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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2월 6일 목요일

[김종철의 수하한화]과학자의 양심과 ‘국익’

후쿠시마 핵발전소 사고 이후, 탈핵운동가들의 초청으로 방한한 해외 전문가나 활동가들이 적지 않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깊은 인상을 남기고 돌아간 이는 1월 하순 서울에 와서 강연을 하고 TV방송 출연까지 했던 일본의 대표적인 반핵 과학자 고이데 히로아키 교수일 것이다. 

그는 <은폐된 핵의 진실>이나 <원자력의 거짓말> 등의 저자로 이미 국내에서도 어느 정도 알려졌지만, 막상 육성을 직접 듣게 된 사람들은 그의 거침없이 솔직하고 양심적인 발언 때문에 책만 볼 때와는 비교할 수 없는 큰 감명을 받았다. 예를 들어, “사고가 난 후쿠시마 원자로들의 현재 상태를 아무도 정확히 모르며, 그냥 물만 퍼붓고 있다”고 말하며, “일본 땅은 지금 대부분 방사능으로 오염되었다, 일본여행은 삼가는 것이 좋다”라든지 “일본산 수산물은 생산지와 출하지역이 다르게 표시될 경우가 많아서 안심하고 먹을 수 있는 게 아니다”라는 등, 자기 나라의 ‘국익’을 해치는 발언까지 그는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했다.

고이데 교수가 다녀 간 뒤, 탈핵운동에 관여하는 사람들이 모인 자리에서 “왜 한국에는 고이데와 같은 양심적인 ‘반골’ 과학자가 없는가”라고 묻는 젊은이가 있었다. 생각해보면, 오늘날 과학자의 세계, 특히 원자력 관련 학계나 전문가 그룹에서 고이데 교수는 매우 예외적인 존재이다.

오늘날 과학과 과학자의 문제를 생각할 때 가장 중요한 사실은 2차대전 중 핵무기 제조를 위해 수많은 과학자가 동원되었던 ‘맨해튼프로젝트’ 이후 현대과학이 사실상 국가와 자본의 논리에 봉사하는 ‘어용과학’으로 변질되어왔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오늘날 우리가 과학자들에게서 독립적인 사고와 행동을 기대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 되었다. 그 중에서도 원자력 관련 분야는 가장 심하다고 할 수 있다. 

실제로 핵발전 기술은, 핵무기 못지않게, 어떤 명분으로도 결코 정당화될 수 없는 기술이다. 그것은 현세대의 단기적인 이익을 위해 불가피하게 미래세대와 사회적 약자들의 희생을 요구하는 반인간적, 비윤리적 기술일 뿐만 아니라 경제적으로도 전혀 합리성이 없는 기술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원자력이 창궐해온 것은 오로지 국제원자력동맹이라고 명명할 수 있는 기득권 세력의 강고한 지배구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 지배구조를 유지하는 데에 불가결한 존재는 말할 것도 없이 과학자, 전문가들이다.

이처럼 현대적 과학이나 지식을 둘러싼 근본 조건을 고려한다면 오늘날 어디서나 어용학자, 어용지식인들이 넘쳐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하다. 표준국어대사전에 의하면 어용학자란 “권력자의 비호를 받고 그에게 아부하기 위하여 그의 정책을 찬양하거나 정당화하는 학자”이며, 일본의 <고지엔>은 어용학자를 “학문적 절조를 지키지 않고 권력에 영합·추수하는 학자”로 정의하고 있다. 

여기서 권력이라고 하는 것은 기본적으로 국가와 자본의 힘이다. 그리고 문제는 오늘날의 과학이 국가권력이나 금권의 비호 혹은 지원 없이는 거의 성립할 수 없다고 과학자들 자신이 느끼고 있다는 사실이다. 인간은 대개 나약한 존재이다. 따라서 과학자나 지식인이 어용학자가 되고, 어용지식인의 삶을 살아가는 것 자체를 덮어놓고 우리가 비난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어용학자와 어용지식인이 봉사하는 국가와 자본이 과학자와 지식인을 동원하여 노리는 것이 과연 무엇인가 하는 점이다.
지금은 고인이 되었지만, 유전자 구조를 밝히는 과정에서 매우 중요한 업적을 세운 생화학자 에르빈 샤르가프는, 현대과학이 자연탐구라는 명분 밑에서 실제로 인간으로서 상상도 할 수 없는 끔찍한 일을 저지르고 있는 상황에 절망하여 생애 후반기를 극도의 우울 속에서 지냈다. 그는 뉴욕에만 5만명의 노숙자가 방치되어 있는데 초대형 가속기를 위해 45억달러를 지출하는 국가정책이 시행되고 있는 현실을 개탄했다. 

그에 의하면 초대형 가속기란 “입자물리학자가 원자를 더 강력하게 원자의 첨단부에 부딪치게 함으로써 그 원자가 스톡홀름에 있는 노벨상 심사위원들에게 들릴 만큼 큰 소리가 나도록 하기 위한 기계”이다. 요컨대 순수한 자연탐구에 대한 열정 때문이 아니라 개인적 명예나 지위, 돈을 위해서 일하는 게 오늘의 과학자들이라는 것이다. 샤르가프가 보기에는, 과학자 수도 예전에 비해 비교가 안될 만큼 지나치게 많다. 따라서 경쟁적인 연구에 몰려서 쓸데없이 자연을 괴롭히고 몰아세우는 과학자들이 너무 많고, 그 때문에 세계는 장기적인 결과가 어떻게 될지도 모르는 수많은 ‘혁신적’ 기술의 도입으로 매우 위험한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

과학자들의 개인적인 동기에 관계없이, 자본가는 물론, 국가가 엄청난 돈을 ‘과학에 투자’하는 것은 요컨대 ‘국익’을 증대시키기 위해서이다. 이 때문에 어용학자는 자신의 진실한 동기를 은폐하고, 스스로 애국자라고 자신과 남들을 속이는 게 가능한 것이다. 이렇게 볼 때, ‘국익 관념’에 붙들려 있는 한, 과학자가 진실로 독립적이고 자주적인 존재가 된다는 것은 애초에 불가능하다고 할 수 있다.

왜 한국에는 고이데 같은 과학자가 없는지를 묻는 젊은이에게 나는 ‘선례’가 없기 때문이 아니겠느냐고 답했다. 평생 ‘조교’라는 최하위 직위를 면치 못할 것을 각오하고 핵공학자의 신분으로 반핵운동에 헌신해온 고이데라는 예외적 지식인은 ‘국익’이 아니라 ‘진리’를 위해 싸운 선인들의 모범 없이는 존재하기 어려웠을 것임이 분명하다. 그 모범적 선례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인물로 고이데 스스로 꼽는 이가 있다. 

‘아시오광독사건’ 피해자 구제를 위해서 일생을 걸었던 메이지시대의 저명한 반체제 지식인이자 정치가였던 다나카 쇼조이다. 다나카는 국가주의 논리가 압도하던 시절이었음에도 ‘국익’에 맞서서 풀뿌리 민중의 삶을 보호하고자 목숨을 걸고 외롭게 싸운 일본근대사의 대표적 의인이었다. 그는 “인간의 생명이나 국가의 생명은 일순간이다. 따라서 인간은 국가와 자신을 일체화할 게 아니라 영원의 생명을 가진 자연과 일체화된 생을 살아야 한다”고 갈파했다.

출처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402052107165&code=990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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