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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3월 3일 월요일

[서예로 찾은 우리 미학](16) 태종무열왕릉비와 전액

ㆍ당풍을 재해석한 통일신라의 기상 ‘용틀임’

우리 역사에서 7세기라는 전환시대는 여러 측면에서 21세기 우리 모습과 겹쳐진다. 당시 한반도에서는 백제와 고구려가 660년, 668년에 각각 멸망하고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였다. 이보다 앞서 당은 618년 수나라를 멸망시키고 중국 대륙을 통일했다. 일본은 710년 겐메이 천황이 나라로 천도한 이후 율령시대 최성기에 해당하는 중앙집권적 정치제도를 완성했다. 요컨대 동아시아 세계질서의 패러다임이 전면적으로 전환되는 과정에서 각국은 독자적인 문화 색채를 띠면서도 크게 하나의 흐름을 형성했다. 바로 ‘당법(唐法)’ ‘당양(唐樣)’이라는 당나라 스타일이다. 

중국은 한족의 남조와 북방민족의 북조라는 이질적인 문화가 수·당을 거치면서 거대한 용광로처럼 하나의 법이나 양식으로 통합되었다. 서(書)를 보더라도 왕희지 중심의 운치 넘치는 동진의 남첩(南帖)과 역동적인 북위 해서 중심의 북비(北碑)가 전형의 당법(唐法)으로 완성되었다. 수대에 처음 남북의 서풍이 융화된 해서가 나왔다면 당대에는 구양순·우세남·저수량 같은 대가들이 나와 해서의 규범을 완성시키면서 서예의 황금시대를 연 것이다. 통일신라는 기존 삼국의 서로 다른 문화를 토대로 이러한 당법을 재해석하여 우리 역사상 처음으로 사실상의 단일문화를 구축하였다. 

648년(진덕여왕 2년) ‘태종무열대왕릉비’의 주인공인 김춘추(602~661)가 왕세자와 같은 신분으로 당 태종과 대면하게 된다. 당시 국력이나 국제정세로 보아 신라가 나제동맹을 파기하고 고구려를 쳐서 삼국을 통일한다는 생각은 그 자체가 무리였다. 게다가 당 태종은 동아시아 권력의 정점이었다. 하지만 김춘추는 당군을 이 싸움에 끌어들여 난제 중의 난제를 기필코 해낼 심사였고, 결국 당 태종을 상대로 청병(請兵) 외교를 성공시켰다. 

‘태종무열왕릉비’(국보 제25호) 전액. 능비의 이수(용머리) 부분에 남아 있는 현침전 계통의 전서체 글씨다.

그 와중에 태종의 친필인 ‘온탕비’ ‘진사비’를 받고 국학에서 석전과 강론을 참관하는 문화외교까지 느긋하게 수행하였다. 당 태종은 본인이 명필임은 물론, 동진의 왕희지를 다시 불러냄으로써 당나라 이후 서예사 전개를 왕희지 재해석의 역사로 만든 사람이기도 하다. 왕희지 글씨를 너무 사랑한 나머지 ‘난정서’를 자신의 무덤까지 가져가게 함으로써 지금 진본이 전하지 않게 만든 일화도 남겼다. 당시 받았던 ‘온탕비’ ‘진사비’로 집자한 통일신라 말기 원주의 ‘흥법사진공대사탑비’(940)는 중국에도 없는 유일한 당 태종의 글씨로 행초서의 호방한 서풍이 압권이다. 

661년 건립된 ‘태종무열왕릉비’(국보 25호)는 통일시대를 열었던 김춘추의 당당한 외교와 세계 예술에 열려 있던 신라인의 문화적 자신감을 최고 품격의 조각과 글씨로 대변하고 있다. 비석 받침의 거북이는 당장에라도 엉금엉금 기어 나올 듯하고 비석 머리에 뒤엉킨 여섯 마리 용은 여의주를 물고 승천이라도 할 기세다. 능숙한 기법으로 쪼은 거북이의 발이나 등, 용틀임의 자태는 사실의 극치이자 진취적인 기운을 한껏 뿜어낸다. 

이후 통일신라의 석비는 모두 이처럼 거북이 받침돌에다 머릿돌은 용의 모습이다. 당나라 풍을 재해석한 태종무열왕릉비가 이런 양식의 첫 사례가 됐다. 여기서 대비되는 것이 같은 시기에 세워진 ‘당유인원기공비’다. 660년 나당연합군의 백제 공략에서 당의 장수 유인원의 공적을 기록한 당비(唐碑)로 귀부(龜趺·거북이 발)는 없으나 이수( 首·용 머리)의 원규형반룡(圓圭形蟠龍·둥근 모서리 형태로 휘감은 용)은 당에서 직수입된 석비의 전형을 보여준다. 새로운 문화코드로 당풍이 유행했음을 여기서도 짐작할 수 있다. 

‘太宗茂(烈)大王之(碑)’라고 8자 2행이 양각으로 새겨진 두전(頭篆)의 글씨 또한 삼국시대 이전에도 볼 수 없었던 독특한 서체와 서풍을 보여준다. 같은 전서라도 통일신라와 고려의 선사탑비, 조선 선비의 신도비 두전에서 흔히 보이는 소전(小篆)은 다르다. 균일한 필획의 굵기에다 좌우 대칭의 글자구조는 같다고 하더라도 송곳처럼 필획의 끝이 뾰족하고 탱탱한 양태는 국내에서는 이 비석이 처음이다. 

마치 통일신라 개창기 힘의 실체가 서체 조형으로 대변된 모습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름하여 현침전(懸針篆)인데 무열왕의 둘째아들인 김인문(629~694)의 글씨로 <대동금석서>에 전한다. 그 또한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도합 22년간 당에 파견되어 나당연합군을 조직, 소정방과 연합하여 백제·고구려를 멸망시켰다. 

하지만 비신의 파손으로 본문 글씨는 온데간데 없다. 같은 시대에 세워진 ‘문무대왕비’(681)나 ‘김인문묘비’(7세기 말)의 본문 글씨로 유추해보면 굳세고도 단아한 구양순체의 해서풍임은 어렵지 않게 짐작이 간다. 이제 글씨도 고박한 고신라 서풍을 완전히 탈피하여 해서의 규범으로 제시된 당풍을 주체적으로 소화해내면서 한국서예의 새로운 시대를 개척한 것이다. 역으로 말해 중국은 물론 한국과 일본에서도 이 시기를 기점으로 더 이상 서체의 분화는 없어진 것이다. 인간이 도달하고자 한 미의 절대적인 질서가 7세기의 글씨문화를 통해 구현되었으며, 이후 중국 청대나 조선 말기에 해당하는 18, 19세기까지도 왕법과 당해의 재해석의 역사가 전개된다. 

이런 맥락에서 절대미의 화신으로 당법을 수용하고 재해석해낸 통일신라의 문화력과 태도는 전통과 서구를 하나로 융·복합해야 하는 지금 우리의 상황과도 무관하지 않은 것이다.

출처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401172044095&code=960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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