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이지

2014년 5월 7일 수요일

정치의 실패, 아이들의 죽음/김종철

6일 오전 경기 안산시 단원구 초지동 ‘세월호 희생자 정부 합동 분향소’를 찾은 시민들이 헌화하는 동안 분향소 들머리 나무에 묶인 노란 리본이 바람에 흔들리고 있다. 안산/이정아 기자 leej@hani.co.kr

세월호 침몰 참사
김종철 녹색평론 발행인 특별기고

가만히 앉아 있자니 너무도 심란해서 비 오는 일요일(4월27일) 오후 안산을 다녀왔다. 두어 시간을 기다려 임시 분향소에 들어서니 아이들의 앳된 얼굴이 담긴 사진틀들이 흰 꽃다발들에 빼곡히 둘러싸인 채 체육관 한쪽 벽면 전체를 채우고 있었다. 참으로 그로테스크한 풍경이다. 저 순진무구한 아이들의 사진이 왜 저런 데, 저렇게 걸려 있어야 하는가. 지금 부모들의 마음이 어떨까. 자식이 감기에 걸려 콜록콜록 기침 소리만 내도 쪼그라드는 게 부모의 마음이다. 그런데 이게 뭔가. 아무 죄 없는 생때같은 자식들을 잃어버린 어머니, 아버지들은 이제 어떻게 살아가란 말인가. 그리고 아이들을 가르쳐온 선생님들은 어떻게 이 터무니없는 비극을 견뎌내란 말인가. 대체 이 상황은 왜, 어떻게 만들어졌는가. 분향소에 잠시 머무는 동안에도 나는 자신도 모르게 치밀어 오르는 분노의 감정, 그리고 형언할 수 없는 슬픔을 억제할 수가 없었다.
말할 필요도 없지만, 이번 여객선 침몰과 구조 실패에 의한 대량 몰살 사태는 인간 세상에 늘 있게 마련인 어쩔 수 없는 숙명적인 재난이 아니다. 우리가 지금 모두 비통한 심정을 가누지 못하는 것은 무엇보다도 이번 사태가 충분히 예견된 일이었다는 사실 때문이다. 외국에서 장기간 사용하던 노후 선박의 도입, 안전성을 무시한 구조변경, 일상적으로 되풀이된 과적운항, 항해요원의 저질화를 불가피하게 하는 극심한 저임금, 비정규직화 구조 등등, 처음부터 끝까지 어리석은 탐욕으로 일관한 선주와 경영자는 설마 이런 날이 오리라는 것을 몰랐을까. 그리고 하루 이틀도 아니고 여러 해에 걸쳐 노골적인 탈법·불법 행위가 바로 코앞에서 자행되고 있는데도 그것을 방관 내지 방조해온 관계 공무원들은 설마 그들의 직무유기 행위가 어떤 결과를 초래할지 정말 몰랐을까.
그러나 결국 근본문제는 정부의 무능과 무책임한 자세이다. 여객선 침몰에 대해서도 정부는 감독 불찰이라는 큰 책임을 져야 하지만, 참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것은 단 한 명의 생존자도 건져내지 못한 극단적인 무능이다. 이것은 어떠한 기술적 이유로도 변호될 수 없는 문제이며, 단순히 공무원의 근무기율에 관한 문제도 아니다. 나는 이 문제는 근원적으로 이 나라 통치체계 혹은 권력 상층부를 차지하고 있는 소위 지도급 인물들의 자질 문제로 파악하지 않으면 안 될 문제라고 생각한다.
이번에도 그들의 자질은 유감없이 노출되었다. 예를 들어, 대통령은 구조 작업이 시작된 초기에 현장 상황과는 어울리지 않는 뜬금없는 발언으로 많은 시민들의 빈축을 샀고, 어떤 고위관리는 절망과 비통에 빠져 있는 실종자 가족들 앞에서 자신의 상급자를 위한 ‘기념사진 촬영’을 운위하는 몰상식을 드러냈다. 가장 어이없는 것은 그곳을 방문한 한 국무위원이 실종자 가족들 앞에서 무심히 라면을 먹고 있는 장면이었다. 그것은 다른 사람도 아닌, 이 나라의 교육과 윤리와 도덕에 관계하는 주무 관청, 즉 교육부의 수장이 보여준 처신이었다. 더욱이 이 몰상식한 행태를 변호한답시고 청와대 대변인이라는 이가 “계란도 안 들어간 라면” 운운했을 때, 그것은 현재 이 나라 상층부 권력자들의 정신상태가 어떠한 수준인지를 단적으로 드러낸 발언이었다.
텔레비전 화면에 비치는
청와대의 국무회의라는 것을 보면
늘 국무위원들은 초등학생처럼
얌전한 자세로
누군가의 ‘말씀’을
열심히 받아쓰고 있다
이 기이한 ‘회의’ 장면은
통치시스템에 만연한
사고력 마비 현상이
어디에서 오는지를
설명해준다

