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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1월 27일 화요일

헛된 공부를 하지않으려면/법인 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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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꿈에 형용사와 부사를 달아 보자
-청매 선사의 공부법에서-

여기 한 사람이 있다. 그는 학력이 화려하다. 특히 독서의 범위와 양도 놀라울 정도로 다양하고 많다. 그런데 그 사람은 그렇게 많은 책을 탐독한 공력에도 불구하고 무언가 석연치 않다. 사물과 사건을 보는 깊이가 탁월하지도 않고, 체계적이고 일관된 논리도 빈약하다. 어떤 상황 앞에서 올바른 판단력도 부족하다. 작은 이해관계에서도 말과 처신을 자주 바꾼다. 이상하지 않는가? 흔히들 책에는 길이 있다고 하는데, 왜 공부한 사람에게서 풍겨야 하는 훌륭한 인격이 나타나지 않는 것일까?

여기에는 분명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수 있다. 이해와 사고의 수준이 부족할 수도 있고,  산만한 정신으로 책을 읽었을 수 있다. 또 자신의 눈높이에 맞지 않은 책만을 읽었을 수 있고, 단어의 개념을 이해하지 못하고 문맥을 바로 읽는 연습이 부족했을 수도 있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무엇 때문에 책을 읽고 어떻게 읽을 것인가, 에 대한 목적과 방법이 빈약하거나 어긋났을 수도 있다. 공부에 있어 반드시 전제되어야 하는 '핵심'과 '필수'가 결여되었기 때문에 많은 시간 열심히 공부해도 상응한 결과를 맺지 못했을 것이다.

육하원칙이라는 말을 누구나 알고 있을 것이다. 육하원칙은 기사문 작성의 필수적 요소인데, 여기서 왜 '원칙'이라는 말을 쓰는지 생각해보자. 그것이 원칙이 되는 것은 반드시 있어야 하는 것, 있지 않으면 사실을 증명하기 어려운 요소이기 때문이다. 학문과 수행에 있어서도 원칙이 따르지 않으면 진리는 성취되거나 증명되기 어렵다. 원칙은 대개 명사 앞에 수식어의 역할을 하면서 명사의 성격을 보다 분명히 하면서 명사의 길을 제시한다. 가령 '학자' 앞에 수식어가 없으면 우리는 허약하고 비겁한 학자를 상상할 수도 있다. 반면 학자 앞에 '진실과 양심을 따르는'이라는 수식어가 부여되면 학자의 정의와 그가 가야 하는 길이 분명해진다. 명사 앞에 왜 그에 합당한 수식어가 중요한가? 그 '무엇'이 되는 것도 중요하지만 '어떠한 사람'이 될 것인가가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영화와일드.jpg
*자아를 찾아 길을 떠나는 주인공. 영화 <와일드> 중에서

목표가 곧 인생의 목적이고 꿈이라고 착각하는 세상이다. 진리도 우정도 죄다 죽이고, 죽어라고 힘써 가면서 공부하고 노력하면서 추구하는 인생의 목표는 수식어가 생략된 명사다. 대통령, 국회의원, 장관, 재벌, 9시 뉴스 앵커, 연예인, 검사, 판사, 의사, 교사, 공무원 등 우리 시대 젊은이들의 꿈은 오로지 명사로만 표현된다. 그렇다면 자격증을 따서 학교에 취업하여 교사가 되면 인생의 꿈은 이루어진 것인가? 안정된 정규직에 끼어들면 행복한가? 직업으로 교사는 있고 스승으로서 교사는 없어도 괜찮은 것인가? 가르치는 수업 시간만 있고, 무엇을 목적으로 어떻게 가르칠 것인가에 대한 고민과 모색의 시간은 없어도 되는 것일까?  

풍부한 삶의 가치와 의미를 이루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명사와 동사 앞에 생기를 불어 넣는 '형용사'와 '부사'가 필요하다. 문장에는 명사와 동사가 필수겠지만 우리 삶에는 형용사와 부사가 핵심이고 필수가 아닌가? 형용사는 곧 삶의 방향과 목적을 지시한다. 명사만 단독으로 존재하면 명사가 가야할 길을 잃는다. 동사만 단독으로 존재하면 그 행위가 너무도 건조하고 맹목적일 수 있다. 그래서 형용사와 명사라는 수식어는 삶의 뿌리다. 그것들은 몸통을 튼실하게 세우고 잎새를 무성하게 피우며 열매를 풍성하게 맺게 한다. 수식어는 전제와 원칙이다. 즉 '어떤 모습인가'와 '어떻게 할 것인가'로 집약된다. '나는 학교에서 교사 생활을 한다'와 나는 지혜와 사랑이 충만한 스승으로서 학생들의 눈높이에 맞추어 사랑과 자기희생을 감내 하면서 가르친다'는 것은 다르다. 이런 두 가지 전제와 원칙이 확고하면 잘 못 든 길에서 인생을 낭비하지 않을 것이다.

