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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12월 30일 화요일

2014 경향신문 선정 올해의 책 10권

출처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412262129455&code=960205

2014년 12월 26일, 경향신문, 정원식 기자


[2014 경향신문 선정 올해의 책]먹먹한 세상에 ‘죽비’를 들고, 갈 길을 들려주다

‘단군 이래 불황’이라는 출판계의 한숨은 올해도 예외가 아니었다. 지난달 21일 시행된 새 도서정가제 때문에 책 판매가 더욱 부진해질 것이라는 비관적 전망이 나오기도 했다. 그럼에도 복합적인 사고와 통찰력을 소망하는 이들에게 책은 대체불가능한 지적 근력의 원천이다. 한 해 동안 경향신문에 소개된 책들 가운데 시의성·충실성·참신성·화제성을 평가해 오래 곁에 두고 읽을 만한 책 10권을 선정했다.


▲ 단속사회…엄기호 지음 | 창비
살아남으려 자신을 착취하는 시대상 적확히 해부

올해 서점가에는 한국 사회의 단면들을 해부한 ‘○○사회’ 책들이 쏟아져 나왔다. <단속사회>는 그 중에서도 첫손에 꼽을 만하다. 저자는 ‘쉴 새 없이 접속하고 끊임없이 차단한다’는 뜻의 ‘단속(斷續)’ 개념으로 한국 사회의 현실을 해부한다. 사람들은 한편으로 사회관계망서비스(SNS)를 통해 ‘과잉연결’돼 있고 다른 한편으로는 취미나 성향이 다른 사람들과의 접촉을 차단한다. 그 결과는 ‘공적인 것’의 소멸이다. “낯설고 모르는 것과 부딪치고 만나며 경험을 확장하고 갱신하고 통합하며 자신의 삶의 서사적 주체가 되려는 개인의 성장은 불가능해졌다. 그 대신 가시적인 성과가 보이면 미친 듯이 자기를 소진해가고 그 성과가 보이지 않으면 무기력하게 널브러지는 것을 무한반복하게 된다.” 저자의 이 말은 공적 합의를 통한 미래 전망 모색이 불가능해 보이는 사회에서 개인들이 살아남기 위해 자신을 착취하는 시대상을 적확하게 요약하고 있다. 관계의 단절은 곧 사회의 붕괴임을 강조한다.


▲ 21세기 자본…토마 피케티 지음·장경덕 외 옮김 | 글항아리
‘불평등이 자본주의의 핵심적 모순’임을 실증

올해 초 미국 서점에서 이 책이 동났다는 소식이 전해지면서 국내 출간 이전부터 화제가 됐다. 학자들은 물론 정치인들까지 저자 토마 피케티 교수의 이름을 거론하면서 한국 경제에 대한 진단을 내놨고 한국 사회의 불평등 문제와 증세 문제가 언론의 집중 조명을 받았다. 지난 9월 저자의 한국 방문을 정점으로 <21세기 자본>은 ‘피케티 현상’을 낳았다. 820쪽에 달하는 경제 서적이 순식간에 베스트셀러에 올랐다. 부와 소득의 불평등이 자본주의의 핵심적 모순이라는 그의 주장은 새롭지 않다. <21세기 자본>은 이 익숙한 이야기를 추상적 담론이 아니라 3세기에 걸친 자료 분석을 통해 실증했다는 점에서 강력한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저자가 주장한 누진적 소득세 강화나 글로벌 자본세 도입에 대해서는 비판적인 견해도 있다. 그러나 충실한 자료 분석과 사회에 대한 문제의식을 결합한 완성도 높은 저술은 아카데미의 울타리를 넘어 사회적으로 큰 공감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는 점을 모범적으로 입증했다. 


▲ 바른마음…조너선 하이트 지음·왕수민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가치의 다원론… 진보에게 도덕적 기반 확충 조언

지난여름 강준만 전북대 교수의 <싸가지 없는 진보>는 진보의 오랜 딜레마를 건드리며 적잖은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그의 문제의식은 ‘진보의 문제는 능력이 아니라 품성’이라는 말로 요약할 수 있는데, 조너선 하이트 미국 뉴욕대 스턴경영대학원 교수는 <싸가지 없는 진보>보다 먼저 출간된 이 책에서 비슷한 주제를 더 깊이 다뤘다. 저자는 가치의 다원성을 주장한다. 사람은 심정적으로 설득되지 않으면 논리적으로도 설득되지 않는다. 진보가 흔히 빠지는 ‘바름’에 대한 강박은 “세상에는 하나 이상의 도덕적 진실이 있다”는 점을 간과하게 만든다. 진보주의자는 희생자들의 피해와 고통, 공평성 여부에 도덕적 가치를 둔다. 반면 보수주의자들은 충성심, 권위 같은 것들에 도덕적 무게중심을 둔다. 저자는 진보에게 도덕적 기반을 좀 더 넓힐 필요가 있다고 조언한다. 이는 미국 진보주의자들에게만 해당하는 말은 아닐 것이다. 인류학, 심리학, 뇌과학, 진화론 등 다방면의 연구를 아우른다.


