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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12월 26일 금요일

김재인 역, 안티 오이디푸스, 자본주의·정신분석학 비판한 ‘20세기 자본’


http://www.hani.co.kr/arti/culture/book/670849.html

등록 : 2014.12.25 2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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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티 오이디푸스
들뢰즈·과타리 지음, 김재인 옮김
민음사·3만3000원
들뢰즈·과타리의 <안티 오이디푸스> 새 번역본이 ‘드디어’ 출간됐다. 1994년 <앙띠 오이디푸스>(민음사) 번역본이 나온 지 20년 만이고, 1000쪽짜리 <천개의 고원>(새물결, 2001)을 우리말로 옮긴 김재인 박사가 팔을 걷어부친 지 10년 만이다.
이번 책에는 미셸 푸코가 영문판에 쓴 서문을 수록했다. 푸코도 그렇지만, 사실 ‘김재인 번역’이라는 데 ‘철학판’의 관심이 쏠렸다. 옮긴이는 10년 전부터 이진경 서울과학기술대 교수를 비롯해 내로라하는 학자들과 논쟁하며 들뢰즈 사상의 오해, 오역에 문제제기해왔다. 번역자들이 개념 자체를 잘못 소개한 탓에 그릇된 이론이 판치고 있다며 비판했던 것이다.
번역은 꼼꼼하고 읽기도 수월하다. 옮긴이는 이 책과 관련된 프로이트·마르크스·니체 등 주요 학자들의 책을 참조하고 적절한 우리말 표현을 찾아냈다고 한다. 예컨대 ‘욕망적 기계’를 ‘욕망 기계’로, ‘힘에의 의지’를 ‘권력의지’로 쓰는 식이다. ‘앙띠 오이디푸스’로 알려진 책 제목도 희랍어 발음을 살려 ‘안티 오이디푸스’로 바꿨고, ‘과타리’란 이름도 국제학술대회에서 쓰이는 말을 종합해 바로잡으려 했다. 그러나 이 모두가 논란일 수 있다. 생산적 토론을 하자며 옮긴이는 개인 누리집 ‘철학과 문화론’에 게시판을 열었다. 원서를 함께 볼 사람들을 위해 프랑스판 쪽수를 본문 좌우 여백에 일일이 표시했다. 자신감의 표현으로도 보인다.
1972년 <안티 오이디푸스>를 쓴 질 들뢰즈(왼쪽)와 펠릭스 과타리. <한겨레> 자료사진
김 박사는 <한겨레>와 통화에서 “이 책은 1968년 5월 혁명에 대한 응답이며 자발적 예속에 대한 분석”이라고 설명했다. 자본주의·정신분석학을 비판한 ‘20세기 자본론’인 셈이다. 들뢰즈·과타리는 혁명적 시민들이 왜 금방 보수화되는지에 대한 질문에 몰두했다. “왜 인간들은 (…) 자신들의 예속을 위해 싸울까?” “대중들은 파시즘을 원했다. 설명해야 하는 것은 바로 이것이다.” “그 어떤 해법, 그 어떤 혁명의 길이 있을까?” 두 사람은 자본주의의 함정과 해법을 규명하려 했다.
19세기 자본주의 초기를 살았던 마르크스와 달리, 이들은 1960~70년대를 거치며 자본주의의 정점인 신자유주의를 경험했고, 사람들이 이해타산보다 ‘무의식’의 욕망 구조를 따른다는 점에 주의했다. 인간이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자발적으로 자본주의의 톱니가 돼 복무하는 이유는 ‘부채’를 갚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왜 정신분석이 비판의 대상이 될까? 태어나자마자 아이들은 이미 ‘사회 기계’의 부품으로 존재하고, 사회와 직접 연결된다는 것이 들뢰즈·과타리의 통찰이다. 그러나 정신분석은 ‘핵가족 삼각형’ 속에 부모의 사회적 지위, 혈통, 재산 따위를 삭제하고 핵가족 관계의 문제로 봉합했다.
이 책의 부제가 ‘자본주의와 분열증’인 것도 정신분석학 비판과 관련이 있다. 자본주의는 ‘분열자’를 배제하고 ‘유순한 주체’만 허용한다. 분열자는 노동자로서 상품이 될 수 없는, ‘오이디푸스 구조’에서 해방된 무의식이며 따라서 자연의 흐름에 가장 가까이 있는 ‘해방의 주체’가 될 수 있다. 그렇다면 “혁명의 길”은 무엇일까? 도망, 벗어나는 것이리라. “이제는 자본에 대한 자발적 예속에서 도주하여 분열증으로서의 우리 자신의 삶을 살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할 때이다.”(김재인 박사학위 논문 ‘들뢰즈의 비인간주의 존재론’)
이유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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