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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1월 11일 토요일

[서예로 찾은 우리 미학](3) 명도전·오수전과 훈민정음

ㆍ고대 화폐에 새긴 한자의 조형미, 한글로 이어지다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310112016215&code=960202&s_code=ac176

이 땅에서 우리 말이 실현된 이래 언어의 역사는 그림에서 다시 한자와 한글로 맥락이 연결된다. 하지만 문자언어만 놓고 보면 갑골문, 종정문 같은 상형문자에서 소전(小篆·한자 서체의 하나로 진전(秦篆)이라고도 한다. 진의 시황제가 문자의 정리·통일을 위해 재상인 이사(李斯)에게 명하여 만들었다)에 이르기까지 1000여년의 공백이 생긴다. 이유는 고조선의 문자 시작을 명도전(明刀錢) 같은 고고유물이 등장한 기원전 400여년쯤으로 보기 때문이다.

문제는 이런 문자 전래 수용의 늦음보다 이에 대한 해석에 있다. 중국문자이기 때문에 한국서예에서 소홀히 취급하는 것은 약과다. 요즈음은 한자를 토대로 축적된 우리 문화를 중국의 아류나 후진 정도로 취급하는 분위기가 팽배하다. 이제 한글서예는 한국서예, 한자서예는 중국서예라고 할 판이다. 과연 그런가. 그렇다면 세계지존의 문자공화국임을 알려주는 ‘광개토대왕비명’ ‘무구정광대탑다라니경’ ‘김생체’ ‘직지’ ‘팔만대장경’ ‘조선왕조실록’ ‘추사체’는 물론 ‘훈민정음’까지 한국 독자의 글씨문화 성취는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이 자리에서 문자 이전에 문화라는 것이 무엇인지 다시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문화는 중심부에서 주변부로 퍼지는 것이 속성이고 생리다. 또 발생지에서 완성지로 흐른다. 지리적으로 대륙과 섬의 중간에 위치한 우리나라는 반도다. 대륙에서 보면 주변부이지만 발상지 문화를 수용하여 이 모두를 하나로 녹여내는 완성지다. 한반도는 문자·서예·인쇄·책 문화의 용광로라 할 만하다. 우리 문화의 특성은 비애도, 무기교의 기교도 아니고 요즈음 말로 하면 융복합의 결정이다. 

우리나라 근현대 서화사 연구의 아버지로 불리는 위창 오세창 선생(1864~1953)이 오수전, 반량전, 대포황천(大布黃千·왕망전의 일종)(왼쪽부터) 등을 탁본한 작품.

■ 제단에서 시장으로 

명도전(明刀錢)은 전국시대(기원전 403~221년) 연(燕)나라 화폐라고 하는 기존 입장에 맞서 고조선 화폐라는 반론이 학계 일부에서 제기돼 논란 중이다. 네이멍구·랴오닝 등 중국 동북부와 한반도 서북부지역 등 옛 고조선 강역에서 작게는 100개, 많게는 1만개 이상까지 출토되었다. 가히 명도전 경제권이라 할 만한데, 논란의 불씨는 연나라 화폐라면 왜 고조선에서 집중적으로 사용되었을까 하는 점이다. 문자 사용의 주체가 누구인가를 풀어내는 단서가 여기 있을 법도 하지만, 필자의 관심은 용불용설 입장의 문자다. 실용에 따라 나고 죽는 것이 문자다. 쓰는 사람이 임자라는 뜻이다. 그래서 한자는 중국만의 문자가 아니라 동아시아 한자문화권의 공통 문자인 것이다. 

당시 고조선은 국제적인 모피교역의 중심이었다. 이미 물물교환을 넘어 사유재산이 인정되는 화폐경제 시대로 접어든 것이다. 이것은 인지능력이나 사유체계가 지금 우리와 별반 차이가 없음을 보여준다. 글자의 생살여탈도 제단이 아니라 시장바닥에서 결정되는 때로 접어들었다. 세상의 중심도 신이 아니라 인간임을 문자가 보여준다. 

