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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12월 1일 월요일

이상헌, 제네바에서 온 편지, 윌리엄 베버리지 보고서, 자유사회에서의 완전고용, 비참함은 증오를 낳는다, Misery generates hate, The Spirit of 45, 켄 로치

http://slownews.kr/34130

제네바에서 온 편지: "비참함은 증오를 낳는다"


널리 알려진 사람과 사건, 그 유명세에 가려 우리가 놓쳤던 그림자, 그 속에 담긴 의미를 이상헌 박사의 ‘제네바에서 온 편지’에 담아 봅니다.
영국에서 사회복지제도가 체계적으로 자리를 잡은 데는 윌리암 베버리지의 보고서가 결정적이었다.
윌리엄 베버리지 (1879년 3월 5일~1963년 3월 16일)  http://ko.wikipedia.org/wiki/%EC%9C%8C%EB%A6%AC%EC%97%84_%EB%B2%A0%EB%B2%84%EB%A6%AC%EC%A7%80
윌리엄 베버리지 (1879년 3월 5일~1963년 3월 16일) 사진은 1943년 당시의 모습 (퍼블릭 도메인)
1942년이었다. “요람에서 무덤까지”이라는 슬로건 하에 빈곤과의 대전쟁을 선언했다. 제2차 세계대전도 끝나기 전의 일이다. 대중의 관심도 대단했다. 무미건조한 영어로 쓰인 이 보고서가 무려 63만 부 이상이 팔렸다.
CBRichmond베버리지는 여세를 모아 [자유사회에서의 완전고용](1944)이라는 책도 써내면서 완전고용과 빈곤퇴치라는 양대 정책축을 만들어냈다. 이 책의 뒤표지에는 단 한 문장만 실려있다. 그는 400 페이지 넘는 방대한 책은 기실 이 문장 하나로 요약된다고 했다. 소설가 샬럿 브론테(오른쪽 초상화, 퍼블릭 도메인)의 문장이다.
“비참함은 증오를 낳는다. (Misery generates hate.)”
"비참함은 증오를 낳는다"
“비참함은 증오를 낳는다.” (사진: 베버리지 책 [자유사회에서의 완전고용]의 뒤표지)
요즘 영국 정부는 이 말을 믿지 않는다. 하기야 대처 정권 때부터 그랬다. 비참한 삶이 있어야 통치에 편리하다는 생각이 그때부터 생겼다. 요즘은 한 발 더 나가서 대중의 삶을 비참하게 만들 뿐만 아니라, 이를 대중에게 ‘친절하게’ 알려준다. 일종의 알박기인데, 잔인하다.
가령 이런 거다. 공공요금의 경우. 대처 이후로 가스와 전기, 물 모두 민영화되었다. 2012년에 이 회사들이 이윤 대박을 맞았다. 소비자들도 요금인하에 대한 기대가 있었다. 그런데 가격 조정에는 미적거렸다. 이유인즉슨, “어려울 때를 준비해야 한다”. 이런 빛나는 개미 정신의 위대함을 발휘할 기회가 2013년에 왔다.
기름값도 오르고 다른 물가도 오르고 해서, 전기 가스 요금 인상 요인이 생겼다. 오랫동안 준비해 온 ‘어려운 때’가 온 것이다. 그런데 이 회사들은 기습적으로 가격을 10% 가령 올렸다. 소비자의 불편을 충분히 알고서도 어쩔 수 없는 결정이었다고, 그들의 ‘형언할 수 없는 고통’도 같이 알렸다.
45년의 정신
믿었던 개미가 알고 보니 베짱이 같은 놈이니, 영국 서민들의 심사가 괴로웠다. 주택, 육아, 교육과 같은 모든 분야에 삭감의 삭풍이 부는 바람에 가뜩이나 힘든 살림인데, 게다가 곧 겨울이 아닌가. 삶은 비참해졌고, 이젠 증오는 멀지 않았다.
에너지 장관이 눈치를 챘다. 한 말씀 아니 드릴 수가 없다. 그래서 고언을 아끼지 않았다.
“에너지 가격 인상은 불가피하다. 이런 불가피한 상황에 부닥쳐서 불평만 하면 무엇하나. 지혜를 모아서 대처방안을 찾아야 한다. 집에서 반팔 입고 지내지 마라. 옷을 두툼하게 입고 있으면 난방비 절약이 절로 된다”.
이렇게 따스하고 살가운 충고에 이어서, 2013년 10월 21일, 장관께서 서민을 위하여 중장기 계획을 발표하셨다. 언제까지 옷 껴입고 지내라고 할 수만은 없지 않은가. 그래서 결정했다. 영국 남서부에 있는 조그마한 마을에 원자력 발전소 만든다.
후쿠시마 원전 사고 이후로 남들이 꺼리고 눈치 보고 있는 이 엄혹한 상황에서, 자신은 대중추수주의를 과감히 버리고 진정으로 시민을 위해서 원자력 발전 건설이라는 ‘고난의 결정’을 했다.
IAEA Imagebank, CC BY SA https://flic.kr/p/epsXL5
IAEA Imagebank, CC BY SA (본 사진은 해당 칼럼의 내용과는 직접 관련이 없음) 
그 며칠 전에는 복지를 담당하는 장관께서 한마디 거들었다. 각종 사회복지 지원 프로그램의 축소로 고통받는 서민들과 그의 지혜를 나누기 위해서였다.
“노령화 사회인데, 오히려 노인을 위한 연금이나 사회지원금이 축소되어 많은 사람이 힘들 것이다. 그러나 발상의 전환이 필요하다. 왜 노인들을 돌보는 것이 사회나 국가의 책임인가? 그건 개인들의, 그러니까 자녀들의 의무다. 자녀들에게 부양의무가 있다. 그런 면에서 우린 아시아에서 많이 배워야 한다.”
사람들은, 그가 말하는, 이렇게 ‘아름다운’ 아시아 국가가 궁금했지만, 그는 단지 아시아라고만 했다. 그의 아내가 중국인이니, 중국일까? 내가 본 중국이 그렇게 ‘아름답지’ 않았다. 중국이 워낙 큰 나라니, 혹 그런 곳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베버리지는 틀렸다. 비참함이 꼭 증오를 낳는 것은 아니다. 삶이 비참해져 증오가 생길 때쯤이면, 정치인들은 ‘솔직담백한’ 언어를 구사하며 당신의 비참함을 확인해 준다. 그러면 저 마음속 깊은 곳에 불끈 솟아오르던 증오는 바로 ‘어이없음’으로 질적 전환을 한다. 어이없음은 곧 해체이므로, 속수무책이다.
영국인들이, 그리고 우리가 전전긍긍하는 까닭일 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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