▲ 사회주의 100년 1·2…도널드 서순 지음·강주헌 외 옮김 | 황소걸음
좌파들이여, 서 있지 말고 다시 사회변혁을 꿈꾸라

책은 ‘20세기 서유럽 좌파 정당’의 100년 역사를 다룬다. 서유럽 좌파 100년 역사는 지속적인 쇠퇴의 역사다. 저자는 “(사회주의자들은) 자본주의와 경제성장, 그것이 줄 수 있는 번영이 필요하지만 자본주의는 사회주의자가 필요하지 않다”는 말로 현재 좌파가 처한 어려움을 요약한다. 그러나 저자는 가만히 있는 게 답은 아니라고 강조한다. “좌파 정당들은 수세에 몰린 채 새로운 비전을 거의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방어 전략은 일시적일 때만 통한다. 정치의 핵심은 이기는 것이지 가만히 서 있는 것이 아니다.” 영국 역사학자 도널드 서순은 2년 전 출간된 5권짜리 <유럽 문화사>로 이름을 알렸다. <유럽 문화사>에서 입증된 매끄러운 문장력과 방대한 주제를 명쾌하게 풀어나가는 그의 능력은 1·2권 도합 1800쪽에 달하는 방대한 저작 <사회주의 100년>에서도 빛을 발한다. 2008년 출간된 제프 일리의 <The Left 1848~2000> 이후 좌파 역사를 다룬 책으로는 최고의 역작이다.


▲ 깊은 마음의 생태학…김우창 지음 | 김영사
‘근원적 원근법’ 상실한 한국 사회의 부박함 질타

우리 시대의 대표적 석학으로 평가받는 김우창 고려대 명예교수의 사상적 행로는 ‘심미적 이성’에서 2000년대 이후 ‘마음’으로 이동했다. <깊은 마음의 생태학>은 80세를 바라보는 그가 미학과 철학, 문학과 사회, 세계와 실존의 문제를 아우르는 자신의 넓은 사유를 ‘마음의 생태학’이라는 열쇳말로 집약한 책이다. 그는 “오늘의 삶에서 우리가 잊어버린 것은 일체의 깊이에 대한 감각”이라며 ‘근원적 원근법’을 상실한 한국 사회의 부박함을 질타한다. “튄다는 말은 매우 상징적인 말이다. 깊이와 뿌리가 없는 곳에서는 튀는 것만이 중요한 것이 된다. 그것은 단명하고 천박한 삶의 파노라마를 이룬다.” 결론을 향해 직진하는 대신 수없이 상충하는 견해들을 모두 검토하며 자신의 생각을 신중하게 드러내는 그의 글쓰기는 여전히 까다롭고 난해한 느낌을 주지만, 지난 세월 지성의 깊이를 향해 내디딘 그의 쉼없는 걸음은 한국 지식사회의 소중한 자산이다. 인문학과 자연과학을 아우르는 깊은 사유의 세계가 펼쳐진다.


▲ 우리 본성의 선한 천사…스티븐 핑커·김명남 옮김 | 사이언스북스
지금 우린, 역사상 가장 평화로운 시대를 살고 있다

심리학자이자 인지학자인 스티븐 핑커 하버드대 교수는 두꺼운 책만 내놓기로 유명한 저자다. 대표작 <빈 서판>은 901쪽, <마음은 어떻게 작동하는가>는 962쪽이었다. 전작들의 성과를 집대성해 인간 본성의 과학을 밝히는 <우리 본성의 선한 천사>는 1400쪽이 넘는다. 책은 ‘과거보다 현대가 폭력적이다’는 일반적인 통념을 반박한다. 우리는 흔히 1차 세계대전 당시 1500만명이 사망했고 불과 20여년 뒤에는 또 다른 세계대전이 일어나 그 몇 배에 달하는 사망자가 발생했다는 점을 떠올리며 20세기가 가장 폭력적인 세기였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핑커는 “기나긴 세월이 흐르는 동안 폭력이 감소해 왔고, 어쩌면 현재 우리는 종의 역사상 가장 평화로운 시대를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고 말한다. 저자의 주장에 직관적으로 동의하기 힘든 사람이라도 책에 등장하는 100개가 넘는 표와 그래프, 저자의 집요하고 방대한 서술을 따라가다보면 쉽사리 반박할 말을 찾기 어려워진다.


