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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2월 2일 월요일

뿌리 깊은 식민사관…오천년 민족사 맥을 끊다/ 세계일보 강구열 기자


http://www.segye.com/content/html/2015/01/29/20150129019757.html

 뿌리 깊은 식민사관…오천년 민족사 맥을 끊다

[세계일보 창간 26주년 특집]

한국사를 바로잡아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일제강점기에 뒤틀린 상처가 광복 70년이 지난 지금껏 그대로라고 한다. 바른 역사를 위한 생산적인 토론이 없었기 때문이다. 세계일보는 창간호에 맞춰 한국사 서술의 문제점을 시리즈로 연재한다. 그간에 조명받지 못했던 학설을 소개할 예정이다. 치열하고 건전한 토론의 장을 마련하는 것이다. 독자와 학계의 활발한 참여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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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12월 국회 동북아역사왜곡대책특별위원회 회의장, 임내현 의원(새정치민주연합)이 국사편찬위원회 유영익 위원장에게 물었다. “식민사관이 아직도 우리 역사학계의 인물들을 통해 온존해 있다는 주장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유 위원장은 “해방 후 국사학자들의 가장 중요한 과제가 식민사관의 극복이었다. 그간 식민사관은 거의 완전히 극복되었다고 생각한다”고 대답했다. 답변이 시원찮다고 판단했던 걸까. 임 의원이 한마디 덧붙였다. “그런데 적지 않은 반론이 있다. 반론을 들어보니 일리가 없지 않다.”

두 사람의 문답은 한국사, 특히 고대사를 두고 벌어지는 역사학계의 첨예한 논쟁을 압축해서 보여준다. 일제가 식민통치의 정당성을 선전하기 위해 만들어 낸 식민사관이 현재 제대로 극복되었느냐가 핵심이다. 학계의 주류는 대체로 긍정적이고, 비주류는 부정적이다. 최근 비주류의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식민사관을 극복하고, 한국사를 바로 세워야 중국, 일본의 역사왜곡에 대응할 수 있다는 주장도 펼친다.

비주류의 논리는 교과서의 내용에 대한 비판에서 분명해진다. 교과서는 학계 주류의 공통분모를 충실하게 반영하기 때문이다. 그들이 지적하는 문제를 지난해 고등학교에서 사용된 한국사 교과서를 바탕으로 살펴본다.

지난해 고등학교에서 사용된 한국사 교과서. 교과서에 식민사관을 제대로 극복하지 못한 내용이 서술되어 있어 바로잡아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초기 삼국에 대한 서술이 없다.”


리베르스쿨 교과서는 고구려는 태조왕(재위 53∼146년), 백제는 고이왕(〃 234∼286년), 신라는 내물왕(〃 356∼402년) 때 고대국가가 형성된 것을 내용으로 하는 표를 제시하고 있다. 미래엔 교과서는 “고구려는 1세기쯤 태조왕 때 이르러 한 단계 높은 국가 발전을 이루었다”, “3세기 (백제의) 고이왕은…지배 체제를 정비하여 중앙 집권적 고대국가의 면모를 갖추었다”, “4세기 후반 (신라의) 내물왕은 밖으로 활발한 정복활동을 벌이고 … 김씨의 왕위 세습권을 확립하였다”고 서술했다. 이 시점까지 삼국에 대한 설명은 건국의 시기(고구려, 백제, 신라 각 기원전 37년, 18년, 57년), 시조, 근거지 등만을 간단히 언급하고 있을 뿐이다. 한국 고대국가의 본격적인 발전 시점을 늦춰 잡음으로써 고구려는 건국 후 약 90년, 백제는 약 250년, 신라는 약 400년 정도가 ‘암흑기’처럼 보인다. 이런 식의 서술은 두 교과서뿐 아니라 다른 교과서 모두 취하는 태도다.

