데 그 필체는 저수량체를 중심으로 우세남·구양순 등 초당(初唐) 3대가의 해서풍이다. 그래서 이 비의 서풍은 고박한 고신라의 글씨와 딴판이기도 하지만 세련미가 뛰어나다는 백제글씨와 비교해도 차이가 난다. 

반면 고신라 금석문 중 하나인 ‘임신서기석’을 보면 ‘당유인원기공비’와 거의 같은 시대에 만들어진 것임에도 ‘영일냉수리비’(503), ‘울진봉평비’(524)의 고예에 가까운 고졸한 미감이 남아있다. 해서의 틀을 힘차게 잡아가는 ‘황초령 진흥왕순수비’(568)와 같은 신라 고비의 구조도 보인다. 비문의 내용이나 글씨 품격도 그냥 막 쓴 글씨가 아니라 신라 최고의 젊은 지식인들의 필적이다. 하지만 전형적인 해서의 면모를 갖춘 ‘당유인원기공비’와는 거리가 있다. 요컨대 7세기 중엽 들어 신라에는 예스러운 고신라의 토종글씨와 전형미의 당나라 글씨가 공존하고 있었던 것이다. 

‘임신서기석’ 탁본. 1934년 경주 금장리 석장사지 언덕에서 조선총독부 박물관 경주분관 관장으로 근무하던 오사카 긴타로(大阪金次郞)가 발견했다. 길이 34㎝, 두께 2㎝, 폭 12.5cm의 자연석에 5행 74자가 새겨졌다. | 국립경주박물관 소장

그렇다면 이들 금석문의 글씨 성격은 어떻게 보아야 할까. 단순히 전자는 선진이고, 후자는 낙후된 것일까. 이에 답하려면 먼저 ‘임신서기석’이 언제 만들어졌는지 볼 필요가 있다. 선행연구를 보면 일제시대에는 임신년을 성덕왕 때인 732년으로 보았다(스에마쓰). 그러나 광복 후에는 신라 진흥왕 때인 552년이나 진평왕 때인 612년으로 봐야 한다는 주장이 제시되었다(이병도). 두 사람의 주장은 무려 120년의 차이가 난다. 스에마쓰는 비문 내용 가운데 “또 앞서 신미년 7월22일에 크게 맹세했다. 시경, 상서, 예기, 춘추전을 차례로 3년 동안 습득하기로 맹세하되 3년으로 한다(又別先辛未年七月卄二日大誓. 詩尙書禮傳倫得誓三年)”와 같이 유가의 최고 경전을 습득할 것을 맹세한 점에 주목해 이 금석문은 신라에서 국학을 설치하고 체제를 갖춘 신문왕 이후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반면 이병도는 국학 설치 이전에 이미 유교경전이 널리 수용되고 학습되었다는 점에서 기년을 훨씬 앞당겨 잡고 있다. 특히 비문 내용 중 나라에 충성을 맹세한 화랑도 정신에 주목했다. 

“임신년 6월16일에 두 사람이 함께 맹세하여 기록한다. 하늘에 맹세한다. 지금부터 3년 이후에 충도를 지키고 과실이 없기를 맹세한다. 만약 이 맹세를 어기면 하늘에 큰 죄를 짓는 것이라 맹세한다. 만일 나라가 편안하지 않고 크게 세상이 어지러워지면 모름지기 충도를 행할 것을 맹세한다.(壬申年六月十六日二, 人幷誓記 天前誓 今自三年以後, 忠道執持,過失无誓 若此事失, 天大罪得誓 若國不安大亂世, 可容行誓之)”

이 짧은 문장에서 충성 맹세를 다섯 차례나 하고 있다. 이 점에서 그는 신라가 백제, 고구려를 평정하고 삼국을 통일해 나라가 안정된 이후 만들어진 것으로 해석한 스에마쓰의 견해를 뒤집는다. 다시 말해 이병도는 ‘임신서기석’에 각인된 화랑도 정신으로 백제, 고구려를 차례로 평정하고 나아가 외세인 당나라의 세력까지 몰아냄으로써 삼국을 하나로 통합했다고 본다. 

그런데 여기서 스에마쓰나 이병도가 공히 놓치고 있는 점이 있다. 유물의 편년 설정에 있어 유물 자체가 가지고 있는 본원적인 정보를 등한시한 것이다. 우리 시대 고고학이나 문헌사학의 실상이기도 하지만 글자조형이나 서체미학이 가진 시대적 특성을 접어두고 내용적으로만 접근하고 있는 것이다. 필자가 보기에는 선행연구에서 ‘임신서기석’이 국학과 화랑도에 버금가는 학문 수준을 가진 젊은 지성의 필적임이 분명함을 확인했다면, 당해와는 다른 고졸한 글자구조와 미감에서 당연히 삼국통일 이전의 글씨로 보아야 하지 않을까 판단된다. 

다시 논의를 처음으로 돌아가 보자. 삼국통일이라는 전환시대에 나당연합은 군대와 함께 글씨도 가져왔다. 그 후 통일신라의 글씨는 당풍으로 바뀌었다. 적어도 삼국시대나 고신라풍의 글씨는 8, 9세기에는 볼 수 없었다. 볼 수 없었다기보다 안목이 모자라 안 보인다고 하는 것이 더 정확한 표현이겠지만 그래서 중국의 아류가 아닌가 하는 오해 아닌 오해가 생기는 것도 사실이다. 

그래서 드는 의문인데 통일신라에 와서 고신라를 중심으로 한 삼국시대 글씨미감을 다 버린 것인가 하는 점이다. 이것의 사실 여부를 떠나 적어도 지금 우리의 인식은 통일기와 삼국기의 글씨를 별개로 보고 있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삼국시대와 통일신라시대 글씨문화를 연속선상에서 파악하지 못하고 당풍의 일방적인 수용으로만 보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시각이 오해 내지 무지의 소치임은 고려시대 김생의 글씨미학만 제대로 보아도 알 수 있다. 그가 쓴 ‘태자사낭공대사비’(954)의 필적은 ‘임신서기석’과 같은 고신라의 고박한 힘을 토대로 왕희지의 운치와 당해의 정법을 하나로 녹여낸 결정인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우리나라 글씨문화의 원형질이자 토대로서 삼국시대 글씨미학은 어떤 시대보다 더 중요하게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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