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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2월 2일 월요일

[세상 읽기] 잔인하지 않은 사람들의 잔인한 사회 / 신진욱


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586297.html

등록 : 2013.05.07 19:08수정 : 2013.05.07 19:08
신진욱 중앙대 사회학과 교수

사회 곳곳에서 가슴 아픈 소식이 끊이지 않고 있다. 올해 1~3월에 용인·성남·울산에서 사회복지 공무원이 업무와 스트레스를 못 견뎌 자살했고, 거제·용인·부산에서 30~40대 편의점주들도 그렇게 생을 마쳤다. 올해 들어 무려 8명의 법원 공무원이 자살하거나 업무 과다로 사망했다 하고, 현대차·기아차 등 노동현장에서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자살이 이어지고 있다. 이러한 죽음의 행렬은 우리 사회에 대한 심각한 경고 신호다.
사람들을 죽음으로 내모는 것은 이 사회의 가혹한 삶의 현실이다. 그런데 대체 우리 사회의 어떤 가혹함이 이런 외로운 죽음을 강요하는 걸까. 무한경쟁 체제가 종종 문제의 원인으로 꼽힌다. ‘팔꿈치 사회’ 같은 말이 그렇다. 하지만 이런 수평적 은유는 서열화된 먹이사슬을 짚어주지 못한다. 팔꿈치와 팔꿈치는 같은 높이에서 부딪친다. 현실에서 우리를 진정 괴롭히는 건 나의 생살여탈권을 쥔 힘이다. 우리는 살기 위해 팔꿈치를 휘두른다.
이런 수직적 불평등을 비판하는 탁월한 표현들이 있다. ‘1%:99% 사회’, ‘20:80 사회’, ‘승자독식 사회’ 등의 규정은 사람들에게 보답 없는 노동과 경쟁을 강요하는 불공정한 현실을 날카롭게 지적한다. 하지만 여기에도 함정이 있다. 99%에 속하는 이들이 똑같은 위치의 패자들인 건 아니다. 똑같은 패자들 사이에도 연대와 공감만 있는 건 아니다. 1%만 무찌르면 되는 거라면 오히려 문제는 단순할 것이다. 하지만 현실은 더 복잡하다.
실상 우리 사회는 맨 꼭대기에서 밑바닥까지 촘촘한 서열 체제로 짜여 있다. 소득, 직업, 재산, 학벌 등으로 분류되는 이 서열의 어딘가에 모든 사람은 놓여 있다. 위계와 불평등은 어느 사회에나 있되, 한국 사회의 잔인함은 그 위계의 ‘승자’가 그렇지 못한 타인들의 물질적·인격적 존엄을 박탈할 수 있을 만큼 무제한적 권력을 휘두른다는 데 있다. 해고하고, 때리고, 멸시하고, 욕설할 수 있는 권력 말이다.
이런 폭력적 사회현실을 교정하는 것이 시급한 과제이건만, 지금 우리 사회는 오히려 반대 방향으로 가고 있다. 두 가지 상반된 의미의 ‘잉여’ 집단이 뚜렷이 대조된다. 하나는 ‘과잉’의 잉여다. 너무 많은 부와 권세를 누리는 계층이 힘을 더해가고 있다. 다른 하나는 ‘잔여’의 잉여다. 불필요하고 가치없는 존재로 취급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 이런 잔여적 존재로 추락하지 않기 위한 투쟁, 그것이 한국 사회에서 만인의 존재양식이다.
많은 사람들은 상위의 잉여계층을 비난하면서도 그와 같아지고 싶어하고, 하위의 잉여계층을 동정하면서도 그와 같아질까 두려워한다. 서열사회에 맞서는 싸움이 아니라, 서열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한 싸움을 택한다. 그래서 사람들의 고통과 분노는 ‘정당한’ 것으로 사회적 인정을 받지 못한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세상을 향해 소리 한번 질러보지 못하고 쓸쓸히 쓰러져가는 까닭은, 아무도 들어주는 자 없을 거라는 절망 때문은 아니었을까.
지그문트 바우만이 말했듯이, 잔인하지 않은 사람들의 타인에 대한 무관심이 잔인한 사회를 가능케 한다. 우리는 특별히 부도덕하지 않은 무심한 일상을 살아가는 가운데 각자도생(各自圖生)의 정글의 윤리를 실천하고 있다. 우리는 각기 평범한 일상을 살면서 그런 사회를 만드는 데 일조하고 있고, 또 그 대가를 함께 치르고 있다. 나는, 당신은, 우리 아이들은 무사한가? 쓰러지는 타인들에 대한 우리의 무관심이 부메랑이 되어 돌아올 것이다. 모든 이의 존엄을 위한 연대가 곧 나와 내 가족의 존엄을 지키는 길이다.
신진욱 중앙대 사회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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