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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3월 30일 월요일

세계책의수도 인천] 13세기 강화도 땅에서 피어난 '세계 최초' 금속활자의 향기 인천 활자의 시대를 열다 - 2. 강화 천도와 상정예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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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존하지는 않지만 세계 최초의 금속활자본으로 알려진 <상정고금예문>은 고려가 강화도로 천도한 이후인 1234년(고종21년) 강도(江都·강화도)에서 찍어낸 책으로 이규보의 <동국이상국집>에 이 같은 사실이 기록돼 있다. 사진은 강도시절 왕의 거처가 있던 고려궁지의 겨울 풍경. 왼편으로 '외규장각' 건물이, 오른편으로 400년 넘은 고목이 눈에 들어온다.
▲ '세계금속활자발상중흥기념비'가 있는 강화도 갑곶돈대를 찾은 한 쌍의 남녀가 비석 뒤를 지나가고 있다.
최이 1234년 '상정예문' 출판 命 
대몽항전 탓 기술 고안 역부족 
천도 이전 금속활자 사용 
주조술 상당한 경지 추측 



"몽골과의 항전은 생각보다 길어질 것이오. 속히 '주자'를 주조하여 '상정예문'을 다시 찍어야 할 것 같소." 고려의 실권자 최이(최우)의 목소리에서 '천도'를 단행할 때와 같은 결연함이 묻어났다. 

"경들은 우리가 2년 전, 임금을 모시고 이 곳에 들어올 때의 결의를 잘 알고 있을 것이오. 몽골이 물러갈 때까지 우리 고려의 수도는 이 곳 강도(강화도)이며, 따라서 모든 국가의 전례를 개경(개성)과 마찬가지로 행해야 할 것이오. 다행히 선친께서 보관하던 책을 내가 갖고 나왔으니 이를 바탕으로 새로운 주자를 만들면 책을 찍어낼 수 있을 것이오."

나는 새도 떨어뜨릴 무신정권의 수장 최이(최우)의 말에 모두들 고개를 끄덕였다. 
이규보가 최이의 말을 일필휘지로 적어 내려갔다.  
고려가 몽골과의 항전을 결의하고 강화도에 들어온 지 2년 만인 1234년(고종21년), 최이는 <상정예문>(詳定禮文)의 출판을 명한다.  

<상정예문>은 동서고금의 예를 수집해 '국가의 전례'를 집대성한 책이었다. 
<해동문헌총록>(海東文獻總錄)은 <상정예문>이 역대 조종(祖宗)의 헌장(憲章)과 우리의 고금의 예의, 당나라의 예의를 참조해 위로는 왕실의 의례와 아래로는 백관의 의복까지 다루고 있다고 밝히고 있다.  

진양공((晉陽公)에 책봉된 최이를 대신해 '신인상정예문발미'(新印詳定禮文跋尾)를 써내려 간 사람은 '백운거사 이규보'다.  이규보의 <동국이상국집>(東國李相國集) 전집 권11 '신인상정예문발미'는 당시 상황을 아래와 같이 기록하고 있다. 

'상정예문은 인종(1127~1140) 때 평장사 최윤의 등이 왕명으로 엮은 것을 최이의 선친인 최충헌이 다시 보집(보충하여 편집함)케 하여 2부를 작성한 다음과 예관과 자기 집에 1부씩 두었는데, 천도할 때 예관의 것은 황급한 나머지 미처 가져오지 못하여 자기 집의 것만이 남게 되었다. 

그것마저 잃지 않은 것을 다행으로 여기고 마침내 28부를 새로 찍어 여러 관사에 나누어 간직케 했던 것이다.' 이 글에 <상정예문>의 출판연대가 정확히 밝혀져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최이가 진양공에 책봉된 1234년 이규보에게 대작을 명했고, 이규보가 1241년(고종28년) 눈을 감았으므로 이 사이에 이뤄진 것은 확실하다.  

'상정예문'은 무려 50권이 한 질로 이뤄진 책이었다.  
주목할 점은 이같은 많은 양의 책을 28질이나 인쇄했다는 사실이다. 
1234년은 고려가 몽골과의 격렬한 항전을 하던 시기였으므로 새로운 기술을 만들어 내기엔 역부족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어떻게 금속활자를 만들고, 활자판을 고안했으며 쇠붙이에 묻기 어려운 먹물을 만들어 책을 찍어낼 수 있었을까.  학계에선 이때문에 '강화 천도' 이전에 만들어진 금속활자를 사용했거나 고려의 주조기술이 이미 상당한 수준에 이르렀을 것으로 보고 있다.  

고려엔 앞서 책판을 인쇄·보급하던 '서적포'라는 기구가 존재했었다. 
'축문'과 '경적'을 담당하던 '비서성'의 책판이 쌓이고 훼손되자 1101년(숙종 5년) 세운, '국가출판사'가 서적포였다.  


<상정예문>을 인쇄한 활자의 성분을 금속활자로 보는 것은 '주자'(鑄字·금속활자)라는 용어가 포함돼 있기 때문이다.  

현존하지는 않지만, 지금까지 밝혀진 '세계 최초의 금속활자'라는 사실 역시 <동국이상국집>의 기록에 근거한 것이다.  

1445년 혹은 1447년 독일 마인츠에서 구텐베르크가 발명한 <36행 성서>, <42행 성서>보다 200여년 앞서 금속활자를 발명할 수 있었던 건 고려의 뛰어난 연금술 때문이었다.

불교가 융성하고 귀족사회가 번창했던 고려에선 일찌기 금속공예술이 발달한다. 

뒷면에 용과 나무, 기와를 얹은 전각(집)이 새겨진 거울인 '용수전각문경', 절의 법회 때 '당'이란 깃발을 달아두는 기둥인 '당간'을 장식품으로 만든 '용머리당간'(국보 136호) 등 고려의 금속공예는 '예술'로 승화한 것이 특징이다.  

이처럼 고려에선 범종, 정병, 청동거울처럼 불교의식이나 귀족들이 사용하는 것들이 많이 제조됐다.  
고려에서 생산되는 구리는 특히 품질이 좋기로 유명하기도 했다. 
질 높은 구리와 금속공예술의 만남. 이같은 조건은 마침내 금속활자의 발명으로 이어진다. 

2015년 1월, 강화도 갑곶돈대로 향한다.  
구 강화역사관 입구에 들어서자 오른 편으로 커다란 돌비석 하나가 눈에 들어온다. 
'고려는 금속활자를 세계에서 맨처음 발견하였다. 이것이 중국 아라비아 독일까지 퍼져나갔으며 이 곳 강화는 13세기금속활자인쇄술을 중흥시킨 고장이다 ….' 

'세계금속활자발상중흥기념비'에 새겨진 글자 하나 하나가 겨울햇살을 받아 '쨍' 하고 금속처럼 반짝인다.  철의 차가움 같은 겨울바람이 얼굴을 스치운다. 

/글·사진 김진국 기자 freebird@incheon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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