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찬수의 더 느린질주: 주종환 교수--혈기방자한 후학도 웃음으로 격려해준 ‘큰 스승’

http://www.hani.co.kr/arti/society/obituary/665879.html

2014년 11월 25일 한겨레

박진도 소장의 추도문

경제학자 주종환 선생님 영전에

2004년 민족화합운동연합(민화련) 상임대표 시절의 고 주종환 교수.

주종환 선생님, 1978년 무렵 어느 학회 토론장에서 처음 뵈었지요. 그때 한 대선배의 발표 논문을 두고 혈기 방자하던 제가 겁없이 신랄하게 비판하는 바람에 곤란해졌는데, ‘학문 연구는 그렇게 하는 것’이라고 웃으면서 격려해주셨지요. 그 뒤, 선생님은 저를 각별히 따뜻하게 지도해주셨습니다. <역사비평>(1997)에서 ‘학문의 외길을 걸어온 실천적 지식인 12명의 삶과 학문’을 조명하기 위해 기획한 ‘학문의 길, 인생의 길’ 대담을 통해 선생님께서 격동의 한국 현대사 한가운데 동시대 어느 누구보다도 치열한 문제의식을 갖고 올곧게 학문의 길을 걸어오신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선생님은 1929년 일제 강점기에 태어나 식민지 교육을 받았고, 서울대 문리대 예과·문과를 2년 수료한 뒤 48년 밀항선을 타고 일본으로 유학을 가셨지요. 갖은 고생을 딛고 수재들에게도 어렵다는 도쿄대 경제학부와 대학원까지 마치고 귀국해서는 부흥부 산업개발위원회에서 농림수산 분야 계획에 참여했습니다. 선생님은 경제학의 여러 분야에 커다란 기여를 하셨지만, 무엇보다도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농업경제학자이십니다. 농민·농업·농촌의 번영 없이는 국민경제가 건전하게 발전할 수 없다는 확신을 갖고 계셨습니다.

선생님께서는 62년부터 94년 정년퇴임하실 때까지 동국대 농대 농업경제학과 교수로서 학문 연구와 후진 양성에 매진하면서 20여권의 저서와 100여편의 논문을 남기고, 한국농업경제학회장과 한국사회경제학회장도 맡아 학문 발전에 공헌하셨습니다. 그렇지만 선생님은 상아탑 속의 연구자만은 아니셨습니다. 유학 시절과 부흥부의 정책 집행 경험, <한국일보> 비상임 논설위원 등 여러 경험을 살려, 늘 우리 사회 격동의 한가운데서 실천하는 진보적 지식인으로 살아오셨습니다. 퇴임 이후에도 참여사회연구소의 이사장으로서 시민사회운동에 참여했고, 최근까지 민족화합운동연합 상임의장, 시민사회남북연석회의 추진위원장을 맡아 민족문제와 통일문제의 해결에 진력하셨습니다.

무엇보다 선생님께서는 우리 사회의 문제를 한발 앞서 제기하는 놀라운 통찰력을 지니고 계셨습니다. 60년대 말 이미 재벌 체제 경제구조의 문제점을 지적한 것이 대표적이지요. 85년에는 <재벌경제론>을 통해 혈족 지배체제 아래 국민들이 고통받는 현실을 통렬하게 비판했습니다. 이어 <토지정책론>을 펴내어, 토지 투기 문제의 심각성을 지적하고 그 해결방안으로 토지공개념을 주장했습니다. 아직 농업개방에 대한 논의가 본격화되기 이전인 70년대 말에 이미 비교우위론과 농업개방론의 문제점을 예견했고, 미국식 식민지 경제학의 폐해를 비판하며 한국적 경제학의 필요성을 역설한 <한국적 경제학>(1984)도 펴냈습니다.

하지만 선생님은 깊은 통찰력으로 급진적 해결보다는 점진적 단계적 해결을 모색하셨습니다. 어떤 주장을 할 때는 실현 가능성을 곰곰이 따져보아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저는 선생님께서 웃지 않는 모습을 본 적이 없습니다. 화를 내실 때도, 논쟁을 하실 때도 늘 웃고 계셨습니다. 가족이나 제자들에게나 함께 일하는 사람들에게나 참 소탈하고 투명하고 사랑이 많은 분으로 기억될 것입니다. 선생님, 이승에서 못다 이루신 일들은 저를 포함해 못난 후학들에게 맡기시고 편히 영면하십시오.

박진도 충남대 교수·전 참여연대 참여사회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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