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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3월 3일 월요일

[서예로 찾은 우리 미학](21) 진감선사대공탑비

ㆍ굽은 듯 탄력적 필획에 담긴 해서의 전형

지난해 6월 박근혜 대통령이 중국을 방문했을 때 시진핑 주석은 뜻밖에도 고운 최치원(857∼?)의 ‘범해(泛海)’라는 시 한 구절을 읊었다. ‘掛席浮滄海(돛달아 바다에 배 띄우니)/ 長風萬里通(긴 바람 만리를 통하네).’ 

새로운 한·중관계를 천년 전 인연으로 불러낸 것이다. ‘창해’나 ‘장풍만리’ 등 당과 신라를 넘나드는 고운의 호연지기가 시 주석의 뜻과 오버랩되면서 중국과 한국의 우의를 바라는 마음이 읽혀졌다. 

고운이 남긴 시문은 <계원필경> <사산비명>을 포함해 <삼국사기>에만도 문집 30권이 전해질 만큼 방대하다. 이 중 당 유학 시절인 25세(881년) 때 지은 ‘토황소격문(討黃巢檄文)’은 적장 황소가 혼비백산했다는 일화가 전해올 정도로 뛰어난 문명을 자랑한다. 특히 잘 알려진 것은 ‘추야우중(秋夜雨中)’이다. 한 인간의 외롭고 괴로운 심사를 함축적으로 보여주는 자전적 시로, 꿈과 현실의 불화 때문에 방황하는 작자의 심회가 눈에 밟힌다. 고운은 신라로 금의환향해 아찬 벼슬에 올랐지만 진성여왕의 난정으로 국운이 사정없이 기울자 개혁책 ‘시무십여조(時務十餘條)’를 올리고는 주유천하하다가 가야산에서 신선이 되었다고 전해진다.

진감선사대공탑비 두전. 지리산 쌍계사에 있는 이 비는 국보 47호로, 통일신라 고승 혜소(774∼850)의 행적을 담고 있다. 고운의 문명(文名)을 대표하는 걸작이다.

시인이자 문장가, 경세가였던 고운의 사상은 유교, 불교, 도교가 회통하면서도 유교 입장에서 양교를 극복할 수 있는 이론적 근거를 한국 유학사에서 처음 제기했다는 데 의미가 있다. 이런 삼교회통의 입장은 경남 하동군 쌍계사 ‘진감선사대공탑비(眞鑑禪師大空塔碑)’(이하 진감선사비) 명문에서 확인할 수 있다. “석가여래와 주나라 공자는 출발은 비록 다르나 귀착한 곳은 하나이다. 지극한 이치를 체득함에 있어 양자를 겸응하지 못하는 것은 모든 물이 두 가지를 다 받아들일 수 없기 때문이다.(謂如來之與周孔 發致雖殊 所歸一揆 體極不兼應者 物不能兼受故也)”

퇴계 이황 같은 조선의 도학자들은 ‘최치원은 불교에 아첨한 사람인데 외람되게 문묘에 배향하여 제사를 지내고 있다(崔孤雲以全身□佛之人 濫厠祀禮)’고 할 정도로 비판했다. 하지만 고운은 유학을 토대로 신라 고유사상을 새롭게 인식해 유·불·도를 하나로 통합해냈다. <삼국사기>에 전해지는 최치원의 ‘난랑비서(鸞郞碑序)’는 삼교를 회통시키는 풍류도를 우리 사상의 고유전통으로 처음 제시하고 있다. “나라에 현묘한 도가 있으니 풍류라 한다. 그 가르침을 베푼 근원은 선사에 상세히 실려 있는데, 실로 삼교를 포함하여 중생을 교화한다. 들어와 집에서 효도하고 나가서 나라에 충성하는 것은 공자의 가르침이다. 무위로 일을 처리하고 말없이 가르침을 행하는 것은 노자의 뜻이다. 악한 일은 하지 않고 선을 받들어 행하는 것은 부처의 가르침이다.(國有玄妙之道曰風流.設敎之源備詳仙史 實乃包含三敎 接化群生. 且如入則孝於家 出則忠於國 魯司寇之旨也. 處無爲之事 行不言之敎 周柱史之宗也. 諸惡莫作 諸善奉行 竺乾太子之化也.)” 

이 글에서 고운이 말하는 풍류도가 신라의 화랑도임은 두말할 필요가 없는데 그 기원은 고대 신앙과 사상으로 이어진다. 이처럼 고유사상에 유·불·도 등 외래사상이 녹아든 풍류도를 고운은 ‘현묘지도(玄妙之道)’라고 정의했다. 그는 당시 중국 중심의 세계질서 속에서도 신라를 ‘해 뜨는 나라’라는 해동의 중심체로 인식했다. 

이러한 사상과 미감을 조형언어로 보여주는 것이 고운의 글씨이며 그 대표작이 바로 진감선사비다. 당에서 돌아온 지 3년 만인 31세(887년) 때 문장을 짓고 쓴 유일한 비문이다. 본문 글씨는 구양순, 저수량은 물론 보는 이에 따라 안진경까지 떠올릴 만큼 당해의 전형적인 필법이 녹아 있다. 국운이 기울고 있었지만 이것을 바로잡을 기세라고나 할까 통일기의 미감이 긴장감 있게 붓끝에서 마감되고 있는 것이다. 굽은 듯하면서도 한없이 곧고 낭창낭창한 탄력적인 필획에다 해서의 전형답게 키가 크고 균제미가 뛰어난 짜임새다.

두전(頭篆·비석 몸체의 머리 부분에 돌려가며 쓴 글씨)에서는 고운의 학식은 물론 정신의 폭과 깊이가 짐작된다. ‘□海東故眞鑑禪師碑(□해동고진감선사비)’라고 쓴 글자는 당시 당에서 유행한 균일한 점획과 대칭구도의 이양빙체 소전(小篆)도 아니고 7세기 말 태종무열왕비 두전과도 다르다. 연원을 따지자면 멀리 위나라 정시연간(240~248)의 ‘삼체석경(三體石經)’에 보이는 고문이나 ‘한간(漢簡)’은 물론 오나라의 ‘천발신참비(天發神讖碑)’, 북위의 ‘휘복사비(暉福寺碑)’의 필법과 자형에까지 거슬러간다. 그러면서도 자신만의 독자적인 시각으로 재해석해내고 있다.

이런 글씨의 맥락에서 보더라도 12세부터 16년간의 당나라 유학으로 글로벌 인재가 된 고운을 사대나 모화로 보는 것은 그의 철저한 동인(東人)의식을 간과한 게 아닌가 생각된다. 당시처럼 지금 동아시아도 미국과 중국 중심으로 세계질서가 재편되면서 대전환의 시대를 맞고 있다. 우리에게 민족자존과 새로운 문명 개척이라는 과제가 동시에 던져진 것이다. 이것이 고운을 다시 봐야 하는 이유다.

출처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402282043185&code=960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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