그 증거를 글자미학에서 찾으면 바로 ‘명(明)’자로 보이는 명문의 조형이다. 간단하기 그지없는 글자라도 가장 눈에 띄는 것은 글자 획의 굵기나 간격이 균일하다는 점이다. 비례 대칭 같은 균제미학이 어느 정도 완성단계임을 볼 수 있다. 이것은 당시 사람들의 변화된 미의식이 돈의 조형언어에 그대로 반영되어 있음을 보여준다. 더 나아가 평양, 서울, 강릉, 여수, 제주, 창원, 김해 등 한반도 전역에서 발굴되는 진(秦)의 반량전(半兩錢)이나 한(漢)의 오수전(五銖錢)·왕망전(王莽錢) 명문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된다.

왕망전의 여러 종류인 일도평오천(一刀平五千), 대포황천, 화천(貨泉) 등을 위창 선생이 방(倣:따라 쓰거나 그림)한 작품. ‘방’은 대상의 본질체득의 시작이자 궁극이다. | 예술의전당 소장 위창콜렉션

■ 비례와 대칭 

그림문자였던 갑골문·종정문 단계를 넘어 곡(曲)·직(直)의 필획 운용만으로도 글자가 되는 대전(大篆)도 모자라 대칭으로 필획을 줄 세우는 소전(小篆)에 이르기까지 1000여년에 걸친 글자의 격심한 변화 궤적을 생각해보라. 문자언어시대에 접어든 시간만 따져도 사람들의 생활이나 생각에 얼마나 큰 변화가 있었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그 정점은 진시황의 문자통일이다. 이것은 결국 인간의 정신이나 미의식까지 통일해낸 것이라는 점에서 500년 군웅할거 백가쟁명의 춘추전국시대를 종식시킨 것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우리는 입버릇처럼 한자의 서체 구분이나 발달 정도를 전·예·해·행·초라고 뭉뚱그린다. 하지만 전서 하나만 놓고 보아도 이미 문자언어의 생로병사를 다 거친 것과 같다. 갑골문 → 종정문 → 대전 → 소전의 궤적 자체가 하나의 조형 사이클로 완결된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붓글씨 미학의 중핵을 이루는 예서와 해서, 행·초서는 제2의 한자 인생이라고 볼 수 있다. 

■ 자방고전과 ‘열린’ 한글

이런 소전의 글자미학은 우리나라 한자문화의 시작 이상이다. 조형적으로 훈민정음(訓民正音) 정인지 서문의 ‘자방고전(字倣古篆)’의 모델도 바로 이것이다. 여전히 ‘글자는 옛날 전서를 모방했다’는 것을 국어학계는 받아들이기가 어렵다는 눈치다. 모든 것을 말 중심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그림 영역인 한글조형을 한자조형과 결부시키는 것 자체가 이해되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창제 당시 이미 완성된 문자인 한글의 점획은 고려의 선사탑비나 조선의 신도비 두전에서 보듯 너무나 흔했던 소전이다.

반량전·오수전·왕망전의 ‘半’ ‘兩’ ‘五’ ‘銖’ ‘扶’ ‘比’ 등과 한글 고체(古體)의 획이나 글자의 짜임새를 비교해 보면 필획의 균일함이나 글자의 짜임새가 모두 같은 맥락이다. 진시황제와 세종대왕이 역사공간에서는 이렇게 조우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한글은 한자와 같은 문자원리에서 나왔으되 그 이상의 성취라는 점이다. 점획, 결구, 장법까지도 이미 창제 때부터 미학적으로 전형이 완성된 글자일 뿐 아니라 표의와 표음이 자유자재로 섞이는 문자다. 한글 안에서는 정작 한글이 안 보이는 역설이 여기서 성립한다. 한글 조형의 건강한 미래는 다시 한자를 불러내는 데서 시작될 것이다. 

‘오직’ 한글이 아니라 ‘열린’ 한글이 왜 지금 절실한지도 여기에 있다. 이런 맥락에서 문자영상시대 미래문자인 한글의 내일을 이 땅에서 처음 문자의 시작을 알린 명도전·반량전·오수전에서 생각해보는 것은 어떨까. 해마다 어김없이 한글날은 왔지만 없는 집에 제삿날 돌아오는 듯한 기분이 드는 것은 오직 한글에 의한 한글을 위한 한글날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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