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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5월 7일 수요일

‘평범한 악’이 대한민국을 침몰 시켰다

윤리적 책임과 인간적 사회
세월호 참사 특별기고 / 김우창 교수

세월호 참사는 국가란 무엇인가, 우리는 무엇을 향해 달려왔는가 같은 근본적 질문을 한국 사회에 던졌다. 우리 시대 지성들의 특별기고를 잇달아 싣는다.
세월호가 침몰하고 2주도 더 지난 지금, 침몰로 희생된 승객의 가족들은 이제 가냘픈 희망이나마 가지기 어려운 것으로 보인다. 이제 남은 일은 시신을 거두어서 삶과 죽음을 확인하고 적절한 장례를 치르는 일일 것이다. 예로부터의 장례는 죽음의 절망감을 제례의 엄숙함으로써 다스리는 절차이다. 장례에는 물론 가족 이외의 사람들도 참여하여, 가족의 고통에 경의를 표한다. 이 엄청난 비극의 경과와 원인을 돌이켜 생각해보는 것도 비극을 마감하는 절차의 일부일 것이다. 그것은 앞으로의 삶을 위해서도 필요한 일이다.
돌이켜 생각하는 일에, 책임의 문제가 첫 과제가 되는 것은 당연하다. 가장 직접적인 책임은 선장과 선원에게 있다고 할 터인데, 보도에 따르면, 선장과 선원들은 승객들의 안전은 염두에도 두지 않고 침몰하는 배로부터 맨 먼저 탈출하였다. 승객들에게 배 안에 그대로 머물라는 방송을 계속하여, 빠져나올 준비도 할 수 없게 하였다는 것은 믿기도 어려운 일이다. 사고 시의 조타수도 그 시점의 임무에 적절한 임원이 아니었다고 한다. 책임은 이에 더하여 구조를 서둘렀어야 할 관계 정부 부처들, 선박 운영을 지켜보고 있었어야 할 선박 회사의 관계 부서로 돌아간다. 보도된바, 화물 과적, 적재 화물의 결박 미비 등에 관계된 책임도 가벼울 수 없다.
이준석 선장(원 안)이 세월호가 침몰 중이던 4월16일 오전 속옷 차림으로 탈출하고 있다. 서해지방해양경찰청 제공
이 ‘평범한 악’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범위를 더 넓혀서 선박 개조가 적절하였던가에 대하여서도 생각을 해보아야 할 것이고, 이러한 모든 일을 통괄하는 해운회사의 운영체제, 그리고 감독을 맡은 정부 관계부처의 움직임도 검토의 대상이 될 것이다.
이번의 사고에서 사람들의 분노는 관계 부서들의 일 처리 잘못에 못지않게, 그 잘못의 큰 부분이 도덕적 해이에 기인하는 것으로 보인다는 데에 관계된다. 기술 정보, 그것을 현실에 옮기는 조직, 항로의 여러 조건에 대한 정보-이러한 점들에서 준비가 적절했던가가 검토의 대상이 될 것이다. 그러나 기술, 정보, 안전 운행 규칙 그리고 그것을 검사하고 감독하는 조직들은 일반적 관점에서는 상당한 수준에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런 점들은 위키백과에 나와 있는 세월호 침몰에 대한 항목이 잘 종합하고 있다.) 그럼에도 각 부분에서의 정보와 조직이 하나로 종합되어 현실상황에 투입되었다고 할 수는 없다. 여러 관계 기구들 특히 정부 기구들이 긴급 사태에 임하여 하나의 통수(統帥)계통 속에서 신속하게 함께 움직이지 못한 것이 문제였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준비가 실천으로 옮겨지지 못한 것은 바로 윤리적 의식의 결여 때문이라는 느낌이 틀린 것은 아니다. 지난 2월의 경주 마우나리조트 체육관 붕괴 사고는, 지붕의 패널을 선정하고 볼트 하나를 박는 것과 같은 작은 일에도 성실한 윤리의식이 따라야 한다는 것을 생각하게 했다.
그런데 이번에 이러한 의식의 결여는 담당 선원, 기업, 감독관청의 문제만은 아니다. 사람들의 분노가 큰 것은 이번의 사고에서 볼 수 있는 윤리성의 부재가 사회의 전반에 퍼져 있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이것은 사회생활의 일상에서 느껴지는 것이다. 비윤리성은, 무의식이나 잠재의식 속에서일망정, 자기 안에서도 발견되는 것이다. 어디에서 발견되든지 간에, 비윤리 인자(因子)는 인생과 세계에 대한 신뢰를 무너지게 한다. 
세월호 사고에 대한 국민의 분노는
선장·기업·정부의 대처가 보여준
도덕적 해이를 절감했기 때문이다