우리는 국회에서 열리는 인사청문회 때마다 고위직에 내정된 인사들이 공직자로서 과연 합당한 도덕성을 갖추고 있는지 심히 의심스러운 경우를 숱하게 보아왔다. 그러나 그때마다 권력층과 어용언론들이 비판적인 여론을 억누르고 전개하는 상투적인 논리가 있다. 즉, 비록 일부 윤리적인 흠결이 있을지라도 국가운영에 없어서는 안 될 탁월한 능력과 전문성을 갖춘 인재들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그 인재들이 지금 이 긴박한 순간에 보여주는 이 기막힌 무능과 어이없는 작태들은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유감스럽게도 벌써 해외의 언론은 세월호 침몰 참사에 관련하여 한국이라는 나라가 얼마나 부실한 나라인지, 얼마나 상식 이하의 나라인지 그 실상을 간파한 것으로 보인다. <월스트리트 저널>은 보수 언론인데도(혹은 그렇기 때문에) 한국의 대통령이 침몰선에서 승객을 버려두고 탈출한 선장을 ‘살인자’와 같다고 공개적으로 비난한 것은 사법권에 대한 침해의 소지가 있는 발언이라고 날카롭게 지적했고, <가디언>은 이와 같은 해난 사고에서 이토록 무능을 드러낸 것은 ‘서방 세계라면 정부 수반의 지위’가 흔들릴 수 있는 문제라고 지적했다. 요컨대, 외국 언론의 이러한 논평의 밑바닥에는 오늘날 한국이라는 나라가 경제발전에도 불구하고 정신적·문화적으로는 매우 후진적 사회라고 보는 다분히 경멸적인 시선이 깔려 있다고 할 수 있다.
나는 국가주의자도 아니고 특별한 애국자도 아니지만, 내 나라가 다른 나라 사람들한테서 존경까지는 받지 못하더라도 업신여김을 당하는 나라가 되지 않기를 늘 바란다. 그러나 요즘 외국의 언론을 눈여겨보면서 나는 자주 심한 수치감에 사로잡힌다. 그중에서도 압권은 <비비시>(BBC) 방송이 내보낸 실로 우스꽝스러운 장면과 그에 관한 논평이었다. 비비시는 절망에 빠진 실종자 가족들이 대통령에게 항의하기 위해서 ‘서울에서 500킬로미터 떨어진’ 섬에서 도보 행진을 시작하자마자 100명도 넘는 경찰병력이 가로막고 나서는 장면을 보여주면서 ‘이해할 수 없는 장면’이라는 기자의 설명을 곁들였다. 국가에도 개인으로 치면 인격이나 품위 같은 게 없다고 할 수는 없다. 그러므로 개인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국가가 대외관계에서 정당한 대우를 받고 그 바탕 위에서 일정한 외교력도 발휘하려면, 최소한 국제적으로 보편화된 상식이 통하는 나라로 먼저 인정받아야 한다.
이 나라에서는 언제쯤 그러한 상식이 통할 수 있을까? 아니, 그런 날이 오기는 할까? 텔레비전 화면에 비치는 청와대의 국무회의라는 것을 보면, 늘 국무위원들은 초등학생처럼 얌전한 자세로 누군가의 ‘말씀’을 열심히 받아쓰고 있다. 이 기이한 ‘회의’ 장면은 지금 이 나라의 통치시스템에 만연한 사고력 마비 현상이 어디에서 오는지를 설명해준다. 정말로 대통령의 말이 그토록 거룩하다면 그냥 녹음을 하면 될 게 아닌가. 하기는 대통령이라는 이는 자신이 단지 최고위 선출직 공무원일 뿐이라는 신분을 망각하고, 언제나 이 나라의 독존적인 최고 현자처럼 행동하고 있는 게 오늘의 한국이다.
다키이 가즈히로라는 학자가 쓴 <이토 히로부미 평전>을 보면, 흥미로운 이야기가 하나 나온다. 1906년 어느날 유명한 <무사도>의 저자 니토베 이나조가 서울로 와서 당시 조선의 실질적인 지배자였던 통감 이토 히로부미를 만났다. 니토베는 “조선인들만으로 ‘문명화’가 가능하겠느냐”고 하면서 일본인들이 대거 조선 땅으로 이민해야 할 필요성을 말했다. 그러자 이토는 “그건 모르는 소리”라며, 조선의 역사를 보면 조선민족이 결코 열등한 민족이 아니고, 오늘날 이렇게 된 것은 오로지 정치가 잘못된 탓이라고 대답했다.
녹색평론 발행인
그러니까 100년 전이나 지금이나 핵심적인 문제는 같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나라 정치의 주역들이 자신들의 책임을 통절히 자각하고, 개과천선할 가능성은 있는가? 물론 단 1퍼센트도 없다. 많은 아이들이 물에 잠겨 있는 동안은 잠시 엎드려 있겠지만, 곧 그들은 다시 그들의 오래된 습성으로 되돌아갈 것이다. 그리하여 또다시 우리는 그들의 뿌리 깊은 무지와 교만, 무교양과 무례함이 빚어내는 거짓과 위선의 정치에 치를 떨며 한없는 무력감에 시달리게 될 것이다.
때때로 절망적인 기분 속에서 나는 내가 좋아하는 젊은이들에게 이민을 권하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예를 들어, 대통령 관저 대신에 작은 농가에서 기거하며 손수 요리와 청소를 하고, 가난한 국민 다수와 같은 수준의 생활을 고집하는 철저한 공화주의자 호세 무히카 대통령이 있는 우루과이 같은 나라로 말이다.

출처 http://www.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635819.html

댓글 없음: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