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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11월 22일 토요일

파워포인트, 칠판, 눈빛 김찬호 | 성공회대 초빙교수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411212045145&code=990399&s_code=ao048

대학 안팎에서 25년 동안 해온 일이지만, 강의는 아직도 어렵게 느껴진다. 그 정도의 연륜이면 베테랑이 되었을 법도 한데, 좌절감으로 끝나는 강의가 종종 있다. 문제는 사전에 그것을 가늠하기가 쉽지 않다는 것이다. 철저하게 준비해 자신만만하게 임했는데 도중에 갈피를 잡지 못해 미로를 헤매는가 하면, 백지 상태로 들어갔는데 의외로 놀라운 작품이 되기도 한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소통이라는 것이 워낙 생물 같은 것이어서, 당사자들이 그 순간에 주고받는 기운의 어우러짐에 그 성패가 좌우된다. 거기에 연루되는 변수들을 파악해서 사전에 통제하기가 쉽지 않다는 말이다. 그런데 그동안 실패한 강의들을 돌아보면, 프레젠테이션 파일을 사용한 경우가 의외로 많다. 물론 시각 자료를 다채롭게 섞어 강의를 진행하면 청중이 덜 지루해한다. 그리고 내용을 더 구체적이고 생생하게 전달할 수 있고, 동영상까지 곁들이면 금상첨화다. 하지만 그렇게 풍부한 자료들이 오히려 걸림돌이 되기도 한다. 우선, 미리 설정해놓은 페이지들을 기계적으로 따라가기 때문에 흐름이 경직될 수 있다. 전체적인 얼개가 정밀하게 짜여 있고 결론까지 예정돼 있어서 도중에 전혀 새로운 이야기로 비약할 수 있는 여지가 적은 것이다.

발표를 하는 것이라면 시나리오를 꼼꼼하게 준비해 오차 없이 진행해야 한다. 그러나 강의에서는 메시지의 일방적인 전달이 아니라 수강자들과의 상호작용이 중요하다. 예상치 않게 떠오른 질문 하나로 인해 예정된 각본과 전혀 다르게 이야기가 흘러갈 수도 있다. 바로 그것이 강의의 절묘한 맛이다. 그런데 파워포인트(PPT) 영상을 띄워놓으면, 그러한 반응과 참여가 봉쇄되기 쉽다. 청중은 일제히 구경꾼 모드로 들어가 버린다. 정밀하게 편집된 지식의 ‘디스플레이’ 앞에서 수동적인 태세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얼마 전부터 가능하면 PPT를 사용하지 않거나, 꼭 필요한 부분으로 최소화하려고 한다. 강의의 많은 부분을 칠판이라는 올드 미디어로 진행한다. 키워드 몇 개를 중심으로 또는 어떤 설명의 도식을 그려가면서 이야기를 풀어간다. 칠판의 매력은 그 여백이 품고 있는 무한한 가능성에 있다. 거기에 어떤 단어나 그림이 들어갈지는 정해져 있지 않다. 오로지 그 시간 그 강의실에서 역동적으로 생성될 생각들이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그 창발(創發)의 피드백은 강사와 수강자 모두를 유쾌한 긴장으로 이끌어간다. 칠판 앞에서는 말과 글자만이 오간다. 영상이 배제되기에 따분할 수도 있겠지만, 나의 경험으로는 오히려 몰입도가 높고 수강자들의 반응도 더 좋다. 그것은 어떤 문학작품을 영화로 보는 것과 책으로 읽는 것의 차이에 비유될 수 있다. 영화에서는 등장인물들의 모습이나 어떤 장면이 연출된 이미지에 갇혀 버리지만, 책에서는 독자의 상상력이 얼마든지 허용된다. 언어는 그 추상성 덕분에 수많은 현상들을 압축할 수 있다. 멋진 풍광을 담은 사진들보다 그것을 시적으로 묘사한 글이 더 깊은 울림과 여운을 주는 것도 바로 그런 이유에서다. 

인터넷 시대 우리의 일상에는 이미지가 폭증한다. 스마트폰은 신체의 일부가 되어간다. 그런 가운데 우리는 눈빛과 마음으로 소통하는 데 점점 서툴러진다. 몇 해 전에 어느 외국의 영화감독이 한국에서 기자회견을 했는데 기자들이 모두 고개를 숙이고 노트북에 받아 적기만 하는 것에 불만을 터뜨린 바 있다. 지난달에는 어느 저명한 미래학자의 강연회가 있었는데, 강의가 시작되자 30여명의 청중이 몰려나와 스마트폰으로 사진을 찍느라 소란을 피워 그를 화나게 했다. 그들 가운데는 강연이 시작되자 스마트폰에 열중하는 이도 적지 않았다. 미디어는 배움을 탁월하게 촉매할 수도 있지만, 정반대의 효과를 내는 경우도 많다. 초등학교에서 ‘아이스크림’이라는 소프트웨어로 수업을 때우는 교사들이 있다. 교과서의 모든 내용을 수업 진행용으로 가지런히 정리해놓았기 때문에 그냥 차례대로 보여주면서 따라가기만 하면 수업을 간편하게 ‘때울’ 수 있다. 그러나 스스로 연구해 창안한 수업 내용이 아니기에 생동감이 있을 수 없다.

지식과 정보가 넘쳐나는 시대에 필요한 것은 그것을 다루는 능력이다. 학생들은 배움의 과정 자체를 즐길 수 있어야 한다. 독서나 사유를 통해서 홀로 깨우치는 공부와 함께, 타인과 대화하면서 생각을 넓혀가는 집단 지성을 맛보아야 한다. 21세기에도 학교가 존립해야 한다면 교사와 학생 그리고 학생과 학생 사이에 그러한 만남이 이뤄져야 하기 때문이다. 이미 학교 바깥의 다양한 공간에서 실험되는 학습 생태계가 교육의 미래를 암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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