개인의 윤리는 현실에 한정돼있어
사회가 윤리적 성격을 갖춰야만
개인의 윤리의식을 기대할 수 있다

선장이 수백명의 승객을 버려둔채
부하와 함께 먼저 탈출한 것을 통해
선장의 윤리의식이 가까운 사람에만
작용됐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멀고 가까움을 따지지 않고
온 국민들이 보여준 비탄과 공감은
이성적 승화의 과정을 거친 뒤
사회의 지속적 윤리의식이 된다 

이번 사고에서 책임을 지지 않을 수 없는 세월호 선장이 일상적으로는 평범한 사람이라는 인상을 주는 사람이었다는 사실이 보도되었다. 유대인 학살의 나치 범죄에 협력했던 독일군 장교 아이히만 재판을 지켜본 정치철학자 아렌트가 사용하여 유명하게 된 말에 ‘악(惡)의 평범성’이라는 것이 있다. 이번 사건에 대한 어떤 논평에 이 말이 쓰이는 것을 본다. 세월호 선장이 악을 행한 사람이라면, 그 악이 사회의 도처에서 일상적으로 부딪치는 현상이라는 뜻에서 이 표현을 빌려 오는 것일 것이다. 그렇다면 궁극적인 대책은 사회 전체의 윤리를 확실히 하여, 이 평범한 또는 편재하는 악을 극복하는 것이다. 물론 이것이 구호를 외치는 것으로 이루어질 수 있는 일은 아니다. 삶의 태도로서의 윤리 또는 비윤리는 삶의 조건들에서 저절로 형성된다. 누구나 알고 있듯이, 부실 공사, 부실 운영의 근본은 돈에 있다. 돈이 부족하다거나 절약하자는 데에서 문제가 생길 수도 있지만, 일반적으로 말하여, 문제는 투자에 대하여 최대한의 이득을 수단을 다하여 거두어들이려는 데에서 일어난다. 이 원리는 자본주의 기업의 기본원리이다. 그것은 그것대로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문제는 그것이 사실적 필요나 윤리적 의무를 최소화하거나 또는 그것을 묵살하는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는 것이다. 정부와 관계 기구의 감독은 기업으로 하여금 윤리 기준을 준수할 수 있게 하자는 것이다. 윤리를 기업 운영 원리로 내면화하자는 ‘사회 기업’이라는 개념은 기업의 비윤리적 경향에 대한 대증요법으로 제안된 것이다. 그러나 윤리의 뿌리는 개인의 의식과 행동에 있다. 주어진 작업을 수행하는 것은 결국 개인이다. 그리고 개인의 인간으로서의 위엄도 윤리적 행동에서 얻어진다. 그러나 그것은 사회 전체와의 교환을 통하여, 개인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현실의 힘이 된다. 그러니까 그 관점에서도 사회 기구-정부와 사회 조직 자체가 윤리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이것은 추상적인 의미에서의 윤리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 윤리성에는 사회 성원의 삶에 대한 관심과 책임이 포함되어야 하고, 보다 높은 삶의 차원으로서의 공공의 공간을 유지하려는 의지가 들어 있어야 한다. 물론 이러한 개인과 집단의 삶이 하루아침에 이루어질 수 있다고 할 수는 없다.
세월호 침몰에서 일어난 인간적 희생에 대한 제일차적 책임이 선장에게 있다고 하는 것은 위에서 말한 바와 같다. 그러나 스스로의 구명만 도모하고 승객들은 방기하였지만, 동시에 부하 선원들과 함께 탈출한 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독일 출신의 생태윤리학자 한스 요나스는 전통시대와는 다른 기술시대의 윤리를 밝히려 하면서, 윤리의 기본적인 여건을 다음과 같이 정의한 일이 있다. 칸트의 윤리학에는, 범상한 사람이라도 대체로는 어떻게 하는 것이 인간으로서 옳게 행동하는 것인가를 알 수 있다는 것이 전제되어 있다. 