▲ 시골빵집에서 자본론을 굽다…와타나베 이타루 지음·정문주 옮김 | 더숲
부패하지 않는 돈은 세계의 건강성 파괴한다

올해는 유난히 ‘자본’과 ‘자본주의’에 대한 책이 풍성했다. 화제성에서는 <21세기 자본>이 압도적이었지만 가독성의 측면에서라면 사정이 조금 다르다. 일본의 오래된 시골 마을에서 빵집을 운영하는 마흔넷의 와타나베 이타루는 자신이 시골빵집에서 마르크스의 <자본론>을 굽고 있다고 말하는 남자다. 그가 주창하는 경제는 ‘창조경제’도 아니고 ‘혁신경제’도 아닌, ‘부패(하는) 경제’다. 모든 물질은 ‘발효’와 ‘부패’를 통해 시간과 함께 모습을 바꾸고 언젠가는 흙으로 돌아간다. 그러나 인공배양된 이스트를 사용하는 빵과 부패하기는커녕 이자를 통해 점점 몸을 불려가는 돈은 예외다. 부패하지 않는 빵이 건강에 문제를 일으키듯 부패하지 않는 돈은 삶과 세계의 건강성을 파괴한다. 자본주의와 빵을 연결하는 발상이 절묘한데 저자 자신의 체험을 발효시킨 이야기여서 조금도 억지스럽지 않고 생생하게 전달된다. 천연균을 연구하는 할아버지, 마르크스에 탐닉했던 아버지에 이은 3대의 이야기도 흥미롭다.


▲ 눈먼 자들의 국가…박민규 외 지음 | 문학동네
작가들이 본 세월호… 문학의 힘·존재 이유 보여줘

올해 공적 관심을 모은 그 어떤 사고도 세월호 참사보다 더 비극적이진 않았다. 김애란·김행숙·김연수·박민규·진은영·황정은·배명훈 등 문인들과 평론가, 학자들이 세월호 참사에 대해 쓴 글들을 모은 이 책은 출간 일주일 만에 3만부를 찍어 종합 베스트셀러 20위 안에 올랐다. 이 중 진은영·박민규 등의 글이 처음 게재됐던 ‘문학동네’ 가을호는 문학 계간지로서는 이례적으로 매진되기도 했다. 작가들은 건조한 언론 기사나 논객들의 날카로운 주장으로는 담지 못한 시민들의 참담한 내면을 작가들만이 쓸 수 있는 섬세한 언어로 표현해냈다. 작가들은 인세 전부를, 출판사는 판매 수익금 전부를 기부했다. 가격도 기존 같은 분량 책의 절반 가격인 5500원으로 매겼다. <눈먼 자들의 국가>는 문학이 갈수록 왜소화하고 문학작품의 판매가 부진한 시대에 문학의 힘과 존재 이유가 무엇인지를 역설적으로 보여줬다. 김연수 작가는 말한다. “역사는 스스로 나아진 인간들의 슬기와 용기에 의해서만 진보한다.”


▲ 축구의 세계사…데이비드 골드블라트 지음·서강목 외 옮김 | 실천문학사
축구 예찬… 그러나 그 사랑을 돈으로 살 수는 없다

스포츠 가운데 전쟁과 가장 흡사하다는 평가를 받고있는 축구는 승리를 위해 맨몸으로 벌이는 투쟁의 매혹을 아무런 윤리적 부채감 없이 체험할 수 있는 스포츠다. 전 세계 인구 6분의 1이 직접 축구를 한다. <축구의 세계사>는 1200쪽이 넘는 만만치 않은 분량이지만 그 덕분에 축구와 정치, 축구와 돈의 관계에서부터 세계축구연맹(FIFA)의 부패, 한국 축구의 성과까지 다루지 않는 주제가 없을 정도로 포괄적이다. 특히 저자의 균형 감각이 돋보인다. 영국의 스포츠 저널리스트인 저자는 “축구에 대한 설명 없는 세계사도 불완전하고 근대사회의 정치·경제·사회사를 보여주지 않는 축구사도 무의미하다”고 말한다. 축구에 대한 사랑을 예찬하면서도 그 사랑을 돈으로 살 수 있다는 점 역시 빼놓지 않는다. 축구를 더 깊이 즐기고 싶은 사람에게든, 올해 ‘홍명보호’를 둘러싼 온갖 잡음에 짜증이 난 나머지 축구의 어두운 이면을 파헤치고 싶은 사람에게든 모두 쓸모 있는 책이다. 


▲ 여자 없는 남자들…무라카미 하루키 지음·양윤옥 옮김 | 문학동네
과도한 선인세 논란 불구하고 ‘하루키 파워’ 입증
하루키의 단편집으로는 오랜만에 출간된 책이다. 표제작을 비롯한 7편의 작품은 ‘여러 가지 사정으로 여자를 떠나보낸 남자들’ 혹은 ‘떠나보내려 하는 남자들’에 대한 이야기다. 최근 몇 년 동안 무라카미 하루키는 해외 저자에 대한 한국 출판사들의 과도한 선인세 논란의 중심에 서 있었다. 지난해 출간된 그의 장편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는 발간 첫날 국내 대형서점에 독자들이 새벽부터 줄을 서는 진풍경을 연출해 큰 화제를 모았으나 실제 판매는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 책을 낸 출판사가 지난해 적자를 낸 원인 중 하나가 하루키에게 지급한 높은 선인세 때문이라는 얘기도 있었다. 이 때문에 한국에서 ‘하루키 파워’가 약해진 것 아니냐는 말이 나왔다. 그러나 <여자 없는 남자들>은 출간 직후 계속해서 종합 베스트셀러 상위권을 차지해 하루키의 위력이 여전함을 입증했다. 그는 한국 독자들이 가장 사랑하는 해외 작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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