학계의 정설처럼 되어 있는 ‘삼국사기 초기기록 불신론’(불신론)의 영향에 따른 것이다. 불신론은 쓰다 소키치 등 일본의 학자들이 일제강점기에 정립한 이론이다. 한마디로 삼국사기에 기록된 초기 삼국의 기록은 허구이며 조작된 것이라는 주장이다. “박혁거세가 알에서 태어나 신라를 건국했다는 것은 믿을 수 없다”, “가야 지역에 주둔해 있던 왜병이 신라를 침략한 사실이 없다”는 등의 근거를 댔다. 초기 삼국의 역사를 지워버린 자리에는 소국들의 연맹체인 삼한을 집어넣었다. 불신론은 4세기 중·후반 한반도 남부를 고대 일본이 지배했다는 ‘임나일본부설’을 주장하기 위한 일제의 ‘창작물’이었다. 백제, 신라, 가야 등 한반도 남부의 고대국가들이 건국 초기에는 강력한 체제를 갖추지 못한 상태라고 우겨야 임나일본부의 존재가 가능해지기 때문이다. 학계는 광복 후 불신론에 여러 가지 수정을 했지만, 기본적인 관점에는 큰 변화가 없었다. 교과서에 삼국이 건국 후 수백년이 지난 다음에야 제대로 된 국가의 모습을 갖췄다는 내용이 여전한 것은 이 때문이라는 분석이 적지 않다.

불신론을 견지하고 있는 주류 학계에 대한 비판은 거세다. 선문대 이형구 석좌교수는 초기 백제의 유적인 서울 풍납토성을 근거로 “기원 전후에 이미 백제는 수많은 인원을 동원해 거대한 성을 축조할 정도의 체제를 갖춘 국가였다”며 “결정적인 반박 자료가 없을 때는 기존 사료를 믿는 것이 바른 태도다. 삼국사기는 800여 년 전에 지금은 전하지 않는 기초 사료를 근거로 편찬된 책인데 믿지 않을 이유가 없다”고 지적했다. 한 소장학자는 “삼국사기의 초기기록은 못 믿겠다고 하면서 후기기록은 인정할 수 있다는 태도야말로 모순된 것”이라며 “고대국가 형성을 판단하면서 중국식 제도의 도입을 기준에 놓는 태도도 큰 문제”라고 꼬집었다.

일제의 학자들이 북한에서 발굴한 ‘점제현 신사비’. 이 비석은 한사군 한반도설을 뒷받침하는 유물로 간주되었으나 재평가가 이뤄져야 한다는 의견도 강하다.
세계일보 자료사진
◆“중국이 설치한 낙랑군이 평양에 있었다(?)”


“낙랑군이 있던 한반도 서북 지역에서는 중국 계통의 금은 장신구…봉니, 기와, 벽돌 등이 다수 발견되었다.” 지학사 교과서의 ‘고조선과 여러 나라의 성장’이란 장에 나오는 내용이다. 교학사 교과서는 “고조선 멸망 후 한이 4군을 설치하였는데, 그중 낙랑군은 지금의 평양에 있었다는 설이 유력하다”고 언급하고 있다. 분명하게 드러나지 않고, 에두른 표현을 쓰고 있지만 학계의 또 다른 이슈인 ‘한사군 한반도설’의 흔적이다. 한사군은 한나라 무제가 고조선을 무너뜨리고 설치한 낙랑, 임둔, 진번, 현도를 말한다. 일제강점기 이후 고분 발굴을 토대로 한사군은 낙랑이 있었던 평양을 비롯한 한반도 북부 지역에 있었다는 게 정설이다. 일제는 한사군이 설치된 이후 중국의 선진문물이 수용돼 한국의 고대국가가 본격적으로 발전하기 시작했다는 주장을 펼치기도 했다.

불신론과 마찬가지로 광복 후 수정되긴 했지만 이런 견해는 여전히 영향력을 발휘하며 교과서에 일부 반영되고 있는 게 현실이다. 지난해 고등학교 한국사 교과서를 분석한 논문을 발표한 경기도 용인의 대지중학교 우장문 수석교사는 “한사군의 위치에 대해서는 일제 시기에 일본 학자들이 식민사관의 입장에서 연구했던 수준을 넘어서 객관적인 연구를 새롭게 해야 할 필요성이 있다”고 지적했다. 
서울 송파구의 풍납토성 발굴 현장 모습. 풍납토성은 초기 백제의 성곽으로 원래는 4㎞에 달하는 큰 규모였다. 기원전에 만들어진 유물도 나오고 있어 백제가 건국 초기부터 강력한 국가체제를 갖추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유적으로 평가된다.
한사군 한반도설의 근거가 된 북한 지역 유적 발굴에 대한 재해석의 필요성도 적잖이 제기되는 상황이다. 인하대 복기대 교수는 “낙랑은 거의 400년간 존속됐다. 그렇다면 이제까지 알려진 평양의 낙랑계 고분 20개 정도보다 훨씬 많은 유적이 나와야 한다”며 “고분을 비롯한 중국계 유물은 교역, 피난 등을 이유로 한반도에 들어와 살던 중국인들의 흔적 정도로 봐야 한다”고 주장했다. 일제강점기에 식민사학에 맞섰던 정인보 선생은 이미 1940년대에 이른바 ‘낙랑출토품’들에 대해 조작설, 발견 과정 및 내용상의 문제점 등을 지적한 바 있다.

