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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3월 3일 월요일

[서예로 찾은 우리 미학](19) 문무대왕릉비명

ㆍ바둑판 같은 괘선에 정해서 ‘7세기 글씨의 교과서’

삼국통일의 주역인 신라 30대 문무대왕과 얽힌 역사기록은 우리의 통념을 깨는 사실들이 많이 있다. 무덤을 땅속이 아니라 바닷속에 만들어 달라는 것이 일례다. <삼국사기>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보인다.

“가을 7월1일, 임금이 돌아가셨다. 시호를 문무(文武)라 하고 여러 신하들이 유언에 따라 동해 어귀의 큰 바위에 장사 지냈다. 민간에서 전하기를 ‘임금이 화(化)하여 용이 되었다’라 하고, 또 그 바위를 가리켜 대왕석이라 불렀다(秋七月一日 王薨 諡曰文武 群臣以遺言葬東海中大石上 俗傳王化爲龍 仍指其石爲大王石).”

역사라는 잣대를 들이대더라도 이미 동해라는 바다이름은 문무대왕 때부터 확인된다. 죽으면서까지 동해의 용이 되어 왜구를 무찌르고 바다를 지키겠다고 한 데서 동해를 두고 벌어지는 오늘의 한·일관계를 예견하고 있는 듯하다.

최대 높이 52㎝, 너비 64㎝, 두께 24㎝. 682년(신문왕2) 건립되었다. 비가 깨지고 마멸되어 전체 내용을 파악하기 어렵다. 대체로 앞면에는 신라 왕실 김씨의 내력, 태종무열왕과 문무왕의 업적, 신라의 백제 평정 사실이, 뒷면에는 문무왕의 죽음과 유언, 문무왕에 대한 찬미의 내용이 기록되었다.

미국 버지니아주에서 시작된 ‘동해 병기’ 운동이 미국 전역으로 번져가고 있다는 소식이 연일 주요 뉴스다. 뉴욕에서 동해병기법안이 발의된 가운데 뉴저지주는 물론 캘리포니아 등 네댓 개 주도 이 대열에 동참할 뜻을 밝혔다. 뉴욕타임스도 동해표기 문제를 본격 거론하기 시작했다고 국내 언론들이 전하고 있다.

재미나는 점은 이 신문에서 “한국인들은 동해가 수세기 동안 사용됐으며 일본해는 일제식민지 역사 이후 퍼진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일본은 19세기 초부터 일본해가 쓰였다고 말한다”고 양쪽의 입장을 소개하는 대목이다.

식민정책의 결과가 아니라 역사적 근거라고 일본이 들이대는 것이 고작 19세기 초라는 사실이 실소를 금할 수 없게 만든다. 또 같은 기사에서 에이 고이치 일본 총영사관 대변인이 “일본해는 국제적으로 공인된 유일한 명칭이다. 과거의 식민지 역사와는 전혀 관련이 없다”고 주장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동해바다 속에 용이 되어 바다를 지키고 있는 문무대왕이 들으면 기가 찰 노릇이다. <삼국사기>가 전하는 왕의 유언을 보면 더욱 그렇다. “과인은 어지러운 운을 타고 태어나 전쟁의 시대를 만났다. 서쪽을 정벌하고 북쪽을 토벌하여 영토를 평정하였고, 배반하는 자는 정벌하고 협조하는 무리와는 손을 잡아 마침내 멀고 가까운 곳을 모두 평안히 하였다(寡人運屬紛 時當爭戰 西征北討 克定疆封 伐叛招 聿寧遐邇)”고 하는 지점에서는 당시 전쟁시대를 맞아 당나라와 왜의 틈바구니 속에서 삼국을 통일해내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짐작할 수 있다.

하지만 미국에서 ‘일본해(SEA OF JAPAN)’에 대항해 ‘동해(EAST SEA)’를 지켜내는 한인동포들의 노력에도 불구, 정작 본국에서는 강 건너 불구경하듯 아무런 행동을 할 수 없으니 이것 또한 딱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새삼 느슨해진 우리의 역사의식을 다시 한번 가다듬을 때임을 다짐해볼 뿐이다.

호국의 화신인 문무대왕의 능비는 경주 사천왕사에 682년에 세운 이래 1100여년 동안 역사에서 실종되었다가 1796년(정조20년)에야 우연히 발견되었다. 조선시대 경주 부윤을 지낸 홍양호(1724~1802)의 문집 <이계집(耳溪集)>에는 밭을 갈다가 비석 하단부와 우측 상단부 조각이 발견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 비석탁본은 청나라 금석학자 유희해(1793~1853)에게 전해져 그의 저작인 <해동금석원(海東金石苑)>에 비문 내용이 실렸다. 이후 비편의 실물들은 소재가 묘연했으나 비석의 하단 부분이 1961년 경주시 동부동 주택에서 그 가운데 1개가 다시 발견되었다. 지금은 국립경주박물관에서 전시하고 있다.

이미 발견 당시 많이 훼손되었지만 바둑판 같은 괘선에다 정해서로 한 자 한 자 박혀 있다. 글자는 적갈색 화성암의 앞뒷면에 가로 3.2㎝, 세로 3.3㎝의 크기다. 비문을 국학의 소경(차관)인 김○○가 왕명을 받들어 지었던 만큼 글씨는 당대 명필인 대사 한눌유가 구양순체의 해서로 작정을 하고 썼다. 정자의 모범으로 글씨의 교과서 중 교과서인 이 서체가 7세기 말 동아시아 세계의 표준서체로 거의 시차 없이 통일신라에 전해져 소화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비문에는 또 다른 미스터리가 있다. 김씨의 시조를 ‘성한왕(星漢王)’이라 하고 문무왕의 15대조라고 함으로써 당시 신라 왕실 계보와 조상에 대한 인식을 살필 수 있어 좋다.

그래서 이 비를 능비나 묘비로 보기도 하지만 <삼국사기>와 같은 역사기록에는 문무왕의 유언에 따라 무덤을 쓰지 않고 화장하여 그 재를 동해에 뿌렸다는 사실과 어긋난다. 더욱 주목할 것은 죽어서까지 대왕암의 해중 능침(陵寢)에서 동해의 파도에 뒹굴며 바다를 지키고 있는 문무대왕의 뿌리다. 문무대왕릉비에는 “그 신령스러운 근원은 멀리서부터 내려와 화관지후(火官之后)에 창성한 터전을 이었고, 높이 세워져 바야흐로 융성하니, 이로부터 ○지(○枝)가 영이(英異)함을 담아낼 수 있었다. 투후제천지윤(侯祭天之胤)이 7대를 전하여… 하였다. 15대조 성한왕(星漢王)은 그 바탕이 하늘에서 내리고, 그 영(靈)이 선악(仙岳)에서 나와…”라는 대목이 있다.

‘제천지윤’이란 천신족으로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종족 정도로 볼 수 있는데 투후(侯)는 바로 한나라 무제가 흉노와 싸울 때 포로가 되었던 흉노왕 휴도의 아들인 김일제를 가리킨다. 요컨대 이 비문은 문무왕의 뿌리를 흉노족으로 볼 수 있기도 한 것인데 역사는 알아가면 갈수록 미궁에 빠지는 듯하다.

출처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402142109165&code=960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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