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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11월 22일 토요일

자본의 17가지 모순

http://www.hani.co.kr/arti/culture/book/665512.html

소비에 놀아나지 말고 사용가치 중심 경제로


조증에 걸린듯 들뜬 소비주의 대신
필요한 사용가치 제공하는 쪽으로
생산을 합리적으로 조직해야 한다
“대안정치는 장기적 야심 품어야”
올해 79살의 영국 마르크스주의자
그람시의 혁명적 휴머니즘 불러내

자본의 17가지 모순
데이비드 하비 지음, 황성원 옮김
동녘·1만9800원
정신없이 살다가 문득문득 뇌리를 스치는 질문. 경제는 성장하는데 왜 우리 삶은 갈수록 팍팍해지나. 기술이 발전하는데 왜 우리는 더욱더 시간이 부족한가.
영국의 마르크스주의자 데이비드 하비는 <자본의 17가지 모순>(원제: Seventeen Contradictions and the End of Capitalism)에서 이렇게 답한다. “노동자 다수는 갈수록 과시적 소비의 바다에서 허우적대면서 어떤 희생을 감수하고서라도 소득을 극대화할 수 있는 방법을 미친 듯이 찾아다니고 있다. 남에게 뒤지지 않기 위해, 그리고 인위적으로 상승하고 있는 자신들의 필요를 충족하기 위해 이들은 과도한 장시간 노동도 마다하지 않는다. 신기술 덕분에 충분히 노동시간을 줄일 수 있지만 사람들의 노동시간은 오히려 더 늘어났다.”
지금 입고 있는 옷, 쓰고 있는 스마트폰이 낡은 것처럼 보이게 하는 광고 역시 자본의 전략임은 물론이다. 무엇보다 자본은 노동자들이 창의적인 생각을 할 수 있는 여유를 싫어한다. “자본주의의 경제적 합리성은 상업적인 부를 생산하지도, 소비하지도 않는 진정으로 자유로운 시간을 용납하지 않기 때문이다. 소비를 도와주는 (전자 은행업무와 신용카드, 자동차는 말할 것도 없고 전자레인지, 세탁건조기, 진공청소기 등과 같은) 노동·시간절감 기술의 은총을 입어 생산의 노역에서 해방된, 자유로운 결사와 자기 창조에 능한 개인들이 비자본주의적 대안 세상을 건설하기 시작할 수도 있다는 위험은 항상 존재한다.”
팍팍해지는 삶과 늘 부족한 시간의 원흉은 다름 아닌 자본이라는 게 올해 79살의 노익장, 데이비드 하비의 진단이다. 자신의 전공인 지리학과 마르크스주의를 접목해 공간의 정치경제학을 개척한 세계적인 비판적 지성인 하비의 이 책은 신자유주의도 자본주의도 아닌 자본 그 자체의 속성과 본질을 파고드는 보기 드문 저작이다.
이 책의 가장 큰 미덕은 자유분방하고 독창적인 사유에 있다. 예를 들어 기존 좌파들이 공장 노동자들의 작업장이나 노동시장에서의 투쟁에 집중하느라 더 중요하고 커다란 핵심을 놓치고 있다고 비판한다. “미국 노동자들은 일반적으로 소득의 약 3분의 1을 주택에 지출한다. (…) 노동이 아무리 노동시장과 생산의 지점에서 전투에서 승리하여 임금에 대한 상당한 권리를 획득하더라도, 이 성과의 대부분을 주택을 구입하는 데 다 쏟아부어야 할 수도 있다. (…) 사용가치로서 노동이 생산 영역에서 획득한 것을 지주, 상인(가령 전화회사), 은행(가령 신용카드), 변호사와 거간꾼들에게 다시 빼앗기고, 그 나머지 중 큰 덩어리는 세무당국에게 가게 되는 것이다.”