한사군 한반도설을 부정하는 학자들은 지금의 만주 지역에 한사군이 있었다는 주장을 펼친다. 최근 출간한 저서에서 주류 사학계를 강하게 비판한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 이덕일 소장은 “한사군이 설치되었던 당시에 쓰인 (중국의 역사서인) ‘사기’, ‘한서’, ‘삼국지’, ‘후한서’, ‘진서’ 등은 일관되게 한사군의 위치를 요동이라고 쓰고 있다”며 “한반도설은 식민사관의 연장이며 어떠한 근거도 없다”고 단언했다. 

일제강점기 식민사관을 정립한 대표적인 학자인 쓰다 소키치의 모습과 그가 작성한 고대 한반도 지도. ‘삼국사기 초기기록 불신론’을 정리한 그는 임나일본부설을 강하게 주장했다. 지도에는 가야 지역을 ‘임나’라고 표시했다.
◆“고대사 서술 방식, 역사전쟁에서 수세를 자초하고 있다.”


불신론과 한사군 한반도설로 대표되는 고대사 서술태도는 중국, 일본의 역사왜곡 공세에 대응해야 할 한국의 입지를 스스로 제한하고 있다는 지적이 제기된다. 중국은 동북공정을 추진하며 고조선부터 부여, 고구려, 발해 등이 중국사의 일부라는 주장을 펼치고 있다. 중국의 입장에서 한사군 한반도설은 유사시 중국이 한반도에 대한 종주권을 주장하는 역사적 근거를 내포한 이론이라는 분석이 있다. 불신론도 끊임없이 임나일본부설을 주장하는 일본의 주장에 부합하는 면이 없지 않다. “중국, 일본의 역사왜곡에 분노하면서도 우리 스스로 그들 앞에 밥상을 차려놓는 꼴”이라는 푸념이 나오는 건 그래서다.

주류 학계에서는 삼국사기 초기기록을 적극적으로 해석하고, 한사군이 지금의 만주 땅에 있었다는 주장이 주변국의 역사왜곡에 대해 같은 역사왜곡으로 대응하는 것일 뿐이라며 냉정한 접근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한·중·일 삼국의 역사 갈등만 부추길 수 있다고도 한다. 하지만 사실을 사실대로 말하는 것이고, 잘못된 것을 바로잡자는 것이라는 반론이 강하다. 복 교수는 “한사군 위치를 원래의 만주 땅으로 돌려놓는 걸 역사왜곡이라고 한다면 우리 역사를 바로잡자는 모든 주장은 왜곡이 된다”고 반박했다.

고대사에 대한 관점의 충돌이 분명한 만큼 논란이 되는 부분은 교과서에는 양쪽 견해를 병기해야 한다는 주장이 강하다. 역사 인식의 기초를 형성하는 교과서에는 균형 잡힌 이론을 소개할 필요가 있다는 인식이다. 우 교사는 “학생들에게 교과서란 무조건 믿고, 외워버리는 책”이라며 “확실한 게 없는 경우라면 다른 가능성을 함께 제시하는 것도 방법”이라고 주장했다. 동북아역사왜곡대책특위 전체회의에 참석한 교육부 관계자도 “이 문제(한사군 한반도설 등)에 대해서는 최근에 많은 학자들이 이견을 도출하고 있다. 교과서 검정·집필 기준, 편찬상의 유의점 등에서 학자들의 의견을 잘 수렴해 정리할 수 있도록 준비를 하고 있다”고 밝힌 바 있다.

강구열 기자 river910@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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