그러나 요나스 교수의 생각으로는, 그러한 윤리의식은 ‘근접한’ 사물과 사람과 단기간의 시간이라는 맥락에서만 효력을 갖는다. 과학기술의 많은 결정은 생태계 전반 그리고 미래 세대에 영향을 미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고려할 수 있는 윤리의식을 수반하지 않을 수 있다. 그리하여 그는 먼 날과 먼 사람들에 대한 윤리적 책임을 다짐할 수 있는 원리로서 ‘책임 원리’의 개념을 정립하려 하였다. 이 원리는 근접 상황에서의 윤리적 감정을 이념으로 확대한다. 그러면서 그 정서적 기반이 되는 것은 생명 일반과 자연에 대한 ‘경외심’이라는 보편적 정서이다.
여기에서 한 가지 주목하고자 하는 것은 근접한 환경을 넘어갈 때, 윤리적 원리에 따라 행동하는 것이 어려울 수 있다는 사실이다. 이 어려움은 행동 범위가 이웃을 넘어 큰 집단과 사회, 또는 추상적인 체제로 확대될 때도 생겨난다. 자연스러운 인간 심성으로는 이웃이나 동료를 넘어 전혀 알지 못하는 사람들을 나의 윤리적 책임의 범위 안에 포함시키는 일이 쉽지 않은 것이다. 자연스러운 공감적 감정은 이성적 과정을 거쳐서 비로소 지속적 윤리의식이 된다고 할 수 있다. 이번 사건에서, 원근(遠近)에 상관없이, 전 국민이 보여준 것은 강렬한 비탄과 공감이었다. 이것은 국민적 단합의 기초가 될 수 있는 커다란 자원이다. 그것이 이성적으로 승화될 때, 그것은 사회를 제도적으로 뒷받침하는 지속적인 윤리의식이 된다.
사회 전반의 윤리의식은 적절한 교육과 문화적 개발로서 진화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제도적 환경이다. 정부나 기업의 제도가 바른 윤리적 원리에 의하여 움직인다면, 책임 의식은 저절로 사람의 마음에 스며드는 것이 될 것이다. 제도 가운데도 중요한 것은 말할 필요도 없이 정치제도이다. 그것은 넓은 차원에서 윤리적 권위를 갖는 것이어야 하지만, 동시에 작은 공동체에서와 같이 사회 성원들에 대한 공동체적인 돌봄을 중심적 관심으로 갖는 것이라야 한다. 기업이 반드시 정부 기구와 같은 뜻에서 공공 목적을 위한 기구라고 할 수는 없다. 그러나 공공 공간 안에 존재하고 움직인다. 기업도 공동체적 정서에 열려 있어야 마땅하다.
세월호의 선장과 선원의 직업이 저임금 비정규직의 구분에 맞아 들어간다는 보도가 있었다. 그렇다면, 그러한 직업에 종사하는 사람으로부터 직업과 관련하여 단호한 윤리적 결정을 기대하기는 어렵다 할 수 있다. 직업의식이나 직업윤리는 대체로 오랜 봉직에서 길러지는 삶의 태도이다. 물론 소소한 개인 사정에 구속될 수 없는 것이 윤리적 당위라는 생각이 틀린 것은 아니다. 그러나 윤리도 삶의 현실에 의하여 한정된다는 사실도 무시할 수는 없다.
대체적으로 말하여, 세월호의 비극을 통해서 우리가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되는 것은 윤리와 도덕의 기초가 없이는 좋은 사회의 이상에 가까이 갈 수 없다는 사실이다. 보다 넓게 생각하여, 개인이나 사회와 정치 조직이나, 적어도, 그 근본에 있어서, 그 심성이 ‘삶에 대한 경외심’으로 열려 있지 않고는 인간적인 삶은 불가능하다 할 것이다.
글을 끝내면서, 희생자 가족 여러분에게 심심한 애도의 뜻을 전하고 싶다.
김우창 고려대 명예교수

출처 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635444.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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