대안경제로 불리는 비자본주의적 생산조직(예를 들어 협동조합)에 대해서도 하비의 쓴소리는 가차 없다. “비자본주의적 형태의 노동조직이라는 목표가 여전히 교환가치의 생산인 이상, 그리고 사적 개인이 화폐의 사회적 권력을 전유하는 능력이 제어되지 않는 이상 조합노동자, 연대의 경제, 중앙계획의 생산체제는 결국 실패하거나 자기착취에 가담할 뿐”이라는 것이다. “자본이 구축하고 있는 생태계를 깡그리 무시한 채 자본의 핵심 동학과 동떨어진 사안을 집적대는” 환경운동이나, “축적의 심화에서 자양분을 얻는” 빈곤퇴치운동 조직 역시 마찬가지다.
무엇보다 그는 “대체로 이해하기 어려운 포스트 구조주의의 깃발 아래 포스트모던의 단편들을 재조립한 모든 이들과 미셸 푸코 같은 사상가들로부터 지적 자양분을 얻는” 좌파들을 경멸한다. 지적 소비의 대상으로 전락한, 현란한 담론을 대신해 그는 쉬운 언어로 미래를 향한 꿈을 꾸자고 말한다. 그 꿈의 실마리가 자본의 17가지 모순인데, 기본모순과 움직이는 모순, 위험한 모순이라는 세 범주로 나눈다.
하비는 기본모순의 첫머리에 ‘사용가치와 교환가치’라는 경제학 개념을 제시하면서, 사용가치를 중심으로 경제 체제를 새로 짜야 한다고 역설한다. “생산을 위한 생산이라는 쳇바퀴를 돌려 조증에 걸린 듯 들뜨고 소외된 소비주의라는 강압의 세계를 유지하는 대신, 만인이 적절한 물질적 생활수준에 이르는 데 필요한 사용가치를 제공하는 방식으로 생산을 합리적으로 조직해야 한다. (잉여가치의) 실현은 필요 중심의 수요로 전환되고 생산은 여기에 대응하는 형식으로 바뀌어야 한다.” 더불어 부동산 권력을 해체하고, 불로소득계급의 능력을 억제할 것, “(국제통화기금처럼) 미국의 달러 제국주의를 지원하기 위한 (…) 모든 국제화폐기관들을 해체”할 것 등 혁명 과제를 쏟아낸다.
“오늘날의 관행을 보고 있으면 이런 해법은 비현실적이고 유토피아적인 것 같다. 하지만 대안정치는 이런 종류의 비전과 장기적인 야심을 품어야 한다. 몰인정하고 규제되지 않는 사유재산과, 민중의 행복이 아닌 자본을 지원하는 데 헌신하는, 갈수록 독재적이고 군사적인 색채가 짙어지는 경찰국가의 권력 사이의 모순 속에 문명이 빠져 죽지 않게 하려면 혁명적이든 개혁적이든 급진적인 의제를 만들어 내야 한다.”
언뜻 몽상처럼 보이는 원대한 목표가 거저 이뤄지는 게 아니라는 걸 하비 역시 잘 알고 있다. 자본가 계급과 그들을 대변하는 국가권력과의 투쟁은 불가피하다. 프란츠 파농을 인용해 폭력의 불가피함을 인정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는 궁극적으로, 루이 알튀세르가 비웃었던 청년 마르크스의 휴머니즘, 안토니오 그람시의 ‘혁명적 휴머니즘’을 불러낸다.
“희망이 있다면 상황이 너무 악화하기 전에, 인간과 환경이 너무 심하게 훼손되어 더 이상 손쓸 수 없게 되기 전에 인류 다수가 이 위험을 감지하는 것뿐이다. 전 세계 대중은 프란치스코 교황의 정확한 표현대로 ‘무관심의 세계화’에 맞서, 파농의 재치 있는 표현처럼 ‘먼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겠다는 결심을 하고, 자신의 머리로 생각하면서, 무책임한 잠자는 숲속의 공주 놀이를 중단’해야 한다. (…) 우리에게는 빠르게 진화하는 현재의 자본의 모순을 배경으로 우리 자신의 미래의 시(詩)를 쓸 의무가 있다.”
이재성 기자 s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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