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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1월 27일 화요일

'안티 오이디푸스' 들뢰즈 가타리/ 장정일 서평/ 시사in



http://www.sisainlive.com/news/articleView.html?idxno=22305

“오이디푸스 모형에 반대한다”

모든 욕망을 ‘기계’로 설명하는 들뢰즈·과타리에게 본질은 없다. 이들은 세계를 ‘오이디푸스 극장’으로 치환하는 것에 반대한다. 오이디푸스는 보편적이냐고? 이 싸움터에서 프로이트는 전사할 것이다.


버지니아 울프의 <댈러웨이 부인>이 처음 나왔을 때, 작품을 이해하기 힘들었던 서평자는 “그것은 나를 쓰러뜨렸다. 나는 끝까지 읽을 수가 없었다”라고 실토하고 말았다. 이 일화는 나이절 니컬슨의 <버지니아 울프:시대를 앞서간 불온한 매력>(푸른숲, 2006)에 나온다. 질 들뢰즈·펠릭스 과타리의 <안티 오이디푸스>(민음사, 2014)를 펼쳐놓고 우리도 똑같은 푸념을 해야 할까? 안 그래도 된다.

모든 ‘욕망’을 ‘기계’로 설명하는 들뢰즈·과타리에게 본질은 없다. 모든 욕망은 무수한 분열과 접속하면서 새로운 기계가 된다. 호흡을 할 때 입은 ‘생명-기계’가 되고, 음식을 씹을 때는 ‘저작-기계’이며, 말을 할 때는 ‘연설-기계’, 입맞춤을 할 때 그것은 ‘성애-기계’다. 구순기 아이는 모든 사물을 자기 입으로 가져가 빨아본다. 이 습관은 추론 능력이 발달하면서 차츰 그치게 되지만 어른이 되어서도 그 용법은 완전히 사라지지 않는다. 예전 사람들은 얼마만큼 ‘약’이 남아 있는지 재보고자 건전지의 배꼽(+)에 혀를 댔고, 올림픽 메달 시상식에 올라선 젊은 금메달리스트는 승리의 기쁨을 음미하고자 앞니로 금메달을 깨문다. 이런 입이 ‘계측-기계’라면, 병마개를 따거나 실을 바늘귀에 꿰기 위해 입으로 실 끝을 뾰족하게 할 때 그 입은 ‘연장-기계’다. 여기서 어느 것이 입의 본질일까?

 <div align=right><font color=blue>ⓒ이지영 그림</font></div> 
ⓒ이지영 그림
이 책을 번역한 김재인은 ‘옮긴이의 말’에 “외국에서 간행된 저술과 논문들 그리고 국제 학술대회에서 접한 강연과 대화를 통해, <안티 오이디푸스>는 현 시점에서 세계적으로도 충분히 이해된 책이 아니라는 점은 분명히 확인할 수 있었다”라면서, 저명한 들뢰즈 연구자 이언 뷰케넌이 이 책은 “저자들이 말하려고 하는 것을 이해하려는 것 자체가 하나의 성취일 정도”라고 논평한 것을 인용해놓았다. 이런 ‘취급 주의’는 유념해야 하되, 흠이 없지 않다. 독서 지도사들은 책에는 그 책만의 고유한 주제가 있으며 독서란 그 책의 본질을 파악하는 것이라고 닦달하지만, 들뢰즈·과타리 사용법에는 그런 본질이 있을 리 없다. 이 책은 독자의 용도에 따라 존재론·윤리학·정신분석·자본주의론·파시즘 비판·인류학·문학(예술)론·문화 이론 등으로 얼마든지 절단하여, 새로운 쓰임새(생성)를 만들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독후감을 쓰기 위해 <처음 읽는 프랑스 현대철학>(동녘, 2013)에 요약된 옮긴이의 박사 논문에 얼마간 의지했다.

제목이 가르쳐주는 것처럼 <안티 오이디푸스>는 ‘오이디푸스 모형(오이디푸스 콤플렉스)’에 반대하며 그것에 저항한다. 오이디푸스 모형의 거부는 궁극적으로 프로이트가 창시한 정신분석을 표적으로 삼는다. 들뢰즈·과타리가 반(反)정신분석을 외치는 이유는, 정신분석이 하나의 시작(본질)에서 출발하기 때문이다. 즉 인간 무의식의 밑바탕에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흘레붙고 싶다’는 욕망이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정신분석 또는 오이디푸스 모형은 두 가지 문제를 낳는다. 하나는 생성하기도 이전에 이미 인간이라는 본질이 정해져 있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저 모형이 금지와 위반을 토대로 법(권력)을 정당화하는 것이다.

