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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1월 15일 목요일

윤효원, 자발성(spontaneity), 의식성(consciousness)

http://m.labortoday.co.kr/news/articleView.html?idxno=129713

‘현장’엔 답이 없다 … ‘자발성’으론 안 된다


노동운동이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무겁게 가라앉은 원인과 이유는 여러 가지다. 나는 자발성 과잉과 의식성 부족의 문제를 눈여겨보고 있다. 철학과 운동론에서 자발성(spontaneity)이란 깊은 생각 없이 본디 타고난 그대로 행동하는 것을 말한다. 외부나 타인의 강제와 영향을 받지 않고 거부한다. 움직임이 가볍거나 즐거워 보이지만 치밀한 계획과 생각 없이 갑작스레 이뤄진다. 그래서 하는 일이 서툴고 이루려는 바가 뭔지 뚜렷하지 않아 좋은 성과를 얻기 어렵다. 

의식성(consciousness)이란 개인이나 집단의 행위가 사회에 미칠 영향과 가져올 결과를 헤아려 행동하는 것을 말한다. 코앞의 일뿐만 아니라 먼 앞날의 일까지도 내다본다. 행위를 하는 바로 그때의 직접적인 결과는 물론 미래에 일어날 사회적 결과와 역사에 끼칠 파장까지도 머릿속에 그린다. 움직임이 무겁고 재미없어 보이지만 생각이 깊고 계획이 치밀해 상황과 정세에 맞는 노선과 방침을 만들어 낸다. 그래서 하는 일에 능숙하고 이루려는 바가 뚜렷해 성과를 얻기 쉽다. 크게 보아 자발성은 감정에 호소하고 의식성은 이성에 호소하는 특징을 갖는다. 

어떤 사람은 "답은 조합원에게 있다"거나 "현장에 답이 있다"고 말한다. 동의하지 않는다. 현장 조합원에겐 답이 없다. 자본가의 위세에 눌려 자기 목소리를 제대로 내지 못하는 일터에서 서로 어울리지 못하고 따로따로 흩어져 외톨이가 돼 가는 게 조합원의 현실이다. 

일터 밖 사정은 어떤가. 상업주의·개인주의·물신주의가 어지러이 춤추는 사회에서 조합원은 ‘조직노동’이나 ‘노동계급’이 아니라 일개 ‘소비자’와 ‘시청자’로 전락했다. 생존경쟁에 내몰려 무엇이 잘못되고 있는지 묻고 생각할 틈조차 없는 사람이 ‘현장 조합원’이다. 노조로 조직된 조합원조차 그럴진대 미조직 노동자는 말해 무엇 할까. 

노동운동은 의식성을 어떻게 키울지에 대한 고민을 접어 둔 채 조합원의 자발성에 기대고 안주하려는 편향을 드러낸 지 오래다. 삶의 벼랑 끝으로 밀린 현장 조합원은 엄동설한에 굴뚝에 오르고 콘크리트 바닥을 긴다. 단식 수십 일은 늘 있는 일이 됐다. 목숨을 끊기까지 한다. 다른 한편으로 ‘대기업-정규직 귀족노조’ 낙인이 찍힌 현장 조합원은 줄을 잘 서 어렵게 얻은 중산층 지위를 어떻게 해야 자식에게 물려줄까 마음 졸이고 애가 탄다. 노동운동이 의식성을 귀찮게 여기고 깔보는 사이 현장 조합원들은 자생성의 두 끝을 오가며 생존전쟁을 치르고 있다. 

자발성과 의식성은 서로 맞서지만 한데 붙어 있다. 한 수레에 붙은 두 바퀴인 것이다. 노동운동이 제대로 성장하기 위해서는 자발성과 의식성이 서로 밀고 당기면서 같이 가야 한다. 중요한 것은 둘 사이의 균형과 통일인데, 노동운동은 그것이 깨졌다. 
의식성 바퀴는 키우지 않고 자발성 바퀴만 쓰다 보니, 이제 자발성 바퀴마저 망가져 버렸다. 이론과 의식의 수준이 도토리 키 재기에 다름 아닌 노동운동의 정파들은 조합원의 의식성을 떨쳐 일으키는 데 게을렀고, 마침내 실패했다. 노동운동을 둘러싸고 현장 조합원들에게는 허무주의와 패배주의가, 노동자들에게는 냉소와 자학이 퍼져 있다. 

지난달 민주노총 임원직선제가 실시됐다. 성사를 위해 애쓴 실무자나 새롭게 출범하는 집행부에겐 섭섭하게 들리겠지만, 노조민주주의 강화에 어떤 기여를 했는지 모르겠다. 직선제를 주장했던 사람들이 썼던 말을 빌리자면 형식이 아닌 내용으로서, 남이 대신해 주는 간접행위가 아닌 내가 하는 직접행위로서의 민주주의에 어떤 도움이 됐을까. 

이승만·박정희·이명박·박근혜의 예에서 보듯 직선제 자체가 민주주의는 아니다. 노동운동의 수준과 조직운동론의 논리로 볼 때 오히려 직선제가 현장 조합원의 의식성을 거세하고 지도부가 현장 조합원의 자발성에 굴종하는 계기로 작용할 가능성이 크다. 

현장 조합원이 목적의식을 갖고 참여해야 성사될 총파업은 또 어떤가. 조합원이 분노로 가득 차 있다는 분석에 동의하기 어렵다. 오히려 공포에 주눅 들어 있다. 분노한 자는 싸우지만, 공포에 질린 자는 싸움에 나서지 않는다. 대신 누군가 싸워 주길 바란다. 지난해 12월 시점에서 민주노총 조합원이 총파업을 공약한 집행부를 선택했다면, 그것은 스스로 총파업의 주체가 되겠다는 게 아니라 지도부가 자기 대신에 총파업을 해 달라는 뜻이다.

역설적으로 그리고 안타깝게도 오늘의 직선제와 총파업은 노동운동의 의식성이 발양된 결과가 아니라 현장 조합원의 자발성에 굴종한 증거다. 추상적인 구호와 감상적인 언사를 뺀다면 ‘그래서 어쩌자고? 어디로 가자고? 그래, 무엇을 하자고?’가 빠져 있기 때문이다. 한국 노동운동은 자발성과 의식성의 통일과 대립이라는 운동론의 근본문제에 부딪힌 지 오래다. 

인더스트리올 컨설턴트 (industriallyoon@gmail.com)
윤효원 industriallyoon@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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