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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3월 30일 월요일

세계책의수도 인천] 고려 최고 문장가, 인천서 '일생일대 역작' 남기다 인천, 활자의 시대를 열다 - 9. 이규보와 동국이상국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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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운거사' 이규보는 경기도 여주 출생으로 65세때인 1232년 강화도에 들어와 1241년 눈을 감을 때까지 술과 시, 거문고를 벗하며 명문을 남겼다. 강화군 길상면 길직리 산 115번지 이규보의 묘는 전형적인 고려시대 무덤의 형태를 하고 있다.
<이규보> 
문학적 재능 탁월…시·거문고·술 '好' 
65세 강화도 정착…수많은 작품 저술 


▲ 강화역사박물관 전시실에 있는 '동국이상국집'.
<동국이상국집> 
1241년 이규보의 아들, 53권 13책 시문집 집대성 
서사시 동명왕편 등 수록 


'나라가 잘 되고 못됨 민력에 달렸고/ 만민의 살고 죽음 벼 싹에 매였네/ 가을날 옥같은 곡식 일천 창고에 쌓이리니/ 땀흘리는 농민들 오늘의 공을 기록하게나'(비 속에서 농사짓는 사람을 보고 서기에게 써주다) 
지난 20일 인천시 계양구 계양산산림욕장 입구. 거대한 돌비석 하나라 우람하게 솟아 있다. '문순공백운이규보선생시비'. 돌비석 받침대에 새겨진 글씨가 고려의 대문호 이규보(1168~1241)를 기리는 시비임을 알려준다. 이규보의 시비가 계양구에 있는 까닭은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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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천시 계양구 계양산 산림욕장 입구에 있는 이규보 시비. 이규보는 고려 고종6년인 1219년 지금의 계양 지역을 다스리는 수령으로 부임한 뒤 13개월간 계양지역에 머물며 계양, 부평 지역과 관련한 글 45편을 남겼다.
고려 고종6년(1219). 이규보는 지금의 계양 지역을 다스리는 수령으로 부임한다. 그의 나이 52세 때였다. 이규보는 본래 중앙관직인 '좌시간'이었으나 지방관의 죄를 묵인했다는 이유로 '계양도호부 부사'란 직책으로 좌천되며 계양으로 오게 된다. 그는 이후 13개월 간 계양에 머무르며 '계양 망해지', '만일사' 등 부평지역의 풍광과 사람들에 대한 내용을 45편의 한시로 남긴다. 이규보가 당시 머물렀던 계산동 산 57의 2 관사 자리인 '자오당지'는 계양구 양궁선수단이 훈련하는 장소로 사용 중이기도 하다. 부평구 십정동 국철1호선 '백운역'은 '백운거사'였던 이규보의 호를 따 지었을 만큼 계양, 부평은 이규보와 인연이 깊은 곳이다. 

경기도 여주 출생인 이규보는 어려서부터 뛰어난 문학적 재능을 보였으며 22세때 과거시험(사마시)에 합격했지만 그로부터 10년 뒤에 관직을 얻게 된다. 32세의 이규보는 최충헌이 초청한 시회에서 발탁돼 전주의 사록겸장서기로 부임한다. 이후 직한림원, 우정언, 우사간 등의 관직을 맡다가 52세 때 계양도호부 부사를 맡았으며 이듬해 최우가 집권하면서 약 10년 간 예부 등의 관청에서 안정된 관직생활을 하며 많은 작품을 쓴다.  

그런 그가 강화도에 정착한 시기는 65세 때이다. 1232년 고려왕조가 강화천도를 단행하며 강화도로 와 하음현(현 하점면)에 거주, '산관'으로 재직하며 몽골에 보내는 국서 작성 등을 담당한다. 70세(1237) 때 정2품인 '문하시랑평장사'로 관직에서 물러난 백운은 74세(1241)에 별세, 지금의 길상면 진강산 동쪽 언덕에서 잠이 든다. 노년엔 시와 거문고, 술을 좋아해 '삼혹호선생'(三酷好先生)이라고도 불린 이규보의 역저 <동국이상국집>(東國李相國集)은 그가 눈을 감은 1241년 아들 '함'이 53권 13책으로 발행한 시문집이다. 이 책은 1251년 손자 '익배'가 교정, 증보해 개간했으며 현재 전해지는 판본은 영조시대에 복간한 것으로 추정된다.

<동국이상국집>은 그가 강화에 들어와서 세상을 떠날 때까지 저술한 일생일대의 역작이다. 자신을 '시마'(詩魔)라고 표현할만큼 글쓰기를 좋아했던 그가 <동국이상국집>과 같은 책을 펴낸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특히 <동국이상국집> 전집 권3에 수록된 '동명왕편'은 장편의 민족서사시로 이규보 문학의 최고봉이라 할 수 있다. 동명왕편은 고구려의 건국역사를 서사시로 빚어낸 작품이다. 해모수와 유화가 만나는 과정으로부터 주몽의 탄생과 관련한 신화를 통해 고구려의 탄생을 노래하고 있다. 시련을 이기고 고구려를 건국하는 과정과 함께 임금들이 어진 마음과 예의로 나라를 다스려줄 것을 희망하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 고구려의 건국역사를 장구한 서사시로 풀어낸 것은 고려의 민족적 자존감을 드러내기 위함이었다. 민족의 영웅인 동명왕의 발자취와 생애를 드러냄으로써 고려의 수준 높은 문화와 역사적 정통성, 민족적 우월감을 드러낸 것이다. 

<동국이상국집>은 고구려와 백제, 신라의 역사를 기록한 김부식의 <삼국사기>(1145)와 일연의 <삼국유사>(1281)의 중간 선상에 놓여 있는 작품이기도 하다.

<동국이상국집>의 서문은 <구삼국사>(舊三國史·고려 초기, 김부식이 <삼국사기>를 내기 이전에 삼국 시대의 역사를 기록한 책)란 우리나라 서사가 있었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또 시 속에서 여러가지 역사적 사실을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있기도 하다. 

전집 권20에 수록된 <국선생전>(麴先生傳)은 술을 의인화해 술과 인간과의 미묘한 관계를 재밌는 이야기로 풀어낸 작품이다. 거북을 의인화한 <청강사자현부전>(淸江使者玄夫傳)에선 어른도 간혹 실수가 있음을 지적하며 매사에 조심하고 삼가할 것을 메시지로 전한다. 이들 '가전체문학작품'은 우리나라 문학사에서 설화와 소설을 잇는 중요한 역할을 한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강화군 길상면 길직리 산 115번지 이규보의 묘. 그의 묘는 농로가 끝나는 지점의 높은 곳에 위치하고 있었다. 이규보의 초상을 모신 '유영각'을 지나 그의 무덤을 향해 비탈진 묘지를 향해 올라간다. 이규보의 묘는 용미를 길게 낸 원형봉분의 형상을 하고 있다. 호석을 두룬 봉분 앞엔 넋이 나와 놀도록 한 '혼유석'과 무덤 앞에 평평하게 만든 장대석구 '계체석'이 놓여 있다. 강화에 있는 고려무덤에서 나타나는 '석수'와 '석인'은 비바람에 많이 닳아있는 모습이다. 무덤 양옆의 '문인석'은 전형적인 고려무덤의 석조조각이다.  

이규보 묘 앞에서 서서 무덤 아래를 내려다 본다. 시와 술, 그리고 거문고를 좋아했다는 삼혹호 선생 백운거사의 무덤 위로, 머잖아 파릇파릇한 생명의 잎들이 피어날 것이다.

/글·사진 김진국 기자 freebird@incheon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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