오이디푸스 모형에 따르면 무의식의 주인은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다.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무의식의 주인으로 모시고 일체의 현실을 그것과 연관 지어 설명하게 될 때,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천재성도, 아돌프 히틀러의 등극과 독일 국민의 열광도, 짐 
 <안티 오이디푸스>들뢰즈·과타리 지음김재인 옮김민음사 펴냄 
<안티 오이디푸스>들뢰즈·과타리 지음김재인 옮김민음사 펴냄
모리슨과 커트 코베인의 자살도, 이상과 기형도의 작품도 모조리 ‘가족 문제(오이디푸스 모형)’로 수렴되고 봉합된다. 자칫 두 사람의 주장은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자체가 아예 없다고 말하는 것처럼 들리지만, 핵심은 그게 아니라 세계를 ‘오이디푸스 극장’으로 치환하는 것에 반대하는 것이다.

“가족들은 가족적이지 않은 절단들에 의해 절단된다. 파리 코뮌, 드레퓌스 사건, 종교와 무신론, 스페인 내전, 파시즘의 대두, 스탈린주의, 베트남 전쟁, 1968년 5월……. 이런 것들이 모두 무의식의 콤플렉스를 형성하는데, 이것들은 늙어 빠진 오이디푸스보다 더 영향을 끼친다.” 들뢰즈·과타리는 ‘무의식에는 부모가 없다, 무의식은 고아다’라고 말한다. 두 사람은 오이디푸스(늙어빠진 부모=법 모델)라는 편집증적 억압 아래서 승화가 생겨난다고 말하는 프로이트를 공박하면서, 그런 억압 아래서보다 분열증적인 ‘고아-기계’가 생성에 더 능하다고 말한다.

오이디푸스의 한국적 분석을 시도한 책이 있다?

들뢰즈·과타리는 문화주의자들과 정통 정신분석가들 사이에 고갈되지 않는 유명한 논쟁이 있다면서 “오이디푸스는 보편적일까?”라고 묻는다. 이 싸움터에서 프로이트는 전사할 것이다. 내가 알고 있는 가장 손쉬운 답변은 1937년, 린위탕(林語堂)이 미국에서 출간한 <생활의 발견>(삼중당, 1975)에 나온다. “저 정신분석학적인 오이디푸스적 인과관계, 즉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니, 아버지와 딸 사이의 콤플렉스니, 어머니와 아들 사이의 콤플렉스니 하는 프로이트의 학설 같은 것은 꺼내놓았댔자 중국인의 눈으로 본다면 우스꽝스럽기만 하고 믿을 만한 것이 못 되는 것이다.” 린위탕은 설명을 생략했는데, 그것의 한국적 분석을 시도한 것이 전인권의 <남자의 탄생>(푸른숲, 2003)이다.

크리스토퍼 레인의 <만들어진 우울증>(한겨레, 2009)과 에단 와터스의 <미국처럼 미쳐가는 세계>(아카이브, 2011)는 미국 정신의학협회와 제약회사가 결탁한 정신장애 진단 통계편람(DSM)이 세계 여러 문화권의 정신질환을 균질하게 만들었다고 규탄한다. 예컨대 제3세계 여러 지역에서는 정신병을 신의 은총이나 현세에 대한 거부로 여겨왔는데, 서구의 생의학이 침투하면서 환자는 대대로 이어져 내려온 그 사회의 문화적 서사로부터 분리된다. 하지만 <안티 오이디푸스>는 미국식 정신장애 진단 통계편람이 여러 문화권의 정신질환을 평평하게 만들기 훨씬 이전에, ‘오이디푸스 제국’에 의한 식민화가 먼저 일어났다고 말한다.

<안티 오이디푸스>는 1994년 같은 출판사에서 최명관이 번역했던 <앙띠 오이디푸스>의 두 번째 번역본이다. 첫 번째 번역본이 나왔을 때 한국은 구제금융(IMF)을 맞기 이전의 장밋빛 시대였다. 그때 누가 “자본주의가 그 본질에 있어 혈연적 산업자본이라는 것이 진실이라 하더라도, 그것은 상업적·금융적 자본과의 결연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어느 모로는, 체제 전체와 욕망의 투자를 쥐락펴락하는 것이 은행이다”라는 구절의 위력을 예감했을까? 지은이들은 자본주의의 지속가능성과 자본주의에 대한 극복이나 내파가 모두 분열증의 성취에 걸려 있다고 말한다. 지독히 이율배반적인 이 원리 속에 우리의 희망과 절망이 혼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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