전제와 원칙이 삶의 이정표가 되는 지점에서 조선시대 청매선사(1548~1623)의 ‘십무익송(十無益頌)’을 생각한다. 지금도 많은 수행자들이 이 경책의 글을 마음에 새기고 정진하고 있다. 청매 선사의 열 가지 공부 지침은 '~~이 없다면 ~~의 이익이 없다'는 형식으로 되어 있다. 오늘 우리는 '~~이 있다면 ~~의 이익이 있다'로 읽을 수 있다. 십무익송은 다음과 같다.

마음을 돌이켜 보지 않고 경을 보는 것은 이익이 없다.
정법을 믿지 않으면서 고행을 하는 것은 이익이 없다.
원인을 가볍게 여기고 결과만을 추구하면 이익이 없다.
마음에 믿음이 없이 능란하게 말을 하는 것은 이익이 없다.
존재가 실체가 없음을 알지 못하고 좌선하는 것은 이익이 없다.
아만을 꺾지 않고 공부하는 것은 이익이 없다.
덕이 없는 사람이 대중을 가르치는 것은 이익이 없다.
교만을 없애지 않으면 지식이 많아도 이익이 없다.
규칙에 어긋난 행위를 하는 사람은 대중과 함께 살아도 이익이 없다.
안으로 덕이 없으면서 겉으로 위엄을 갖추어도 이익이 없다.

당시 선사는 성급하게 결과만을 바라고 형식에만 치중하는 수행 풍토를 보고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을 것이다. 또 자신을 참답게 가꾸지 않고 단지 지식과 자리로 대중에게 존경 받으려는 권위주의자들에게 일침을 주고 싶었을 것이다. 그래서 자기 공부와 대중을 향한 활동에 반드시 있어야 하는 핵심을 전제한 것이다. 이렇듯 전제와 원칙이 분명해야 추구하는 바가 제자리를 찾을 수 있음을 선사는 갈파하고 있다.

회광반조(廻光返照), 자신의 내면을 비춰 보라는 뜻이다. 조고각하(照顧脚下), 자기의 발  아래를 살피라는 뜻이다. 모두 자신의 마음 씀과 자신의 행실부터 살피라는 비유와 가르침이다. 종교인이 경전을 공부하는 목적이 단지 신도에게 말씀만을 전하는 수단과 도구로 한정할 뿐, 말씀으로 자신의 마음을 비추어 보다 겸손하고, 보다 청빈하며, 보다 자애로운 덕성과 행실을 수행하지 않는다면, 그는 그저 좋은 말씀만을 되풀이하는  녹음기와 다를 바가 없을 것이다.

선사는 말한다. 늘 마음을 성찰하고 덕을 길러 인격이 성숙되어야 한다고, 모든 일에 진실이 토대가 되어야 한다고, 결과에 앞서 과정이 중요한 것이라고 거듭 역설하고 있다. 그런데 우리 시대의 학교 교육의 현주소는 청매 선사의 공부법에 비추어 보면 어떠한가? 우리의 청춘들은 오로지 성공하고 출세하기 위해 '앞'과 '위'만을 바라볼 뿐, 우정과 사랑과 진리를 나누기 위하여 '옆'과 '뒤'를 보지 않는다. 학생들의 봉사활동도 사람에 봉사하는 사랑의 실천이 아니다. 봉사조차도 입시와 취업을 위한 경력 쌓기의 수단이 되었다. 전제와 원칙, 방향과 과정이 바로 서지 못한 교육의 현실은 인간을 자본의 그물망에 희생시킨다. 또 자본의 대열에 끼어들기 위해 몸을 혹사시키고 감정을 빼앗아 버린다.

우리 시대 청춘들이 공부하고 일하는 목적이 오직 좋은 정규직을 얻기 위한 것이어야 하는가. 만약 평생 사람의 꿈을 직업의 이름에 묶어 두려한다면, 그리고 명사로만 꿈을 묶어 버리는 자본의 음모에 대한 비판 없이 살게 된다면 상생하는 행복의 활로는 어디에서도 찾기 어려울 것이다. 꿈은 끊임없이 꾸는 것이다. 꾼다고 하는 것은 동사이고 형용사이고 부사이다. 그러하므로, 꿈을 포기 하지 않는 이상, 우리의 공부와 일과 삶에 아름답고 굳세고 지혜로운 형용사와 부사를 달아 주자. 그래서 우리 삶에서 꿈이 형용사와 부사의 날개를 달고 진정한 인간의 성취에 다다를 수 있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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